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한 이불 덮고 자고 싶어
2017.12.28.
“잘될 줄 알았어. 나는 지후를 아주 많이 좋아하니까, 나루도 지후를 아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이 마음,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줄 알았어.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줄 알았어.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고, 재경은 말했다.
누구를 봐도 나루를 겹쳐 보게 된다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런데 오늘은 정말…… 내가 먼저 말 꺼내놓고, 내가 괜히 슬퍼져서. 고백도 못 한 내가 불쌍해져서.”
재경이 고개를 숙였다.
“아, 미안하다, 윤영아. 너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미안해.”
“아냐, 재경아.”
“아니, 미안해. 더 잘 감췄어야 했는데. 하, 진짜 이게 뭐하는 짓이지, 난?”
자책하는 재경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재경은 혼란스러운 듯했다.
“앞으로 더 잘 감출 거야. 지후랑 나루가 결혼하고 나면, 아이가 생기면, 그때는 정말로 나도 여기서 나루를 떠나보낼 수 있겠지.”
재경이 자신의 가슴을 꾹 누르며 말했다.
“미안해, 윤영아. 이건 비밀로 해 줘.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줘.”
윤영이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재경은 혼자 말하고 혼자 정리를 했다.
사실 시간을 줬다고 해서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많이 좋아하는 친구가 내가 많이 좋아하는 친구를 좋아하는데, 그 친구는 내가 많이 좋아하는 친구의 연인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나루가 재경이 마음을 알면 큰일 나겠지.’
재경이 꽁꽁 감추는 심정도 이해가 됐다.
재경의 마음이 드러나는 순간, 지후도 나루도 곤란해질 것이다.
나루는 윤영을 꼭 끌어안고 또 재잘거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고 싶었는데.’
잠깐 재경이 원망스러웠던 마음을 금방 지웠다.
‘하지만 재경이도 힘들었을 거야. 아무한테도 말할 수가 없었을 테니까.’
고민이 있을 땐 가장 신뢰하고 좋아하는 친구에게 말하게 된다. 재경에게는 그런 친구가 지후와 나루였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나한테 말했을까?’
그리고.
번쩍―
윤영은 눈을 떴다.
분명 좋은 향기가 났었는데, 술 냄새와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깨끗한 천장이 보여야 하는데, 지저분하고 곰팡이 쓴 천장이 보였다.
나루가 날 끌어안고 있어야 하는데, 드렁드렁 코 고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뭐지?’
윤영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상체를 일으키고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어제 과 전체 MT를 왔고, 술을 마시다가 새벽에 방에 들어와서 잠들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심장이 지끈지끈 아팠다.
‘대체 그건 무슨 꿈이야?’
생생한 꿈이었다.
마치 그게 진짜 윤영이고, 지금 여기가 꿈처럼 느껴질 만큼.
‘전에도 이런 꿈을 꿨었는데.’
나루와 지후가 사랑하는 꿈. 사랑하는 둘을 앞에 두고 카페에서 노닥거리는 꿈. 너무 생생해서 가슴이 아팠던 꿈.
‘왜 자꾸 이런 꿈을 꾸는 거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알 수 없는 장소에 푹 담가졌다가 돌아온 기분이었다.
세수라도 할 생각에 거실로 나갔다.
다들 여기저기 너부러져서 자고 있었다.
지후가 있나 찾아봤지만 남자 방으로 들어간 듯 보이지 않았다.
‘자는 얼굴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고 생각하며 화장실에 가려다가 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나루와 명진이 들어오고 있었다.
울었던 걸까?
나루의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지끈―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꿈에서는 그토록 행복해 보였는데, 아무런 고민 없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는데.
‘나 때문이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젯밤에 지후랑 사귀는 척을 실컷 해대서 나루가 저렇게 운 거야.’
죄책감과 후회와 슬픔과 미안함에 나루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아니, 그건 꿈이잖아. 내가 왜 쟤한테 미안해해야 하는데? 쟤는 내 친구도 아닌데. 나랑 지후가 사귄다는 걸 알면서도 지후를 뺏으려고 하는 앤데.’
라고 방어했다.
그런데도 가슴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꿈에서 본 나루의 미소가, 향기가, 체온이 윤영의 심장을 쿡쿡 찔러대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왜 꿈과 현실을 제대로 분리할 수 없는 걸까?
꿈은 꿈일 뿐인데, 왜 자꾸 현실의 연나루와 겹쳐서 생각을 하게 되는 걸까?
‘내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
윤영은 도망치듯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울고 싶었고, 그래서 주저앉아 울었다.
그래도 가슴의 응어리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 * *
재경은 짐을 챙겨서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지후는 없었다.
아까 MT에서 돌아와 윤영과 둘이 어디로 사라진 걸 보면, 데이트라도 하러 갔나 보다.
아니, 데이트하는 척을 하러 간 거겠지.
짐을 정리하고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와 거실에 앉았다.
안주 없이 맥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 나루의 이야기.
술에서 깨 멀쩡한 정신으로 생각해 보니, 너무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시간을 돌아오다니.
그런 비과학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타임머신을 개발한 것도 아니고, 그저 지후의 죽음에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했다는 것만으로 돌아왔단다.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 리 없다.
‘하지만.’
왜 믿어지는 걸까?
머리는 그럴 리 없다고 하는데, 어째서 믿어지는 걸까?
나루의 절박한 표정이나 애절한 눈빛 때문이 아니었다.
나루가 시간을 돌아왔다고 해야 이해할 수 있는 몇몇 사건들 때문이었다.
‘그래, 그런 것들은…… 나루가 시간을 돌아왔다고 하면 설명이 돼. 그래서 믿을 수밖에 없는 거겠지.’
그리고 지후도.
달칵―
현관문이 열리고 지후가 들어왔다.
지후는 재경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왔었냐.”
“그래.”
“저녁은?”
“아직. 넌?”
“난 윤영이랑 먹었어.”
“아아, 그래.”
재경은 지후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최근에 종종 낯선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갑자기 생긴 습관, 갑자기 피우기 시작한 담배,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들.
지후가 시간을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재경이 모르는 12년 간 달라진 모습들이 낯설게 다가왔던 것이다.
“뭘 그렇게 열렬하게 봐?”
지후가 물었다.
“내 친구 놈, 참 잘생겼구나 싶어서.”
“후.”
지후가 바람이 불 듯 웃었다.
나루의 이야기에 따르면 12년 후, 민지후는 칼에 찔려 죽는다.
아직 한참이나 남은 일인데도 가슴이 지끈 아파왔다.
“밥 해 줄까?”
“네, 엄마.”
“엄마 말 좀 잘 들어라. 걱정시키지 말고.”
“네, 엄마.”
지후가 요리를 하는 동안, 재경은 식탁에 앉아 그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12년 후 내 친구가 죽는다.
12년 후 이 모습을 볼 수 없게 된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렇구나.’
재경은 이제야 지후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혼자 남게 될 나루 때문이구나.’
지후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12년 후, 지후가 죽을 때에 나루의 곁에 있어 줄 사람으로 재경을 지목한 것이다.
나루가 재경을 사랑한다면, 그래서 두 사람이 연인이 된다면, 지후가 죽은 후 나루와 재경이 서로에게 기대어 슬픔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후라면 할 법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윤영이랑 사귀는 척까지 하는 거구나.’
지후가 그답지 않은 행동까지 하며 절박하게 나루와 재경을 이어 주려고 한 이유를,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가슴이 미어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아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지후가 죽는다.
지후가 죽는다.
지후가 죽는다.
사람이라면 응당 죽는 법이지만, 싫었다.
‘정말 싫다.’
재경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물이 손가락 틈으로 흘러내렸다.
뜨겁고 쓰렸다.
‘정말 싫어.’
친구의 죽음을 미리 아는 것은 조금도 유쾌하지 않았다.
‘나루 기분은 더 끔찍하겠지.’
간혹 보이던 그녀의 슬픈 눈동자,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고독감을, 이제야 이해했다.
재경은 조금 울다가 눈물을 닦고 거울을 응시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남자의 얼굴이 거울 안에 있었다.
‘지후야, 넌 틀렸어.’
나루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지후만을 사랑할 것이다.
그렇다면.
‘12년 후 그 날까지 힘껏 사랑하고 사랑받고, 서로에게 후회도, 미련도 남기지 않는 게 좋은 거야. 그걸 위한 회귀인 거야.’
* * *
가족 같았던 내 소중한 친구가 12년 후에 죽는다.
그것을 미리 알게 된 지금, 재경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았다.
울고 슬퍼할 틈은 없었다.
지후와 나루는 사랑해야 한다. 12년이라는 시간, 더 많이 사랑하고 사랑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나는.’
소중한 두 사람을 끌어주는 역할이다.
그걸로 좋았다.
‘그리고 그 순간.’
12년 후, 지후가 죽음을 맞이하는 그때에.
‘할 수 있다면.’
지후를 구한다.
‘죽음이 꼭 필요하다면.’
내가 대신 죽는다.
‘그러면 지후도, 나루도 괜찮을 거야.’
결심을 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화장실에서 나왔을 땐 저녁상이 거의 차려진 후였다.
“변비냐?”
지후가 물었다.
“응, 요새 좀. 와, 맛있겠다.”
“응, 많이 먹고 쑥쑥 자라라.”
“네, 엄마.”
재경은 수저를 들었고, 지후는 맞은편에 앉아 재경이 저녁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재경아.”
“응?”
“너,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응? 뭐가? 왜?”
“표정이 좀 평소랑 달라서.”
재경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글쎄.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가? 별로 안 좋을 건 없는데.”
“그렇다면 다행이고.”
무슨 일은 자기한테 있으면서, 재경의 작은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지후가, 재경은 좋았다.
지후에 대한 애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물씬 피어올랐다.
“지후야.”
“응.”
“이따 같이 자자.”
“뭐?”
지후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같이 자자. 너랑 한 이불 덮고 자고 싶어.”
“어디 아프냐?”
“안 아파. 어릴 때 자주 같이 잤잖아.”
“오해할 소리하지 마. 넌 침대에서, 난 바닥에서 잤으니까.”
“이제 우리도 성인이니까 한 이불 덮고 자보자고.”
지후가 진저리를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녁을 먹은 후 재경은 기어코 지후의 방에 쳐들어갔고, 좁은 싱글 침대에서 두 남자는 불편하게 잠이 들었다.
* * *
각 동아리와 학과들은 축제 준비를 하느라 바빠졌다.
나루는 1학년이고 맡은 게 없어서 과에서 하는 주점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봉사 동아리 공연에는 참여해야 했다.
거의 비어 있던 동아리방은 이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축제 준비를 위해 동아리 회원 전부가 모이는 날에는, 학생회관에 있는 회의실을 빌렸다.
동아리 회장이 축제 때 할 수화 공연에 대해 설명하고 있을 때, 뒷문이 조용히 열리고 지후가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시선이 쏠리자 지후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저도 죄송합니다.”
지후의 뒤로 윤영이 얼굴을 빠끔 내밀며 말했다.
“저, 좀 늦은 것 같지만 봉사 동아리 가입하고 싶어서요.”
* * *
동아리는 늦게 가입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고, 봉사 동아리 같은 경우에는 인원이 많지 않기에 추가 가입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윤영은 빠른 적응력으로 금방 동아리 사람들과 친해졌다.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의견을 내기도 하는 윤영은, 선배들의 마음에 쏙 들었다.
재경과 명진은 윤영을 못마땅하게 지켜봤지만, 나루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너, 괜찮냐?”
명진이 나루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안 괜찮아.”
“그래, 그렇겠지. 나도 쟤가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다. 진짜 뻔뻔하네.”
“아니, 그게 아니라…… 기억이 안 나.”
“응? 뭐가?”
“수화 공연.”
“뭐?”
“이때 수화 공연했던 거, 잘하면 기억날 것 같기도 한데 가물가물하네. 한 번 해 보면 기억이 나려나?”
윤영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공연만 신경 쓰는 나루를, 명진은 황당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왜 그렇게 봐? 수화 외우기 어렵단 말이야. 게다가 난 몸치라서…… 옛 시간에서도 공연 외우느라 진짜 죽는 줄 알았거든. 재경이한테 놀림도 엄청 받고.”
“이젠 성재경이 그런 걸로 놀리거나 하진 않겠지.”
“응, 그렇겠지?”
나루는 재경을 돌아봤다.
재경은 윤영과 지후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 * *
화학 실험을 할 때는 정밀도가 생명이었다.
먼지의 무게만으로도 실험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명진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저울에 시약을 덜고 있었다.
조원들 모두가 긴장된 눈으로 명진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이따가.”
훅―
명진의 귓속으로 뜨거운 입김이 훅 밀려들어 왔다.
명진은 소스라치게 놀라 약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챙강―
“야, 이 자식아! 깜짝 놀랐잖아!”
명진이 휙 돌아보며 외쳤다.
재경이 씩 웃었다.
“귀가 민감한가 보지?”
“너, 진짜!”
“하여간 이따가.”
재경이 명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명진은 피하고 싶은 듯 뒷걸음질을 쳤지만, 뒤에 실험대가 있어서 도망칠 수 없었다.
그런 명진의 어깨에 턱을 얹은 재경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따가 나 좀 보자.”
“그 얘기를 꼭 이런 식으로 해야 하냐? 너, 눈에 띄는 거 좋아하는구나?”
“어, 좋아해.”
“허리에서 손 좀 치우시지. 나루한테 까이고 아예 남자 쪽으로 취향을 바꾼 거냐?”
“나루한테 까였다는 말을 그렇게 거침없이 해 주는 놈이라서 더 좋은걸?”
“허리에서 손 떼라고, 이 잘생긴 놈아.”
실험을 하다말고 느닷없이 애정 행각을 펼치는 재경과 명진을, 실험실 안의 모두가 황당하다는 듯 쳐다봤다.
“이따 보겠다고 말해, 그럼 놔줄게.”
재경이 은밀하게 속삭였다.
명진은 오만상을 찌푸렸지만 별수 없었다.
재경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명진은 시선을 끄는 게 딱 질색이었다.
“알겠으니까, 이 손 치워. 당장.”
재경이 씩 웃으며 명진에게서 떨어졌다. 재경은 자신을 보고 있는 학생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데이트 약속, 따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