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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46화 (46/93)

46화 우리 사귀기로 했어요

2017.12.07.

“말했잖아. 나는 나루를 좋아해. 너랑 사귀는 일은 없어.”

지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롭게 윤영의 심장을 찔렀다.

하지만 윤영은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알아. 잘 알아들었어. 내 말은, 사귀는 척하자는 거야. 그러면 네가 더 편하지 않겠어?”

지후는 말없이 윤영을 응시했다.

지후가 속마음을 읽는 것만 같아서 민망했다. 윤영은 시선을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

“날 이용해도 돼. 어차피 대학 내에서 누구 사귈 생각도 없었고, 나중에 밖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는 너한테 말할 테니까. 그때까지는 나랑 사귀는 척해. 그럼 재경이도, 나루도 널 신경 쓰지 않을 거 아냐.”

말이 너무 빠르지는 않았을까.

목소리에 너무 들뜬 기색은 없었을까.

지후의 대답이 들려오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윤영의 머릿속에는 오만 가지 생각이 떠돌았다.

“고마운 제안이지만, 내가 널 좋아할 일은 없을 거야. 이런 일을 한다고 해서…….”

“어휴. 너, 너무 자의식 과잉 아니니? 내가 널 좋아해서 이런 제안을 하는 것 같아? 너랑 재경이 싸우는 거 보고 싶지도 않고, 네가 왜 그렇게까지 나루랑 재경이를 이어 주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게 절박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친구로서 도와주고 싶은 것뿐이야.”

“친구로서.”

“그래, 친구로서.”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지후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

지후는 자꾸 ‘절대’를 붙이지만, 윤영은 사람 마음에 ‘절대’란 없다고 믿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데이트를 하다 보면 정이 들고, 정이 들다 보면 애정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렇게 선을 긋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보다, 연인인 척하면서라도 지후와 가까운 곳에 있고 싶었다.

“그래, 그럼.”

지후의 대답이 들려왔을 때, 윤영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다만 나는.”

“날 좋아하는 일 없을 거라고. 그 말, 잘 알았으니까 더는 안 해도 돼. 애들 있는 데서 연기나 제대로 하셔. 나도 그럴 테니까.”

“그래.”

“오늘 저녁에 만나고, 내일 사귄다고 얘기하면 되겠지?”

“응.”

“알겠어. 그럼 들어가자.”

“그래.”

먼저 돌아서서 걸어가는 지후의 뒤를 따라 걸어가며, 전에 꿨던 꿈이 떠올랐다.

나란히 앉아 행복하게 웃던 지후와 나루.

또다시 꿈을 꾸게 된다면, 나루의 자리에 자신이 앉아 있기를, 윤영은 간절히 바랐다.

* * *

실험실로 돌아온 윤영은 즐거워 보였다.

지후는 여전히 무표정이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재경은 지후 쪽으로 시선도 보내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나루는 답답했다.

옛 시간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

다툼도, 질투도, 미움도, 그들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간혹 생기는 의견 충돌은 대화를 하며 풀었고, 어색함도 하루를 넘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 시간은 정말로 엉망진창이다.

‘미래를 알면 좀 더 쉬울 줄 알았는데.’

인간관계도, 삶도 더 쉬워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어렵다.

“오늘 학과 전체 모임 공지 봤어?”

눈치를 보던 선미가 침묵을 깨뜨렸다.

“아, 봤어. 이따 6시에 소강당이었나?”

재경이 대답했다.

“응, 다들 갈 거지?”

“가야지.”

“응, 나도.”

“난 못 가. 선약이 있어서.”

지후가 말했다.

“나도. 나도 오늘 선약이 있어.”

윤영이 들뜬 목소리로 말하며 지후를 흘끗 쳐다봤다.

윤영의 행동은, ‘나 지후랑 약속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뭐야, 너네 둘이 만나는 거 아냐?”

아니나 다를까.

선미가 콕 집어 지적했다.

윤영이 얼굴을 붉혔다.

“아니, 뭐. 그런 거 아냐.”

“아니긴. 둘이 만나는 거 맞네. 뭐야, 아까 나가서 무슨 얘기를 했던 거야?”

선미가 분위기 풀기에 좋은 소재라고 생각했는지, 둘의 사이를 물고 늘어졌다.

나루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지후 쪽을 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지금 지후를 보면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싫어. 나, 네가 윤영이랑 단둘이 만나는 거 싫어.’

지금 지후는 내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지후는 내 것이었다.

저 손도, 머리칼도, 갸름한 눈매와 오뚝한 코도. 남김없이 내 것이었다.

윤영이 아무리 친한 친구였더라도, 지후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시간은 옛 시간이랑 달라.’

너무 다르다.

재경과 지후의 관계도, 나와 재경의 관계도, 그리고 나와 지후의 관계도.

그렇기에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이 언젠가는 내게로 향하리라는 것을.

내가 숨 쉬는 모습마저 사랑한다는 그의 말을 믿고 싶지만, 그것은 옛 시간에서의 말이었다.

이 시간에서의 지후는 윤영이 숨 쉬는 모습마저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시간의 목적은 오롯이 지후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12년 후, 지후만 살아날 수 있다면 나를 사랑해도,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지만 난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지후를 보고 싶지 않았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지후의 12년 후를 원하지 않았다.

내 가장 사랑하는 남자가 내 가장 친한 친구와 연인이 되어 사랑을 나누는 것 따위,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나루는 아랫입술을 더 세게 깨물었다.

‘그래도 지후만 살아간다면.’

나루는 고개를 들어 지후를 응시했다.

지후는 무어라 말하고 싶은 표정으로 나루를 지켜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나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후는 알고 있었다.

말이 없어도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을 만큼, 그녀를 사랑하니까.

꽉 깨문 아랫입술이 안타까웠다.

‘아니야, 나루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그리 말해 주고 싶었다.

‘알잖아. 내 마음에는 너만 있는 거. 하지만 나루야. 나는 12년 후에 죽어. 지금 우리가 사랑하게 되면, 너는 12년 후에 또다시 상처를 받고, 또다시 혼자가 될 거야.’

이 시간으로 돌아온 후 늘 꿈을 꾼다.

지후가 죽은 후, 텅 빈 집에 혼자 앉아 오열하는 나루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내 죽음보다 홀로 남은 그녀의 외로움이 더 걱정이었다.

작은 몸을 떨며 흐느끼는 그녀를 안아 줄 수 없어서, 괜찮을 거라고 말해 줄 수 없어서. 그래서 울다가 잠에서 깨곤 했다.

지후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

나루가 혼자 울지 않는 것.

그래서 이 순간에,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응, 오늘 윤영이랑 선약이 있어.”

* * *

생명공학과 학생회 임원들이 나와서 1학기 계획에 대해 브리핑을 하는 동안에도, 나루는 지후의 그 냉정한 눈빛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나루에게는 약간의 감정도 없는 차가운 눈빛과 밀어내는 듯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음가짐을 바꿔야 한다고, 이 상황도 즐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남자가 나를 거부할 때 느껴지는 아픔은, 이성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윤영이, 걔. 좀 웃기지 않아?”

옆에 앉아 있던 선미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응?”

“전체 과 모임도 빠지고 지후 만나러 간 거잖아.”

“그렇게 따지면 지후도 웃기는 거지, 뭐.”

“아니, 그래도. 윤영이 걔, 지후한테 전혀 관심 없는 것처럼 굴었으면서, 이제 와서 웃기잖아.”

“수줍어서 그랬을 거야. 호감 표현하는 게, 누구한테나 쉬운 일은 아니잖아.”

나루의 부드러운 답변에, 선미는 입술을 비쭉거렸다.

“윤영이가 널 되게 싫어하는 거 알기는 해?”

“내가 그럴 만하게 행동했나 보지. 너도 나 싫어하잖아.”

나루의 말에 선미가 얼굴을 붉혔다.

“아니, 그런 거 아냐. 내가 널 왜 싫어해.”

“아니라면 다행이고.”

상냥하게 웃는 나루를, 선미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쳐다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재경과 지후에게 관심을 받는 나루가 싫었는데, 오늘 얘기를 나눠 보니 그렇게까지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묘하게 어른스러워서 나이 차가 한참 나는 언니와 대화를 하는 느낌이었다.

“저기, 내가 널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으면 미안해. 나, 진짜로 널 싫어하는 거 아냐.”

“응, 알았어. 나도 너 안 싫어해.”

나루가 선미를 돌아보며 웃었다.

커다란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히는 모습은 조금 신비롭게 보이기까지 했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재경은 속닥거리는 나루와 선미를 지켜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후랑 나루가 나한테 감추는 게 있어.’

윤영과 선약이 있다고 하는 뻔한 수작에도 화가 나지 않았던 이유는, 둘 사이에 무언가 있는 것 같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재경에게 말할 수 없는 ‘무언가’ 때문에, 지후가 그토록 절박하게 자신의 마음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 ‘무언가’를 알아내야만 했다.

‘그게 뭘까?’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지후와 나루가 과거에 관계가 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둘은 자꾸 망상이라고 말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누가 그런 망상을 입 밖으로 내? 게다가 아까 지후 표정은 정말…….’

지후는 순식간에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그 잠깐 흔들리는 감정을 재경은 분명히 목격했다.

그것은 아주 깊고 진해서, 함부로 끼어들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대체 언제 알고 지냈던 거야? 지후가 나루랑 만났었다면, 분명 나한테 들켰을 텐데.’

학교도, 학원도 같이 다녔다.

재경이 불시에 찾아가도, 지후는 늘 집이나 독서실에 있었다.

오히려 재경이 이리저리 돌아다녔지, 지후는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예전의 사건이 떠올랐다.

―커피, 아니, 커피 안 마시지? 코코아 타줄게.

나루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재경이 추가 합격을 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루가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어. 그건 지후에게 들었기 때문인가? 그럼 그런 것들은 언제 얘기를 해 준 거지? 혹시 채팅 같은 걸로 만난 사인가?’

그럴 리 없다.

그렇다면 지후가 나의 수면제 운운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의문점만 깊어졌다.

재경은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 있는 명진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명진은 지루한지 반쯤 누운 자세로 하품을 참고 있었다.

‘얘는 알고 있는 것 같았어. 왜 내가 모르는 지후와 나루의 일을, 얘는 알고 있는 거지?’

명진이 재경의 시선을 느낀 듯 재경을 돌아보더니, 씩 웃었다.

“왜? 지후랑 이혼하고 나랑 만나고 싶냐?”

‘왜 이런 실없는 놈이 나보다 아는 게 많은 거지?’

재경은 혼란스러웠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평온한 삶이었다.

이해되지 않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이해를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흘러가는 모든 상황이 부자연스럽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상황을 뒤섞어 놓은 것처럼.

* * *

“응, 우리 사귀기로 했어.”

윤영이 환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한 것은, 생명공학과 전체 MT를 가는 날 아침이었다.

안 그래도 윤영과 지후가 유독 붙어 다닌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다.

점심도 같이 먹고, 집에 갈 때도 함께 돌아갔다.

그래서 다들 ‘둘이 사귀는 거 아냐?’라고 수군거리고 있던 참에, 두 사람이 교제 사실을 밝힌 것이다.

나루는 이런 상황이 오리라는 걸 예감하고 있었지만, 막상 손을 꼭 잡고 있는 둘을 보니 심장이 자근자근 저미는 통증이 일었다.

“뭐야, 언제부터?”

“진심? 진짜야? 정말?”

“우와, 대박. 축하해!”

“몇 호 커플이지? 준호랑 유미 다음이니까, 4호 커플인가?”

모두의 축하를 받는 윤영의 얼굴은 태양보다도 밝았다.

나루는 도저히 웃을 기분도, 무심한 표정을 가장할 기분도 아니라서 먼저 버스에 타려고 했다.

슬그머니 돌아서는 나루의 어깨를, 명진이 톡톡 두드렸다.

“오토바이 타고 갈래?”

“뭐? 야, 넌 아직도…….”

“어차피 나 죽을지도 모르는 날까지는 좀 남았잖아. 그 전에 실컷 즐겨야지.”

“명진아, 제발 좀 타지 말라는 건 타지 마. 저번에 지후, 물에 빠져 죽을 뻔했잖아. 너도 그렇게 막 행동하다가 더 빨리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쩔래?”

“지후가 죽을 뻔한 게 꼭 걔가 12년 후에 죽는 거랑 관계된 건 아닐 수도 있잖아. 그냥 늘 일어나는 사고 중 하나일 뿐이야.”

“그렇다면 더 안 되지. 오토바이는 위험하잖아.”

“천천히 주의해서 달리면 안 위험해. 타고 가자. 저거 계속 지켜볼 기분 아니잖아.”

명진이 턱으로 윤영과 지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루는 그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지후는 이쪽을 쳐다볼 기미가 없었다.

아마 앞으로 쭉, 그의 시선을 마주치는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가슴이 먹먹했다.

“응, 그래.”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들었다.

“타자, 오토바이.”

“어디 가?”

명진을 따라가는 나루에게, 재경이 물었다.

“명진이랑 오토바이 타고 가려고.”

나루의 말에, 재경은 못마땅한 듯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심해서들 와라.”

“응, 이따 봐.”

재경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명진의 오토바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토바이를 타는 건 처음이었다. 옛 시간에서도 타 본 적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무서웠다.

하지만 명진의 집에 들러 헬멧을 하나 더 들고 나와 머리에 쓰고, 다시 달리기 시작할 무렵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명진은 약속대로 천천히, 조심하면서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가 엉덩이가 아프다고 했더니, 명진이 근처 가게 앞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오토바이에서 내려 헬멧을 벗었다.

“너, 머리 눌렸다.”

명진이 나루의 머리를 가리키며 웃었다.

“고마워.”

“뭐가? 널 놀리는 게?”

“아니, 내 마음 신경 써 줘서.”

“별말씀을.”

명진이 상냥하게 말했다.

“멈춘 김에 밥이나 먹고 갈까?”

명진이 밥집을 가리키며 물었다. 두부 요리 전문 식당이었다.

“너무 늦어지지 않을까?”

“일찍 가 봐야 넌 어차피 한 번 겪은 일이잖아. 뭐, 대단한 거 있어?”

“넌 못 겪어봤잖아.”

“나야, 뭐. 애초에 가는 이유 자체가.”

거기까지 말하고 명진은 입을 다물었다.

“이유가 뭔데?”

나루가 물었지만, 명진은 씩 웃을 뿐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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