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나랑 사귀자
2017.12.04.
“나루야, 너. 원래 지후랑 아는 사이였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나루는 입을 꾹 다물고 재경을 응시했다.
“옛날에 이랬다니. 지후랑 언제 아는 사이였는데?”
나루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재경이 다시 물었다.
나루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말했다.
“아니, 그냥. 꿈을 좀…….”
“꿈?”
“응, 그냥. 꿈에서.”
“꿈 얘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지후랑 언제 알던 사이였어? 둘이 원래 알던 사이라는 거, 지후 본인도 알아?”
몰아붙이는 어조는 아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듣고 싶다는 듯, 재경은 단호했다.
‘난 바보야.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을 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 시간부터 동방에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에, 당연히 명진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아니, 그게…….”
“아, 그래. 지후도 아는 거겠지. 수면제였다니……. 그 정도면 긴밀한 관계였다는 건데. 나는, 들은 적이 없는데. 아무것도.”
재경이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재경과 지후는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
나루와 지후 사이에 접점이 있었다면, 그걸 재경이 모를 리가 없었다.
큰일 났다.
달칵―
그때, 동아리방 문이 열리고 콜라를 손에 든 명진이 들어왔다.
“오, 재경. 너, 지후랑 별거 중이라며?”
명진이 유쾌하게 말했다.
재경이 인상을 찡그렸다.
“별거라니. 그런 거 아냐.”
“아니긴. 지후가 상심이 크더라. 적당히 하고 들어가. 별거 길어지면 이혼인 거 알지?”
“아, 왜 다들 별거네, 이혼이네 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라고.”
“그럼 어떤 건데?”
다행이다.
명진 덕분에 이야기의 주제가 방향을 틀었다.
“넌 몰라도 돼. 이건 지후와 내 사이의 문제니까.”
“크흐. 둘이 진짜 너무 열렬하네.”
“열렬이라니. 너, 단어 선택 진짜 이상하다. 남들이 들으면 우리 둘이 사귀는 줄 알겠네.”
“거의 그 급이잖아. 둘이 찰싹 달라붙어서 다니는 걸 보면.”
“어, 그래서 이제 좀 안 그러려고. 나 때문에 지후가.”
재경이 나루 쪽을 흘끗 보며 말을 이었다.
“여자를 못 사귀는 것 같아서.”
“뭐, 그게 꼭 너 때문이겠냐. 친한 친구 있는 놈들이 다 애인 못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넌 모르는 그런 게 있어. 그나저나, 나루 너는 지후랑 언제 어떻게 알던 사인데?”
망했다.
대화의 주제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루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응? 지후랑 나루랑 뭘 어떻게 알던 사인데?”
명진이 끼어들었다.
“나루가…… 옛날에 지후가 항상 수면제였다고 그래서.”
재경의 대답에, 명진이 눈을 부릅뜨고 나루를 노려봤다.
‘이 멍충아. 너, 얘한테 뭔 소리를 한 거야?’
‘넌 줄 알았다고!’
‘넌 애가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을 때가 있어! 과 수석이면 뭐해?’
‘아, 그놈의 과 수석 타령 좀 하지 말라고!’
나루와 명진 사이에 무언의 대화가 오고 가는 동안, 재경은 점점 미심쩍어졌다.
물론 나루와 지후가 이전에 알았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눈을 감고 중얼거리던 그녀의 음성이 몹시 애달파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둘 사이에 무언가 있는데도 재경 때문에 갈라서야만 했던 거라면, 자신을 더욱더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대체 언제? 지후는 늘 나랑 붙어 있었는데.’
지후가 아무리 감추려 했다고 해도, ‘내 수면제야.’를 운운할 만큼 긴밀한 사이였다면 완전히 감추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나루를 만나러 가거나 해야 했을 텐데,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권태기며, 별거며, 이혼이며 따위의 소리를 들을 정도로, 둘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망상이야.”
재경의 고민을 뚫고, 명진의 단호한 음성이 들려왔다.
재경은 멍한 표정으로 명진을 돌아봤다.
“뭐?”
“망상이라고, 그거.”
“망상이라니?”
“너도 알지? 얘가 민지후 좋아하는 거.”
“어, 알아.”
“그래서 망상하는 거야. 과거에 이랬네, 저랬네, 하고. 맞지?”
명진이 나루를 보며 물었다.
나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좀 상상력이 풍부하거든. 지후랑 연인이었다면 이렇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한 거였어. 내가 좀 여기가 정상이 아니잖니.”
나루가 자기 관자놀이를 가리키며 어색하게 웃었다.
더 수상하다고, 재경은 생각했다.
다른 경우였다면 믿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까 나루의 음성은 정말로 애달팠다.
그 애달픔이 망상에서 비롯된 것 같지는 않았다.
재경은 도저히 끼어들 수 없는, 강렬하고 짙은 무언가가 존재했다.
의문이 남아 있지만,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데 계속 캐물을 수도 없었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의문이 개운하게 가시지 않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셋은 2교시 수업을 듣기 위해 강의실로 향했다.
마침 1교시가 끝났는지 화장실에 가려고 나오는 과 학생들이 보였다.
재경은 멈칫했다.
아직 지후를 마주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절교를 한 것도 아닌데, 얼굴을 보고도 못 본 척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직은 웃으면서 인사를 할 기분이 아니다.
그래서 머뭇거리는데, 명진이 뒤를 돌아봤다.
“뭐 하냐, 안 오고.”
“아,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왜? 지후 보기 껄끄러워서?”
재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놈은 뭔데 이렇게 눈치가 빠른 거지?
“둘이 정말 무슨 일 있는 거야?”
나루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좀. 아무튼 먼저들 들어가.”
“적당히 해라. 부부 싸움 칼로 물 베기라는데, 어차피 화해할 거, 계속 질질 끌어 뭐하냐?”
“부부 싸움 아니라고.”
왜 꼭 이런 순간에 당사자가 등장하는 걸까.
강의실을 나오던 지후가 이쪽을 돌아봤다.
흠칫한 재경이 뒷걸음질을 치려는데, 지후가 성큼성큼 다가와 재경의 손목을 잡았다.
“성재경.”
“이거 놔.”
“놓긴 뭘 놔. 나랑 얘기 좀 하자.”
“할 얘기 없어.”
“난 있어.”
“난 없다고.”
“난 있어. 얘 좀 데려간다.”
지후가 명진과 나루를 돌아보며 말했다.
토라진 여자 친구를 데려가는 남자 친구 같은 지후의 모습에, 명진과 나루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멀어지는 지후와 재경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명진이 말했다.
“야, 연나루. 너, 잘 생각해 봐라. 너랑 민지후, 진짜 사귀었던 거 맞아? 쟤들 둘이 연인이었던 것 같은데?”
“어, 나도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 중이야.”
* * *
키가 큰 지후는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띄었다.
그런 지후가 재경의 손(정확히 말하면 손목이지만)을 잡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걸어가는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쟤들 둘이 사귀는 거야?’
‘둘이 너무 붙어 다닌다 싶었어.’
그런 시선을 보내거나 말거나, 지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곳까지 재경을 끌고 갔다.
“뭐 하는 거냐, 이게.”
재경이 잡힌 손목을 빼내며 툴툴거렸다.
“너야말로 뭐 하는 건데?”
“내가 뭘?”
“왜 갑자기 집을 나간 거야?”
“그냥 좀 떨어져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해.”
“괜한 소리 하지 말고 집에 들어와.”
“싫어.”
“들어오라고. 거기서 통학하기 힘들잖아.”
“할 만해. 아, 오늘 아침에 너네 누나 만났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아니면 내가 나갈 테니까, 네가 여기 있든가.”
“됐어. 그런 식으로 양보할 거 없어.”
“양보라니.”
“양보하잖아, 항상.”
재경이 지후를 노려봤다.
“양보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 양보하잖아.”
“양보하는 게 아니라 상관이 없는 거야. 있어도, 없어도. 먼저 해도, 나중에 해도. 나한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
“나루도?”
지후의 말을 끊으며, 재경이 물었다.
“나루도 너한테 중요한 문제가 아냐?”
“여기서 나루가 왜 나와?”
“나는 걔가 제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니까. 나한테도, 너한테도.”
“틀렸어. 너한테나 그렇지, 나한테는…….”
“네가 수면제래.”
“뭐?”
“나루가 그러더라. 네가 자기 수면제였다고. 네가 있으면 잠이 잘 왔었다고. 그런데 네가 없어서 잠을 못 자겠다고.”
나루에게 듣지 못한 진실을, 이 기회에 지후에게 듣자 싶어서 꺼낸 말이었다.
이 말이 지후에게 큰 파동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
‘왜?’
다음 순간 지후에게 벌어진 변화에, 재경은 당황했다.
언제나 흔들림 없는 지후의 눈동자가 일렁, 움직이는가 싶더니.
‘왜 눈물이…….’
눈물이 고였다.
고인 눈물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재경은 똑똑히 목격했다. 착각 따위가 아니었다.
“너, 왜?”
재경은 지후의 팔뚝을 세게 붙잡았다.
“너, 왜 울어?”
“울다니.”
지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적 없어.”
“울었잖아. 너, 대체 뭐야? 너랑 나루, 무슨 사이야?”
“아무 사이도 아냐.”
“아무 사이도 아닌 게 아니잖아. 나루는 자기 망상이라고 하는데, 그럴 리가 없어. 나, 바보 아냐. 너, 나루랑 언제 어떻게 만난 건데? 왜 나한테 감춘 건데? 어째서…….”
“망상이야.”
지후가 말했다.
“모두 나루의 망상이야. 나랑 나루 사이에 연결점은 없어. 있다면 성재경, 너 하나겠지.”
“나를!”
재경이 그대로 지후를 밀어붙였다.
턱―!
지후의 등이 벽에 닿았다.
재경은 그 상태로 지후를 노려보며 씹듯이 내뱉었다.
“무시하지 마, 민지후. 내가 바보야?”
“무시하지도 않고, 바보라고도 생각 안 해.”
“그럼 피하지만 말고 솔직하게 좀 말해 달라고!”
분노에 찬 재경의 눈동자를, 지후는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재경은 늘 여유가 있고 다정하고 유쾌했다.
하지만 지후가 이 시간으로 돌아온 후, 재경은 달라졌다.
휘둘리고, 무엇에 휘둘리는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재경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사실은 재경아. 사실은 말이야.
나는 12년 후에 죽어. 그래서 나루를 사랑할 수 없어.
내가 나루를 사랑하면, 나루가 내게 익숙해지면, 지난 시간의 아픔을 또다시 반복하게 될 거야.
그래서 네가 나루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해.
나루의 수면제 역할을, 나루가 기댈 나무의 역할을, 네가 해 주었으면 해.
‘하지만 믿지 않겠지.’
재경은 이런 걸 믿지 않았다.
바보 취급한다고 더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피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성재경. 나는 나루에 대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지후는 생각을 바꿨다.
재경과 멀어지는 편이, 재경과 나루의 사이가 가까워지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떨어져서 지내고 싶다면 그렇게 해. 피하고 싶다면 계속 피하고. 나는.”
지후는 여전히 팔뚝을 잡고 있는 재경의 손을 떼어 냈다.
“정말 할 말이 없으니까.”
* * *
물리학 실험을 하는 동안, 재경과 지후 사이에 찬바람이 불었다.
같은 조인 선미와 나루, 윤영은 둘의 눈치를 보느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야, 니들 때문에 분위기 엿 같잖아.”
명진만 당당하게 둘을 지적했다.
“우리가 왜?”
재경이 물었다.
“우리가 왜? 부부 싸움을 하더라도 너무 티는 내지 말아야지. 사랑싸움은 둘만 있는 데서 하고, 여기서까지 그렇게 분위기 어둡게 만들지는 말자, 좀.”
“부부 싸움은 뭔 놈의 부부 싸움이라는 거야? 그런 거 아냐.”
“아니긴. 둘이 눈도 안 마주치는구먼.”
“하아. 그런 거 아니라고.”
재경의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았다.
나루는 이러다가 재경이 버럭 할까 봐 걱정이 됐지만, 명진은 그렇지도 않은 모양인지 계속해서 재경과 지후를 나무랐다.
의외로 재경은 목소리만 낮아질 뿐, 화를 내진 않았다.
오히려 지후가 들고 있던 펜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실험실을 나갔다.
나루가 기억하는 지후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지후가 정 떨어지게 행동하려고 한다는 걸 모르는 나루로선,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윤영이 지후를 따라 나갔고, 나루는 어째야 하나 망설이다가 그냥 실험실에 남아 있었다.
“너도 나가보지 그래?”
재경이 나루에게 말했다.
“내가 왜?”
“너, 지…… 아니다.”
선미가 그 자리에 있다는 걸 깨닫고, 재경이 말을 멈췄다.
“재경아, 지후랑 싸운 거야? 무슨 일이야?”
선미가 조심스레 물었다.
“싸운 거 아냐. 그냥 의견이 좀 다른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며 재경은 나루를 흘끗 돌아봤다.
“분위기 흐려서 미안해. 얼른 실험이나 하자. 보고서 써야 하잖아.”
재경이 애써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조교가 알려 준 대로 실험을 하는 동안, 윤영은 지후를 따라잡았다.
지후는 실험실 밖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꺼내고 있었다.
“담배, 피우지 마.”
“신경 꺼.”
“나한테까지 그렇게 차갑게 굴 거 없잖아.”
“후우.”
지후는 담배를 다시 집어넣고 윤영을 돌아봤다.
“왜 따라 나왔어? 난 널 이용하려는 놈인데.”
지후의 말에 윤영이 웃었다.
“날 이용할 마음이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놈이 나쁜 놈 같아 보이지는 않으니까.”
“그러냐.”
지후가 쭈그리고 앉았다.
윤영도 그 옆에 앉으며 물었다.
“재경이랑은 왜 그런 거야? 나루 때문이야?”
“응.”
“나루도 죄 많은 여자네.”
“그러게.”
“나루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야? 예뻐서?”
“응.”
“나루 정도 예쁜 애들은 많잖아. 왜 그렇게 걔가 특별해?”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톡 쏘는 듯한 말투가 되어 버렸다.
“특별해, 나루는.”
하지만 지후는 윤영의 말투를 깨닫지 못한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웃어도, 찡그려도, 바보 같은 표정을 지어도. 뭘 해도 예쁘고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어.”
지후는 심장이 쿵 내려앉을 정도로 달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남자에게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드는 나루가 부럽고 미웠다.
윤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말했다.
“그렇게 예쁘고 눈을 못 떼겠으면, 그냥 네가 사귀어. 양보하려고 하지 말고.”
“그건 안 돼.”
지후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나루는 내 것이 아니야. 나는 나루랑 사귈 생각 전혀 없어.”
“정말이야?”
“응.”
“절대 안 사귈 거야?”
“응.”
“그럼.”
윤영은 지후에게 ‘널 이용하는 거야.’라는 말을 들었던 날부터 쭉 생각해 오던 말을 꺼냈다.
“그럼 나랑 사귀자, 지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