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43화 (43/93)

43화 상냥하고 농밀하게

2017.11.27.

인적이 드문 놀이터는 조용하고 어두웠다.

관리를 잘하지 않아서, 여러 개의 가로등 중 두 개만 빛을 내고 있었다.

나루는 을씨년스러운 놀이터를 거침없이 걸어가 그네에 앉았다.

지후는 그네에 앉지 않고 나루의 옆에 서 있었다.

나루는 그넷줄을 붙잡고 지후를 돌아봤다.

“넌 안 타?”

“안 타.”

“그럼 여기까지 왜 온 거야?”

“그건.”

지후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못마땅한 표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나루는 속으로 조금 웃으며 발을 굴렀다.

그네를 타는 건 오랜만이었다.

이 시간에서도, 옛 시간에서도.

그네의 진자 운동이 강해질수록 얼굴에 닿는 바람도 세졌다.

그네가 충분히 높이 올라간 후, 나루는 발 구르는 걸 멈추고 두 다리를 쭉 폈다.

높이 오가던 그네가 진자 운동을 거듭할수록 조금씩 힘을 잃고 낮아졌다. 거의 멈춰 갈 무렵, 지후가 말했다.

“다 탔으면 그만 들어가.”

“난 더 탈 거야.”

“대체 왜 이 시간에 나와서 그네를 타는지 모르겠다.”

“그러는 넌 왜 이 시간에 날 따라와서 잔소리를 하는 거야?”

나루의 지적에 지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 나 좋아한다면서?”

“응, 좋아해.”

“이게 좋아하는 사람의 태도야?”

“말했잖아. 짝사랑은 처음이라서 서투를 수 있다고.”

눈을 깜빡거리며 말하는 나루를, 지후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렇게 제멋대로 굴면 짜증이 나야 하는데, 이 여자를 너무 사랑해서 문제였다.

이런 모습조차도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견디기 힘들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볼을 가볍게 꼬집으며, ‘으이그, 연나루. 으이그.’ 과거에 했듯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지후는 그러는 대신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꽉 쥐고 말했다.

“난 갈 거다.”

“응, 잘 가.”

나루가 담백하게 인사했다.

강하게 나가면 따라올 줄 알았는데, 지후가 놀이터 입구까지 갔을 때에도 나루는 일어나는 기척이 없었다.

슬쩍 돌아봤더니, 나루는 다시 그네를 타고 있었다.

저 여자가 진짜!

지후는 놀이터 주위를 둘러봤다.

어두침침한 놀이터 주변은 아무리 봐도 위험해 보였다. 지금은 오가는 사람이 없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런 장소에 나루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지후는 다시 걸어가 나루의 옆에 섰다.

“돌아가자.”

“싫어.”

“고집 그만 부려.”

“고집 부리는 거 아냐. 나는 그냥 그네를 타고 싶어.”

“내일 낮에 타도 되잖아.”

“내일 낮에는 또 다른 게 하고 싶겠지.”

“너, 이렇게 제멋대로 굴면 평생 남자 못 사귈걸.”

“걱정 마. 이런 내 모습까지도 사랑해 주는 남자가, 분명 있을 테니까.”

물론 있다.

민지후란 이름을 가진 남자.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하고 있는 남자.

“연나루. 그만 가자.”

나루는 천천히 그네를 움직이며 지후를 돌아봤다.

“넌 나 안 좋아한다며? 왜 그렇게 신경 써? 그냥 내버려 두고 들어가서 자.”

“친구잖아. 이웃이기도 하고.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겠어?”

지후의 다정한 말에, 나루는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이 남자는 너무 다정하다.

지후가 냉정하게 대할 때보다 다정하게 대해 줄 때, 더 눈물이 나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

“나는 그네 탈 거야.”

생떼를 쓰고 고집을 부려도 화를 내지 않는 그의 행동이 좋아서, 옛 시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어서. 나루는 한 번 더 고집을 부렸다.

“하아.”

지후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옆 그네에 앉았다.

“너, 진짜 남의 말 안 듣는다.”

“응, 그런 말 자주 들었어.”

“그래, 자주 들었겠지. 앞으로 더 자주 들을 거고.”

“응, 아마 그럴 거야. 그래서.”

널 잃게 돼.

―그 연구는 관두는 게 좋지 않을까?

심심풀이 삼아 몰래 시작한 연구가 조금씩 궤도에 오르고 있을 때, 지후에게만 그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지후는 그렇게 말했다.

―위험할 것 같아, 그거.

그때, 그 말을 들었더라면 지후가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루는 그 말을 듣지 않았고, 연구 성과를 발표하며 공개 연구로 돌렸고, 위험에 처했다.

그리고 나루로 인해 시작된 그 위험은, 결국 지후를 죽였다.

“내가 남의 이야기를 좀 더 귀담아 듣는 애였더라면 좋을 뻔했어.”

나루가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그러는 게 어때?”

“아니, 이미 늦었어. 나는 그냥 쭉 남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말아야 돼.”

그래야 그 연구를 성공시키고, 위험에 처하고, 지후가 나루를 구하려는 그 순간, 지후를 구해낼 수 있다.

만약 그 연구를 성공시키지 못한다면, 지후에게는 다른 죽음의 위험이 닥쳐올지도 모른다.

그게 명진의 가설이었고, 나루는 그 가설을 믿기로 했다.

이 고집스러운 말에 대해 무어라 할 줄 알았던 지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지후가 나루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

“어쩌다가 이런 거랑 엮였나 싶어서.”

곧바로 돌아온 대답에 나루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럼 집에 가든가.”

“아무리 봐도 넌 날 좋아하는 게 아냐.”

“좋아한다니까 그러네.”

“좋아한다는 사람한테 하는 행동치고는, 너무 막 하는 거 아냐?”

“그럼 어쩔까?”

나루는 벌떡 일어나, 지후가 피할 새도 없이 그의 앞으로 가서 섰다.

지후는 그네에 앉아 나루를 올려다봤다.

나루는 그의 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따스한 손이 볼에 닿을 때까지, 지후는 숨도 쉬지 못했다.

나루는 지금까지의 어린애 같은 표정을 버리고 애틋한 미소를 지으며 지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점멸하는 가로등 불빛에 감싸인 그녀는 심장이 쿵 내려앉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이렇게.”

지후의 볼에 손을 댄 채, 나루가 입을 열었다.

“상냥하고.”

나루는 허리를 굽혔다.

그녀의 얼굴이 그의 얼굴과 가까워졌다.

둘의 숨결이 허공에서 얽혔다.

“농밀하게.”

지후는 눈을 감고 싶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코가, 입술이 너무 가까운 곳에 있다.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이 지후를 덮쳐 왔다.

그넷줄을 잡은 지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대해 줄까?”

꿀꺽―

지후는 침을 삼켰다.

“그러면.”

나루가 엄지로 지후의 볼을 쓸었다.

“네가 나를.”

나루가 다시 허리를 폈다.

지후를 내려다보며 나루가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해 줄까?”

아직도 볼에 닿아 있는 그녀의 손을 뿌리쳐야만 했다.

장난치지 마. 이런 짓 하지 마.

그런 말을 하며 매몰차게 그녀를 떼어 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매료되어, 지후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둘은 시간의 흐름을 잊고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후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

볼에 닿아 있던 나루의 손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이런 짓 관둬. 재미없다.”

지후의 차가운 말에 나루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걸 원하는 줄 알았는데.”

“안 원해. 다 놀았으면 그만 가자.”

이번에 나루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지후는 먼저 걸음을 옮겼고, 나루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귀를 기울여 나루가 따라오는 걸 확인한 지후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그녀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빌라에 도착할 때까지, 지후와 나루는 쭉 같은 거리를 유지했다.

* * *

지후가 집에 들어갔을 때, 재경은 없었다.

재경을 상대할 각오를 하고 들어왔는데 당황스러웠다.

재경만 없는 게 아니었다.

재경의 짐들도 사라졌다.

지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전화를 걸어 볼까 싶어 휴대폰을 꺼냈다가 관뒀다.

그래, 어쩌면 잠시 떨어져 있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가까이 있어 봐야, 나루를 향한 마음을 재경에게 들킬 뿐이니까.

* * *

잠이 오지 않아서 인터넷에 과외 찾는 글을 올리고, 다른 아르바이트가 있나 찾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1교시는 째야지. 이 교수님은 2교시에 출석 부르니까.’

나루는 잠깐이라도 눈을 붙일 요량으로 침대에 누웠다.

몸은 피곤한데 도통 잠이 들지 않았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그 잠깐 동안 꿈을 꿨다.

“싫어, 난 안 가.”

네 사람이 만나는 장소는 보통 재경의 병원 앞 커피숍이었다.

더운 여름, 가장 더운 오후에, 넷은 시원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인턴인 재경은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내서 나온 터였다.

“왜? 집들이하면 꼭 온다고 했잖아.”

나루가 월세를 벗어나 전세로 큰 집을 구해 이사를 하고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집들이, 가고 싶지. 뭘 사 갈지도 고민했고. 네가 이사를 결정한 그 날부터, 네 집들이는 내 꿈이었다.”

“꿈 한 번 작네.”

윤영이 중얼거렸다.

“작다니. 친구 집들이는 처음이라고. 게다가 전세! 아름다운 전세! 아, 난 언제 월세를 벗어나나.”

“아니, 그런 건 됐고. 그렇게 기대했는데 왜 안 오겠다는 거야?”

“네가 요리하겠다며?”

“응! 뭘 만들지도 정해놨어. 찜닭이랑 잡채랑 만두 만들 거야.”

“응, 그러니까 안 가.”

“아니, 왜!”

“너 요리 못하잖아.”

“못하진 않거든.”

“아니, 못해. 안 그러냐, 윤영아?”

“나한테 묻지 마. 난 나루한테 쓴소리 하고 싶지 않아.”

윤영이 시선을 피했다.

“배신 때리지 마, 김윤영. 너도 저번에 나루가 끓여준 라면 먹고 한동안 마음고생 했잖아.”

“아니, 뭐 라면 가지고 마음고생까지 해?”

“연나루, 생각해 봐. 윤영이는 널 아껴. 그런데 네가 만들어 준 라면이 너무 맛없는 거야. 그걸 꾸역꾸역 다 먹고 잘 먹은 척했는데, 네가 또 끓여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며? 마음고생 안 하게 생겼냐?”

나루가 윤영을 돌아봤다.

윤영은 나루와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윤영아, 그렇게 맛없었어?”

“아냐, 맛없긴. 먹을 만했어. 라면 맛이 다 거기서 거기지.”

“거짓말하지 마라, 김윤영. 거짓말하면 코 길어진다.”

“성재경, 내가 애니? 그 말은 요새 5살한테도 안 먹혀.”

“우리 조카한테는 먹히더라. 펑펑 울던걸.”

“애 좀 괴롭히지 마. 넌 어떻게 된 애가.”

“괴롭히긴. 거짓말은 애초에 싹을 잘라야 돼.”

윤영과 재경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나루는 옆에 앉아 있던 지후에게 물었다.

“그렇게 맛없었어?”

그러자 지후는 미소를 지으며 나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맛있어.”

재경이 지후를 노려봤다.

“네 놈 코가 긴 데는 이유가 있었어.”

“지후 코는 안 길어. 아주 완벽하다고.”

나루의 반박에 재경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길어. 긴 편이야. 줄자 가지고 와서 재 볼까?”

“적당히 해, 성재경.”

“너나 적당히 해, 민지후. 네가 그렇게 거짓말을 하니까 나루가 요리를 하겠다는 만행을 부리려는 거 아냐. 아무리 사랑을 해도 독해져야 하는 순간이 있는 거라고. 바로 지금처럼 음식으로 테러를 하려고 할 때!”

딩동―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커피숍인데 왜 초인종이 울리는 걸까?

의아하게 생각하며 친구들에게 물어보려는데, 방금 전까지 함께 있던 친구들이 사라졌다.

4인용 테이블에 앉아 있는 건 나루 혼자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독감이 그녀를 덮쳐 왔다.

딩동―

또 초인종이 울렸고.

나루는 잠에서 깨어났다.

멍하니 앉아서 좁은 자취방을 응시했다.

가슴이 지끈, 지끈 아팠다.

옛 시간에서 처음 전세를 구했을 때의 추억이었다.

행복한 시간이었는데, 지금은 그 시간이 가슴을 미어지게 만든다.

딩동―

채근하듯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나루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8시.

1시간도 못 잤다.

‘이 시간부터 누구지? 재경인가?’

침대에서 내려오는 동안 또 초인종이 울렸다.

“나가요, 나가.”

문을 열었다.

“야, 넌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문을 여냐?”

명진이었다.

나루는 인상을 찌푸리고 명진을 올려다봤다.

“이 시간부터 어쩐 일이야?”

“잠에서 일찍 깼거든. 배도 고프고. 같이 아침이나 먹고 학교에 가자고.”

“들어와. 나 준비해야 돼.”

나루는 하품을 하며 돌아섰다.

집으로 들어오며 명진이 말했다.

“넌 여자애가 혼자 있는 집에 남자를 막 불러들이냐?”

“이 여자애는 여자애로 보이지만 사실 32살이란다, 아가야.”

“하지만 내 눈에는 20살의 여자애인데? 이러다가 내가 확 덮치면 어쩔래?”

“아하하하하하.”

“뭘 그렇게 신나게 웃어? 못 덮칠 것 같아?”

“진짜 덮칠 놈이면 그런 말 안 하지. 거기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씻고 나올게.”

명진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나루의 집은 여자 혼자 사는 집답지 않았다.

“엄청 더럽게 해 놓고 사네.”

명진도 깔끔한 성격은 아니지만, 나루의 집은 더했다.

여기저기 던져 놓은 옷가지와 책상에 수북한 물건들.

기대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너, 진짜 정리 정돈 안 한다? 집이 이게 뭐냐?”

명진이 씻고 나온 나루에게 잔소리를 했다.

“뭐 어때. 몸 눕힐 곳만 있으면 되지. 어차피 다 꺼내서 쓸 것들이야.”

“그래도 좀 제자리에 넣어두면 찾기 쉽잖아.”

“다 찾을 수 있어. 지저분해 보이지만 나름의 규칙이 있거든.”

“너 이러고 사는 거, 지후도 알아?”

“응, 알아.”

옛 시간의 지후는 알고 있었다.

“늘 지후가 정리 정돈을 해 줬거든. 나는 어지르고 지후는 정리하고.”

“걔도 참 힘들었겠다.”

나루는 웃었다.

“그러게. 난 정말 챙겨 주기 힘든 여자였지. 대체 날 왜 사랑했었는지 모르겠다니까.”

하지만 명진은 알 것도 같았다.

지후를 사랑해도 된다는 말을 들은 후, 나루는 한 꺼풀 벗어던진 것처럼 분위기가 변했다.

나비가 고치에서 나와 날개를 편 듯, 그녀를 둘러싼 해사한 공기는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털털한 듯 아닌 듯한 행동도 매력적이었다.

‘지후도 이 시간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면, 더 빛나겠지.’

마음껏 행복해하는 나루는 어떨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이상하기만 했던 연나루라는 여자가, 어느새 명진의 가슴속에 들어와 앉았다.

1년 후 생을 마감하기 전에, 나루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지후의 옆에서 마음껏 사랑하고, 사랑받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러면 안심하고 죽을 수 있을 텐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나루가 물었다.

“아니, 딱히. 이 근처에 맛있는 집 있어?”

“응, 자주 가는 가게 있어. 거기 가자.”

명진이 먼저 신발을 신고서, 나루도 신발을 신는 걸 보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뭐야?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복도를 지나가던 지후가 명진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