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죽음은 언제나
2017.11.02.
나루는 눈을 부릅뜨고 굳어 있었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지만 듣지 못했다.
“누나, 피자 왔나 봐.”
미루가 어깨를 툭 쳤을 때에야 정신을 차렸다.
“미루야.”
“어?”
“자, 이 돈으로 피자 먹어. 나 잠깐 나갔다가 와야겠어.”
“어?”
놀란 미루의 손에 떠넘기다시피 돈을 쥐여 준 나루는, 휴대폰만 들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큰길로 향하며 명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명진이 졸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 졸린 토요일. 나 어제 게임하느라…….]
“나, 지금 학교로 갈 거야. 학교 앞에서 봐.”
[어? 뭐? 지금? 왜?]
“빨리 나와.”
[야, 연나루!]
나루는 전화를 끊고 택시를 잡았다.
나루가 택시에 타고 있을 때, 명진은 끊긴 휴대폰을 노려봤다.
“이 여자가, 진짜. 누굴 시다바리로 아나. 이렇게 갑자기 오라가라야? 내가 오란다고 오고, 가란다고 가는 사람이야? 내가 그렇게 쉬워?”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명진은 침대에서 내려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 진짜. 내가 왜 이 좋은 휴일에 학교를 가야 하는 거냐고.”
* * *
“죽음은 항상 존재했어.”
죽음은 늘 삶 속에 존재한다.
“그저 내 일이 아니라서.”
남의 일이라서.
“내 소중한 사람에게 닥친 일이 아니라서.”
내가 슬플 일은 아니라서.
“잊고 있었던 것뿐이야.”
내 일이 아니니까.
내 친구가, 내 가족이, 내 연인이 죽은 게 아니니까.
내 가슴이 아프지도, 내 심장이 찢기지도 않으니까.
겪은 당사자에게 허울 좋은 위로를 해 줄 뿐, 돌아서면 잊게 되는 것이 ‘죽음’이었다.
“네가 죽었다는 걸 잊었던 것처럼, 윤영이 동생이 죽었다는 것도 잊고 있었어.”
나루가 담담히 말했다.
“여름 방학 때, 윤영이네 가족은 계곡에 놀러 가. 비가 내린 직후라 계곡 물이 많이 불어 있었대. 가족들이 잠깐 눈을 뗀 사이에, 윤영이 동생이 물에 빠진 거야. 지완이는 살려 달라고 하는데, 윤영이 가족들은 그게 장난이라고 생각을 한 거지.”
“그래서?”
“그러고 나서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됐대. 그제야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고 구하러 갔는데, 지완이는 이미 떠내려간 후였어. 이틀 후에 하류에서 발견돼.”
“저런.”
명진은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장례식을 치르고 여름 방학 내내 울면서 보냈나 봐. 윤영이는 휴학을 하려다가, 자기까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2학기도 등록을 해. 2학기 때, 어떤 수업을 듣는데 걔가 내 옆에 앉았거든. 그때, 내가 여름 방학 잘 지냈냐고 물어봤고, 윤영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어.”
조용한 강의실에 윤영의 흐느낌이 퍼졌다.
교수와 학생들, 모두가 윤영을 돌아봤다.
나루는 황급히 일어나 윤영의 팔에 팔짱을 끼고 강의실을 나왔다.
“커피숍에 데리고 갔어. 윤영이는 계속 울고 있었고. 나는 이야기를 들었지. 위로를 해 줬고, 우리는 그걸 계기로 친해졌고, 나는 왜 친해졌는지를 잊게 됐어.”
나루는 큰 한숨을 내뱉었다.
“난 정말 최악이야. 내 일이 아니라고 다 잊다니.”
“뭐, 사람이 모든 일을 기억할 수는 없으니까. 보통 남의 일은 잘 기억 못 하지.”
“그래도. 동생의 죽음이 윤영이랑 친해진 계기였는데, 그조차 잊었어. 윤영이는 가슴에 묻고 살아갔을 텐데.”
“그럼 그걸로 좋은 거 아냐? 가슴에 묻은 걸 파헤칠 필요는 없잖아.”
“그야 그렇지만.”
“이런 거 하나하나 탓하다 보면, 기아 난민들이 죽는 이유도 네 탓이 되는 거야. 쓸데없는 자책은 하지 마.”
“응, 그래야지. 고마워, 명진아. 얘기 들어줘서. 그 일을 떠올리는 순간, 왠지 혼자 있기 무서웠어.”
“어, 뭐.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네. 그래서 어쩔 거야? 김윤영한테도 말할 거야?”
“말하면, 믿어 줄까?”
“안 믿지, 보통. 게다가 걘 널 좋아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싫어하지.”
나루가 씁쓸하게 말했다.
“네가 좀 말해 주면 안 돼? 나보다는 네가 윤영이랑 친해지기 쉬울 텐데. 친해진 다음에, 여름휴가를 물 있는 데로 가지 말라고.”
“말했잖아. 그건 안 된다고.”
“아, 맞다. 큰 틀을 벗어나지 말라고 했지.”
“응. 만약 김윤영이 물 없는 데로 여행 갔다가 다른 사고로 걔 동생이, 어쩌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다칠 수 있어.”
“하아, 그럼 어쩌지?”
“뭘 어째. 여름 방학 될 때쯤에, 김윤영한테 어디로 휴가 가는지 물어보고 따라가서 구하든가 해야지.”
“역시 그 방법밖에 없겠지?”
“잘됐네. 그렇게 해서 걔 동생을 구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게 증명되는 거니까. 잘하면 나도 21살 이후로 살아갈 수 있겠군.”
나루는 씩 웃으며 말하는 명진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뭐가?”
“너도 네 죽음 때문에 무서울 텐데.”
“글쎄. 아직은 실감이 안 돼서. 아, 네 말을 못 믿는다는 건 아냐. 그냥, 아직 죽어 본 적이 없어서 실감이 안 난다는 거지.”
“응. 너한테 정말 미안하고, 고맙고 그래.”
“그럼 커피나 사든가.”
“응, 당연하지. 내가 부른 건데.”
“야, 농담인데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내가 좀 민망하거든.”
“아냐, 진짜로 커피 정도는 내가 살게. 네가 없었으면 계속 혼란에 빠져 있었을 거야.”
* * *
옛 시간에서는 잊고 있었던 윤명진이라는 존재가, 이 시간에서는 나루에게 가장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는 게 신기했다.
역시 이 시간은 옛 시간과 다르다.
‘그렇다면 난 진짜로 짝사랑을 하는 중이구나.’
집으로 돌아오며, 나루는 생각했다.
‘어쩌면 지후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내가 아닐 수도 있게 되겠구나.’
그가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힘껏 노력하겠지만, 모든 짝사랑이 보답을 받는 것은 아니다.
나의 짝사랑만 특별히 애절하고, 특별히 애달픈 것 또한 아니다.
이 사랑이 보답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세상에는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참 많네.’
옛 시간에서는 그런 걸 모르고 지냈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고,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나라고 생각했다.
외모도 괜찮고, 머리도 좋았다.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좋은 성적을 받았고, 노력을 하면 더 대단한 성과를 얻어냈다.
거침없는 성격 덕분에 친구도 많았다.
항상 칭찬을 받고, 항상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가, 나를 가장 소중하게 여겨 주었다.
세상은 언제나 내 편이었다.
이 시간으로 돌아와 깨달았다.
세상이 꼭 내 편인 것만은 아니라고.
때로는 내가 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가 되기도 한다고.
어쩌면 주인공을 짝사랑하다가 잊히는, 여자 주인공의 대학 동기1로 남을지도 모른다고.
‘그럼 정말 싫겠다.’
집에 들어온 나루는 우선 미루에게 전화를 걸어, 하루 일찍 자취방에 돌아오게 되었다고 알렸다.
그러고 나서 책상에 앉아 고민에 빠졌다.
여름 방학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윤영의 동생을 어떤 식으로 구해야 할까.
‘여름 방학 물놀이를 가면, 네 동생이 죽을 거야.’
현재 시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들, 윤영이 믿어 줄 리 없었다.
‘이런 걸 믿어 주는 명진이가 특이한 거지. 나라도 누군가 갑자기 자기가 미래에서 돌아왔다고 하면, 절대 못 믿을걸. 지금 나조차도,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가끔 의심스러울 때가 있는데.’
나루는 노트를 꺼내 펼쳤다.
생각을 정리할 때 하는 습관이었다.
나중에 스마트폰과 탭 등, 여러 기기가 발달해 간편하게 메모를 할 수 있게 된 후에도, 이 버릇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루는 아날로그가 좋았다.
펜을 들고 번호를 써 본다.
1번. 여름 방학 윤영의 동생 지완이 물에 빠져서 죽음.
2번. 2학년 1학기 봄, 명진이 오토바이 사고로 죽음.
3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또 다른 죽음이 있을까?’
나루는 기억을 더듬었다.
대학 동기들 중에는 없었다.
고등학교 동창들 중에도 없었고, 중학교 동창들 중에는.
‘한 명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였던가.
중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서 놀다가 ‘누구누구가 자살을 했대.’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누구였더라.’
나루와 별로 친하지 않은 이름이라서 흘려들었다.
‘나중에 본가에 가면 졸업 앨범을 한 번 다 훑어봐야겠다.’
3번. 중학교 동창 누군가의 자살.
4번까지 쓰고 머뭇거리다가 적어 넣었다.
4번. 지후의 죽음.
3번에서 4번으로 가기까지 긴 시간이 존재했다.
아마 그 사이사이에 더 많은 죽음들이 존재할 테지만, 나루가 전부 신경 쓸 수는 없었다.
‘모두를 구하기 위해 돌아온 게 아니야. 내 돌발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아무도 몰라.’
이기적이라고 한대도 어쩔 수 없다.
나루의 목표는 하나.
민지후를 구하는 것.
다만 윤영의 동생인 지완은 내 소중했던 친구의 동생이니까. 명진은 이 시간으로 돌아와 소중한 존재가 되었으니까.
‘살리고 싶어.’
나루는 펜으로 노트를 톡톡 두드리다가 일어났다.
아침도, 점심도 먹지 못했는데, 벌써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성 식당에 가서 돼지고기 김치찌개나 먹고 들어와야겠다.’
나루는 회색 후드 재킷을 꺼내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타닥, 타닥, 계단을 내려갔다.
1층에 도착했을 때, 재경이 빌라 입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루를 본 재경이 걸음을 멈췄다. 나루도 멈춰서 재경을 올려다봤다.
“안녕?”
재경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응, 안녕.”
나루도 슬쩍 손을 올려 인사했다.
“어디 가는 길이야?”
재경이 물었다.
“응, 저녁 먹으려고.”
“아, 그래.”
“너는 본가에 갔다가 오는 길?”
“응. 내일 오려다가 그냥 오늘 왔어.”
재경은 원래 내일 지후와 함께 돌아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어젯밤의 일 때문에 지후가 껄끄러워서, 오늘 저녁에 있던 동창들과의 약속을 취소하고 먼저 돌아온 터였다.
회색 후드 재킷을 입은 나루는 중학생처럼 보였다.
“너, 그렇게 입으니까 진짜 어려 보인다.”
“그래? 젊음은 좋은 거야. 막 입어도 예쁘고.”
“하하하하. 넌 가끔 말할 때 보면, 마흔 먹은 아줌마 같을 때가 있어.”
재경이 웃으며 던진 말에, 나루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니, 왜 다들 마흔 살은 됐을 것 같다고 하는 거지? 명진이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난 고작 32살이었다고! 30대 중반도 아니고 초반!’
“저녁은 혼자 먹으러 가는 거?”
재경이 물었다.
“응, 혼자.”
“그럼, 같이 가도 될까? 나도 아직 저녁 먹기 전인데.”
재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마도 나루가 불편해할까 봐 마음을 쓴 것이리라.
“그래, 같이 가자. 대신에 넌 돈가스를 먹어.”
“돈가스?”
“응. 한성 식당은 돼지고기 김치찌개랑 돈가스가 맛있는데, 난 김치찌개를 먹을 거거든.”
“아, 그래. 메뉴 고를 필요 없어서 편하네.”
재경과 함께 빌라에서 나와, 한성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한성 식당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 요리가 나올 때까지, 대화는 끊임이 없었다.
시답잖은 이야기였지만 즐거웠다.
옛 시간에서의 관계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나루는 알고 있었다.
재경은 있는 힘껏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나루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런 재경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차라리.’
왕자처럼 화려한 재경의 얼굴을 보며, 나루는 생각했다.
‘내가 이 시간으로 돌아와서 재경이를 사랑하게 되었더라면, 더 편했을까?’
지후를 생각하면 가슴이 따끔, 따끔. 아프다.
그를 사랑하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데,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이가 나를 사랑하지 않음이, 이토록 아프고 절절한 것인 줄은 몰랐다.
서로 사랑했기에, 이 고통을 모르고 지냈다.
‘재경이도 이런 기분일까?’
내가 지후를 짝사랑하듯, 재경 또한 나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내가 지후를 볼 때 명치가 아려오듯, 재경 또한 그런 걸까?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재경이를 좋아했으면…… 나도 재경이도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 텐데. 지후가 나를 귀찮아하는 일 또한 없었을 텐데.’
영화나 드라마에서 삼각관계나 짝사랑 소재가 나오면, 늘 가볍게 생각했었다.
그냥 마음을 접으면 되지, 그게 뭐가 어렵다고.
세상에서 내 마음이 가장 소중한 거잖아. 왜 굳이 아픈 쪽을 선택하는 거야?
몰랐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나는 지금도 내 마음이 제일 소중하지만, 쉽지 않아. 아무리 힘껏 노력해도 흘러가는 마음을 막을 수가 없어.’
이 마음이 흐르는 방향에 둑을 쌓아, 흐르는 방향을 바꿔 재경에게로 향하면 훨씬 더 행복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잘 알아도.
‘마음에 둑을 쌓을 수가 없어.’
“이거 정말 맛있다.”
재경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재경은 한 입 베어 문 돈가스를 살살 흔들고 있었다.
“응, 그거 진짜 맛있지? 내가 여기 돈가스를 정말 좋아해. 가끔 생각나더라고.”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그랬지. 여기 맛이 그리웠다고. 이 근처에 자주 왔었나 봐.”
“아…….”
조심해야 하는데, 잠깐만 마음을 놓으면 말실수를 하게 된다.
“그리울 만하네. 밑반찬도 훌륭하고.”
다행히 재경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보통은 상대가 시간을 되돌아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지.’
적당히 둘러대면 되는 일인데, 너무 긴장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시험은 잘 봤어?”
재경이 물었다.
“그럭저럭. 나쁘진 않은 것 같아. 너는?”
“나도 그럭저럭. 대학 시험은 중, 고등학교 때랑 많이 다르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막상 그렇게까지 다르지도 않은 것 같더라.”
“그렇지. 결국 달달 외워야 하는 건 마찬가지야.”
“응. 영화나 드라마 보면, 대학에선 토론하고 그런 모습 많이 보여 주잖아. 그럴 줄 알았는데, 다른 게 없어. 고등학교 때보다 공부할 게 더 많아졌다는 거 빼고는.”
“그리고 OMR카드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 맞아, 맞아.”
재경이 웃었다.
옛 시간에서도 늘 생각했지만, 재경의 웃는 얼굴은 참으로 근사하다.
왕자처럼 화려한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번지면, 주위가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외모도 외모지만, 이 웃는 얼굴이 재경의 인기에 한 몫을 더했을 것이다.
재경이 돈가스 한 조각을 나루의 앞 접시에 덜어주며 물었다.
“나루, 너는 대학에 오면 특별히 하고 싶었던 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