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지금 당장 해야겠어
2018.01.08.
나루는 집에 들어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방을 둘러봤다.
처음 이 시간으로 돌아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불과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무척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바로 어제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혼자 이 시간으로 돌아온 줄 알고 느꼈던 고독감과 외로움. 그 처절한 슬픔.
어두운 방에 혼자 웅크리고 누워 흐느끼던 밤들이 생생했다.
지후를 한 번 안아보고 싶지만 안아서는 안 되기에 서럽게 울던 나날들이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러나 오늘.
고독이 끝났다.
내게는 지후가 있다.
나를 기억하고, 나의 추억을 공유하는 민지후가 있다.
나루는 침대에 앉아 지후가 뽑아 준 토끼 인형을 끌어안았다.
“지후가 돌아왔어.”
콧등이 시큰거렸다.
“지후가 돌아왔어.”
지후와 포옹할 때에 전해진 그의 체온이 여전히 나루의 몸에 남아 있었다. 그의 향기와 체취가 아직도 나루를 에워싸고 있었다.
방금 전 헤어졌는데도 그가 그리웠다.
앞으로 쭉 그와 함께할 텐데도, 또다시 그를 안고 싶었다.
아직은 이 모든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딩동―
초인종 소리에 나루는 벌떡 일어났다.
누구냐고 묻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달려가 문을 열자, 지후의 커다란 몸이 보였다.
지후가 후, 하고 웃으며 나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상대를 좀 확인하고 문을 열어.”
“너일 줄 알았어.”
지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미소가 몹시도 그리웠다.
나루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와 눈을 맞추고 그의 얼굴을 마음껏 만질 수 있는 자격이, 또다시 주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옛 시간에서는 당연했던 것들이, 이제는 아주 특별하고 소중한 것이 되었다.
옛 시간에서는 익숙해졌던 것들이, 이제는 아주 설레고 떨리는 일이 되었다.
지후는 뺨에 닿은 나루의 손을 살짝 쥐고 떼어내, 그녀의 손가락에, 손등에, 손목에 입을 맞췄다.
“들어가도 돼?”
그가 물었고.
“응, 물론이지.”
나루는 대답했다.
지후는 안으로 들어와 새삼스럽다는 듯 방을 둘러봤다.
“이 방에 다시 들어오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러게.”
“네 20살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될 줄도 몰랐고.”
“역시 젊은 여자가 좋지?”
나루의 장난스러운 질문에 지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루가 놀리듯 말할 때면, 지후는 늘 이런 표정을 짓곤 했다.
“난 그냥 연나루가 좋아.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그의 다정한 음성이 꿈결처럼 들려왔다.
구름 위에 붕 뜬 기분이었다.
“기분 참 이상하다. 너랑 분명 12년을 알고 지냈고, 그중 9년을 사귀었었는데,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기분이야.”
“응, 나도 그래.”
“두근거려.”
“나도.”
지후가 나루의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얹었다.
그의 심장이 두근, 두근, 조금 빠르게 뛰는 것이 전해졌다.
조용한 방 안에서, 둘은 한동안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앉는 것도 잊은 채, 그리웠던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지후가 엄지로 나루의 눈썹을, 눈가를, 볼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가락이 나루의 귓불을 살짝 만지작거렸고, 나루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 곧 입맞춤이 이어지겠지.
“어쩔까?”
그러나 지후는 나루의 예상을 깨고 물었다.
“응, 뭘?”
나루가 다시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옛 시간 때처럼 친구부터 시작할까, 아니면 지금부터 연인처럼 행동할까?”
질문이 끝나자마자 나루는 지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힘주지 않아도 이끌려 오는 지후를 침대에 앉힌 나루는,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그녀는 도발적인 눈으로 지후를 응시했다.
“친구부터 시작할 수 있겠어?”
지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능할지도.”
“내 몸에 손대면 안 되는데? 내가 지금 이렇게 섹시한데?”
지후가 씩 웃었다.
“노력하면 안 될 게 없지. 내가 그동안 너한테 어떻게 행동했는지 잊은 거야?”
원하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나루는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루는 지후의 어깨를 두 손으로 밀었다.
지후는 버티지 않고 그대로 드러누웠고, 나루는 지후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나는 지금 당장 해야겠어.”
나루는 허리를 굽혔다.
그녀의 얼굴이 다가오자 지후는 눈을 감았다.
나루는 그의 눈썹에 꼼꼼히 입을 맞췄다.
눈썹과 눈에, 볼에, 귓불에. 부드러운 입술이 낙인을 찍듯 눌렸다가 떨어졌다.
지후가 몸이 달 정도로 느리게, 조심스럽게 입을 맞춘 나루는 그의 붉은 입술 위에 살며시 입술을 겹쳤다.
간절히 원했던 그의 입술은, 기억과 같았다.
뜨겁고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 위에, 아주 오랫동안 입술을 겹치고 있었다.
입술의 온도가 섞여 같은 온도가 될 때까지.
숨결이 섞여 같은 향기가 날 때까지.
오래도록 꼼짝도 않고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이윽고 입술을 뗀 나루가 허리를 펴고 지후를 내려다봤다.
감겨 있던 그의 눈이 서서히 벌어지며, 그의 맑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왜 그만둬?’라는 눈으로 나루를 보고 있었다.
나루는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웃으며, 지후의 앞머리를 쓸어 뒤로 넘겼다.
“여기까지야.”
“응?”
“내가 지금 당장 하려는 건 여기까지라고.”
지후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떴고, 나루는 우아하게 웃으며 말했다.
“옛 시간 우리는 24살에 첫 경험을 했지. 아무리 시간을 돌아왔대도 그건 바뀌지 않을 거야.”
지후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나루는 손가락으로 지후의 미간을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노력하면 안 될 게 없으니까, 어디 한 번 잘 참아 봐.”
* * *
나루의 집에서 나온 지후는 잠시 복도에 서서 나루의 집 문을 응시했다.
매일 밤 이렇게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의 현관문을 응시했었다는 것을, 그녀는 모를 것이다.
닫힌 이 문을 내 손으로 마음껏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날이 영원히 오지 않을 줄로만 알았다.
그녀의 얼굴을, 육체를 마음껏 만질 수 있는 날은, 이제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다시금 그녀와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앞으로 12년.’
12년 후에 지후는 죽는다.
‘12년 간, 온힘을 다해서 사랑해야지.’
옛 시간, 어쩌면 그녀를 서운하게 했을지도 모르는 일들, 외롭게 했을지도 모르는 시간들.
이 시간에서는 없도록 힘껏 그녀를 사랑하고 아껴 줘야지.
몇 시간이나 그녀와 붙어 있었는데도 아쉬움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간신히 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하며, 그녀의 도발적인 모습을 떠올렸다.
―노력하면 안 될 게 없으니까, 어디 한 번 잘 참아 봐.
그렇게 말하며 짓궂게 웃는 나루의 모습은 예쁘고 작은 악마 같았다.
지후는 때때로 그런 짓궂은 모습을 보이는 나루를 참으로 사랑했다.
집으로 들어가니, 거실에 재경이 잠들어 있었다. TV를 보다가 잠든 모양인지 TV가 켜져 있었다.
재경의 옆에 앉아 TV를 끄고, 잠든 재경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늘 잘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했지만, 20살로 돌아와 보니 20살 재경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렇게 잘생긴 얼굴로 연애 한 번 제대로 안 한 이유는 나루 때문이었다.
정리하지 못한 감정, 고백하지 못한 감정.
그것이 남아, 옛 시간에서 재경은 연애를 하지 않았다.
간혹 여자를 만나는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짧은 만남으로 끝이 나곤 했다.
―적당히 고르고 연애 좀 해.
지후가 그리 말하면.
―바빠. 연애도 사치다, 요샌.
재경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 답했다.
그렇게 말해야만 했던 재경의 심정을 생각하니 가슴이 쓰렸다.
“너는 나쁜 적 없어.”
지후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후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이후, 재경은 나루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지후에게 고백했다. 질투했노라고, 그런 자신이 싫었노라고.
사실은 그때 말해 주고 싶었다.
옛 시간에서 네가 어떠했는지.
나와 나루의 사랑을 위해,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 감정을 감추고 있었는지.
그런 네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나야말로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너는 늘 나한테 최고의 친구였어.”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속삭인 말에, 재경이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알아. 그러니까 징그럽게 굴지 말고 들어가서 자라.”
“언제 깼냐?”
“방금.”
“너야말로 방에 들어가서 자야 하는 거 아냐?”
“그러려고 했는데, 지금 어떤 표정으로 널 봐야 할지 모르겠다. 고백 받은 기분이거든.”
재경의 장난스러운 말에, 지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항상 이렇게 좋은 친구였다.
이런 상황에서마저 지후의 기분을 생각해 장난으로 분위기를 바꾸려는, 이런 좋은 친구.
“얼른 들어가 버려. 그래야 나도 눈을 뜰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래.”
지후가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재경은 눈을 떴다.
가슴이 시큰시큰 아팠다.
지후와 나루가 잘되어서 기뻤다. 이건 진심이다.
그러나 가슴에 이는 통증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 통증이 친구를 배반하는 것만 같아 속이 상했다.
‘언젠가는 괜찮아질까?’
옛 시간의 성재경은 아마도 쭉 나루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 성재경은, 어떻게 이 기분을 견뎌냈을까?’
* * *
윤영은 1교시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지후를 찾았다.
지후는 없었다.
그래서 나루를 찾아봤더니, 나루도 없었다.
재경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관뒀다. 너무 집착하는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젯밤 계속 전화를 해 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오늘이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잠도 못 자고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지후가 수업에 안 나오다니. 그것도 나루까지.
‘물론 내가 지후랑 진짜로 사귀는 건 아니지만.’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대체 나루랑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어제부터?’
수업이 시작됐지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열리지 않는 강의실 문을 몇 번이나 돌아보며, 지후든 나루든 나타나 주기를 바랐다.
1교시가 거의 끝나갈 무렵 조용히 뒷문이 열리고 지후가 들어왔다. 함께일 줄 알았던 나루는 보이지 않았다.
‘같이 있는 게 아니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후와 눈이 마주쳤다.
지후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곧 시선을 피했다.
지후가 온 걸 확인하자마자 나아졌던 기분이 다시 가라앉았다.
짝사랑은 이렇다.
상대의 행동 하나에 기분이 들쑥날쑥. 하루에도 몇 번씩 파도처럼 움직인다.
싫다.
10분쯤 지나 1교시가 끝났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윤영은 지후에게 다가갔다.
“지후야.”
지후가 고개를 들었다.
“어제 연락이 안 되던데, 무슨 안 좋은 일 있었던 건 아니지?”
“응, 그런 거 아니야.”
“그래, 다행이다. 갑자기 연락이 안 돼서 안 좋은 일 있는 줄 알고. 어제 연습도 안 나오고.”
“그럴 일이 좀 있었어.”
무슨 일인데? 나루랑 관계된 일이야? 나루랑 같이 있었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질문들을 꿀꺽 삼켰다.
“아, 그렇구나.”
여러 개의 질문보다 힘든 한 마디를 내뱉었다.
지후는 윤영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말했다.
“윤영아, 이따가 저녁 같이 먹자.”
지후가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기쁜 마음보다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지후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의 신중하고 진지한 눈빛에서, 이것이 그냥 데이트 신청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싫어.”
윤영의 대답에 지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
“응, 그래서 싫어.”
“윤영아.”
“싫어, 저녁 같이 안 먹을 거야.”
윤영은 휙 돌아섰다.
“6시에 학교 교문 앞에서 기다릴게.”
“기다리지 마.”
“기다릴게.”
“기다리지 마. 안 갈 거니까. 전화도 안 받을 거야.”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늦출 수 있다면 늦추고 싶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의 마음이 내게로 향할지도 모르니까.
그저 말뿐인 연인 관계라도, 최대한 길게 늘리고 싶었다.
고집스러운 모습이 안 좋게 보이리라는 걸 알면서도, 윤영은 자리로 돌아가 정면을 응시했다.
실제로 사귀는 것이 아니지만 겉으로나마 사귀는 이 관계를, 윤영은 절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 * *
나루는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어제 지후는 나루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주었다.
늘 뒤척이다가 잠이 들곤 했는데, 지후 덕에 곧바로 잘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서, 지후에게 문자로 [오늘은 수업 패스할래.]라고 보낸 후 빈둥거리는 중이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점심시간쯤 지후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지후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오늘 저녁에 윤영이랑 얘기하려고. 많이 늦을 것 같아.]
‘오늘 얘기하려는구나.’
나루는 착잡한 기분으로 문자를 응시했다.
지후를 앞에 둔 윤영의 표정이 떠올랐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생기발랄하고 행복한 표정과 반짝거리는 눈빛.
나루가 지후를 사랑하듯, 윤영도 그러고 있었다.
윤영이 겉으로는 강단이 있어도 속은 얼마나 여린지 알고 있었다.
윤영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봐야 하는 것이, 그럴 때에 윤영을 위로해 줄 수 없는 것이 무척이나 슬펐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윤영아.’
나루는 침대에서 내려와 책상 앞에 앉았다.
‘지후는 넘겨줄 수 없어. 지후는 나랑 사랑을 해야 돼. 12년 후 그 날이 될 때까지, 그때 내가 지후를 구할 수 있을 때까지.’
머리가 맑게 개었다.
[응, 얘기 잘하고 와.]
지후에게 답장을 보낸 후, 나루는 책상을 노려봤다.
이제 곧 대학 축제가 시작되고, 축제가 끝나면 곧바로 기말고사 준비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기말고사 후에는 여름 방학이다.
올해 여름 방학, 윤영의 동생인 지완이 죽는다.
어떻게든 지완의 운명을 바꿔야만 했다.
‘바꾸지 못하면.’
증명이 된다.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지후의 가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