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덮칠 거야
2018.01.01.
약간 어둑한 분위기의 커피숍은 좌석마다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커플들이 와서 조용히 놀다가 가기에 좋은 커피숍이었다.
차를 시키면 케이크가 하나 나오기 때문에, 명진과 재경의 앞에는 차 두 잔, 케이크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덩치가 산만 한 사내 둘이 앉아 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카페라, 손님들이 두 사람을 흘긋흘긋 훔쳐봤다.
시선이 부담스러워, 명진은 커튼을 내렸다.
“저 둘, 사귀나 봐.”
“분위기 좀 그렇지?”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남자 둘이 이런 데 올 리가 없잖아.”
속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명진은 팔짱을 끼고 재경을 노려봤다.
재경도 주위에서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아무 상관없다는 듯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명진의 시선을 느낀 재경이 포크로 덜어낸 케이크를 명진의 앞에 내밀었다.
“자, 아아.”
“아아는 개뿔.”
명진은 입술로 다가오는 케이크가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왜? 케이크 맛있어. 좀 먹어 봐.”
“네놈이랑 데이트하러 온 거 아니거든.”
명진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레게 머리에 귀를 잔뜩 뚫고, 눈썹에 스크래치까지 한 명진은 안 그래도 험악해 보였는데, 인상을 찡그리니 험악함이 더했다.
그런데도 재경은 무서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너, 이런 놈이었냐?”
“응, 난 이런 놈이야. 그동안 정말 나답지 않았지.”
재경이 싱글싱글 웃으며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뭔가 한 꺼풀 벗어던진 기분이야. 마음이 아주 개운해.”
“개운하다고?”
“응,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았거든. 방향을 잘 잡으면 개운해지지.”
“네가 뭘 해야 하는데?”
“나루랑 지후를 사랑하게 해 줄 거야. 있는 힘껏.”
“흐응.”
명진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재경의 뜻이 명진과 통했기 때문이다.
그때, 테이블에 올려둔 명진의 휴대폰에 문자가 들어왔다. 명진이 슥 확인을 해 보고 말했다.
“나루가 심심하다는데.”
“오라고 해.”
“와도 괜찮겠냐?”
“나는 이제 괜찮아. 말했잖아. 방향을 잘 잡으면 개운해진다고. 그리고 내가 잡은 방향은, 나루랑 지후가 사랑하는 거야.”
“그래, 알겠다.”
명진은 나루에게 장소를 알려 줬다.
“시간이 없어. 나는 12년이라는 기간 동안 나루랑 지후가 서로를 더 많이 사랑하고 대화도 많이 나눠야 한다고 봐.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재경이 말했다.
“그래, 나도 마찬가지 생각이야. 하지만 나루한테는 말하지 않았어, 죽음을 바꿀 수 없을 거라는 말.”
“아, 그래?”
“응. 그걸 말하면.”
명진은 나루의 어두운 표정을 떠올렸다.
슬픔과 고독이 가득 담겨 넘치던 그 암울한 눈동자를,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힘들 거야, 나루는.”
“그렇겠지.”
“거기다.”
명진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나는 내년 봄에 죽을 거야, 성재경.”
“뭐?”
“나루한테 못 들었냐? 나에 대해서.”
“어, 그것까지는.”
“나, 내년 봄에 오토바이 사고로 죽는대. 그래서 나루가 날 처음 봤을 때 그렇게 반응한 거야.”
“아…….”
재경은 명진이 첫 등교를 했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조용한 강의실에서, 나루는 뒷문으로 들어오는 명진을 보고 벌떡 일어났었다.
“네가 나루에 대해 알고 믿어 줘서 다행이야. 내가 죽은 다음에, 나루가 혼자가 될까 봐 정말 걱정이 많았거든.”
명진이 담담히 말했다.
재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재경이 입을 열려는데 명진이 선수를 쳤다.
“아니, 내가 죽는 일에 대한 건 여기까지만 얘기하자. 위로하지 않아도 돼. 난 납득했고, 받아들였으니까.”
“그래.”
“나는 내가 죽기 전에 나루랑 지후가 행복해지는 걸 보고 싶어. 그걸 봐야 후회를 남기지 않을 것 같거든.”
“응.”
“그런데 지후는 나랑 생각이 다르더라.”
“걔가 고집이 세거든. 그냥 나루랑 지후 불러놓고 말해 버리는 건 어때? 지후도 시간을 돌아온 거.”
“그럴까도 생각해 봤는데. 이게 답이 없는 문제라서.”
“답이 없다라…….”
“그렇잖아. 솔직히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 지후가 12년 후에 죽을 수도, 죽지 않을 수도 있어. 나루가 지후 아닌 남자한테 사랑에 빠질 수도, 빠지지 않을 수도 있고. 만약 나루가 지후 말고 다른 사람한테 사랑을 느낀다면, 그래서 12년 후 지후가 죽을 때 누군가 나루 곁에 있어 준다면.”
“불가능할걸, 그건.”
재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루는 평생 민지후만 사랑할 거야.”
재경과 명진이 대화를 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비슷한 내용의 대화를 되풀이하고 있을 때, 커튼이 걷혔다.
나루였다.
MT 이후, 나루와 재경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루는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재경이 먼저 손을 들었다.
“안녕, 나루.”
“응, 안녕.”
“여기 앉아.”
명진이 재경의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말했다.
나루가 명진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재경이랑 같이 있는 줄 몰랐어.”
“응, 내가 데이트 신청을 했거든.”
재경이 씩 웃으며 말했다.
사심 없는 재경의 미소에, 나루는 안심했다.
아까 실험실에서의 돌발 행동도 그렇고, 지금의 미소도 그렇고. 이제야 나루가 아는 그 성재경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완전히 ‘그’ 성재경일 수는 없었다.
이제 나루는 재경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내게 품고 있는 그 애틋한 마음을.
“나루야.”
나루의 생각을 눈치챈 듯 재경이 입을 열었다.
“내가 고백을 한 건 잊어. 나는 이제 너를 알고, 네 마음을 아니까, 잊어. 잊고, 편하게 대해 줘. 옛 시간의 성재경처럼.”
“응, 알겠어.”
“정말 그래 줄 거지?”
“응, 그럴게.”
셋은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닭갈비를 먹으러 향하는 세 사람을, 집에 가던 지후가 목격했다.
며칠 전부터 지후를 보는 재경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나루와 재경, 명진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 재경이도 알게 됐구나.’
그렇지 않다면 명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재경이 그런 행동을 할 리 없었다.
게다가 재경은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벗어던진 듯 홀가분해 보였다.
나루가 시간을 돌아왔다는 걸 믿고,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결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방향은 아마도 옛 시간에서처럼, 자신의 마음을 있는 힘껏 감추고 나루와 지후의 사랑을 지켜보는 것이리라.
가슴이 아프고 미안했다.
나는 내 친구의 사랑을 조금도 눈치채 주지 못했는데, 재경은 늘 눈치를 채고 한 발 물러선다.
조금 더 이기적이어도 될 텐데. 지난번 물에 빠져 죽을 뻔했을 때 질투를 한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지후는 한숨을 삼켰다.
‘더 어려워지겠군.’
안 그래도 명진의 머리 회전이 빨라서 곤란했는데, 거기에 재경까지 합세했다.
두 남자의 사이에 있는 나루의 모습을 보니 지켜주는 사람이 많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양쪽에 날개를 얻었으니, 나루가 더 거침없어지겠어.’
* * *
“가두라고?”
닭갈비를 굽던 재경이 집게를 멈췄다.
“응, 가둬 줘. 동방에.”
“동방에…….”
“일주일 후에, 회의실에서 수화 연습을 하느라 동방이 빌 거야. 연습이 늦게 끝나서 다들 거기서 흩어질 거고. 그러니까 지후랑 날 동방에 가둬 줘.”
“가두면…… 뭘 하게?”
“덮쳐야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한 나루의 말에, 명진이 사레에 걸려 콜록거렸다.
“야, 넌 계집애가!”
“어머, 우리 명진이는 생긴 거랑 다르게 순진하구나.”
나루가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명진이 얄밉다는 눈으로 나루를 노려봤다.
“나랑 지후는 10년을 사귀었어. 32살이었고. 당연히 이런 일도, 저런 일도 했었다고.”
“하?”
“그래, 20살의 순수한 너희들에게는 조금 자극적일지도 모르겠다.”
나루가 또 호호 웃었다.
“이런 게 좋냐?”
명진이 나루를 가리키며 재경에게 물었다.
재경이 웃었다.
“그러게. 처음 봤을 땐 신비로웠거든. 이럴 줄은 몰랐지.”
“어머, 원래 여자는 조금 저돌적인 부분이 있어야 매력적인 거 모르니? 이래서 어린것들은.”
호호 웃는 나루를, 한 대 치고 싶다는 표정으로 보던 명진이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가둬? 문이 가둘 수 있게 되어 있나?”
“지금쯤 합주 동아리 동방에서 누군가가 악기를 하나 훔쳐갈 거야. 그것 때문에 주말에 동방 전체에 자물쇠가 달릴 거고. 그 자물쇠, 회장이 갖고 있어. 왜 그렇게 봐?”
“아니, 그런 얘기 들으니까 정말 미래에서 오긴 왔구나, 싶어서.”
명진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 아가야. 누나는 32살이란다. 하여간 동아리 회장은 좀 건성인 부분이 있어서, 문 잠그는 걸 귀찮아하거든. 회장한테 얘기해서 문 잠그고 오겠다고 하면 자물쇠를 줄 거야. 그걸로 잠가 버려. 난 핑계를 대서 지후랑 동방 안에 있을 테니까.”
“뭐, 문을 잠그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지후가 네 뜻을 따라줄까?”
나루가 씩 웃었다.
“따를 수밖에 없을걸.”
* * *
나루와 재경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빌라 앞에서, 나루는 재경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재경아.”
“응?”
나루가 고개를 들어 재경과 눈을 맞췄다.
나루의 까만 눈동자가 불빛을 받아 신비롭게 빛났다.
“나는 잊지 않을 거야.”
“응?”
“네가 고백한 거, 네 마음, 나는 잊지 않을 거야.”
“아…….”
재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거, 그래서 아주 많이 잘해 준다는 거, 나는 안 잊을 거야. 그걸 어떻게 잊어? 못 잊어, 난.”
나루의 단호한 말에 재경의 눈가가 빨개졌다.
“기억할 거야. 옛 시간에서는 알지 못했지만 이 시간에서는 기억하고 있을 거야. 네가 언젠가 또 다른 사랑을 할 때까지, 나는 쭉 이 가슴에 네 마음을 품고 있을 거야.”
“……또 다른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응, 할 수 있을 거야.”
“옛 시간에선 어땠는데?”
“그때는 못 했지만 이 시간에서는 할 수 있을 거야. 그 시간의 너는 내게 네 마음을 밝히지 못했지만, 이 시간에서는 밝혔으니까. 그러니까 더 빨리 미련을 털어낼 수 있을 거야.”
“그럴까?”
“응. 그럴 거야. 원래 고백하지 못한 사랑이 더 오래 간다잖아. 그러니까 너는 나보다 훨씬 예쁘고 성격도 좋고 야한 소리도 안 하는 여자를 사랑하게 될 거야.”
재경이 웃었다.
“나는 네 마음을 기억할 거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행동할 거야. 네 마음, 받아줄 수 없지만 그렇다고 너랑 멀어지지도 않을 거니까, 지후를 사랑하는 내 모습을, 네 앞에서 감추지 않을 거야. 어쩌면 그게 너한테 아픔이 될지도 몰라. 괜찮겠어?”
“응, 괜찮아.”
재경이 나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정말로. 나는 가야 할 방향을 잡았고, 그 방향으로 걸어갈 때 조금 아프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했으니까.”
* * *
눈에 띄게 수척해진 윤영에게, 선미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윤영아, 너 다이어트를 너무 심하게 하는 거 아냐? 살이 너무 빠졌어.”
“아냐, 다이어트라니.”
“안 그래도 말랐는데, 더 뺄 게 뭐가 있다고. 넌 살 안 빼도 예뻐. 지후가 마른 여자가 좋대?”
지영이 거들었다.
윤영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냐. 요새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래.”
“왜? 불면증이야?”
“응, 그런가 봐.”
사실 불면증이 아니었다.
잠은 잘 잤다.
다만 잠을 잘 때마다 꾸는 꿈이 문제였다.
매일 꿈을 꾼다.
꿈에서 윤영은 나루의 가장 좋은 친구였다.
늘 나루와 붙어 다녔다.
윤영이 실연을 당해서 울 때에 며칠씩 옆에서 위로해 준 사람은 나루였다.
윤영이 가족들 때문에 지칠 때에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윤영의 손을 잡아 준 것 또한 나루였다.
꿈에서 깨어나면,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알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 상태로 한참이 흘러야, 이것이 현실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왜 자꾸 그런 꿈을 꾸는 걸까?
지후와 사귀는 척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런 걸로 이런 생생한 꿈을 꾼다고?
아니, 내가 꾸는 꿈이 꿈인 건 맞나?
사실은 이게 꿈이고, 그 꿈이 현실인 거 아냐?
나는 나루랑 친한 친구인데, 나루와 사이가 안 좋은 꿈을 꾸고 있는 중인 거 아닐까?
매일 두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할 수가 없다.
다들 바보 같은 소리로 치부해 버릴 것이다.
특히 지후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꿈에서 너와 나루가 사랑하는 걸 봤어. 아주 많이 사랑하고 곧 결혼을 한다고 행복해하는 걸 봤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나는 여전히 지후를 사랑하니까.
그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으니까.
* * *
나루의 말대로 합주 동아리의 악기가 도난당했다.
주말에 각 동아리방에 자물쇠가 설치되는 걸, 재경과 명진은 놀라운 마음으로 지켜봤다.
수화 동아리의 축제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제각각 모여서 노래에 맞춰 수화를 배웠고, 나루는 수화가 기억난다며 좋아했다.
그리고 나루가 말한 그날이 되었다.
윤영은 한 과목 따로 듣는 강의가 있어서, 늦게 끝나는 날이었다.
재경은 지후와 함께 동아리방으로 향했고, 명진은 회장에게 자물쇠를 받으러 갔다.
동아리방에는 일찍 끝난 회원들이 와서 누워 있거나 앉아 있었다.
재경과 지후는 회원들과 인사를 나눈 후,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벌써 다음 주가 축제네.”
재경이 말했다.
“그러게.”
“너, 주점 표는 많이 팔았냐?”
1학년들에게는 주점 이용권을 파는 임무가 맡겨졌다.
“그럭저럭. 고등학교 때 애들한테 넘겼어.”
“아, 나도 그럴걸.”
“중학교 때 애들 좀 구슬려 봐. 지찬이랑 성민이가 대학 축제 오고 싶어 하던데.”
지찬과 성민은 재수생이었다.
“그래야겠네. 걔들한테 한 열 장쯤 팔아야지.”
그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나루가 들어왔다.
나루와 재경은 지후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눈빛을 주고받았다.
“자, 모일 만큼 모였으니까 연습하러 가자.”
수화를 가르쳐 주는 선배의 말에 다들 미적미적 일어났다.
지후와 재경도 일어났고, 사람들 뒤를 따라 나가려고 했다.
그때, 나루가 지후의 팔을 잡았다.
“지후야.”
사람들은 거의 다 빠져나간 후였다.
“나, 너랑 할 말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