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사랑싸움
2017.10.30.
뚜르르―
울리는 신호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후가 내 전화를 받아줄까?
긴장해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받지 않으려나 보다 싶을 정도로 오랫동안 신호음이 울린 후.
[네.]
지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부드러운 음성을 듣자 괜히 눈가가 시큰거렸다.
“나야, 나루.”
[알아. 번호 저장해 놨으니까. 무슨 일이야?]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하아.]
지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루가 들으라고 일부러 더 크게 내쉬는 것 같아서 가슴이 따끔거렸다.
“뭐 하고 있었어?”
애써 명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전화, 불편하다.]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나루는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예상한 반응이기는 해도 직접 겪으면 아프다.
‘그거 알아, 지후야? 너랑 나는 언제 어느 때든 전화를 해도,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는, 그런 사이였었어. 가족보다도 더 편하게 전화를 걸 수 있는, 그런 사이였었어.’
이 시간의 민지후는 옛 시간의 민지후가 아니다.
지후에게 나는 연인이 아닌, 친구가 좋아하는 여자일 뿐.
그냥 아는 관계여도 그의 마음을 얻기 힘들 텐데, 친구가 짝사랑하는 여자의 위치에 있다니.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 최악의 상황에서, 지후와의 관계를 새롭게 시작해야만 했다.
[이런 식으로 전화하는 건 그만둬.]
나루가 한동안 대답이 없자, 지후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이런 전화 불편하면, 그냥 받지 않으면 되잖아.”
[어떻게 그래?]
“어떻게 그러긴. 귀찮은 여자 떼어내는 셈 치고 연락 안 받으면 되지. 수신 거부를 해도 되고.”
[같은 과잖아. 실험할 때는 같은 조이기도 하고. 학교 일로 연락하는 걸지도 모르니까.]
“넌 너무 다정해.”
[여기서 왜 그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네. 난 너한테 다정하게 군 적 없어.]
“지금 그러고 있잖아. 내가 싫으면 그냥 딱 끊어내. 이렇게 내가 착각하게 만들지 말고.”
[하아. 대체 내 어느 부분이 널 착각하게 만든다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이거. 불편하다면서도 내 칭얼거림을 받아주는, 이거.”
[하아.]
“한숨 좀 그만 쉬어. 한숨 한 번에, 수명이 1초씩 줄어든대.”
[네가 그런 비과학적인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네.]
“나도 이런 비과학적인 이야기를 할 줄 알아. 나는 네가 모르는 모습들이 아주 많이 있고, 그걸 너한테 하나씩 보여 주고 싶어.”
[아니,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노래 듣고 싶어. 노래 불러 줘, 지후야.”
옛 시간에서는 통화를 하다가 이렇게 느닷없이 요청을 하곤 했다.
그러면 지후는 작게 웃으며 노래를 불러 줬다.
부드럽게 흘러가는 나직한 음색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하하하하.]
지후가 웃음을 터뜨렸다.
억지웃음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웃음소리였다.
“왜 웃어?”
[황당해서. 내가 너한테 왜 노래를 불러 줘야 하는데?]
“나는 생떼를 부릴 줄 아는 여자거든.”
[아, 그래? 그거 참 매력 없네.]
“그럼 앞으로 생떼는 안 부릴게.”
[하아.]
지후가 또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런 전화 불편해. 앞으로는 전화하지 마. 끊는다.]
뚝―
나루가 대답할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옛 시간에서 지후와 통화를 할 때면, 언제나 나루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네가 먼저 끊어, 아냐, 네가 먼저 끊어.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나루가 먼저 끊곤 했다.
지후가 먼저 전화를 끊어서 이어지는 적막은 생소하고 씁쓸했다.
* * *
끊긴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지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전화를 끊는 순간부터 미간에 자리 잡은 주름이 사라지지 않았다.
“지후, 뭐해?”
본가에 돌아온 김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이 담배를 피우러 나와, 지후에게 물었다.
“아니, 그냥.”
“누구 전화기에 밖에 나와서 받아? 여친이야?”
“아냐, 그런 거.”
“아니긴. 표정 보니까 여친이랑 싸운 표정인데.”
“정말 아냐, 그런 거.”
동창이 담배를 꺼내 지후에게 내밀었다.
지후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물었다.
“나야 고딩 때부터 피웠다고 쳐도, 너 담배 피우는 건 못 봤었는데. 언제부터 피우기 시작한 거?”
“대학 입학하고 나서부터.”
“대학도 좋은 데 들어간 놈이, 무슨 고민이 있으셔서.”
동창의 말에 지후가 피식 웃었다.
“담배가 꼭 고민이 있어야 피우냐.”
“그래서 네 여친은? 예뻐?”
“여친 아니라니까 그러네.”
“아직 아닌 건가? 간만 보는 중?”
“그런 것도 아냐.”
“뭐가 아냐, 솔직히 여자랑 통화한 거 맞긴 맞잖아.”
“아니라니까.”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술집 문이 열리고 재경이 나왔다.
재경이 지후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너, 담배 피우냐?”
지후가 담배를 든 손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어.”
“언제부터?”
“대학 입학하고 나서부터.”
“그래? 몰랐는데.”
재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야, 재경. 지후, 여자 생긴 거 맞지?”
동창이 끼어들었다.
지후는 입을 틀어막고 싶다는 표정으로 동창을 노려봤지만, 눈치 없는 동창이 계속해서 말했다.
“이 자식, 이거. 방금 여자랑 통화한 필인데, 자꾸 아니라고 하잖아. 얘, 여자 생겼지?”
재경이 지후를 흘끗 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무슨 말이야? 없는 거 알면서.”
“지후, 넌 가만히 좀 있어 봐. 어때? 너도 아는 여자야? 너네 대학?”
“응, 우리 대학. 우리 과야.”
“그게 무슨!”
“아, 지후 넌 끼어들지 말라니까. 어떠냐? 예뻐?”
“응, 예뻐. 엄청. 하얗고 작아서, 아기 여우 같은 느낌이야.”
재경의 설명에, 지후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오, 그래. 이것 봐. 여자 있을 줄 알았다니까. 방금 딱 여자랑 통화한 분위기였다고.”
“아, 그래?”
재경이 지후를 쓱 보고는 피식 웃었다.
지후는 가만히 재경을 노려보다가 재경의 손목을 잡았다.
“우리, 얘기 좀 하자.”
“난 할 얘기가 없는데.”
“난 있어.”
“난 없어.”
“난 있다고.”
지후가 단호하게 말하고 재경의 팔을 잡아끌었다.
둘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동창은, 둘의 모습이 골목 안으로 사라진 후 중얼거렸다.
“뭐야, 저 둘. 사랑싸움이야?”
* * *
“놔, 민지후.”
지후에게 끌려가다시피 골목길을 걸어가며, 재경이 말했다.
지후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앞만 보고 걸었다.
재경은 한숨을 삼키고 다시 한 번 말했다.
“민지후, 놔.”
지후가 걸음을 멈추고 재경을 돌아봤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의 끝이었다.
고장 난 가로등 하나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어스레한 가로등 불빛이 빛날 때마다 지후의 눈동자가 어둠보다도 검게 빛났다.
왜일까.
재경은 최근에 지후가 낯설게 느껴졌다.
형제처럼 지내서 그 어떤 이야기도 다 할 수 있는 친구였다. 가족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가장 편한 존재였다.
그랬던 친구가 아주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앞에 있는데,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내 탓이겠지.’
지후의 탓이 아니다.
지후는 변한 것이 없다.
그저 내가 나루를 사랑해서, 내가 지후를 질투해서 이런 마음이 드는 것뿐.
“너, 왜 이래?”
지후가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뭘?”
“왜 거짓말을 해?”
“거짓말이라니. 난 거짓말을 한 기억이 없는데. 너, 나루랑 통화한 거 맞잖아.”
재경의 지적에 지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나루였구나.’
휴대폰을 확인한 지후가 황급히 일어날 때부터, 나루일 거라고 짐작은 했다.
짐작할 때와 그것이 들어맞았을 때는 기분이 다르다.
가슴이 따끔거렸다.
이 미련한 가슴. 아직도 미련을 못 끊어서.
재경은 쓴웃음을 흘렸다.
“나는 연나루랑 아무 사이도 아니야.”
지후가 말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나루가 들으면 서운하겠다, 야.”
최대한 가볍게 들리기를 바라며 말했다.
하지만 지후는 재경을 향해 가볍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지후의 눈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나 때문에 나루를 피하는 거라면 관둬. 난 이제 나루에 대한 마음을 접었으니까.”
“무슨 소리야, 그게.”
“너도, 나루 좋아하잖아.”
재경은 지후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지후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누구 마음대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정해?”
“그럼 아니야? 너, 나루 안 좋아해?”
“안 좋아해.”
“거짓말하긴. 내가 너를 모르냐, 민지후? 뻔하지. 너도 나루가 좋은데, 내가 좋다고 하니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한 거겠지. 안 그래?”
“넌 나를 아주 모르는 것 같다. 안 그래.”
“안 그렇긴.”
“지레짐작하지 마.”
“지레짐작이 아니야. 최근 네 행동을 생각해 봐. 너, 처음부터 나루를 신경 썼어. 내가 아는 민지후는 이유 없이 여자한테 친절한 성격이 아니야.”
“말했잖아. 내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아, 그만!”
재경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 빌어먹을 내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 타령하지 마.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민지후.”
“…….”
“네가 나루를 좋아하니까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하는 거잖아.”
이렇게 언성을 높일 생각이 아니었다.
차분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나루에 대한 마음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척, 지후의 등을 밀어줄 생각이었다.
지후가 나를 위해 그랬듯이, 재경도 그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꾸만 아니라고 우기는 지후를 보니, 울컥 화가 치밀었다.
“내가 바보야? 나, 너랑 몇 년을 친구였냐? 내가 널 몰라? 네가 그런 눈빛으로 나루를 보는데, 어이구, 내가 좋아하는 여자라서 지후가 저런 눈빛으로 나루를 보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이 되겠어?”
“재경아…….”
“인정하기 싫어서 계속 모르는 척했어. 나루, 내가 갖고 싶어서 네 마음 눈치챘으면서도 모르는 척했어. 그런데 이제 관두려고, 그거. 너랑 나루 사이에서, 나 혼자 전전긍긍 비참해지는 거, 그만두려고.”
지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재경은 자신도 비슷한 표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루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대, 민지후.”
재경은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봤을 때, 그건 너인 것 같아. 너도 알지?”
“아냐, 재경아.”
“부정하지 마. 너도 알잖아. 아니까 요새 나루한테 더 차갑게 대한 거잖아. 그래도 좋아서, 밀어내려고 다짐했어도 좋아서, 오늘 걸려온 전화를 받은 거잖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내가 알아, 그 마음. 나도 그렇거든. 나루를 밀어내야 하는데, 좋아서. 미운데도 좋아서. 자꾸만 걔를 보게 되거든. 너처럼.”
“……재경아.”
“난 네가 소중해, 민지후. 그래서 싫어. 여자 때문에 네가 멀게 느껴지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거, 그거 정말 싫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둘래, 이 짓. 나루를 사랑하고, 널 질투하는 이런 거. 이제 관둘래.”
재경은 크게 심호흡했다.
다 털어놓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이제 내 눈치 보지 마.”
“눈치 본 적 없어. 네가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나는 나루를 좋아하지 않아. 네가 걔를 포기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지후야.”
“네가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네 멋대로 날 판단하지 마. 나는 널 위해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포기할 만큼 속 좋은 놈 아니니까.”
평소답지 않게 빠른 어조로 말을 끝낸 지후가 휙 돌아섰다.
“야, 민지후. 얘기하다 말고 어디 가?”
“얘기 끝났어.”
재경이 걸음을 서둘러 지후를 따라잡았다.
“난 얘기 안 끝났어.”
“난 끝났어.”
“나루는.”
“내 앞에서 나루 얘기 하지 마.”
지후가 으르렁거리듯 덧붙였다.
“나는 연나루 같은 타입, 딱 질색이니까.”
* * *
“누나. 나 맛있는 거 사 주라.”
토요일 오후에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빈둥거리는데, 늦잠을 자고 나온 미루가 옆에서 칭얼거렸다.
“네가 사 먹어.”
“나 용돈 적은 거 알잖아.”
“그럼 돈을 아껴 써.”
“아껴 쓸 돈이 있어야 아껴 쓰지. 그러지 말고 나 피자 시켜 주라. 누나도 점심 먹어야 하잖아.”
“다이어트 중이야.”
“개뿔. 새벽 2시에 라면 끓여 먹는 거 봤거든?”
“남 먹는 걸 왜 몰래 보고 야단이야?”
“몰래 보다니. 대놓고 보는데도 모르고 먹더니만. 냄비까지 먹을 기세더라.”
“아, 됐어. 나도 돈 없어. 과외 시작하면 사 줄게.”
“아, 좀 사 달라고. 지훈이네 누나는 만날 먹을 거 사 준다던데. 우리 누나는 진짜.”
“지훈이네 누나는 지훈이랑 나이 차이가 10살이나 나잖아. 10살이나 어린 동생이 얼마나 귀엽겠어?”
“나도 누나보다 3살이나 어리거든? 난 안 귀엽냐?”
“귀엽겠냐? 누나한테 냄비까지 먹겠다고 그러는 애가?”
“누나는 냄비 안 먹게 생겼어. 그러니까 피자 사 줘.”
이러다가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아서, 결국 피자를 시켰다.
“역시 우리 누나가 최고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 미루가 게임 한 판 하고 오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남동생이라는 존재는 평생 누나를 귀찮게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얘기, 누군가한테 들었었는데.’
―남동생이라는 존재는 평생 누나를 귀찮게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분명해. 그런 말을 자주 했었어. 입버릇처럼.
‘그래, 윤영이가 했었지. 2학기 때, 분명.’
윤영은 울면서 얘기했다.
‘울었어. 울었었어.’
―그러면 지완이는, ‘어쩔 건데? 그래서 누나가 어쩔 건데?’ 그러면서 까불어댔어. 그게 얼마나 얄밉던지. 콱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아.
‘그리고.’
―그래서 죽었나 봐.
‘죽었어.’
―지완이가 죽은 건 나 때문이야. 내가 그런 생각을 해서. 그래서. 그래서 죽은 거야.
기억이 났다.
2학기 때, 윤영과 친해진 이유.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날의 광경이 머리를 강타했다.
뇌가 뒤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나루는 벌떡 일어났다.
1학년 여름 방학 어느 날.
윤영의 가족이 휴가를 간 어느 계곡에서, 윤영의 동생이 급류에 휘말렸다.
그리고.
‘죽었다.’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