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나는 당신을 있는 힘껏 사랑하겠습니다
2017.11.23.
둘은 같은 주제를 놓고 계속 실랑이를 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정답이 없는 일이야.”
이윽고 지후가 말했다.
“우리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은 없어. 그렇다면 각자 믿는 대로 행동하면 되는 거야.”
옳은 말이었다.
명진도 지후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슬슬 받아들이던 참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야. 내 죽음에 나루가 아파하지 않는 거. 나루가 사랑하는 사람이 꼭 성재경이 아니어도 좋아. 재경이면 좋긴 하겠지만, 그것까지 욕심을 낼 순 없지. 그저 12년 후, 나루의 가슴에 들어 있는 사람이 나만 아니면 되는 거야.”
반박할 말이 많았지만, 명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해 봐야 지금껏 했던 말다툼이 또 반복될 뿐이다.
지후의 말대로 이 일에는 정답이 없었다.
여러 가지 추측과 가정만이 난무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후회가 남지 않도록 자신이 믿는 바를 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 일의 당사자는 지후와 나루였다.
‘나는 곁가지일 뿐이지. 1년 후에 죽을 놈이 뭘 해 줄 수 있겠어.’
씁쓸했다.
나루의 곁에서 그녀의 고독을 덜어내 주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죽으면 나루는 슬퍼하겠지.’
이제야 거기에 생각이 미쳤다.
‘옛 시간에서 나는 나루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이제는 나루랑 친해졌으니까. 옛 시간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슬픔을 느끼게 될 거야. 그럼 이것도 결국 나루가 과거를 바꾸려고 하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걸까? 저번에 지후가 물에 빠져서 죽을 뻔한 것도, 지후가 나루와의 관계를 바꾸려고 해서 벌어진 일일까?’
명진은 자신이 살날이 1년도 남지 않았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간으로 돌아온 사람이 둘이나 된다.
게다가 한 번 죽었던 지후는 죽음에 있어서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래서인지 명진의 생각도 자꾸만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운명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죽음 또한 바꿀 수 없다고.
“네가 뭘 말하는지, 잘 알겠어. 무슨 생각인지도 알겠고.”
“그래, 알아주니 고맙다. 그럼 나루한테는 나도 이 시간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 하지 말아 줘.”
“말 안 해. 하지만 나루가 먼저 눈치챌 수도 있어.”
“눈치 못 챌 거야. 엄청 둔해서.”
그렇게 말하며, 지후는 나루의 둔한 점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었다.
“성재경이 네 마음을 눈치챈 게 이해가 된다.”
“응?”
“아냐, 아무것도. 아무튼 나도 내 가설이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네가 이 시간으로 돌아왔다는 걸 나루에게는 말하지 않을게.”
“그래, 고맙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나루는 또 혼자가 돼.”
“…….”
“나루는 나랑 친해졌으니까 이 시간에서는 슬퍼하겠지. 그리고 유일하게 연나루를 알아주는 사람이 사라진 거라고 생각해서, 엄청 고독해질 거야. 나를 알기 전보다 더 많이.”
“그래, 그렇겠지. 그래서…….”
“나랑 엮이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거겠지.”
“그래, 맞아. 냉정하게 말해서, 넌 나루에게 아무 득이 안 돼.”
“뭐, 어쩌겠어. 이미 친해졌는데.”
그냥 친한 관계가 아니었다.
나루에게 명진은 유일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였다.
“나는 나루가 조만간 너에 대해 알아낼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나는 얘기할 거야.”
“윤명진.”
“그렇게 멋지게 불러도 소용없어. 나는 내가 죽기 전에, 그러니까…… 1년 후 이맘때가 되면 얘기해 줄 거야. 혼자가 아니라고. 내가 죽더라도 슬퍼하지 말고 네게 기대라고.”
지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가 나루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처럼, 나도 그래. 나한테도 나루는 소중한 사람이 됐어. 걔가 혼자 우는 꼴, 나는 못 보겠다. 뭐, 그때는 죽은 후라서 뭘 볼 수도 없겠지만.”
“그래, 알겠다.”
“응. 네 마음은 알겠지만, 나 죽고 나서 걔가 12년 간 혼자 고독하게 살아가는 건, 주객이 전도되는 거잖아.”
“그 전에 나루한테 기댈 사람을 만들어 줘야지.”
“하여간 고집은.”
명진은 혀를 쯧, 차고는 일어났다.
“하. 나이가 드니까 좀 오래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고 아주 삭신이 쑤시네.”
투덜거리는 명진을, 지후가 물끄러미 응시했다.
“뭐야, 철딱서니 없는 어린 동생 보는 것 같은, 그 시선은.”
“32살이 돼 봐라. 지금이 그리워질 테니까.”
“안됐네. 난 32살은 못 경험해 볼 것 같거든.”
“아…….”
지후가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명진은 지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셔. 나는 젊고 생생하고 가장 아름다운 나이로 평생 기억될 예정이니까.”
* * *
명진이 떠난 후에도 지후는 그 자리에 남아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천천히 연기를 뱉어 내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회청빛 밤하늘이 유독 시리게 다가오는 이유는, 옛 시간에서 나루와 종종 올려다보던 밤하늘과 같은 색이기 때문이리라.
있는 힘껏 그녀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12년 후, 죽는 그 순간까지 이 마음을 오롯이 품고 가게 될 것이다.
그저 있는 힘껏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척’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거겠지.
담배를 끄고 일어났다.
‘앞으로 1년인가.’
명진은 죽기 전에 나루에게 지후에 대한 것을 말하겠노라고 했다.
명진의 존재는 나루에게 독이었다.
명진이 나쁜 녀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좋은 녀석인 것이 문제였다.
명진이 죽으면 나루는 크나큰 상실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녀가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도 더 짙어지리라.
‘그 전에 나루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야 하는데.’
재경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명진의 말대로, 나루가 재경에게 사랑을 느낄 가능성은 적었다.
재경은 지후의 친구이니까. 나루가 사랑하는 남자의 오랜 친구이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라도 상관없다.
나루를 곁에서 보호해 주고 지탱해 줄, 이왕이면 지후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남자가 생겼으면 좋겠다.
‘그래야 내가 12년 후에도 나루 근처를 어슬렁거릴 수 있으니까.’
나루와의 연이 끊기면 안 된다.
나루와 가까이 지내다가 죽음의 위험이 닥쳐오는 그 순간, 나루를 구해야만 한다.
빌라 계단을 올라간 지후는, 나루의 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 안에, 나루가 있다.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있는데.’
만질 수 없음이 슬펐다.
옛 시간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음껏 그녀를 만지고 싶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뺨과 목덜미를, 부드러운 살결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자그마한 그녀를 품에 안고 머리칼에 얼굴을 파묻으면, 그녀의 체취와 샴푸 향이 어우러진, 달콤한 향기가 났다.
그 향기를, 지후는 무척이나 사랑했다.
차라리 멀리 떨어져 있다면 이토록 간절하지 않을 텐데.
달칵―
그때, 나루의 집 문이 열렸다.
피할 새도 없었다.
운동화를 신으며 나오던 나루가 지후의 신발을 발견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놀란 듯 눈이 동그래진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지후는 간신히 무표정을 유지하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아, 어. 안녕?”
나루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응, 안녕.”
나루가 복도 쪽을 둘러본 후 물었다.
“윤영이는 갔어?”
“응.”
“아, 그래.”
나루의 표정은 어두웠다.
지후는 말해 주고 싶었다.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알잖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 마음에 너밖에 없다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
그런 말을 할 수 없음이 슬펐다.
“저녁은 맛있게 먹었고?”
“응.”
사실은 먹지 않았지만 거짓말을 했다.
“뭐 먹었어?”
“그냥 이런저런 것들.”
“아, 그래.”
“너는?”
“나도 뭐, 그냥 이런저런 것들.”
시선을 옆으로 피하며 대답하는 나루의 모습에, 지후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가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나루는 거짓말을 할 때면 시선을 똑바로 맞추지 못한다.
“나는 산책을 가려고.”
나루가 말했다.
“아, 그래.”
“같이 갈래?”
나루가 지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까만 눈동자에 기대와 불안이 담겨 있었다.
당연히 함께 가고 싶었다.
그녀의 옆에서 함께 걷는 길은, 늘 새롭고 설레었다.
그리고 나루 혼자 이런 시간에 돌아다니는 것이 걱정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부터 있는 힘껏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척’해야만 하니까,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된다.
차마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챙겨 주었던 행동도, 이제는 하면 안 된다.
“아니, 난 갈 생각 없어.”
나루의 눈동자가 실망으로 흔들리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아, 그래. 음. 왜?”
“응?”
“왜 산책 같이 안 가려는 거야?”
생각지 못한 질문에, 지후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 바보 같은 여자야. 몰라서 물어? 나, 지금 널 피하는 거야.
지후는 웃음기 묻은 입매를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였다.
나루는 짝사랑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짝사랑하는 남자를 대하는 모습이 이토록 서투른 것이리라.
‘아, 귀여워 죽겠네.’
나루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지후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녀의 사랑을 받아서는 안 되는데도, 나를 혼자 사랑한다 착각하고 있는 그녀가 곱고 예뻐서, 가슴이 아려왔다.
“나는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야.”
간신히 대답했다.
“한 번 더 해도 좋잖아. 산책을 하는 건 건강에 좋아.”
“내가 아직 건강 챙길 나이는 아니라서.”
“그럴 나이야. 지금부터 챙겨야 나중에 편해.”
“너, 진짜 집요하다.”
지후는 고개를 들고 나루와 눈을 맞췄다.
최대한 냉정해 보이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네가 이러는 거, 귀찮아.”
나루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가늘어졌다.
“응, 그래. 귀찮을 거야. 이해해.”
“이해하면 좀…….”
“네가 좋아, 민지후.”
거침없는 고백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토록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주고받았었는데도, 이 시간에서 듣는 고백은 색달랐다.
“누군가를 먼저 좋아하는 게 처음이라서, 어디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아마 좀 귀찮게 할 수도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이 부분은 이해해 줘.”
당당하게 요구하는 나루의 모습에, 지후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조금 허무맹랑한 구석이 있다.
“그걸 내가 이해해 줄 이유가 없잖아. 나는 원치 않는 사랑을 받는 입장이라고.”
이 말이 그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힐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내 가슴에도.
나루를 밀어내는 말을 할 때마다, 지후의 심장도 아팠다.
오히려 나루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이유가 없긴 왜 없어. 일단은 이웃이기도 하고, 대학 친구이기도 하잖아. 그 정도면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아?”
“너, 그거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안 될 건 또 뭐야. 친구 사이에 어려운 부탁, 한 번쯤 할 수도 있는 거지. 지금 이게 내가 친구로서 하는 부탁이야. 나, 사람 좋아하는 거 처음이라서 서투르니까, 좀 귀찮게 해도 이해해 달라는 거.”
“……그런 식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네.”
“응, 앞으로 더 신기한 것들을 많이 보게 될 거야.”
“사양하고 싶은걸.”
“사양하면 후회할걸. 나, 썩 괜찮은 여자거든.”
그렇게 말하며, 나루는 해사하게 웃었다.
이 시간으로 돌아와서, 나루가 이렇게 웃는 건 처음 봤다.
심장이.
쿵―
쿵―
격하게 뛰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이 바보 같은 심장은, 여전히 그녀에게 강하게 반응한다.
그녀가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마다, 첫사랑을 하듯 두근거린다.
이 심장은 한결같이 그녀를 향해 있으니까.
“썩 괜찮은 여자 같진 않은데.”
썩 괜찮은 여자 정도가 아니다.
나루는 늘 완벽한 여자였다.
“이렇게 사람 귀찮게 하는 여자는 매력 없어.”
“에이, 그 부분은 좀 이해해 달라니까. 아무튼 같이 가자. 사격장에서 총 쏘게 해 줄게.”
“하아. 나는 총 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그럼 그네 타러 가자. 나, 그네 타고 싶어.”
“애도 아니고.”
“그네를 꼭 애만 타야 하나.”
“난 생각 없어. 너도 밤길에 돌아다니는 거 관두고 잠이나 자.”
“못 자.”
“왜? 착한 아이들은 잘 시간이야.”
“그래, 그런데 난 착하지가 않거든. 사람 귀찮게 하는 못된 여자잖아. 그래서 못 자. 못 자겠어, 정말.”
애써 밝은 표정을 유지하며 말하는 나루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넌 착한 아이라서 자야 할 시간인데, 내가 너무 매달렸네. 그래, 들어가 봐.”
나루가 담백하게 말하고 돌아섰다.
“너, 그네 타러 가게?”
“응.”
“거긴.”
위험하다.
이 근처의 놀이터는 밤이면 노숙자나 취객들이 많아졌다.
옛 시간에서 이 무렵에 성추행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사격장 가서 총이나 쏘지 그래?”
“신경 끄셔. 난 그네 타기로 결정했으니까.”
지후는 잠시 망설이다가 나루의 뒤를 따라 걸었다.
놀이터에 혼자 가게 놔둘 수는 없었다.
“넌 날 실컷 귀찮게 해 놓고, 너한테는 신경 끄라고 하냐?”
“넌 날 안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귀찮게 할 자격 없어.”
“그게 말이 돼?”
“하면 말이지, 안 될 건 또 뭐람.”
이게 좋아하는 남자를 대하는 태도인가 싶을 정도로, 나루의 행동은 제멋대로였다.
그리고 지후는 그런 나루의 모습조차 사랑스러웠다.
‘사랑해.’
총총총 걸어가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지후는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속으로나마 읊었다.
‘사랑해, 나루야.’
* * *
자신의 뒤를 따라 걷는 지후의 기척에, 나루는 웃음을 삼켰다.
역시 지후는 다정하다.
냉정한 척 말해도, 이 시간에 위험해지는 놀이터에 나루를 혼자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역시 놀이터 이야기를 꺼내 보길 잘했다.
지후가 내뱉은 차가운 말들은 여전히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즐기기로 했다.
지후의 행동 하나하나에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성미에 안 맞았다.
시간을 돌아왔고, 그를 살릴 기회를 얻었다.
그 기회를 아파하고 슬퍼하면서 날려 버릴 순 없다.
나는 지후를 짝사랑하는 중이다.
지후는 나를 친구가 좋아하는 여자로만 생각한다.
거기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지후가 날 사랑하게 된 이유를, 나는 아직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다.
―네가 숨 쉬는 모습까지도 사랑스러워.
옛 시간에서 지후가 했던 말을 믿기로 했다.
그것이 이 시간에서도 다시 시작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까 지후야. 나는 이제부터 널 있는 힘껏 사랑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