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내 평생
2017.12.25.
나루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재경은 자신이 주먹을 너무 꽉 쥐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손톱에 찔린 손바닥이 얼얼했다.
손에서 힘을 풀어보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긴장이 사라지지 않았다.
웃어넘기면 되는 소리였다.
말도 안 돼. 어이가 없네. 너, 머리가 약간 이상한 거 아냐? 어떤 영화를 보고 온 거야? 공상 과학 같은 거 좋아해? 아, 이건 판타지인가?
다른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재경은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나루의 표정이, 눈빛이, 그녀가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걸 말해 주었다.
“믿지 못하겠지?”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한동안 말이 없는 재경에게, 나루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래, 믿지 못할 거야. 이런 이야기, 누가 믿겠어? 게다가 넌…… 원래 이런 얘기를 좋아하지도 않고. 너, 되게 현실적이잖아.”
나루는 재경의 굳은 얼굴을 보며 말했다.
재경이 믿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재경은 이런 이야기를 질색했으니까.
농담하지 말라며 화를 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쨌든 진실을 이야기했으니 속이 시원했다.
“지후랑 연인이었다고?”
이윽고 재경이 입을 열었다.
“응, 지후가 군대 다녀오고 나서부터.”
“난 너희들의 좋은 친구였다고?”
“응, 내가 고민이 있다고 하면 언제든 달려와 주는, 가장 좋은 친구.”
“그래.”
“응.”
“그래.”
“응.”
“그렇다면.”
재경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네 시간의 성재경은 꾹꾹 감추고 있었을 거야.”
재경이 벤치를 돌아 나루의 옆에 와서 섰다.
나루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네 시간의 성재경은 아마도 꾹꾹 감추고 있었을 거야.”
“재경아…….”
“첫눈에 반했거든.”
재경의 음성이 떨렸다.
이번에는 나루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나루의 볼을, 재경이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의 손은 차가웠지만, 나루는 그 손길에 담긴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난 널 처음 보는 순간 반했거든.”
애절한 목소리에, 나루는 울 것만 같았다.
볼을 쓰다듬는 손이 가늘게 떨려서, 더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지후가 널 사랑하니까, 내 친구가 널 좋아한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나는 아마도 그 12년, 내 마음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며 살았을 거야.”
나루는 두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러지 않으면 신음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그 시간의 나는, 정말로 잘해 냈나 보다. 널 사랑한다는 마음을, 정말로 잘 감췄나 보다. 대단하다, 그 친구.”
“……재경아.”
“이 시간의 나는 네 시간의 나보다 나은 걸까?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한테 내 감정을 알리기는 했으니까.”
물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재경이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나는 좀 나은 건가?”
“나는, 재경아. 나는 너한테 미안해서…… 알아주지 못한 게 미안해서……”
나루가 더듬더듬 말하는데, 재경이 눈을 번쩍 떴다.
“알리기 싫었을 테니까 알아주지 못한 게 당연한 거겠지. 그리고 네 시간의 성재경은, 내가 아냐. 다른 사람이야. 나한테 미안해할 거 없어.”
“내 이야기를 믿는 거야?”
“안 믿어. 안 믿는데, 믿을 수밖에 없어. 그런 거 알아? 정말 안 믿는데, 머리는 믿지 말라고 하는데. 여기가 믿어.”
나루의 볼에 닿아 있던 손이 재경의 가슴 위에 얹어졌다.
재경은 자신의 가슴을 꾹 누르고 말했다.
“네 시간의 성재경은 친구를 위해 사랑을 포기했겠지. 그 사랑 고백도 못 하고 그렇게 살아갔겠지. 그리고 이 시간의 성재경은…… 바보처럼 친구의 마음도 알아차리지 못한 성재경은…… 그래, 앞으로 포기해야겠지. 잘 감추고 살아가야겠지.”
“재경아.”
나루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이 미어졌다.
나루도 이 시간으로 돌아와 짝사랑을 했다.
지후도 시간을 돌아왔다는 걸 몰랐을 때에는 짝사랑이었다.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아프고 외롭고 슬픈 일인지, 때때로 그것이 얼마나 가슴을 고통스럽게 만드는지 알고 있었다.
알기에, 슬펐다.
내 소중한 친구가 그런 기분을 오랫동안 느끼며 살아갔다는 것이, 그 고통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견뎌냈다는 것이,
그리고 시간을 돌아온 이때에도 역시 그러리라는 것이, 그것을 알면서도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이.
쓰렸다.
가슴이 쓰려,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재경이 힘없이 웃으며 나루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네가 왜 울어? 울고 싶은 건 난데.”
“미안해서.”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모르겠네. 사랑을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미안해서.”
간신히 참고 있던 재경의 눈물도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흘렀다.
재경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나루를 끌어안았다.
나루는 재경을 밀어내지 않았다.
“이렇게 널 안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
“응.”
“네 시간의 나도, 이렇게 널 안은 적이 있어?”
“……아니.”
“그래, 그럼 나도 앞으로 잘 해낼 수 있겠다. 널 안고 싶어도 안지 않는 거.”
“…….”
“사랑해도 표현하지 않는 거, 나도 잘 할 수 있겠지.”
“…….”
“그러니까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러는 건.”
“응.”
“내가 널 참 많이 좋아해. 아주 많이 좋아해. 한 여자가 처음으로 너무 많이 좋아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좋아서…… 그래서 내 자신을 잃고 있었어.”
재경은 나루를 꼭 끌어안고 속삭였다.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음에도, 나루는 그가 계속 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를 사랑해, 나루야. 너도 날 사랑했다면, 내 시간과 내 세상이 정말 반짝반짝 빛이 났을 거야. 하지만. 너는 내 친구를 사랑하고, 나도 내 친구를 사랑해. 그리고 내 친구도. 널 사랑하지.”
울음 섞인 목소리가 띄엄띄엄 이어졌다.
“나는 내 친구를 너무 많이 사랑하니까, 그리고 나는 널 아주 많이 사랑하니까.”
재경이 나루에게서 떨어져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나루를 내려다보던 재경이 허리를 굽혔다.
그의 입술이 나루의 이마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다시 허리를 편 재경이 나루와 눈을 맞췄다.
그의 연갈색 눈동자가 각오를 다지고 빛났다.
눈물도, 더는 흐르지 않았다.
재경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는 있는 힘껏 너를 사랑하지 않을게. 온힘을 다해 너를 사랑하지 않을게. 내 평생 너를 사랑하지 않을게.”
* * *
“먼저 들어갈게.”
라고, 재경은 말했다.
“언제든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
라고도, 재경은 말했다.
나루는 대답하지 못하고, 돌아서서 들어가는 재경을 멀거니 응시했다.
재경이 돌아간 후, 나루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재경에게 안겼던 감촉과 어깨에 떨어지던 눈물의 뜨거움과 떨리던 목소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루는 울었다.
울고 또 울었지만 가슴에 걸린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역시 재경은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옛 시간에서도 그랬으리라.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고독했을까.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그 감정이 얼마나 고됐을까.
‘어째서…… 어째서야, 재경아.’
왜 이 시간에서조차, 재경은 이토록 좋은 사람인 걸까.
어째서 이 시간에서조차, 재경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게 된 것일까.
진작 알았더라면, 20살로 돌아온 그 순간에도 이걸 알고 있었더라면.
집 밖으로 나오는 일 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을 텐데.
한참을 그렇게 오열하는데, 누군가 나루의 옆에 와서 쭈그리고 앉았다.
나루는 말없이 옆자리를 지켜주는 사람이 명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돌아보지 않고 계속 울었다.
울다가 울다가 더는 흘릴 눈물도 남아 있지 않아, 끅끅거리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새벽 동이 틀 때쯤에야, 나루는 울음을 멈췄다.
둘은 쭈그리고 앉은 채 말없이 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 울었냐?”
명진이 침묵을 깨뜨렸다.
“아니, 아직. 나중에 또 울지도 몰라.”
“그래.”
“재경이가 옛 시간에서도 나를 사랑했을 거래. 나를 사랑하지만 마음을 쭉 감춰 왔을 거래.”
“그래.”
“그게 참 아프고 슬프다. 어떻게든 해 주고 싶은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라서, 그게 참 어렵고 괴로워.”
“그래, 그렇겠다.”
“재경이한테 너무 미안해. 앞으로 재경이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뭐, 미안해하든 고마워하든. 그거야 네 마음이겠지만. 적어도 재경이 얼굴은 평범하게 봐. 피하면 피할수록, 성재경은 더 괴로울 테니까.”
* * *
좋은 향기가 나는 방이었다.
달콤한 샴푸 향기와 로션 냄새, 그리고.
윤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루가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었다.
봉긋한 이마와 결 좋은 눈썹, 아몬드 형의 눈과 오뚝한 코.
참으로 그림 같은 옆모습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루가 말했다.
“그래서 지후가 프러포즈를 안 할 줄 알았거든.”
아, 그래. 오랜만에 나루의 집에 놀러와, 여자들만의 밤을 보내는 중이었다.
저녁으로 먹은 피자 때문에 아직도 배가 불렀다.
나루가 저번 여행 때 지후가 사 온 은촛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루의 방에서, 그 은촛대가 빛을 내고 있었다.
“그렇잖아. 저걸 주면서 은근슬쩍 같이 살 때 쓰자고 하니까, 그런 식으로 프러포즈를 하는 건가 싶었지. 요새 프러포즈라는 게 의미가 없기도 하고, 지후가 이벤트 같은 걸 떡하니 하는 성격이 아니기도 하고. 그래서 정말 깜짝 놀랐어. 게다가 반지도 엄청 내 스타일이고.”
나루가 재잘재잘 떠드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윤영은 웃으며 나루에게 말했다.
“어디 반지 좀 보자.”
“응, 이것 봐.”
나루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눈에 익은 반지가 나루의 가느다랗게 예쁜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내 친구는 어쩌면 이렇게 손가락까지도 예쁠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말했다.
“정말 예쁘다.”
나루가 까르르 웃었다.
“왜 그렇게 웃어?”
“너, 연기 정말 못한다.”
“응? 연기라니?”
나루가 고개를 돌려 윤영을 응시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나루의 눈이 정말로 예뻤다.
사랑에 빠지면, 그리고 사랑을 받으면 여자는 이런 눈빛을 하나 보다.
“이거 네가 골라 준 거지?”
뜨끔했다.
“아니.”
“대답이 한 박자 늦었어. 네가 골라 준 거네.”
“아닌데.”
“맞잖아. 프러포즈도 제대로 하라고, 네가 말해 준 거지?”
“아냐, 그런 거.”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났다.
며칠 전 나루가 바빠서 나루를 빼고 모인 적이 있었다.
“니들 슬슬 결혼해야 하지 않냐?”
결혼 얘기를 꺼낸 건 재경이었다.
“그러게. 이제 우리 나이도 있고, 슬슬 결혼해야 하는 거 아냐? 언제까지 나루를 기다리게 할 거야?”
윤영의 말에 지후가 대답했다.
“프러포즈 했어.”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촛대를 선물하면서 같이 사는 미래를 이야기했단다.
“말도 안 돼.”
“넌 애가 왜 그러냐?”
“프러포즈는 여자의 로망인 거 몰라?”
“제대로 좀 하라고, 민지후.”
“넌 이래서 못 써.”
“나루가 불쌍하다.”
사정없이 몰아붙이는 재경과 윤영을 난처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지후가 물었다.
“내가 그렇게 못 쓰겠냐?”
“어, 못 써. 프러포즈는 그런 식으로 하는 거 아냐. 제대로 해.”
“맞아, 인마. 똑바로 하란 말이야, 똑바로.”
그래서 프러포즈 계획을 함께 세우고, 반지는 윤영이 골라 주었다.
나루의 취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쉽게 고를 수 있었다.
나루에게는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역시 끝까지 비밀로 할 순 없었나 보다.
“고마워, 윤영아. 역시 너밖에 없어.”
나루가 윤영을 끌어안았다.
나루에게서 전해지는 체온이 기분 좋았다.
나루가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게 정말로 좋았다. 나루가 언제까지고 이렇게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가슴 한쪽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재경이었다.
프러포즈 계획을 세우고 헤어지던 날, 지후가 먼저 떠났고 재경과 윤영은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재경이 말했다.
“우리, 술 한 잔 더 할래?”
“응, 그래.”
다음 날이 쉬는 날이기에, 윤영은 별생각 없이 수락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재경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맞은편에 앉은 재경은 조금 어두운 표정이었다.
왕자같이 화려한 얼굴에 상념이 서려, 더 근사한 외모로 보였다.
근처의 여자들이 재경을 흘끗흘끗 훔쳐보는 게 느껴졌다.
“넌 여전히 인기가 많구나. 서른이 넘었는데, 저 어린애들이 너한테 관심 보인다, 야.”
재경의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분위기 좀 바꿔보기 위해 말했다.
재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인기가 없어도 내가 원하는 걸 가질 수만 있다면 좋은 거고, 인기가 아무리 많아도 내가 원하는 걸 가질 수 없다면…… 그건 참 싫은 거 같아.”
“가질 수 없는 게 있어?”
“응, 있어.”
그때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괴로워. 가질 수 없어서 괴로운 게 아니라, 여전히 갖고 싶어서 괴로워. 난 정말 나쁜 놈이야, 윤영아.”
괜히 술 한 잔 더 하자고 한 게 아니구나 싶어서, 윤영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무슨 일이야, 재경아.”
“그러게. 이게 무슨 일일까? 이쯤 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인데 그래?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야?”
“응, 안 좋아, 윤영아. 이건 정말 안 좋아.”
재경의 눈가가 빨갰다.
늘 유쾌한 재경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윤영아. 내가…… 진짜 애썼거든. 정말 노력했는데…… 안 되려나 봐.”
“재경아…….”
“나는 아직도 나루를 좋아하나 봐.”
숨이 턱 막혔다.
생각지도 못했다.
재경은 그런 식으로 행동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재경이 나루를 좋아할 거라고는 상상해 보지도 못했다.
그저 내가 나루를 좋아하듯, 재경도 그러리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눈만 휘둥그레 뜨고 있는 윤영에게 재경은 담담하게 말했다.
첫눈에 반했다고, 하지만 지후가 나루를 좋아한다고 해서 포기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