56화. 그런 날은 절대 오지 않아
2018.01.11.
윤영은 벽걸이 시계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똑딱―
똑딱―
초침이 움직이는 것을 따라, 윤영의 눈동자도 움직였다.
똑딱―
똑딱―
지후는 6시에 교문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현재 시간 7시 30분.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까?’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의 지후는 각오를 다진 눈빛이었다.
그동안 윤영에게 흘리듯 ‘이런 건 너만 힘들게 할 뿐이야.’라고 말할 때와는 달랐다.
이제 윤영이 아무리 매달리고 애원해도, 굳건한 눈동자가 흔들리는 일은 없으리라는 걸 예감할 수 있었다.
똑딱―
똑딱―
또 시간이 흘렀다.
9시가 되었다.
무시하고 내 일이나 하면 그만이다.
만화책을 좀 보면 시간이 빨리 지나갈 것이다.
12시쯤 되어 침대에 눕고 잠이 들면 내일이 온다.
내일이 되면 지후는 또 만나자고 하겠지만, 그때도 무시하면 그만이다.
이렇게 피하고, 또 피하다 보면.
‘뭐가 남을까?’
만나지도 못하는 사이, 눈도 못 마주치는 사이, 손 끝 하나 댈 수 없는 사이.
그런 사이가 되어 버리는 게 아닐까.
윤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흘러가는 시간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지후가 몇 시간을 기다리든, 나는 나가겠다고 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미안할 것도, 신경 쓸 것도 없다.
그런데도.
윤영은 다시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그런데도 자꾸만 신경 쓰이는 것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교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고 있을 지후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렸다.
‘나갈까?’
하지만 무서웠다.
지후는 냉정한 목소리로, 이 관계의 끝을 고할 것이다.
‘관계.’
윤영은 쓰게 웃었다.
‘대체 우리가 무슨 관계지?’
좋아한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관계. 타인보다도 못한 관계.
그런 관계인데, 왜 이리도 이 관계를 놓을 수 없는 걸까.
‘그래도 지후는 지금 날 신경 쓰고 있잖아.’
지금 지후에게 가면, 앞으로 지후는 그 작은 관심조차 윤영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
지후에게 아무것도 아닌 여자가 되느니, 성가셔도 신경 쓰이는 존재로 남고 싶었다.
윤영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끝까지 끌어올렸다.
시간을 확인하지 않을 것이다.
지후를 만나러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라도 그의 세계 안에 속해 있을 것이다.
* * *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지후인가 싶어 후다닥 달려가 현관문을 열었는데, 재경이 서 있었다.
나루의 표정을 본 재경이 한숨을 쉬었다.
“지후, 아직도 안 왔어?”
“응.”
“김윤영이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나 보네.”
“글쎄. 얘기가 길어지는 걸지도 모르지.”
나루의 말에 재경이 미간을 좁혔다.
“나루, 너는 김윤영을 너무 좋게만 보는 것 같아. 이 시간의 김윤영은 네 시간의 김윤영이 아니야. 내가 네 시간의 성재경이 아닌 것처럼.”
“응, 하지만 기본적인 건 바뀌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너는 내 시간의 성재경이 아니지만, 내 시간의 성재경처럼 지후를 위해 나를 포기했잖아.”
“지후를 위해 널 포기한 게 아냐. 너도 지후를 좋다고 하니까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적어도 나는 네 시간의 성재경과 달리, 고백도 하고 진상도 부려봤잖아.”
재경의 장난스런 말에 나루가 웃었다.
“진상이라니. 그렇게까지 진상은 아니었어.”
“그래, 김윤영 정도는 아니었겠지.”
재경이 다시 윤영의 이름을 끄집어냈다.
재경의 말대로 이 시간의 윤영은 연나루의 김윤영이 아니었다.
그러나 윤영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유쾌하지 않았다.
“윤영이는 그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하고 있을 뿐이야.”
나루의 두둔에 재경이 피식 웃었다.
“그래, 뭐. 다른 방식이라면 다른 방식일지도. 하여간 난 그 다른 방식을 못 봐주겠고, 내 친구 놈이 거기에 휘둘려서 전전긍긍하는 것도 싫어. 김윤영, 지금 어디 사는지 알지?”
“알긴 하는데, 그건 왜?”
“찾아가게.”
“찾아가서 뭘 어쩌게?”
“끌어내서 지후 앞에 데려다 놔야지.”
“재경아.”
“아, 그런 식으로 내 이름 부르지 마, 설레니까.”
그저 농담만은 아닌 것 같아서, 나루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가 말했다.
“너, 나빴어. 그런 말 하면 내가 약해지는 거 알면서.”
“응, 맞아. 난 나빴어. 그러니까 나쁜 역할은 그냥 나한테 맡기고, 니들은 알콩달콩 사랑이나 해.”
“재경아.”
“그렇게 내 이름 부르지 말라니까.”
“그런 거라면 그냥 내가 가서 말할게. 너한테 나쁜 역할 시키기 싫어.”
재경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냥 해 본 소리야, 그런 건. 그리고 김윤영이 지금 네 얘기를 듣기나 하겠냐? 널 싫어하는데? 걔한테는 내 말이 더 먹힐 거야. 어쨌든 나는 민지후의 친한 친구니까.”
“그건 그렇지만…….”
“강제로든 어떻게든 답을 내야 돼. 그러지 않으면 김윤영이 받는 상처만 더 깊어질 거고, 너에 대한 증오도 커질 거야. 주소 알려 줘. 이 지긋지긋한 관계 좀 어떻게 해 봐야겠으니까.”
* * *
“누나, 누나. 누가 찾아왔어. 남자야, 남자!”
방문 밖에서 동생 지완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영은 왈칵 짜증이 났다.
“시끄러!”
“아, 진짜로 남자가 찾아왔다니까!”
누군지는 안 봐도 뻔했다.
지후일 것이다.
교문 앞에서 기다리다 못해 찾아온 것이겠지.
시간은 밤 1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남의 집을 방문하기에는 늦은 시간이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 것이지.’
윤영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 누나. 진짜 잘생긴 형이 찾아왔다고. 왜 튕겨? 나가 봐, 얼른.”
지완이 지치지도 않고 떠들어댔다.
지완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5살 터울의 남동생은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버릇이 없고 제멋대로 굴었다.
안 그래도 귀찮은 동생이, 방해받고 싶지 않은 순간에 떠들어대니 ‘확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비싼 등록금 내면서 대학 보내놨더니 연애나 하고 돌아다니고. 엄마한테 일러야지.”
놀리듯 말하는 지완의 목소리에, 더는 참지 못하고 방문을 열어젖혔다.
주먹으로 지완의 머리를 콱 쥐어박았다.
“야, 너 까불래?”
“아씨! 왜 때려? 내가 뭘 어쨌는데? 누가 찾아와서 알려 준 건데 왜 때리고 난리야?”
“안 만날 거야. 돌아가라고 해.”
“내가 누나 심부름꾼이냐? 누나가 직접 말해!”
괜히 꿀밤을 맞은 지완은 화가 났는지 버럭 외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윤영은 난처해졌다.
지후는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마 윤영이 나올 때까지 서 있을 작정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귀가하는 부모님과 마주칠 것이 분명했다.
‘엄마, 아빠 귀에는 들어가면 안 돼.’
윤영의 부모님은 엄한 편이었다.
특히 지난 번 윤영이 바람둥이 남자친구에게 차이고 몇 달을 폐인처럼 지낸 이후에는, 윤영의 남자관계에 더 예민해졌다.
그때 이후로는 남자에 관심이 없는 척, 쿨한 척 지내왔지만, 지후가 부모님에게 모든 것을 말해 버리면 끝장이었다.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대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지후가 아닌 재경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모습에, 윤영은 대문 손잡이를 잡은 채로 굳었다.
벽에 기대어 삐딱하게 서서 바닥을 내려다보던 재경이 대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윤영은 대문을 닫으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달려온 재경이 닫히려는 문을 잡았다.
재경의 갈색 눈동자가 윤영을 똑바로 노려봤다.
“김윤영, 도망치지 마.”
윤영은 눈을 부릅뜨고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재경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재경은 대문을 열어젖히고 윤영의 손목을 잡아 끌어냈다.
“이거 놔!”
윤영이 외쳤지만 재경의 손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거 놓으라고!”
“안 놓을 거야. 애쓰지 마.”
“놓으라니까! 너, 이거 폭력이야!”
“어, 알아. 고소해 버려. 일단 지후를 만나고 나서.”
“나는 지후 만날 생각 없어. 내가 왜 걔를 만나야 돼?”
“지후가 아직도 널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말에 심장이 두근, 뛰어서 화가 치밀었다.
그래 봐야 ‘헤어지자.’는 말을 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일 텐데, 그가 나를 몇 시간째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설레다니.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된다.
“난 분명 안 나갈 거라고 말했어. 기다리지 말라고도 했고. 지후가 날 기다리는 건 지후 사정이지, 내 탓이 아냐.”
“그래,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난 지후 친구로서…….”
“민지후가 연나루를 좋아해!”
윤영이 바락 외쳤다.
재경이 걸음을 멈추고 윤영을 돌아봤다.
윤영은 눈에 힘을 주고 재경을 노려보며 말했다.
“민지후가 연나루를 좋아해. 그런데도 걔가 네 친구야? 네가 이럴 가치가 있어?”
“…….”
“지후, 아마도 오늘 나한테 헤어지자는 말 하려고 만나자는 걸 거야. 어제 지후랑 나루랑 둘이 나란히 동아리 활동 안 한 거 기억하지? 걔네 둘이 밤새 같이 있었을 게 분명해. 그러고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으니까 나한테 헤어지자고 하려는 거겠지. 그런데도 민지후가 네 친구라며 나한테 이런 짓을 할 가치가 있어?”
“…….”
“네가 좋아하는 연나루를, 민지후도 좋아하는데. 민지후가 널 배신한 건데, 네가 이래야 할 이유가 있어? 아직도 걔가 네 친구야?”
둘 사이를 이간질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미워서, 그러나 헤어지기 싫어서, 윤영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들어댔다.
묵묵히 윤영의 이야기를 듣던 재경이 말했다.
“지후는 항상 가치가 있어, 나한텐. 나는 지후를 위해 뭐든 할 수 있어. 지후도 나를 위해 뭐든 할 거고.”
“하? 네가 좋아하는 여자를 빼앗으려고 하는데, 그게 널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친구라는 거니?”
“응, 그런 친구야. 지후는 늘 그런 친구였고, 나도 그런 친구가 되고 싶어. 그러니까 가치가 있어, 민지후는.”
윤영은 이를 악물었다.
화려하고 가벼운 놈이라고만 생각했던 재경은, 묵직하고 신중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담긴, 지후를 향한 애정과 신뢰는 몇 마디 말로 흔들릴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민지후가 연나루를 사랑해. 연나루도 민지후를 사랑하지. 나는 그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네가 방해를 한다고 둘의 사이가 멀어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 두 사람이 네 눈치를 보는 건 싫어.”
“나도 민지후를 좋아해.”
“그래, 알아.”
“나도 민지후를 사랑한다고.”
“그래, 알아.”
“연나루가 민지후를 사랑하는 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민지후를 사랑한단 말이야.”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는 윤영을, 재경은 안타깝다는 듯 응시했다.
“안 좋아하려고 했어. 남자한테 상처받는 건 지긋지긋해서, 남자 같은 거 사귀고 싶지도 않았어. 그런데 좋아졌어. 내가 얼마나 치졸하고 바보 같아 보이는지 알아. 그런데도 좋은데 어떻게 해? 그런데도 못 접겠는데,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야? 나도…… 나도 지후를 많이 좋아하는데.”
윤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재경은 망설이다가 윤영의 눈물을 닦아줬다.
재경의 친절이 놀라운 듯, 윤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경을 올려다봤다.
“그래서 지금 넌 행복해?”
재경의 질문이 윤영의 가슴에 콱 꽂혔다.
“지금 이렇게 지후와의 관계를 질질 끌고 있는 게, 너는 행복해?”
“물론…… 물론 행복하지 않아. 매일 가슴이 아파. 하지만 지후와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 되는 게 더 싫어. 그게 더 무서워.”
“왜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좋은 친구가 된다는 선택지도 있잖아.”
“아니, 그런 건 없어. 이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친구로 남아? 나는 지후 옆에 내가 아닌 다른 여자가 있는 걸, 웃는 얼굴로 지켜볼 수 없어. 매일, 매일 가슴이 아플 거야.”
“하지만 그 아픔도 언젠가 무뎌지고, 또 언젠가는 진심으로 웃으면서 지켜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다정하게 묻는 재경을, 윤영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선이 고운 눈썹과 크고 예쁜 눈, 그린 듯 오뚝한 코와 붉은 입술.
이 잘생긴 남자는, 많은 여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 남자는, 하필이면 가장 친한 친구가 사랑하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런 날은 오지 않을걸.”
꿈인데도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꿈이 떠올랐다.
그 꿈에서 재경은 나루를 향한 마음이 접히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보는 이마저 가슴이 먹먹할 만큼 슬픈 눈으로, 나루를 향한 사랑을 접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그런 날은 절대로 오지 않을 거야, 재경아.”
순간 재경의 눈동자가 일렁 흔들렸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아주 짧았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내가 견뎌내야 할 내 문제야. 내 문제를 내 친구와 내 사랑하는 여자에게 짊어지게 하고 싶진 않아. 그래서 나는 앞으로 있는 힘껏 나루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거고, 이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할 거야.”
“그래서 네가 얻는 게 뭔데?”
“글쎄.”
재경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약간의 허세?”
* * *
―어느 날엔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몰라.
윤영은 학교를 향해 걸어가며, 재경의 말을 떠올렸다.
―나, 내 친구를 위해 여자를 포기한 놈이야. 굉장하지 않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재경이, 꿈에서 본 재경과 겹쳐졌다.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내 자신은 뿌듯할 거야. 난 내 친구를 위해 내 마음을 잘 감추고 있어. 정말 속 깊은 놈이야, 나는.
현실일 리 없는데도 현실 같은 그 꿈속의 재경은, 그렇게 뿌듯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재경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가슴이 아팠다.
앞으로 지후에게 들을 말 때문이 아니라, 재경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재경은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여자를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나루를 잊지도 못할 것이다. 늘 그렇게 나루를 그리워하고 친구를 질투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결혼을 약속하게 되는 그 날, 재경은 슬퍼하다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건 그냥 꿈일 뿐인데. 10년이 넘게 짝사랑을 하는 지고지순한 남자가 있을 리 없잖아. 게다가 재경이는 잘생겼으니까 주변에 여자들도 엄청 많을 거고.’
윤영은 머릿속을 차지한 망상을 털어냈다.
저 멀리, 교문이 보였다.
그리고 교문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정면을 응시한 채 꼼짝도 하지 않는 검고 큰 남자의 실루엣.
지후가 여전히 윤영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