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내가 지켜줄게
2017.12.11.
순두부찌개와 두부제육볶음을 시켰다.
해물이 가득한 순두부찌개는 적당히 얼큰하고 맛있었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쯤이지?”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을 꺼낸 나루는, 폴더폰을 보며 피식 웃었다.
“왜 웃어?”
“아니, 그냥. 습관이라는 게 참 신기해서.”
“습관?”
“얼마 안 있어서 스마트폰이라는 게 나오거든.”
“그게 뭔데?”
“휴대폰인데, 음. 휴대폰 안에 컴퓨터가 담겨 있어. 인터넷도 할 수 있고, 채팅도 할 수 있고, 영화나 만화도 볼 수 있고.”
“별 게 다 나오네. 컴퓨터야 그냥 컴퓨터로 하면 되지, 그런 걸 쓰는 사람이 있냐?”
“깜짝 놀랄걸.”
모두가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다닌다는 걸, 지금의 명진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있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뭘 타야 목적지까지 빨리 갈 수 있는지. 처음에 이 시간으로 돌아왔을 땐, 그게 없어서 정말 불편하더라.”
“그런 걸 썼으면 그랬을 수도 있겠네. 하지만 컴퓨터로 다 할 수 있잖아.”
“느낌이 달라, 느낌이. 컴퓨터는 일부러 켜고 그 앞에 앉아야 하지만, 스마트폰은 손에 쥐고 누워서도 할 수 있고, 아무 데서나 편하게 볼 수 있으니까.”
“흐응.”
“처음엔 참 불편했는데 나중에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이 시간에 스마트폰이 없어서.”
“왜?”
“스마트폰은 영상 통화가 가능하거든.”
지후가 출장을 가거나 나루가 연구 때문에 바빠서 퇴근을 못 하는 날에는, 영상 통화를 하곤 했다.
자그마한 스마트폰 화면에 비치는 그의 얼굴은, 바로 앞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되게 하고 싶었을 거야. 매일 그걸로 지후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을 거야. 그래서 다행이야.”
아련한 미소를 짓는 나루를, 명진은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말했다.
“지후가 윤영이랑 진짜로 좋아서 사귀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 난.”
“과연 그럴까?”
“응, 과연 그래. 사실 너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다만 무서우니까 최악의 상황으로 가정하려고 하는 거지.”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어쨌든 사귀는 거잖아. 그 두 사람, 손 꼭 잡고 있는 거 봤지? 정말 꼴 보기 싫더라.”
조금은 장난기가 묻어 나오는 나루의 말에, 명진이 피식 웃었다.
“응, 꼴 보기 싫지.”
“옛 시간의 윤영이 마음을, 이제 와서는 확신할 수가 없어. 하지만 이 시간의 윤영이는 지후를 좋아하는 게 분명해.”
“그래, 눈에 보이게 행동하니까.”
“윤영이는 정말 사랑스럽고 귀엽고 좋은 애야. 남을 배려할 줄도 알고, 생각도 깊어.”
“글쎄. 내가 본 김윤영은 다른데.”
“그건 아마도 내가 이 시간으로 오면서 많은 것들이 헝클어져서 그런 걸 거야. 하지만 윤영이는 정말 괜찮은 애야. 아마 지후는 앞으로 그런 윤영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겠지.”
“흐응.”
“그러면 조금씩, 조금씩 윤영이에게 마음이 갈지도 몰라. 지금이야 아무 생각 없이 사귄다고 해도, 언젠가는.”
나루는 눈을 감았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의 애정 어린 눈빛과 상냥한 미소, 다정한 손길과 부드러운 말투.
오롯이 연나루라는 여자만을 향한, 그 크고 깊은 사랑.
“언젠가는 윤영이에게 말해 주게 되겠지.”
―네가 숨 쉬는 모습까지도 사랑스러워.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고.”
연나루의 것이었던 민지후가 김윤영의 것이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게 무섭고 아프고 싫었다.
“나는 참 이기적이고 못됐나 봐. 소중한 친구를 위해, 사랑을 양보하지 못하잖아.”
“그게 뭐, 양보해서 되는 문제냐. 양보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그건 결국 개인 가치관 차이지.”
“글쎄. 그럴까?”
“게다가 너야 김윤영을 좋은 친구라고 여기지만, 김윤영은 널 싫어하잖아. 그런 애를 위해 굳이 양보할 필요는 없지. 성인군자도 아니고. 그리고…… 네가 뭘 걱정하고 두려워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내 생각은 달라. 민지후가 김윤영을 좋아하게 되는 일은 없을 거야. 절대.”
명진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아하하하. 세상에 절대가 어디에 있어?”
“있잖아, 너한텐.”
명진이 힘없이 웃는 나루를 가리켰다.
“너한텐 절대가 있잖아. 너는 절대 성재경을 사랑하지 않을 거고, 넌 절대 민지후만을 사랑할 거잖아.”
나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니까 민지후한테도 절대라는 게 있을 수 있지.”
“하지만…… 나야 지후 연인이었고, 그 시간을 함께 걸었던 기억이 있으니까 그렇다 쳐도, 지후는 아니잖아. 지후는 나와 함께한 기억도, 추억도, 사랑도 없는데. 왜 걔한테 절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나루의 질문에 명진은 입을 다물었다.
‘얘는 진짜 눈치가 없구나.’
명진이 일부러 눈치챌 만한 발언을 했는데도, 나루는 지후가 자기처럼 시간을 돌아왔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옛 시간의 김윤영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김윤영은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으니까. 민지후도 보는 눈이 있을 거 아냐.”
“하지만 윤영이는 점점 매력적으로 변할 거야.”
“글쎄다. 그건 모를 일이지.”
* * *
“과자 먹을래?”
좌석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윤영이 지후에게 물었다.
“아니, 별로.”
지후는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말을 걸지 말아줬으면 좋겠다는 듯이.
윤영은 그런 지후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귀는 척하는 중이니까 너무 많은 걸 바라면 안 돼.’
집착하고 조급해하면 상대가 질리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후가 무심히 행동할 때마다 마음이 급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지후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나루 생각을 하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윤영은 아까 모두 모인 자리에서 지후의 시선이 자꾸만 나루에게로 향하던 것을 알고 있었다.
윤영이 “우리 사귀고 있어.”라는 말을 하는 그 순간에도, 지후의 눈동자는 나루를 향해 있었다.
‘좋겠다, 나루는.’
요 며칠 지후와 사귀면서 그를 향한 마음이 더 깊어졌다. 지후가 좋아지는 만큼, 나루가 미워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지후의 사랑을 받아서.’
지후는 윤영의 시선을 느꼈지만, 모르는 척했다.
흘러가는 차창 밖의 풍경이 눈에 익었다.
옛 시간에서 나루와 함께 이 거리를 드라이브한 적이 많았다.
언젠가 나루와 들렀던 가게가 보일 때마다 심장이 철렁, 철렁 내려앉았다.
조금 전에 봤었는데도 그녀가 그리웠다.
‘명진이가 위로해 주고 있겠지.’
윤영과 사귄다는 걸 밝혔을 때 나루의 표정은 꼭 울 것만 같았다.
명진이 나루의 옆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명진도 내년 이맘때는 나루의 곁에 없다.
그때에 나루를 위로해 줄 사람이 얼른 생겨야 할 텐데.
‘그나저나 그 둘은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건가?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나루를 태운 명진이 위험하게 운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걱정스러웠다.
지후의 기억으로 나루는 오토바이를 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무서워서 제대로 못 타고 오는 거 아냐?’
* * *
“더! 더 빨리 달리자!”
나루의 외침에 명진이 말했다.
“야, 여기서 어떻게 더 빨리 달려?”
“다른 오토바이들은 잘만 달리더라.”
“너, 오토바이 처음 타 보는 거 맞냐?”
“처음이고 아니고가 뭐가 중요해? 자주 타 본 너는 느려 터졌잖아!”
“느려 터지다니. 무서워서 엉엉 울지나 마라.”
명진이 더 속도를 냈다.
바람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는 느낌이 좋았다.
나루는 명진의 옆구리를 꽉 잡고, 볼을 스치는 바람을 느꼈다.
윤영과 지후가 사귄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유일한 내 것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그럼 나도 뺏을 거야!”
나루가 외쳤다.
“나도 김윤영한테서 민지후를 뺏을 거라고!”
“그래, 그래.”
“김윤영, 그 계집애. 내가 옛날에 얼마나 잘해줬는데! 실연으로 울 때마다 며칠 간 밤새서 같이 있어 주고, 욕해 주고 그랬는데! 이런 식으로 배신을 때리다니!”
“그래, 그래.”
“두고 봐! 뺏을 거야. 민지후는 내 거야. 늘 내 거였고, 앞으로도 내 거일 거야. 그러니까 내가 다시 가져올 거야!”
“그래, 잘 생각했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지후와 윤영이 알콩달콩한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리라는 것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결과가 무서워서 최악의 예상을 하기보다는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지후는 나루를 밀어내기 위해 윤영과 사귀는 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결국 지후는 그만큼 나루를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의리고 뭐고 다 필요 없는 이기적인 애니까.”
나루는 명진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윤영아. 나는 지후를 너에게 넘길 수가 없어.”
* * *
오토바이가 다닐 수 있는 길로 돌아서 오느라, 다들 모인 시간보다 2시간 늦게 도착했다.
워크숍이나 MT를 위한 독채 펜션 앞마당에, 모두가 모여 있었다.
앞에서 진행을 하고 있던 2학년 과대가 나루와 명진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거기 1학년들. 누가 마음대로 오토바이 타고 오래? 오늘 단체 행동인 거 몰라? 빠져가지고.”
명진과 나루가 살짝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시하고 1학년들 자리로 들어가려 했지만, 2학년 과대는 굳이 둘을 앞으로 불러냈다.
“시작하기도 전부터 멋대로들 굴면 안 되지. 엎드려.”
명진은 분란을 일으키기 싫어서 엎드리려 했지만, 나루는 2학년 과대를 빤히 응시했다.
“왜죠?”
“뭐?”
“왜 엎드려야 하는 거죠?”
“늦게 왔잖아, 니들. 단체 행동인데 따로 행동하고.”
“대학 MT가 단체 행동이라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요. 3, 4학년 선배들 중에서는 늦게 오는 사람들도 꽤 되는 걸로 알고 있고.”
“야, 선배가 엎드리라면 엎드리지, 뭔 말이 그렇게 많냐.”
진행을 도와주던 다른 선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루는 이 두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옛 시간에서도 늘 이런 식으로 후배들을 쥐 잡듯이 잡던 선배들이었다.
옛 시간에서는 나루도 처음이라서 당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그래 줄 생각이 없었다.
선배들에게 예쁨을 받아 봐야 아무 소용없고, 미움을 받는다고 불이익을 받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중고등학교 수련회도 아닌데 이러는 게 이상해서 그러죠. 다 같이 재미있게 놀자고 온 MT인데, 기합 받고 그러면 누가 MT를 오겠어요?”
나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2학년 과대의 표정이 구겨졌다.
“하, 쒸벌. 야, 너 뭐야? 너, 1학년 수석인가 그렇지? 성적 좀 좋다고 선배님 말씀이 말 같지가 않냐? 엉?”
“사람은.”
나루의 입가에 우아한 미소가 번졌다.
“할 말이 없을 때 욕을 하죠. 저는 1학년 수석이 맞고, 성적 좀 좋다고 선배님 말씀을 말 같지 않게 생각하진 않아요. 그리고 지금 선배님의 그 말씀은 주제에서 벗어난 것 같고요. 저는 이 MT, 다 같이 즐겁게 놀자고 온 게 아니냐고 물었는데, 그에 대한 대답은 안 해 주시고 다른 말씀을 하시니까 당황스럽네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고고하게 제 할 말을 하는 나루의 모습에, 모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2학년 과대는 그렇지도 않은지, 험악한 욕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자칫 잘못하면 한 대 칠 분위기였는데, 2학년 중 누군가가 말했다.
“야, 그만 좀 해라. 걔 말이 맞지, 뭐. 놀러 온 건데, 분위기 완전 더러워졌네.”
동기에게까지 막말을 할 수는 없는지, 2학년 과대는 얼굴이 벌게졌다.
“그래, 그만해. 1학년 애들 잡으러 온 거 아니잖아. 1박 해야 하는데 재미있게 놀다 가자.”
“맞아, 괜히 애들 괴롭히지 말고.”
여론이 나루에게 호의적이 되자, 2학년 과대는 화가 난 듯 마이크를 땅에 집어던졌다.
“하, 썅. 그럼 니들끼리 쳐 놀든가. 난 갈 거니까.”
어린애 같은 대처에 당황한 2학년들이 잡을 새도 없이, 2학년 과대는 펜션 마당을 나가 버렸다.
“아, 쟤는 진짜 왜 저러냐.”
“저런 애들은 훈장 차면 안 되는데.”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때, 지민이 앞으로 나와서 바닥에 떨어진 마이크를 집어 들고, 특유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간 사람은 간 사람이고, 우린 놀아야지. 돈도 냈는데! 30분 후에 서바이벌 게임 시작하니까, 우선 팀부터 정하자.”
* * *
서바이벌 게임은 옛 시간에서도 했었다.
그땐 나루와 지후가 한 팀이었고, 재경이 다른 팀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나루가 재경과 한 팀이 되고, 지후와 명진이 같은 팀이 됐다.
“나루, 나랑 팀 바꾸자.”
서바이벌용 옷을 입는 나루에게, 명진이 말했다.
“응? 왜?”
“나, 민지후랑 한 팀 하기 싫어서.”
명진의 빤한 수작에 지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그렇게 싫으면 윤영이랑 바꿔.”
지후의 말에 근처에 있던 윤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내가 바꿔줄게.”
“아니, 싫은데. 나는.”
명진이 옆에서 총을 점검하던 재경의 팔짱을 끼었다.
“이놈이랑 같은 편 하고 싶거든.”
재경은 놀란 듯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라면 내 뒤를 맡길 수 있을 것 같다.”
“응, 나만 믿어. 내가 지켜줄게.”
“나도 네 뒤를 지켜줄게. 우리 끝까지 살아남자.”
나루는 황당하단 표정으로 둘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우린 원래 친했어. 그치, 성재경?”
“응, 네 그 머리를 처음 봤을 때부터 너라면 믿고 내 뒤를 맡길 수 있다고 생각했지.”
아주 쿵짝이 잘 맞았다.
누가 봐도 나루와 지후를 한 팀으로 해 주려는 둘의 수작에, 윤영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아무튼 나랑 바꿔, 연나루.”
“아니, 뭐. 바꾸는 건 상관없는데.”
“상관없으면 바꾸면 되지. 그럼 난 이쪽 팀이다. 선배님들, 잘 부탁드려요.”
나루가 뭐라 하기 전, 명진이 선수를 쳤다.
나루는 입술을 비쭉거리며 지후 쪽 팀으로 가려고 했는데, 윤영이 나루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나루야, 나랑 팀 바꿔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