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나를 좋아하지 마
2017.12.18.
탈락자들이 하나둘씩 내려오는 가운데, 나루는 가슴을 졸이며 지후를 기다렸다.
‘팩폭이랬어, 분명.’
어쩌면.
‘지후도.’
옛 시간에서.
‘이 시간으로.’
돌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왜 나는 그럴 거란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봤을까?’
당연히 나 혼자 돌아왔을 거라고만 여겼다.
지후까지 돌아왔을 거란 생각은 못 해 봤다.
‘그러고 보면.’
여러 가지로 이상한 점들이 많았다.
내가 몰랐던 20살의 민지후가 있구나, 라고 넘기기에는 너무 이상한 점들이 많았다.
지후의 행동도, 습관도 나루의 기억과 다를 때가 많아서 미심쩍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지후는 되게 잘하고 있나 보다.”
“그러게. 아직도 안 내려오네.”
뒤에서 윤영과 지영의 대화가 들려왔다.
“좋겠네, 김윤영. 남친이 든든해서.”
“응, 좋아. 지후랑 같이 다니면 그늘이 생겨서 눈이 부시지도 않고.”
“하긴, 지후가 키가 진짜 크긴 크지. 우리 학교에서 제일 크지 않나?”
“아마 그럴걸.”
윤영은 ‘내가 민지후 연인이야.’라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목소리의 크기를 보면, 나루가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성공이다.
거침없이 달리던 나루의 생각이, 윤영의 존재를 깨닫고 나서 멈췄다.
‘그렇다면 왜 윤영이랑 사귀는 거지?’
만약 지후가 옛 시간에서 돌아왔다면, 윤영과 사귈 리가 없었다.
옛 시간에서 윤영은 나루와 친자매처럼 친한 사이였다.
거짓으로 사귄다고 해도, 윤영을 선택할 리 없었다.
‘그리고…… 지후는 왜 날 밀어내려고 하는 걸까?’
제3자의 눈으로는 빤히 보이는 것이, 당사자가 되면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나루가 그랬다.
만약 이것이 다른 사람의 일이었다면, 나루는 명진이 그랬듯 대번에 지후가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루는 지후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를 단번에 떠올릴 수가 없었다.
고민하고 있을 때, 명진이 돌아왔다.
페인트 범벅이 된 명진에게, 나루가 달려갔다.
“명진아. 나랑 얘기 좀 하자.”
“나, 좀 씻고 오면 안 될까?”
명진이 자신의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응. 그래, 씻고 와서 얘기하자.”
“그래.”
나루를 피해 수돗가로 향하며, 명진은 한숨을 삼켰다.
지후에게 방법을 알려주긴 했지만 잘한 일일지 모르겠다.
지후의 눈빛이 조금만 덜 간절했더라면 도와주지 않았을 텐데.
‘지금 나루 태도를 보니, 지후가 돌아온 거라고 확신하는 게 분명하네. 저 정도면 내가 알려준 방법이 안 통할 수도 있겠어.’
그렇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그래, 뭐. 이렇게 해서 알려진다면, 그건 그것대로 운명이겠지.’
* * *
지후는 나루와 마주치는 순간을 최대한 미루기 위해 시간을 때우다가 느지막이 내려왔다.
내려오자마자 나루는 묻고 싶은 말이 많은 눈으로 지후를 쳐다봤지만, 윤영이 지후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통에 가까이 오지 못했다.
이 순간에는 윤영의 접촉이 고맙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서바이벌 게임을 마무리 짓고, 최종 승자에게 선물 증정을 하고, 다시 펜션으로 이동했다.
씻고 정리하고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몇 번이나 나루의 시선을 느꼈다.
‘이대로 넘어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하리라는 걸, 지후는 알고 있었다.
“저녁 먹기 전에, 피구나 한 판 하자.”
선배들의 말에, 모두 펜션 마당에 모였다.
팀을 나누는 동안, 지후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펜션 안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저녁 준비하던 선배가 지후를 보고 말했다.
“지후야, 너 가서 쌈장 좀 사올래? 깜빡하고 쌈장을 안 사왔네. 영수증 끊어 오고.”
“네.”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는데, 마침 잘됐다.
가서 시간 좀 때우다가 저녁 시간에 딱 맞춰서 돌아와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펜션을 나와서 슈퍼 쪽으로 걷고 있을 때였다.
“지후야.”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지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다. 분명 피구를 시작한 걸 확인했는데.
“어.”
대답을 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어디 가?”
“선배가 쌈장 사오래서. 슈퍼.”
“아, 같이 가.”
“피구하고 있었잖아.”
“응. 그렇긴 한데, 너 나가는 거 보고 따라왔어.”
“팀 나눠서 하는 거 아냐? 중간에 빠지면 안 되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나는 너랑 얘기 좀 해야겠어.”
지후를 따라잡은 나루가 그의 팔을 잡았다.
지후는 거칠게 뿌리치는 대신 걸음을 멈추고 나루를 돌아봤다.
“무슨 얘기?”
“아까 서바이벌 할 때.”
“응.”
“네가 그랬잖아. 팩폭이라고.”
“응?”
“팩폭한다고 했잖아.”
“그게 뭐야? 팩?”
나루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리다가 다시 확신을 가지고 고정되었다.
“분명 들었어. 네가 하는 말. 팩폭한다고 했잖아.”
“그게 뭔데? 언제?”
“내가 너한테 친한 친구 없다고 했을 때, 네가 너무 팩폭하는 거 아니냐고 그랬잖아.”
“아, 그거 그 말 아니었는데.”
“응?”
“핑퐁이라고 한 거야.”
“응?”
나루의 얼굴을 일그러졌다.
그녀의 눈동자에 ‘말도 안 돼.’라는 빛이 떠올랐다.
물론 지후도 그렇게 생각했다.
정황상 ‘핑퐁’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도 않고, 팩폭과 핑퐁 사이에는 어감에 큰 차이가 있었다.
―잡아떼.
그러나 방법을 알려준 명진은 그렇게 말했다.
―핑퐁이라고 해. 그리고 잡아떼. 끝까지 잡아떼. 그 방법밖에 없어.
“핑퐁이라니…… 그건 그 상황에 어울리는 말이 아니잖아.”
“아니, 내가 한 말을 네가 받아쳐서, 핑퐁이라고 한 건데. 핑퐁이 왔다 갔다 받아칠 때 쓰는 말이잖아.”
“말도 안 돼.”
나루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야말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는데. 팩폭이 뭔데 그래? 쓰면 안 되는 말이야?”
“정말 몰라서 물어?”
“하아.”
지후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네가 여기까지 따라와서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나루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지후는 그녀의 확신이 무너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된다.
“네가 필요 이상으로 친한 척하는 것도, 어지간하면 모르는 척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건 좀 그렇지 않냐? 나, 지금 윤영이랑 사귀고 있고, 걔가 가슴 아픈 거 보고 싶지 않아. 그런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걸 핑계 삼아서, 나랑 둘이 있으려고 하는 거. 정말 불쾌하다.”
불쾌했다.
지후는 이런 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불쾌하고 슬프고 아팠다.
그녀의 예쁜 얼굴이 상처를 받아 어두워지는 것을 보는 게, 가슴이 미어져서.
“거참, 불쾌하게 해서 미안해 죽겠네!”
나루가 바락 외쳤다.
지후는 생각지도 못한 나루의 외침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래, 내가 널 좋아하고, 단둘이 얘기 좀 하고 싶어서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따라왔다. 그게 뭐 어때서? 그게 아주 죽을죄야? 그렇게 한숨 팍팍 쉬면서 씅질 낼 만큼?”
“아니, 지금 화낼 사람이 누군데…….”
“누구긴 누구야, 나지!”
“…….”
“너는 어쨌든 나한테 사랑을 받는 입장이잖아! 나는 널 짝사랑하느라 가슴이 아픈 상황이라고. 그러니까 좀 귀찮아도 참으라고. 그걸 못 참아? 왜 씅질이야, 씅질이.”
“씅질은 네가 내는 것 같은데.”
“화낼 사람은 나니까! 넌 씅질 낼 자격 없어!”
“아, 그래. 그것도 자격이 필요하냐?”
“필요해. 넌 그냥 입 닥치고 내 사랑 받아. 나는 네가 날 밀어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네가 윤영이랑 사귄다고 해서 속상하고. 그러니까 나랑 대학 친구로서, 좀 귀찮고 싫어도 내 투정 받아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락바락 외치는 나루가 귀여워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밀어붙이는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지후는 하마터면 그녀를 끌어안을 뻔했다.
“가서 쌈장이나 사와. 난 아주 분노의 피구를 해서, 살아남는 마지막 승자가 될 테니까!”
다 쏟아부은 나루가 휙 돌아서서 펜션을 향해 탁탁탁 달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아, 진짜.”
웃음을 참는 지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아, 정말.”
지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귀여워 죽겠네.”
* * *
펜션에 돌아갔을 때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느꼈다.
윤영이 할 말이 잔뜩 있는 표정으로 나루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피구가 끝나자마자 다가온 윤영이, 펜션으로 돌아가려는 나루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연나루, 너 뭐야?”
“응?”
“너, 아까 왜 지후 따라갔어?”
“아, 그거. 지후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무슨 얘긴데?”
우리의 이야기.
나루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내 옛 시간에 대한, 민지후와 나의 이야기. 너는 모르는, 하지만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야기. 네게 들려주고 싶은, 그런 이야기.
“무슨 이야기인지는 말하고 싶지 않은데.”
나루의 말에 윤영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말하고 싶지 않다니. 나, 지후 여자 친구야.”
“응, 알고 있어.”
“네가 지후 따라가서 무슨 소리를 한 건지, 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나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한 거 아냐? 네가 내 남자를 건드리는데, 그걸 모르는 척할 순 없잖아.”
“글쎄. 내가 네 남자를 건드리려고 한 짓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잖아, 아직.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아니, 험악해진 것은 윤영뿐. 나루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자격을 따져야 하는 일이라면, 넌 나한테 그런 걸 물어볼 자격 없어. 내가 지후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싶다면, 지후한테 물어봐. 네가 자격이 있다면, 그 애가 알려주겠지.”
단조롭게 흘러나오는 나루의 말에, 윤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나루는 윤영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돌아섰다.
“너, 정말 최악이야.”
윤영의 목소리가 나루의 가슴을 때렸다.
“너처럼 남자만 보면 미쳐서 꼬리치는 애, 진짜 싫어.”
악의를 담은 음성이 사정없이 나루를 찔러댔지만, 나루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거 참 유감이네.”
나루가 작게 내뱉은 말을, 윤영은 듣지 못했다.
* * *
모멸감에 온몸이 떨렸다.
윤영은 펜션 입구에서 지후를 기다리며, 이를 악물었다. 안 그러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너무 애처럼 굴었어.’
보는 눈이 많은 상황에서는 조심했어야 했는데,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나루와 윤영의 다툼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어 대는지, 윤영은 알고 있었다.
―윤영이 쟤, 왜 저래?
―나루만 불쌍하네.
―같은 과 친구끼리 얘기도 못 하나?
―나루가 지후한테 관심 있을 리가 없잖아. 재경이가 그렇게 따라다니는데.
―오히려 나루는 명진이랑 분위기 좋은 거 아니었어?
―지후, 피곤하겠다. 김윤영, 집착 장난 아니네.
속삭이는 소리들이 귓속을 파고들어 왔다.
한 달 전이었다면, 나루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다.
나루가 기행을 하는 동안, 윤영은 인맥 관리를 잘 해왔다. 선배들에게도, 동기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심어줬다.
그런데 나루가 그걸 단숨에 바꿔 버렸다.
오늘 낮, 2학년 과대를 상대할 때의 나루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멋있었다.
20살 또래답지 않은 성숙함과 흔들리지 않는 강렬함이 인상적이었다.
‘싫어.’
나루가 싫었다.
지후와 사귀는 척하기로 한 지 며칠이 지났다.
지후를 만나 데이트를 하다가 간혹 나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럴 때면 지후의 표정이 달콤해졌다. 보는 사람의 입안이 달게 느껴질 만큼.
그래서 나루가 싫었다.
끔찍이도 싫었다.
저 멀리서 지후가 터덜터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윤영은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하고 지후에게 다가갔다.
“뭐 사오는 거야?”
“쌈장.”
“아, 되게 오래 걸렸네. 가게가 멀리 있어?”
“응, 길을 좀 헤맸어.”
“아까…… 나루가 너 따라 나가는 거 봤는데.”
“아아.”
“무슨 얘기했어?”
지후가 윤영을 돌아봤다.
“그걸 말해 줘야 하나?”
차가운 음성에 가슴이 지끈 아파왔지만, 윤영은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궁금할 거 없어. 별 얘기 아니니까.”
“별 얘기 아닌 거, 나도 좀 알자. 애인으로서 내 남자가 딴 여자랑 무슨 얘기하는지, 궁금할 수도 있는 거잖아.”
윤영은 일부러 농담조로 말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지후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윤영을 응시했다.
“넌 내 애인 아니야.”
지후가 냉정하게 말했다.
“네가 제안해 줘서 사귀는 척하고 있긴 하지만, 우린 진짜로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내가 누구랑 무슨 얘기를 하든, 너는.”
거기까지 말한 지후는 입을 다물었다.
윤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차디찬 음성이 심장을 후벼 파, 윤영은 간신히 참고 있던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지후의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는데, 좋아하는 이 감정 드러내고 싶지 않았는데.
그리고.
“하아.”
지후가 저렇게 귀찮아하는 표정, 보고 싶지 않았는데.
“관두자, 그냥.”
지후가 말했다.
“우리 이렇게 거짓으로 사귀는 거, 관두자. 너한테 상처주고 싶지 않아.”
지후는 가슴이 답답했다.
옛 시간이었다면 윤영을 울린 지후를, 나루가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윤영은 나루에게도, 지후에게도 그런 존재였다.
윤영의 마음을 알기에 더 차갑게 행동하지만, 그럴 때마다 윤영이 상처를 받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싫어.”
윤영이 절박하게 말하며 지후의 팔뚝을 잡았다.
“싫어, 그만두는 거.”
“윤영아…….”
“그냥 계속해.”
윤영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는 물어보지 않을게. 네가 누구랑 얘기를 하든 신경 쓰지 않을게. 그러니까…….”
“안 돼.”
“제발.”
“윤영아, 말했잖아. 나는 널 좋아할 일 없을 거야. 그리고 너도 날 좋아하면 안 돼.”
“나는…….”
널 좋아하지 않아, 라는 말은 이제 통하지 않으리라는 걸, 윤영은 깨달았다.
그 어떤 말을 해도,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보일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윤영은 지후를 올려다보며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