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54화 (54/93)

54화. 그냥 사랑하고 싶어

2018.01.04.

“나, 너랑 할 말이 있어.”

나루의 말에 지후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나는 없는데.”

“그런데 나는 있어.”

“나는 없어.”

지후가 잡힌 손목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난 오늘 죽을 거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후는 눈을 부릅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루를 내려다봤다.

그때 모두가 동아리방을 나갔고, 재경이 마지막으로 나가며 문을 닫았다.

달칵―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명진이 자물쇠를 잠그는 소리를, 나루는 들었다.

그러나 나루가 던진 폭탄 같은 발언에 놀란 지후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루는 지후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오늘 죽을 거야.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

“뭐? 왜? 갑자기?”

나루의 돌발 발언에 당황한 지후는, 자신이 나루를 밀어내는 중이라는 것도 잊었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대가가 필요하다면, 다른 희생양이 있으면 되는 거 아닐까? 너는 네가 12년 후에 죽을 거라고 확신해서 나를 밀어내려는 거잖아. 내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만들려는 거잖아.”

지후가 시간을 돌아왔다는 걸 알게 된 당시에는 지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생각을 정리하니,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지후가 굳이 나루와 재경을 이어 주려는 이유. 윤영과 사귀는 척까지 하면서 나루를 밀어내려는 이유.

“내 생각은 그래. 널 대신해서 내가 죽으면, 너는 죽지 않겠지. 네가 죽는 원인인 내가 죽으면, 너는 살겠지. 그러니까 나는 죽을 거야.”

지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후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죽지 마.

말도 안 돼.

내가 널 지킬 거야.

그런 말을 한다는 건, 결국 지후가 시간을 돌아왔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었다.

그렇다고 죽으라고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나루는 한다면 하는 여자니까. 확신을 가지면 그때부터는 거침이 없어지는 여자니까.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정말.”

간신히 내뱉었다.

“아니, 알 거야. 너는 알고 있어. 모른다면 그냥 여길 나가 버리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어쨌든 같은 과 친구가 죽겠다는데, 모르는 척할 수는 없으니까.”

“아, 그래?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겠다는 거지?”

“뭘 그런 식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너 이러는 거 정말 성가셔. 죽겠다는 말까지 하다니. 너, 약간 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냐?”

“내 연인인 민지후라는 남자는 군대에 다녀오기 전에 총을 참 못 쐈어.”

지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 연인인 민지후라는 남자는 군대에 다녀오기 전에 담배를 피우지 않았어. 그리고 내 연인인 민지후라는 남자는.”

나루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후는 나루가 자신의 운동화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군대에 다녀오기 전엔 운동화를 이렇게 구겨 신지 않았어.”

지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원래…….”

“원래라는 변명은 안 통해. 나는 시간을 돌아왔어, 지후야. 나는 너와의 12년을 보내다가 왔어. 그렇다면 너는, 내 기억 속의 20살과 같아야 돼. 20살의 민지후여야만 돼. 그런데 너는, 그 이후의 민지후가 가진 버릇들을 가지고 있어.”

“…….”

“20살의 민지후라면 하지 않을 행동들을, 너는 하고 있어. 이제는 네 변명이 통하지 않아. 뭔 소리야, 네 머리 이상해진 거 아냐, 그런 말들은, 이제 하지 마. 할 거라면, 네가 왜 내가 기억하는 20살의 민지후와 다른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봐.”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지후는 이제 더 이상 속일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후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나루가 나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이 시간에서는 12년 후에 죽을 남자 따위가 아닌, 오래도록 나루의 곁에서 그녀를 지켜 줄 남자를 사랑해야만 한다.

지후는 돌아섰다.

“너랑 할 얘기 없다. 간다.”

문으로 향했다.

열려고 했지만 밖에서 잠겨 있었다.

덜컥― 덜컥―

몇 번을 시도하다가 나루를 돌아봤다.

나루가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못 나가, 우리.”

“하아. 네가 세운 계획이야?”

“그래. 내가 세웠어. 이렇게라도 안 하면, 네가 나를 피할 거 같아서.”

“대체 왜…….”

말을 끝낼 수가 없었다.

나루가 달려와 지후를 끌어안은 것이다.

너무도 간절히 원했던 나루의 체온이 전해져, 지후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나루는 지후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말했다.

“너무 외로웠어, 지후야. 나, 이 시간으로 돌아왔을 때 너무너무 고독했어. 이렇게 널 끌어안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너무 힘들었어.”

밀어낼 수가 없었다.

지후는 언제나 나루를 사랑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까지 사랑한 여자가 힘들다고 말하는데, 밀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지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사랑하면 안 되는데, 그녀의 사랑을 받아서는 안 되는데.

애달픈 음성으로 힘들었다 말하는 그녀를 밀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후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왜 나를 밀어내려 하는지 알아. 그런데 지후야. 너는 잘못 생각하고 있어. 나는…… 나는 너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해. 알잖아.”

“나루야.”

“너도 그렇잖아. 너도 나만 사랑하잖아. 나도 그래. 나도 그렇게 널 사랑해 왔어. 그런데 왜 나한테 그걸 강요하는 거야? 왜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를 강요하는 거야? 너도 못하면서.”

“나는…… 나는 윤영이를 사랑하게 됐어.”

나루가 지후의 품에서 얼굴을 들고 지후와 눈을 맞췄다.

나루의 눈이 가늘어졌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네 표정만 봐도, 네 마음을 알 수 있으니까.”

“나루야.”

“윤영이 상처 주는 거 그만둬. 화낼 거야. 일주일 동안 혼낼 거야.”

옛 시간과 같은 나루의 모습에, 지후는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힘껏 참고 있던 눈물이, 지후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떨어진 눈물이 나루의 이마에 닿았다.

“나루야, 안 돼.”

“돼.”

“안 돼, 나루야. 나를 사랑하는 건 그만둬.”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너도 알잖아.”

“나루야, 나는. 나는 12년 후에 죽어.”

그 날의 일이 떠올라, 나루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나루는 흐르려는 눈물을 꿀꺽 삼켰다.

이 순간에는 아니다.

오늘은 지후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다.

슬픈 모습, 괴로운 모습, 그에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결심했다.

“나는 너와 평생 함께하지 못해. 내가 죽으면 너는 혼자 울겠지. 나는 죽는 순간에도 그게 너무 걱정이 돼서, 그래서…… 여기로 돌아왔어.”

“그럼 네가 죽지 않으면 되잖아. 널 죽게 놔두지 않을 거야.”

“아니, 난 죽을 거야. 죽음은 피할 수 없어. 나는 죽고, 너는 또 혼자가 될 거야.”

나루가 눈을 질끈 감았다.

“지후야. 나는. 나는 그래도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아.”

“네가 뭔데 괜찮지 않대? 난 괜찮아. 그래, 너 죽고 나 혼자 울었어. 그런데 괜찮았어. 견딜 만했어.”

나루의 고집스러운 말에 지후가 웃었다.

“거짓말쟁이. 내가 널 몰라?”

“모르잖아. 하나도 모르잖아. 내가.”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루는 주저앉았다.

“내가 얼마나. 내가 얼마나. 아, 민지후. 내가 얼마나 널 사랑하는지. 모르니까 이런 소리를 하는 거잖아. 딴 남자를 사랑하라니. 그게 말이 돼? 그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해?”

흐느끼면서도 나루는 말했다.

“못 해, 난. 네가 아닌 사람을 사랑하는 거, 나는 못 해. 네가 못 하듯이, 나도 못 해. 네가 못 하는 걸, 나한테 강요하지 마. 나는 그냥.”

나루가 젖은 눈으로 지후를 올려다봤다.

“나는 그냥 네가 죽든 살든. 그냥, 지후야. 그냥 사랑하고 싶어.”

간절하게 응시하는 나루에게 매몰찬 말을 할 수 없었다.

지후는 늘 나루의 눈빛에 약했다.

지후도 나루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지후는 엄지로 나루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나루야. 너는 날 살릴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알아. 하지만 나루야. 나는 12년 후에 죽을 거야. 네 곁에 있어 줄 수 없어.”

“말했잖아. 네가 죽든 살든, 나는 널 사랑하고 싶다고.”

“시한부야. 어쩌면 그보다 더 빨리 죽을지도 몰라.”

“지후야, 나는. 혼자가 되는 게 무섭지 않아. 내가 정말 무서운 건, 너랑 사랑하지 못하는 채로 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거야.”

“…….”

“만약 네가 12년 후에 죽을 수밖에 없다면, 나는 이게 우리가 더 힘껏 사랑하라는 기회라고 생각해. 후회가 남지 않도록, 서로를 더 많이 사랑하고 아껴 주라는 기회.”

“나루야.”

“내가 알아서 할게.”

나루가 볼에 닿아 있는 지후의 손을 꽉 잡았다.

“네가 죽은 후에 슬퍼하든, 뭘 하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알아서 잘 견뎌낼게. 그러니까 민지후.”

나루의 까만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넌 그냥 닥치고 내 사랑이나 받아.”

닥치고 사랑이나 받으라는 여자를 거부할 수 있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지후 또한 그랬다.

너무도 연나루다운 모습에, 지후는 그만 웃고 말았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나를 잃는 순간을 겪었음에도 당당하고 거침이 없어서, 역시나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지후는 두 팔을 벌려 나루를 끌어안았다.

간절히 원하고 또 원했던 나루의 자그마한 육체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녀의 정수리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향기를 마음껏 즐겼다.

이것을 몹시도 하고 싶었다.

사무쳤던 향기가 지후의 후각을 자극했다.

“하, 나루야. 넌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지?”

지후가 웃었다.

“그래, 정말. 사랑해.”

나루의 몸이 떨렸다.

나루는 울면서 웃고 있었다. 지후 또한 그랬다.

사무치는 시간이 지나 다시금 하나가 된 연인은, 울면서 웃으며 그렇게 서로의 체온을 나눴다.

슬프고도 행복한 공기가 둘을 에워싸고 있었다.

* * *

수화 연습을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지후와 나루가 보이지 않았다.

윤영은 지후에게 문자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는데도 받지 않았다.

망설이다가 재경에게 다가갔다.

“재경아. 혹시…… 지후랑 연락 돼?”

“아니, 연락 안 해 봤는데.”

“아, 그래. 통화가 안 돼서.”

“집에서 자나 보지.”

“먼저 연습 와 있겠다고 했는데. 아직 동방에 있나?”

“동방엔 없을걸. 내가 문 잠갔거든.”

“아, 그래.”

“너, 괜찮은 거냐?”

“응?”

“얼굴이 좀…… 아파 보인다?”

재경의 말에 윤영이 손바닥을 볼에 가져다 댔다.

“그냥 요새 잠을 좀 못 자서.”

“그럼 일찍 들어가서 좀 자지 그래?”

“응, 그럴까 봐. 지후도 없고.”

재경은 힘없이 웃는 윤영이 마음에 걸렸다.

나루의 말에 따르면, 옛 시간에서 윤영은 나루와 아주 친했다고 했다.

나루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윤영과 지금 재경이 보는 윤영은 완전히 딴 사람처럼 보였다.

‘얘가 의리파라고? 남자보다 친구를 중요시하는?’

그래도 나중에 친해질 사람이라고 하니 신경이 쓰였다.

어쩌면 지후와 나루가 이 시간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윤영이 저런 모습으로 변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윤영은 피해자다.

“데려다줄까?”

재경의 제안에, 윤영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너, 진짜 아파 보여서. 가다가 쓰러질까 봐 걱정이다.”

“네가 내 걱정을 해 줄지는 몰랐는데. 나 싫어하잖아.”

“걱정을 하는 건 싫은 거랑은 관계가 없지. 데려다줄게. 가자.”

“괜찮아. 혼자 갈 수 있어. 아픈 것도 아니고. 그리고 너, 아무 여자한테나 그렇게 친절하지 마. 여자가 오해해.”

“넌 남친이 있잖아.”

재경의 말을 들은 윤영이 쓰게 웃었다.

“그래, 난 남친이 있지.”

* * *

약속한 시간이 되어 명진과 재경이 동아리방 문을 열어 주러 갔을 때, 지후는 무릎을 꿇고 앉아 나루에게 혼나는 중이었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커플의 가슴 저미는 재회를 기대했던 명진과 재경은, 동아리방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건 대체 뭔 분위기냐?”

명진이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지후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지후 넌 할 말 없어. 그냥 있어.”

나루에게 혼났다.

“아니, 지후는 왜 혼내는 건데? 덮쳤는데 거절하든?”

재경의 말에, 지후가 나루에게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얜 나한테 덮쳐질 자격도 없어.”

나루가 선수를 쳤다.

둘이서 사랑을 하네, 마네 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에, 명진과 재경은 웃음이 나왔지만 참았다.

“근데 진짜 왜 혼나는 거야?”

“윤영이 때문에.”

나루가 말했다.

재경은 윤영의 수척한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혼날 만하겠다. 사랑하지 않는 척하려고, 다른 여자랑 사귀는 척을 하다니. 윤영이 입장에선 진짜 몹쓸 짓이지.”

“하지만 윤영이도 충분히 납득했고…….”

지후가 변명하려 했지만.

“민지후.”

나루의 무시무시한 부름에 입을 다물었다.

“윤영이가 널 좋아하는 걸 빤히 알면서 그런 짓을 한 건, 정말 안 되는 거였어. 누군가를 좋아하면, 어떻게든 그 사람 옆에 있고 싶은 법이라고. 넌 그 마음을 이용한 거야.”

“그래, 할 말이 없다.”

지후가 고개를 숙였다.

“당분간 모르는 척할게. 우리 관계를 티내지도 않을 거야. 그러니까 지후야. 최대한 윤영이가 상처받지 않게 끝내. 알겠지?”

“응.”

“천하의 민지후도 나루 앞에서는 말 잘 듣는 개구나.”

지후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 재경은 놀랍기만 했다.

“개라니. 어감이 안 좋다. 강아지라고 해.”

지후가 지적했지만.

“개도 너 같은 짓은 안 해!”

나루의 질책에 깨갱 물러났다.

“하여간 그래서. 얘기는 잘 된 거야?”

명진이 물었다.

나루는 지후와 눈을 맞췄다가 손을 맞잡고 웃었다.

“응. 12년 후에 우리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동안 있는 힘껏 사랑하기로 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