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나는 언제나 이 자리에
2017.11.06.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다.
나루는 젓가락을 멈추고 멍하니 재경을 응시했다.
재경이 머쓱하게 웃었다.
“왜 그렇게 봐? 내 질문이 너무 어려웠나?”
옛 시간, 이 나이의 나루였다면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루는 대학 입학 후, 12년을 더 살다가 돌아온 상황이었다.
이 또래의 아이들이 대학에 대해 어떤 희망을 품고 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물론 나도 옛날에는 여러 가지 상상을 했었겠지. 기대하는 것도 많았을 거고.’
“너는 어때?”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물었다.
“나? 음. 우선 축제.”
재경은 곧바로 대답했다.
“아, 축제. 맞아, 축제. 나도 대학 축제 궁금했었어.”
나루는 적당히 말을 맞췄다.
“대학 축제는 고등학교 때랑 다르겠지? 연예인도 초청하고 그런다더라. 게다가 우리 학교에는 응원단도 있고.”
“응원단 공연이 기대돼.”
“대학 MT도 궁금해. 수학여행을 가던 거랑은 다르겠지? 신입생 OT랑 비슷하려나?”
“아마 다를걸. MT는 좀 더.”
나루는 첫 MT 때를 떠올렸다.
“더 진상일 거야, 아마.”
술을 많이 마신다고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신입생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술을 마셔댔다.
자신의 주량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무리해서 마시고, 취하고, 토하고, 울고, 화내고.
대학 첫 MT 때 온갖 진상을 다 경험했던 기억이 났다.
“동아리 활동도 기대했었어. 봉사 동아리에서는 뭘 하려나.”
“그러고 보니, 재경이 너도 봉사 동아리지?”
“응. 아,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인데, 너 때문에 봉사 동아리 들어간 건 아니다.”
재경의 말에 나루는 웃었다.
그쯤은 알고 있었다.
재경의 꿈은 의사가 되어서 의료 봉사를 하는 것이었다.
노는 걸 좋아하게 생긴 외모와 다르게, 재경은 남을 돕는 일에 열심이었다.
“봉사하는 거 좋아해?”
나루가 물었다.
“좋아한다고 해야 하나? 그냥 어릴 때 부모님 따라서 주말마다 고아원도 가고, 장애인 복지 시설도 가고 그랬거든. 나한테는 큰일이 아닌데, 그 사람들한테는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되니까, 계속하게 되더라고.”
“그래.”
“수능을 좀 못 봐서 이 과에 오긴 했는데, 졸업하면 편입해서 의대에 갈 거야. 의사가 되면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뭐, 의사가 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넌 될 거야, 의사.”
재경은 의사가 됐다. 그리고 바쁜 일상 중에도 늘 시간을 내서 봉사를 하러 다니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 처음의 각오가 흐릿해질 법도 한데, 재경은 꾸준히 남을 도우러 다녔다.
그런 재경을 보며 늘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하하하.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나 진짜로 의사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재경이 웃었다.
“응, 될 거야. 그러니까 지금까지처럼만 해.”
“그래, 고마워. 힘난다. 더 열심히 해야지.”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나루가 내겠다고 했는데도 굳이 재경이 밥을 샀다.
“고마워, 다음엔 내가 살게.”
식당 앞에서 재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재경은 나루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나루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옆으로 걷어내 주었다.
“나루야.”
“응?”
“나, 대학 오면 하고 싶었던 게 하나 더 있었어.”
“뭔데?”
“연애.”
“…….”
“내가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랑 연애를 하고 싶었어.”
재경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늘 사랑을 받아왔는데, 내가 좋아해 본 적은 없어. 그래서 궁금했어. 내 마음이 가는 여자와 연애를 하는 게 어떤 기분일지. 대학에서 연애를 한다면, 내가 아주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고 싶었어. 설령 짝사랑으로 시작해도 좋으니, 내 마음이 가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어.”
재경의 표정은 평온했고 말투 또한 담담했다.
그래서 나루는 그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들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마음이 급했던 것 같아.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너만 보면서 일방통행을 해 버렸어. 미안해.”
“미안하다니. 아냐, 그렇게 생각하지 마.”
재경이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고, 또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를 하고 싶어. 그래서 너에 대한 마음을, 있는 힘껏 접을 거야.”
“…….”
“이제 날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신경 쓰지 말라니.”
“지후, 좋아하지?”
나루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알고 있어. 눈에 보이는걸. 나는 너만 보고 있어서, 네가 지후만 본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재경아.”
“모르는 척했어. 네가 좋아서. 그냥 내 마음 밀어붙이면, 너도 날 봐 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어.”
재경은 선미와 지영을 떠올렸다.
“내가 하는 짓이, 날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하는 짓이랑 다를 바가 없다는 걸. 많은 애들이, 내 사정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 마음을 밀어붙이고 곤란하게 만들거든. 너도 그랬겠구나, 싶더라.”
나루는 눈썹 끝을 내리고 재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재경이 하는 한마디, 한마디 전부 가슴에 새기겠다는 듯 눈을 떼지 않았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갖고 싶었다.
저 맑은 눈동자도, 고양이처럼 매력적인 아몬드형의 눈매도, 오뚝한 코와 붉은 입술도. 전부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너와 좋은 친구가 되고 싶어. 그러니까 나는 이제부터 있는 힘껏 널 좋아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거야. 하지만.”
재경은 각오를 했다.
그러나 미련을 전부 거두기는 힘들었다.
“혹시라도 너무 힘이 들면, 지후를 사랑하는 것이 지쳐서 그만두고 싶어지면. 여기로 와.”
“재경아.”
“나는 이 자리에 있을 거니까.”
나루는 눈을 감았다.
재경의 음성은 무척이나 다정했다.
지금 당장 그에게 기대고 싶을 만큼.
얼마나 어렵게 결심했는지, 나루는 알고 있었다. 나루 또한 사랑을 하고 있으니까.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상대의 마음이 조금 편안해질지도 알았다.
나루는 눈을 뜨고 재경과 시선을 맞췄다.
“응, 고마워. 고마운데.”
나루는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재경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밥집 앞에서 너무 진지한 거 아냐?”
재경이 웃었다.
“그러게. 근사한 레스토랑이라도 빌렸어야 했던 건데.”
* * *
명진은 소파에 앉아서 좋아하는 쇼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한참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데, 갑자기 채널이 바뀌었다.
막내 누나가 제멋대로 리모컨을 가지고 가서 채널을 바꾼 것이다.
명진이 돌아보자, 소파 뒤에 서 있던 막내 누나가 턱을 치켜들었다.
“왜? 뭐?”
예전이었다면 버럭 화를 냈을 것이다.
처음에는 티격태격하다가 나중에는 악을 쓰며 서로의 약점을 끄집어내서 상처를 입히려고 했을 것이다.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막내 누나와는 앙숙이었다.
어쩌면 전생에 철천지원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막내 누나의 날 선 눈빛을 보니,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앉아서 봐.”
명진은 화를 내는 대신에, 소파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막내 누나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당황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뭐야, 너? 무슨 꿍꿍이야? 소파에 뭐 묻혀 놨지?”
“내가 애냐. 그런 짓 안 해.”
“아닌데. 안 할 리가 없는데.”
막내 누나가 명진이 가리킨 소파 위를 살펴봤다.
“소파 안에 압정이라도 넣어 둔 거 아냐?”
“그럴 리가.”
“이상한데. 어디 아픈 거 아냐? 아니면 여기가 좀 이상하게 됐다거나.”
막내 누나가 관자놀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명진은 피식 웃고는 TV로 시선을 돌렸다.
막내 누나는 믿을 수가 없는지 명진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리모컨을 내려놓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명진은 리모컨을 집어 원래 보던 프로그램으로 채널을 변경했다.
‘나는 내년에 죽을지도 몰라.’
나루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증거를 본 건 아니지만, 그녀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루가 알려 준 시험 문제들이 정말 나오기도 했고. 걔 분위기를 봤을 때, 거짓말을 하거나 망상에 시달리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면 내년 봄.
‘나는 죽어.’
죽음을 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았다.
나루의 앞에서는 희망적으로 이야기했지만,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도통 들지 않았다.
지후가 죽었을 때, 나루는 염원했다고 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있는 힘껏 민지후를 사랑하지 않으리라고. 그리하여 민지후가 32살 이후에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겠노라고.
‘만약 지후를 살리기 위한 기회가 주어진 거라면.’
아주 잘됐을 경우, 지후를 죽음에서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후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할 수는 없을 가능성이 높다.
이 기회가 단지 민지후라는 사람 한 명만을 구하기 위해 주어진 기회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죽겠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죽는다.
오토바이를 타든 타지 않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집에만 머물든, 집 밖으로 나가든.
‘나는 내년 봄에 죽을 거야.’
아직은 실감이 되지 않았다.
내 인생에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한편 무섭기는 했다.
나루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년 봄에 죽는다는 말을 듣고 나서 한동안 괴로워했다.
잠만 자면 사고로 죽는 꿈을 꿨다.
오토바이를 타다가 차에 치이기도 하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칼에 찔리기도 했다.
꿈에서 죽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단 하나는 똑같았다.
죽기 직전 눈에 들어오는 광경.
구름 한 점 없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흐드러진 연분홍 벚꽃.
‘아아, 마지막 순간에 내 눈에 보이는 것이 무척이나 아름답구나. 이 아름다운 세상을 좀 더 살아보고 싶었는데.’
항상 그런 생각을 하며 잠에서 깨곤 했다.
‘이건 나한테 기회일지도 몰라.’
설령 내년 봄에 죽는다 해도, 나루가 과거로 돌아와 나의 죽음을 알려 주었다는 사실은 기회다.
좀 더 살아보고 싶은 세상을 더 살지 못한다면, 사는 동안이라도 후회 없게 살다가 가야 한다.
그래서 명진은 살아 있는 동안, 내 가족들에게 더 잘하겠노라고 마음먹었다.
내가 죽더라도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도록, 내 가족들 역시 나를 대했던 것들에 대해 후회하지 않도록.
‘땅 파는 건 관두자.’
우울한 생각은 시작하면 끝을 모른다.
우울해 봐야 바뀌는 것은 없다.
명진은 이 짧은 삶을 제대로 살고 가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니까 무서워하고 슬퍼하는 건 관둬야 한다.
TV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개그맨들의 입담에 집중하다가, 문득 지후에게로 생각이 흘러갔다.
‘민지후. 걘 대체 무슨 생각이지?’
아까 나루를 만났을 때, 지후가 윤영과 주말에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가벼운 놈이었나? 아니면 성재경 때문에 나루에 대한 마음을 감추려고 일부러 그렇게 행동하는 건가?’
그렇다면 방법이 별로다.
아무것도 모르는 윤영은 상처받을 것이다.
‘뭔가 이상한데.’
나루는 간간이 옛 시간에서의 지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녀의 이야기에 나온 민지후와 명진이 보는 민지후는 다른 느낌이었다.
‘역시 뭔가 이상해.’
* * *
새벽에 눈이 떠졌다.
윤영은 눈을 끔뻑거리며 천장을 응시했다.
‘이상한 꿈을 꿨어.’
나루가 나오는 꿈을 꿨다.
꿈에서 나루는 지금과 비슷한 듯 다른 느낌이었다.
비밀스럽거나 어두운 느낌은 조금도 없고, 무척 밝았다. 티 없이 환하게 웃고, 장난도 잘 쳤다.
꿈에 나루만 나온 건 아니었다.
재경도, 지후도 있었다.
나루의 옆에는 지후가, 윤영의 옆에는 재경이 앉아 있었다.
넷은 햇빛이 잘 들어오는 커피숍 창가 자리에 앉아, 특별한 주제가 없는 잡담을 끊임없이 나눴다.
간혹 지후가 나루를 사랑스럽다는 듯 응시했고, 나루도 그렇게 지후를 응시했다.
둘의 약지에는 같은 모양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적당히 좀 해라. 둘이 커플인 거, 아주 잘 알겠으니까.
꿈에서 윤영은 그렇게 말했다.
이상했다.
‘싫지 않았어.’
둘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싫지 않았다. 질투가 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이 같은 반지를 끼고, 서로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 둘은 서로에게 그러기 위해 존재한다는 듯.
꿈속의 김윤영은 그렇게 둘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무리 꿈이라도 현실을 반영하는 법인데, 왜 싫지 않았던 걸까.
‘그리고 그건 뭐였지?’
어느 순간 나루는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손에 턱을 괸 자세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루야. 무슨 생각해?
윤영이 물었더니, 나루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윤영과 눈을 맞췄다.
늘 예쁘다고 생각했던 까만 눈동자로 한참 동안 윤영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나루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게 참 그리웠어.
그 목소리가 묵직한 슬픔이 되어 가슴에 콱 박히는 바람에 잠에서 깬 것이다.
개꿈이라면 개꿈일 텐데, 너무 생생했다.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게다가.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슬픈 꿈이 아니었다.
분명 즐거운 광경이었다.
그런데 가슴이 아파서 울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윤영은 가슴 위에 지그시 손을 얹고 슬픔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잠시 그러고 있었더니 기분이 나아졌다.
‘정말 이상한 꿈을 다 꿨네.’
침대에서 내려오자, 생생했던 꿈이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씻고 나올 무렵에는 완전히 잊었다. 꿈에서 깨자마자 느낀 슬픔이 거짓말이라고 생각될 만큼.
‘그런 꿈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냐.’
오늘은 지후와 영화를 보기로 한 날이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도 한참 남았지만 준비할 것이 많았다.
지후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다.
지후가 ‘어, 얘한테도 이런 면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오늘을 위해 옷도 사고 화장품도 샀다.
‘꾸미긴 꾸미되, 너무 티가 나면 안 돼. 자연스럽게 예뻐 보여야지.’
지후와 오늘의 만남을 약속한 이후부터 계속 지후 생각뿐이었다.
어쩌면 오늘 이상한 꿈을 꾼 것도, 계속 지후 생각을 해서인지도 모르겠다.
‘단둘이 만난다는 건, 지후도 날 어느 정도 괜찮게 생각한다는 거겠지.’
남자는 관심 없는 여자와는 절대로 단둘이 만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시작이 좋다.
윤영은 거울 앞에 앉았다.
거울 속엔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귀여운 외모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와 복숭아처럼 붉은 볼, 입가에 머문 미소.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