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시한부 관계
2017.12.21.
“나는 널 좋아해.”
감정을 억누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지후는 예상했다는 듯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윤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윤영은 고개를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냉랭함이 무섭고 슬펐다.
용기를 낸 나의 고백이, 오랜만에 다시 하게 된 사랑이, 보답 받지 못하리란 확신이 들어서 아팠다.
“사실은 좋아해. 이런 말을 하면 네가 날 피할 것 같아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끝까지 감추려고 했는데.”
툭―
눈물이 떨어졌다.
“그런데 좋아.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툭―
투둑―
떨어진 눈물이 바닥에 짙은 얼룩을 남겼다.
“네가 나루를 좋아하는 거 알아. 아는데…… 그런데…… 그래도 옆에 있고 싶어.”
윤영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주 차가운 눈동자를 보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지후의 눈동자는 가슴에 알싸한 통증이 번질 정도로 어둡고 난처한 기색이 가득했다.
‘관심도 없는 애가 고백해서 귀찮아.’라는 감정이 아닌, 난감함이 그의 눈동자를 채우고 있었다.
“옆에 있게 해 줘. 애인 역할, 잘할 수 있어. 네가 성가실 정도로 캐묻고 그러지 않을게. 그냥 남들 보는 앞에서만 연인인 척할게. 앞으로는 단둘이 데이트하자고 조르지도 않을게. 그러니까…….”
“윤영아.”
지후는 더는 들을 수 없어, 윤영의 말을 끊었다.
그녀의 고백을 끝까지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절박하게 애원하는 윤영을, 그냥 보고 있기 힘들었다.
내 사랑하는 여자의 소중한 친구였다.
이 시간의 윤영은 전혀 모르는 일일지라도, 지후에게 윤영은 그랬다.
내 사랑하는 여자에게 할 프러포즈를 함께 고민해 주고, 내 사랑하는 여자와 말씨름을 할 때에 중재를 해 주는, 좋은 일, 궂은 일, 항상 함께해 주는, 그런 친구였다.
그래서 윤영이 자존심을 버리며 매달리는 모습을 보는 게 고통스러웠다.
“알겠어.”
이런 대답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윤영이 무슨 말을 하든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거절하면 윤영은 또다시 매달릴 것이다.
그런 성격이니까. 모든 일에 자신감을 가지고 행동하지만, 남자 관계에 있어서만은 자존심을 버리는 성격이니까.
옛 시간에서 봐오던 그런 윤영의 모습을, 당사자로서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후는 혼란에 빠져 있었고, 생각과 다른 대답을 하고 말았다.
윤영이 매달리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답을 들은 윤영의 표정이 밝아지는 모습에, 지후는 아차 했지만, 무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후는 마음을 다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루에게 연인이 생기면, 이 관계는 끝낼 거야. 이 관계는 그때까지 내 마음을 감추기 위한 관계니까.”
* * *
모여서 고기를 구워 먹고 술을 마시는 동안, 윤영과 지후는 보란 듯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윤영은 고기를 싸서 지후의 입에 넣어주고, 지후는 미소를 지으며 윤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누가 봐도 서로가 좋아서 죽을 것만 같은 커플의 모습이었다.
주위에 있던 몇 명이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냐?”라며 야유를 퍼부을 때마다 윤영은 수줍게 웃었다.
술자리는 점점 무르익어 갔고, 얼굴이 빨개진 선배 한 명이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다.
자리를 잡느라 어수선해진 틈을 타서, 나루는 펜션을 나왔다.
‘옛날에도 이랬지.’
옛 시간에서도 술자리 게임에 참여하지 않았다.
분위기에 취해 따라주는 술을 다 받아먹다 보니 취기가 올라왔고, 이러다가 정신을 놓지 않을까 싶어 바람을 쐬러 나왔었
다.
조금 걷고 있을 때, 지후도 따라 나왔고,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길을 함께 걸으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었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느릿하게 걸으며 대화하는 시간이 참 좋았다는 느낌은 남아 있었다.
옛 시간에서 지후와 함께 걸었던 길을, 나루는 다시 걸었다.
지금 이 옆에는 지후가 없지만, 그와 함께였던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다시 펜션으로 돌아왔다.
펜션 뒤쪽에는 자그마한 정원이 있었다.
손질하지 않아서 볼 만한 건 없지만, 지저분한 벤치가 하나 있었다.
나루는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곳일 뿐인데, 밤하늘은 서울과 완전히 달랐다.
청빛 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반짝거리는 광경이 아름다웠다.
한참 그러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 와서 앉았다.
“괜찮냐, 너?”
명진이었다.
나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디 갔던 거야? 너, 나가고 나서 바로 따라 나왔는데 안 보이더라.”
“그냥 좀 걸었어.”
이번에는 나루가 대답했다.
“옛 시간에서 지후와 함께 걸었던 길을, 다시 한 번 걸어봤어.”
“흐음.”
“그땐 지후랑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거든. 그런데도 같이 걷는 길이 참 좋았어. 손등이 닿을락 말락 스치는데, 조금 두근거렸던 것 같기도 해. 잊고 있었는데, 그 길을 다시 걷다 보니 생각나더라.”
나루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마도 나는 그때도 지후를 좋아했던 것 같아.”
“지후는?”
“글쎄. 모르겠어, 어땠는지. 나는 그런 쪽으로 눈치가 빠르지 않거든.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처음부터가 아니었을까 싶어.”
“처음부터?”
“응, 지후는 첫눈에 나한테 반한 게 아닐까?”
“…….”
“오늘 서바이벌이 끝나고 나서부터 계속 생각을 해 봤어. 그런데…… 처음부터가 아니었을까, 싶어. 처음부터, 지후는 나한테 참 잘해줬거든.”
“그러냐.”
“지후는 항상 나를 제일 먼저 챙겼어. 나를 신경 써 주고 배려해 줬지. 이 시간에서와는 다르게.”
“…….”
“이 시간의 지후는 내 기억이랑 다른 모습들을 자꾸만 보여. 나한테 너무 차갑게 굴기도 하고, 못된 소리를 하기도 하고. 얘가, 내가 알던 그 민지후가 맞나 싶을 때가 있어.”
“그래.”
“좀 전에만 해도…… 사람들 앞에서 윤영이랑 그렇게 연인인 티를 내는 거, 정말 지후답지 않은 행동이야.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더라, 정말.”
명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거 연기야, 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루가 명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팩폭이라는 말 알아?”
“어?”
“팩폭. 이 단어, 들어본 적 있어?”
명진은 당황했다.
물론 들어봤다. 몇 시간 전, 지후에게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모른다고 해야 하나?
아까 나루는 지후를 따라갔고, 혼자 돌아왔고, 윤영과 신경전을 펼쳤다.
그것만으로는 나루와 지후 사이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지후가 팩폭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는지 알 수 없기에, 명진도 뭐라 답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나루는 굳이 명진의 대답을 들을 생각은 아니었는지, 계속해서 말했다.
“한참 뒤에 이런 단어가 생겨. 팩폭. 지후는 유행어나 말줄임 같은 걸 좋아하지 않는데, 가끔 이 말은 쓰곤 했어. 그리고 아까, 지후가 이 말을 했어. 팩폭인 거 아니냐고.”
“나도 알아, 그 말.”
지후를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에, 명진은 말했다.
“응?”
“나도 그 말 안다고. 팩폭.”
나루가 명진을 돌아봤다.
무표정하던 나루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렇구나. 너도 아는구나.”
“그래. 그거 저번에 인터넷에서…….”
“너도 지후가 시간을 돌아왔다는 걸 아는구나.”
나루의 음성은 확신에 차 있었고, 명진은 자신이 어떤 변명을 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넌 나보다 눈치가 빠르니까 나보다 빨리 눈치챘겠다. 지후가 도와달라고 했니?”
“아니, 그게…….”
“핑퐁이라고 했다더라. 그거, 지후는 생각하지 못할 변명이거든. 핑퐁이라고 말한 걸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잡아떼는데, 그거 정말 지후답지 않아서 이상했거든. 네가 가르쳐 준 거구나, 그 방법.”
“나루야.”
“아, 그래. 네 반응을 보니까 더 확신하게 돼. 지후도 이 시간으로 돌아왔다는 걸.”
나루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맺힌 눈물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지후도 돌아온 거야.”
“…….”
“나와의 추억들을, 나만 아는 줄 알았던 추억들을, 지후도 기억하고 있는 거야. 맞지?”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명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루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나루의 허벅지로 뚝뚝 떨어졌다.
명진은 말없이 그녀의 모습을 지켜봤다.
한참 그러고 있던 나루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얼마나 반짝이는지, 그 찬란한 아름다움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지후가 시간을 돌아왔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그 사실을 감추려고 하고. 아마 앞으로도 쭉 그렇게 감추려고 하겠지.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는 증거를 찾을 거야. 지후도 이 시간으로 돌아왔다는 증거.”
지후도 이 시간으로 돌아왔다.
아까부터 나루는 확신하고 있었다.
지후가 아무리 잡아떼도 나루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남자.’라는 걸 확신하자마자,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핑퐁이라고 말했다며 잡아떼면서 민망해하는 걸, 귀찮게 하지 말라고 짜증내면서 미안해하는 걸. 나루는 알 수 있었다.
민지후였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민지후였다.
20살, 나를 사랑하기 전의 민지후가 아니라 32살, 나를 쭉 사랑해 온 민지후였다.
감격에 심장이 요동쳤다.
자꾸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의 목에 매달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품이 그리웠다고, 이 향기가 간절했다고 말하고 싶었
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후는 온 힘을 다해 나루를 밀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너는 아니?”
명진은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물었다.
“명진아, 넌 알아? 지후가 날 밀어내려는 이유.”
“응, 알아.”
명진이 자포자기한 듯 대답했다.
“이유가 뭐야?”
“너랑 비슷한 이유지, 뭐.”
“나랑 비슷한 이유…….”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두 사람,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 거야?”
둘의 뒤에서, 재경의 음성이 들려왔다.
* * *
지후와 윤영이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이는 게 불편했고, 도망치듯 나간 나루가 걱정이 됐다.
나루를 따라 나가고 싶었지만, 명진이 먼저 일어나 나가기에 앉아 있었다.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이 됐고, 위로해 주는 사람이 하나보다는 둘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어 밖으로 나왔다.
어디에 있는지 몰라 서성거리고 있는데, 명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냐, 너?”
그때부터 쭉 들었다.
믿을 수 없는 대화들을.
처음에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옛 시간이라는 둥, 이 시간이라는 둥, 팩폭이라는 둥.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나루와 명진은 당연하다는 듯 하고 있었다.
듣다 보니, 나루가 오랫동안 살다가 다시 과거로 돌아왔다는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믿어졌다.
그동안 나루가 보인 기행들과 나루가 재경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점과 절대로 재경은 안 된다고 밀어냈던 것들이,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동안 의문이었던 것들이 설명되는데도, 믿을 수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두 사람,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 거야?”
나루가 벌떡 일어났고, 명진은 재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루는 휘둥그레 뜬 눈으로 재경을 올려다봤고, 명진은 느릿느릿 일어나 한숨을 쉬었다.
“재경아…….”
나루의 음성이 떨렸다.
“너, 언제부터 엿들었냐?”
명진은 거침이 없었다.
재경은 엿들었냐는 말에 불쾌감을 느낄 정신이 없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처음부터. 전부 다.”
재경은 숨기지 않고 말했다.
나루가 ‘어떡하지?’라는 눈으로 명진을 돌아봤다.
명진은 고민하는 듯 고개를 잠깐 숙였다가 들더니, 나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모르겄다. 얘기 잘 해 봐라.”
“가지 마!”
“갈 거야. 술 마실래.”
명진이 나루를 놔두고 도망쳤다.
나루는 따라가고 싶다는 눈으로 명진의 뒷모습을 한참 보다가, 재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재경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루를 보고 있었다.
나루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재경아. 내가 하는 말들을, 너는 믿지 않을 거야.”
“그건 들어봐야 알지.”
“아니, 넌 안 믿을 거야. 너는 원래 이런 걸 믿는 애가 아니니까. 그래서 말 못 했어. 사실은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하고 싶었는데, 말할 수가 없었어.”
“왜 그렇게 확신해?”
“나는 널 아니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너에 대해 잘 아니까.”
“……시간을 돌아왔다는 게, 미래에서 여기로 돌아왔다는 거야?”
재경의 질문에 나루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게…… 타임머신이나, 그런 걸로?”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떻게?”
“그걸 잘 모르겠어. 나도 ‘어떻게’인지는 모르겠어. 그냥…… 우리가 32살이 되었을 때, 지후가 죽어. 지후가 죽고, 나는 울었어. 많이 울고 또 울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로 돌아와 있었어.”
“지후가 죽는다니…… 왜?”
“나 때문에.”
“너 때문에?”
“응, 날 구하려다가.”
“차에 치여서?”
“아니.”
나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칼에 찔려서.”
“칼에 찔리다니. 그게 무슨…… 대체 왜? 지후가 어째서?”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 나를 납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그 두 팀 중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어. 아마 날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겠지. 나를 죽이려고 했고, 지후는 나를 감쌌고, 나는 살아남았고, 지후는 죽었어.”
벤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본 자세로, 나루는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재경은 시간의 흐름을 잊고 나루의 이야기를 들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도 없는, 그러나 어째서인지 믿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나루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