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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44화 (44/93)

44화 권태기입니다

2017.11.30.

“내가 여기서 나오는 이유는, 지금껏 이 집에 있었기 때문이겠지.”

명진의 담담한 대꾸에, 지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명진의 뒤에서 나루가 나왔다.

“어, 지후야. 일찍 학교 가네.”

“밥 먹으러 가는 길이야. 너, 왜 이 시간에 윤명진이랑 같이 나오는 건데?”

지후의 지적에 나루는 명진을 돌아봤다가, 씩 웃었다.

“왜? 질투하니?”

지후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질투? 그럴 리가 있나. 이런 시간에 여자 혼자 사는 집에서 남자가 나오는 게 이상하니까 묻는 거지.”

“흐응. 그게 뭐가 어때서? 법적으로 잘못된 거야?”

“법적으로 잘못된 게 아니라…….”

“역시 질투하는구나?”

“하. 너, 나 좋아한다며?”

“응, 좋아해.”

“그런데 그 태도는 뭐야?”

“내 태도가 왜?”

“넌 지금 좋아하는 남자한테 딴 남자랑 한집에서 나오는 장면을 들킨 거야.”

“아하하하. 지후, 너. 은근히 야하구나?”

“뭐?”

“내가 명진이랑 한집에서 무슨 짓을 했다고 상상하는 거야? 설마 옷이라도 벗고 뒹굴었을까 봐?”

“야, 너.”

나루의 발언에 지후가 입을 열었다가 바로 다물었다.

명진은 놀라서 나루를 돌아봤다.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생각인 걸까? 지후를 짝사랑하고, 그의 사랑을 받고 싶은 여자의 태도인 걸까, 이게?

‘원래 나루 성격이 이런가? 그렇다면…….’

명진은 지후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지후도 참 고생 많았겠네.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여자와 12년이나 사귀다니.’

명진의 시선을 느낀 듯 지후가 명진을 쳐다봤다.

동정 가득한 명진의 눈빛에, 지후가 미간을 좁혔다.

‘동정하지 마.’

‘하지만 불쌍한걸.’

‘난 나루의 이런 모습까지도 사랑스럽고 귀엽다고!’

‘안쓰럽다. 이런 모습까지도 사랑스럽고 귀엽다고, 자신을 세뇌시켜야 했던 네가.’

‘세뇌시킨 게 아니라 그냥 귀엽다고. 저절로 사랑스럽다고.’

‘무리하지 마.’

‘무리하는 거 아냐.’

둘은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침 먹으러 가는 길이면 잘됐다. 우리도 아침 먹을 거거든. 같이 가자, 지후야.”

정작 나루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난 갈 생각 없어.”

지후가 차갑게 말했지만 나루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아침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며?”

“난 생각해 둔 메뉴가 있어.”

“뭔데?”

“돼지고기 김치찌개.”

“한성 식당에서?”

“응.”

“우리도 거기 가는데.”

“……메뉴를 변경해야겠군.”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내가 그렇게 싫어?”

나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후를 올려다봤다.

지후보다 키가 한참 작은 나루는, 궁금한 게 있을 때면 이렇게 지후를 올려다보며 묻곤 했다.

언제나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응.”

여전히 사랑스러운 그 모습을 보며, 지후는 간신히 대답했다.

“싫어.”

그녀가 내게서 멀어지게 만들어야만 했다.

냉정한 모습에 질려 떠나도록 해야만 했지만, 이런 말을 할 때면 그녀가 느낄 아픔이 고스란히 돌아와, 지후의 심장을 찔렀다.

아직은 날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이 다칠까 걱정…….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우린 밥 먹으러 갈게.”

되어야 하는데.

이게 뭘까?

전혀 상처받지 않은 듯 담백하게 대답하고, 먼저 걸음을 옮기는 나루의 뒷모습에서, 지후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후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고, 지후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명진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루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싫다는 말을 들은 나루보다 오히려 지후가 더 고통스러워 보여서 안타까워하려는 찰나였는데, 나루가 분위기를 다 깨뜨렸다.

“쟤는 원래 성격이 저래? 로맨틱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

명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 뭐. 그런 부분이 없잖아 있지.”

“없잖아 있는 정도가 아니라 없는데.”

“그래도 상관없잖아. 예쁘니까.”

“네 눈에나 예쁘지.”

“네 눈엔 안 예쁘단 말이야?”

지후는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예쁘긴 한데…… 내가 상상했던 거랑 이미지가 너무 달라. 널 사랑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땐 애가 신비로운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너무 제멋대로야.”

명진의 평가에 지후가 씩 웃었다.

“그래, 제멋대로지.”

“너, 진짜 중증이다. 제멋대로인 게 좋냐?”

“응, 좋아.”

“그렇게 좋으면서 굳이 나루를 밀어낼 필요가 있을까?”

“그 얘기는 끝난 걸로 아는데.”

그때, 나루가 뒤를 돌아봤다.

“윤명진, 뭐해? 밥 먹으러 안 가?”

“어, 가야지. 야, 너도 같이 먹으러 가자.”

명진이 걸음을 옮기며 지후를 돌아봤다.

지후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난 너희랑 같이 밥 먹을 생각 없어.”

* * *

한성 식당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아, 지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옆 테이블에는 명진과 나루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왜 나는 여기에 앉아 있는가.

나루와 명진이 한성 식당에 간다고 하기에, 지후는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빌라에서 나와 반대쪽으로 가려는데, 나루가 앞을 막아섰다.

피해서 가려고 할 때마다 자꾸 따라와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왜 이래?”

“내가 뭘?”

뻔뻔하게 되묻는 나루가 귀여워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화를 낼 만한 일도 아니었다.

“왜 자꾸 앞을 막아?”

“그러게. 내 다리가 멋대로 움직이네. 널 보내기 싫은가 보다.”

배시시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미어졌다.

“귀찮게 하지 말고 비켜.”

최대한 감정을 누르고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응, 비키고 싶은데 어쩌지? 다리가 멋대로 움직여서.”

나루는 정말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여자는 정말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라는 생각을 하는데, 명진이 지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같이 가지 그래? 테이블만 따로 앉으면 같이 밥 먹는 건 아니잖아.”

그게 말이 되냐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길에서 그런 실랑이를 하는 게, 오히려 나루와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성 식당에 왔고, 테이블을 따로 잡았다.

나루는 그 부분까지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돈가스 먹을래. 명진이, 넌?”

나루가 벽에 붙은 메뉴판을 보며 물었다.

“난 제육덮밥. 지후 넌 뭐 먹을 거냐?”

명진이 지후를 돌아봤다.

“지후는 돼지고기 김치찌개 먹겠다고 했잖아. 일단 주문할게.”

지후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나루가 손을 들었다.

“이모. 여기 제육덮밥이랑 돈가스 주시고요, 저쪽에는 돼지고기 김치찌개 주세요.”

“같이 온 거면 같이 앉지, 왜 따로 앉았어?”

가게 주인이 주문을 받으며 물었다.

“아, 같이 온 거 아니에요. 저랑 밥 같이 먹기 싫다더라고요.”

나루가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왜 우리 예쁜 학생이랑 같이 먹기 싫대? 따돌리고 그러는 거야?”

가게 주인이 지후를 돌아봤다.

지후는 이번에도 나루가 대신 대답해 주기를 기다렸지만, 나루도 명진도 지후의 입술만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지후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같이 앉아서 먹어.”

“싫습니다.”

“잘생긴 총각이 고집이 세네.”

“네, 제가 한 고집합니다.”

“고집 부려 봐야 뭣에 써? 시간 지나면 다 별일 아닌데. 그냥 같이 좀 먹어.”

“싫습니다.”

“쯧쯧.”

가게 주인이 혀를 차며 주방으로 향했다.

나루는 수저를 꺼내 명진과 자신의 앞에 놔뒀다.

“이제 중간고사도 끝났으니까 축제 준비하겠다. 우리 동아리에서는 뭘 하려나.”

“봉사 동아리인데 뭐 할 수 있는 게 있나?”

“수화 공연이나 그런 걸 하지 않을까?”

“나, 수화 모르는데.”

“아는 선배가 가르쳐 주겠지. 지후야, 너도 동아리 참여할 거지?”

나루가 지후를 돌아봤다.

“글쎄. 봐서.”

“같이 하면 재미있겠다. 동아리 준비하면서 연습을 가장한 합숙도 하고 그럴 텐데.”

“술만 마시는 거 아냐?”

“그러고 보니, 명진이 넌 술 잘 마셔?”

“못 마시진 않아. 지후, 넌?”

“그럭저럭.”

나루와 명진은 지후를 자꾸만 대화에 끼워 넣었다.

음식을 가져다주러 온 가게 주인이 그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그럴 거면 그냥 같은 식탁에 앉으라니까 그러네.”

“싫습니다.”

지후는 단호했다.

그런 지후의 모습에, 나루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지후는 엉뚱한 면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부리지 않아도 되는 고집을 부리는 모습도, 그의 엉뚱한 면 중 하나였다.

그렇게 싫으면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으면 될 텐데.

이 와중에도 대답은 꼬박꼬박 해 주는 지후가 귀여웠다.

냉정한 그의 태도에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꿨더니, 그 아픔마저도 즐거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것은 과정일 뿐이다.

그를 사랑하고, 그의 사랑을 받게 되기까지의 과정.

옛 시간에서는 그가 했던 나를 향한 짝사랑을, 이제는 내가 하고 있는 것이다.

옛 시간에서는 무심히 넘겼던 순간들을, 이제는 머릿속에 꾹꾹 눌러 담을 기회가 생겼다.

슬퍼할 이유는 없었다.

지후만 따로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아침을 먹었다.

각자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명진이 지후에게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성재경은? 걔는 학교 안 가냐?”

지후가 미간을 좁혔다.

“재경이는, 집을 나갔어.”

“집을 나가다니?”

“본가에 갔어. 당분간 거기에 가 있겠다고.”

“왜? 무슨 일 있어?”

나루의 질문에 지후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나도 모르지.”

“뭐야, 민지후. 너네 권태기니?”

나루의 말에 지후가 피식 웃었다.

“그러게. 권태기인가?”

* * *

“드디어 니들한테도 권태기가 왔구나.”

지후의 누나인 지연의 말에 재경은 피식 웃었다.

“권태기라니. 그런 거 아냐.”

“아니긴. 신혼부부처럼 찰싹 붙어 다니더니, 드디어 별거하는 거잖아.”

“아니, 누나는 단어 선택이 왜 그래? 좀 좋은 표현도 있잖아.”

“좋은 표현? 음. 이혼?”

“누나…….”

“이혼을 해도 조정 기간이 있는 법이야. 이대로 갈라서지 말고, 생각 잘해.”

“아니, 그러니까 그런 거 아니라고.”

학교에 가기 위해 나오다가 마주친 지연은, 재경이 잠깐 본가에서 통학하기로 했다는 말에 권태기를 운운했다.

권태기라니.

‘그러고 보니, 나랑 지후가 싸운 건 이번이 처음이구나.’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도 싸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내아이들은 다투면서 더 친해지는 법인데, 지후와 재경 사이에는 사소한 말다툼도 없었다.

‘그건 아마도.’

늘 지후가 양보를 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지후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양보했는지.

영화를 봐도, 밥을 먹어도, 늘 재경의 선택을 따랐다. 그러면서도 그런 내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양보할 게 따로 있지.’

여자를 양보하려고 하다니.

재경을 생각하는 지후의 마음을 알기에, 더 싫었다.

‘나는 지 생각 하나도 안 했는데.’

나루에게 푹 빠져서, 지후의 감정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루에게 푹 빠져서, 지후가 죽을 뻔한 순간에도 지후를 질투했다.

‘몹쓸 놈이야, 나는.’

그런 몹쓸 놈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여자와 데이트를 하면서까지 나루를 양보하려는 지후를,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았다.

지후의 그 무한한 자기희생을 보면, 그를 질투했던 내 자신이 초라해졌다.

그런 한편 화가 나기도 했다.

나루는 지후를 좋아하고, 지후 또한 나루를 좋아한다.

둘의 사이에서 방해가 된다는 게 민망하고 창피하고 화가 나고 슬펐다.

‘나만 없었으면 둘은 벌써 고백하고 사귀었겠지.’

이런 상황, 참 싫다.

* * *

“아침까지 먹어 놓고 1교시 땡땡이를 치겠다고?”

학생회관 앞에서, 지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루를 내려다봤다.

“응, 배부르니까 졸려서. 동방에서 한숨 자고 가야겠어.”

“아무리 과 수석이라도 이렇게 자꾸 수업을 빠지는 건 안 좋은 것 같은데.”

“왜? 나루가 친구 못 사귈까 봐 걱정되냐?”

명진이 끼어들었다.

지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입 조심해.’라는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뭐, 상관없잖아. 땡땡이치는 게 나루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또 누가 있는데?”

“나.”

명진이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도 동방에서 한숨 자려고.”

지후의 표정이 굳었다.

“동방에서, 둘이?”

“그럼 동아리 사람들 다 불러들일까?”

“너…….”

지후는 으르렁거리듯 명진을 노려봤다.

“나루랑 나랑 둘이 자는 게 걱정되면, 너도 따라오든가. 이 교수님, 1교시 때 출석 안 부른다며.”

명진이 도발하듯 말했다.

지후는 명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였다.

이런 식으로 나루를 걱정하는 행동을 이끌어내, 지후의 마음을 나루가 눈치채게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걱정 안 되고, 난 수업 들을 거다.”

지후는 명진이 나루에게 몹쓸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명진에게는 신뢰가 생겼다.

매몰차게 말하고 돌아서서 걸어가는 지후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루가 명진을 올려다봤다.

“왜 그러는 거야, 너?”

“내가 뭐?”

“괜히 지후 속 긁잖아.”

“긁긴 뭘 긁어. 동방서 잘 거야?”

“응, 너무 졸려. 어젯밤에 잘 못 잤거든.”

둘은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동아리방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루는 구석에 있는 이불을 가져다가 덮고 누웠다.

명진은 벽에 기대어 앉아, 가방에서 만화책을 꺼냈다.

“넌 만화책 진짜 좋아하나 보다.”

“응, 어지간한 건 다 읽었지. 아, 그러고 보니 이 만화, 언제 완결돼? 완결은 나냐?”

명진은 만화책을 흔들며 물었다.

장편으로 연재된, 꽤 유명한 만화책이라 나루도 그 만화에 대해 알고 있었다.

좋은 스토리에 비해 터무니없는 결말이 났다고, 인터넷에서 자주 언급됐었기 때문이다.

“응, 완결 나.”

“몇 권에서?”

“42권인가?”

“어마어마하구먼. 1년에 2, 3권밖에 안 나오는데. 어떻게 돼?”

“나중에 사서 봐.”

“아, 치사하다. 좀 알려 주지.”

“사서 봐. 미리 알아서 뭐하니?”

‘나는 이게 완결나기 전에 죽을지도 모르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지만, 명진은 간신히 삼켰다.

‘이 만화가 완결나기 전에 죽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런 말로 나루를 흔들고 싶지 않았다.

나루는 명진이 아니어도 고민할 거리가 많을 터였다.

“나, 음료수 좀 사 와야겠다. 뭐 마실래?”

명진이 일어나며 물었다.

“아니, 난 잘래. 다녀와.”

나루는 눈을 감았다.

명진이 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조금 지나 다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루는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좀 전까지는 엄청 졸렸는데 잠이 안 와. 아까는 지후가 있었고, 지금은 지후가 없어서 그런가 봐.”

들어온 사람이 나루의 옆에 앉았다.

“옛 시간에서도 이랬어. 지후가 있으면 정말 잘 자는데, 없으면 못 자고. 걘 항상 내 수면제였어. 지금 나는 매일, 매일 불면증이야.”

“나루야, 너.”

들려오는 목소리가 명진의 것이 아니었다.

나루는 눈을 번쩍 떴다.

재경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원래 지후랑 아는 사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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