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민지후 이야기
2017.11.16.
나는 죽었다.
생명이 사라지던 그 순간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나루를 향했던 칼은, 내 복부 깊이 들어왔다.
상대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에 분노했는지, 칼을 마구 휘저었다.
타는 듯한 통증, 흐르는 피, 그리고.
나루의 절규.
피와 함께 생명이 흘러나가는 것을 느끼는 와중에도, 나는 하나만 생각했다.
살아야 돼. 연나루는 살아야 돼.
나루의 비명이 근처에 있는 살인범을 자극하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쉿.”
살아야 돼. 너는 살아서 행복해야 돼.
그러니까.
“쉿.”
그 한마디에 많은 염원을 담았다.
사실은 더 많은 말을 할 기회가 있을 줄 알았다.
나루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다.
나루야. 너는 정말로 사랑스러운 여자야.
너를 만난 이후, 너와 함께한 매일이 축복이었어.
네가 있어서 내 삶이 완성되었어.
나는 먼저 가지만, 너는 더 살아야 돼. 더 오래 살다가 와.
미안해하지 마. 네가 죄책감을 가질 일이 아니야.
있는 힘껏 행복해져. 내 몫까지,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경험하고, 그렇게 살아가.
좋은 남자를 만나고, 예쁜 연애를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렇게 오랫동안 살다가 많은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와.
그때까지 내가 먼저 가서 지켜볼게.
너의 모든 순간을 내가 함께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니까 멀리서나마 지켜볼게.
그러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쉿.”
그 말을 끝냄과 동시에, 암흑이 찾아왔다.
그리고.
눈을 떴더니, 나는 편의점에서 콜라를 들고 서 있었다.
내게 벌어진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나는 죽었다. 내 인생에서 유일했던 연인의 품에 안겨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왜 나는 지금 콜라를 들고 편의점에 서 있는 거지?
어째서? 이게 뭐지?
이런 게 죽음인 건가?
죽으면 편의점에서 콜라를 사게 되나?
콜라나 사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천국과 지옥이 가름 나거나 그러는 걸까?
콜라는 지옥, 사이다는 천국. 그런 건가?
“저기요.”
그때,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나를 일깨웠다.
내 뒤에 서 있던 남자였다.
이 남자도 죽은 걸까?
“계산 안 하실 거면 좀 비켜 주실래요?”
계산?
그제야 나는 내가 계산대 앞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네. 죄송합니다.”
사후 세계는 의외로 산 자의 세계와 비슷하다.
어떻게 돌아가는 시스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도 계산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돈을 지불했다.
돈을 지불하면 무언가 벌어질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보다 앞서 계산한 남자가 그랬듯, 나도 편의점을 나왔다.
편의점에서 나오면 새로운 죽음의 세상이 펼쳐질 줄 알았다.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온 건, 묘하게 그리움을 자아내는, 익숙한 거리였다.
‘여긴.’
대학 다닐 때 자취하던 빌라 앞이다.
사후 세계에 왜 이런 곳이 있는 걸까?
‘아, 이거 혹시 주마등인가?’
어쩌면 아직 사후 세계에 가기 전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인생의 모든 순간이 순식간에 흘러 지나간다고 한다.
지금 나는 그걸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가장 좋았던 순간.
내 인생에서 가장 축복 받았던 순간.
연나루를 만나고 반하게 된 그 순간부터, 나의 주마등이 시작되는 건지도.
그렇다면 가 보자.
그녀를 처음 보고, 사랑에 빠진 그 장소로.
나는 콜라를 들고 빌라를 향해 걸어갔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설레었다.
죽으면 끝인 줄 알았는데, 20살의 연나루를 한 번 더 볼 수 있다니.
행운이다.
아니, 아니야. 지금 나루는 나를 잃고 괴로워하고 있을 텐데, 너무 좋아하면 안 되지.
하지만 4층에 올라선 나는, 기억과 다른 장면을 목격했다.
나는 나루에 관계된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녀를 처음 본 날, 그녀가 입고 있던 청바지와 회색 후드 티셔츠, 구겨 신은 운동화에 묻은 얼룩까지도 전부 기억한다.
그런데 지금 나루는, 내 주마등 속의 나루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주마등이라면 내 기억과 똑같이 흘러가야 하는 거 아냐?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재경이 나를 불렀고 나루가 나를 돌아봤다.
나를 본 나루의 표정은 마치.
유령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우와, 너네! 진짜 키 크다!
내 기억과 같다면, 나루는 우리를 보며 그렇게 말해야만 했다.
그게 그녀의 첫 마디였다.
그러나 내 주마등 속의 나루는 내 얼굴을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도망치듯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게 대체 뭘까?
왜 주마등이 내 기억과 다른 걸까?
혼란스러워하며, 나는 재경을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닫자마자 재경이 날 돌아봤다.
“방금 연나루라는 애.”
나는 멍하니 재경을 응시했다.
그리고 재경의 이어지는 말에, 나는 이것이 주마등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진짜 내 타입이야. 정말 예쁘다.”
* * *
원래는 내가 먼저였다.
집 앞 복도에서 나루를 마주치고, 짧은 대화를 나누고, 집으로 들어와 재경에게 말했다.
―나루, 귀여운 것 같아.
―귀여워? 뭐야? 반한 거야?
장난스럽게 대꾸하는 재경에게,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응, 반했어. 첫눈에 반했어.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나는 들뜬 듯한 재경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 거였나?
성재경도 나와 마찬가지였던 거였나?
내가 나루에게 반했듯, 재경도 나루에게 반했던 거였나?
단지 내가 먼저 말하는 바람에, 그 마음 감추고 나를 응원해 준 거였나?
가슴이 미어졌다.
울고 싶었다.
내 죽음에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재경의 진짜 마음을 아는 순간 흐르려 했다.
그대로 있다가는 재경에게 못 볼 꼴을 보이게 될 것만 같아, 나는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어떻게 된 거지?
지금 이게 주마등이 아니라면 뭐지?
왜 내 기억과 다른 일들이 펼쳐지는 거지?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나는 내가 시간을 돌아왔다는 걸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인간이 상상하는 모든 일은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나는 믿어왔다.
때문에 시간을 돌아왔다는 것 또한 믿을 수 있었다.
어째서 이런 기회가 주어진 건지는 모르겠다.
‘사람이 죽으면 다들 한 번씩 이런 기회를 얻는 건가? 후회되는 일을 바꿀 기회.’
벌써 기회는 주어졌다.
나는 내 친구의 마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 소중한 친구가 내 연인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 친구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바꿔야지.’
나는 12년 후에 죽는다.
12년 후, 나루는 연구를 완성시킬 것이고, 그 연구를 필요로 하는 무리와 그 연구를 말살시키려는 무리들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루를 지키다가 죽는다.
이건 변치 않는 사실이다.
내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재경을 위해, 그리고 나루를 위해, 나는 둘 사이에서 빠져주어야만 한다.
‘잘됐어.’
혼자 남을 나루가 걱정이었다.
혼자 울고 혼자 생활할 나루가 걱정이었다.
하지만 나루와 재경이 연인이 되고, 내가 둘의 가장 좋은 친구로 남는다면.
내가 나루를 지키다가 죽었을 때에, 나루는 혼자 울지 않아도 된다.
나루가 느낄 죄책감 또한, 재경이 어루만져 줄 것이다.
* * *
내 친구가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내 평생에 걸쳐 사랑한 연인을 내 친구에게 넘겨주어야만 한다.
슬프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조금 울었다.
나를 위해 사랑을 포기하고, 그 사랑을 결코 드러내지 않았던 재경에게 고마워서.
평생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혼자 남겨두고 온 나루에게 미안해서.
그리고 나루와의 행복했던 나날이 그립고 아쉬워서.
이렇게 죽을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잘해 줄걸. 더 많이 행복하게 해 줄걸. 사랑한다는 말도 더 자주 할걸.
후회와 슬픔이 가슴에 사무쳤다.
하지만 곧 눈물을 멈췄다.
내게는 후회되는 일을 반복하지 않을 기회가 주어졌다.
이것이 죽어간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기회인지, 내게만 특별히 주어진 기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시간을 후회하지 않도록 살아갈 것이다.
내 사모하는 이가 나를 잃고 괴로워하는 일이 없도록, 내 소중한 친구가 속에 품은 사랑을 드러내지 못하고 힘들어하지 않도록.
* * *
결심을 굳힌다고 해서 내 마음을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재경이 나루와 가까워지도록 부추기며, 내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은 몹시도 크고 깊어서, 노력만으로 행동을 제어하기는 힘들었다.
20살의 나루는 귀엽고 풋풋하고 사랑스러웠다.
내 기억과 조금 다른 행동을 하기는 하지만, 시간을 돌아왔으니 모든 것이 옛 시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루는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워서,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있는 힘껏 그녀를 보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간혹 긴장을 늦추면 그녀를 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아니, 간혹이 아니다.
자주 그랬다.
옛 시간에서 늘 그랬기에, 내 눈은 습관적으로 나루를 찾아 헤맸다.
습관이란 무서웠다.
나는 군대에서 피우기 시작했던 담배를, 이 시간에 돌아와 피우게 되었다.
옛 시간에서 담배를 많이 피우지는 않았었다.
아주 가끔 일이 힘들 때, 고민이 있을 때 피웠다.
이 시간으로 돌아와 나는 늘 마음이 힘들었다.
담배를 피운다고 가슴에 이는 이 통증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피웠다.
재경에게 나루에 대한 고민 상담을 해 준 후, 나는 집 밖으로 나왔다.
술렁이는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나루가 있었다.
어스레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자칫 잘못하면 흩어질 듯 위태로웠다.
왜 저런 분위기를 풍기는 걸까?
왜 저렇게 슬픈 눈으로 나를 보는 걸까?
안아주고 싶었다.
저 마른 몸을 꼭 끌어안고, 괜찮아, 내가 옆에 있잖아, 슬퍼하지 마,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는 대신, 나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슬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내 옆으로 다가온 나루가 나를 올려다봤다.
나루의 새까만 눈동자를, 티 없이 맑은 그 눈동자를. 나는 무척이나 사랑한다.
옛 시간에도, 이 시간에도 마찬가지이기에, 사랑하는 까만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자,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이 소리가 그녀의 귀에 닿지 않기를.
“담배, 피우네?”
그때, 그녀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담배를 벽에 문질러 끄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원래 피웠어?”
이 시간의 나루는, 역시 뭔가 다르다.
나루는 절대 오지랖이 넓지 않았다. 호기심이 많지도 않은 편이었다.
내가 모르는 연나루의 일부분이 존재할 리 없다.
“원래라니?”
“어, 그러니까…… 언제부터 피운 거야?”
이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 걸까?
내 또래의 남자가 담배를 피운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보며 꼬치꼬치 캐묻는 나루가 이상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나루의 눈동자에 담긴 애정과 간절함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깨달았다.
그녀 또한 시간을 돌아왔음을.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어두운 그녀의 눈빛과 슬픔을 띤 미소, 그녀답지 않은 기이한 행동들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나루 또한 이 시간으로 돌아왔다고 하면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나루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녀를 지키려다가 내가 죽었으니,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와 연결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내가 그녀를 구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리라.
가슴이 미어졌다.
“고등학교 때부터.”
간신히 대답한 나는, 황급히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나루를 계속 보고 있다가는, 그녀를 끌어안게 될 것만 같았다.
내 몸은 여전히 그녀를 원했다.
그녀의 향기와 체온, 부드러운 살결을 그리워했다.
‘아, 어쩌지?’
난처한 상황이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던 20살의 연나루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를 사랑하는 연나루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계획을 변경해야 하는 걸까?
나를 사랑하는 나루에게 있어서 성재경은,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자, 나루에게도 좋은 친구였다.
나루가 과연 그런 재경에게 사랑을 느끼게 될까?
나에게로 향했던 마음을 재경에게로 돌릴 수 있게 될까?
혼란스러웠다.
내게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를 모르는 척할 수도 없었다.
이런 시간에 밖에 나온 이유는, 아마도 잠이 안 오기 때문이리라.
안 그래도 예민한 성격이라 불면증에 시달리는데, 이 시간으로 돌아와 잠이나 제대로 잤을지 걱정이었다.
―넌 내 수면제야.
불현듯 그렇게 말하며 말갛게 웃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네가 옆에 있으면 정말 잠이 잘 와. 난 원래 엄마 옆에서도 잘 못 자는데, 신기해.
재잘재잘 떠들던 그녀의 음성이 그리웠다.
그녀의 볼을 마음껏 만질 수 있었던 그 시간이 간절했다.
안 돼, 지금은 안 돼.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게 우선이야.
아직은 나루에게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돼.
그리 생각했지만, 밤길을 혼자 걸어가는 그녀를 보는 순간 결심이 무너졌다.
이런 길을 그녀 혼자 걷게 둘 순 없었다.
어둠 속에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혼자 걷는 그녀를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를 위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죽을 수 있을 만큼.
그 선택을 결코 망설이지 않을 만큼.
그런데 어찌 그녀를 혼자 보낼 수 있겠는가.
나와 같은 고독감을 느낄 것이 분명한 나루를 못 본 체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녀를 따라 걸었다.
바로 옆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걷고 싶었지만, 그 욕심은 꾹 눌러 담았다. 그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었다.
“나, 혼자 가도 돼.”
나루가 울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나루의 자그마한 뒤통수를 보며 생각했다.
바보야. 너, 정말 연기 못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