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너를 좋아해
2017.10.26.
지후의 눈이 커졌다가 가늘어지고,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지후는 한동안 대답 없이 나루를 응시했다.
이윽고 입을 연 지후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데이트를 하고 싶다고?”
이 목소리를, 나루는 기억하고 있다.
지후는 기분이 나쁠 때 이런 목소리를 냈다.
“응, 데이트를 하고 싶어.”
“나랑?”
“응, 너랑.”
지후가 한쪽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너, 내가 누군지 모르냐?”
냉랭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알아. 민지후잖아.”
“아니, 그 전에. 나는 재경이 친구야.”
“재경이 친구이기 이전에, 넌 민지후잖아. 네가 날 때부터 재경이 친구였니?”
“하. 그런 뜻이 아니라.”
지후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루가 성가시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내 친구가 좋아하는 여자랑 데이트를 할 리가 없잖아.”
“못 할 건 없잖아. 내가 재경이랑 사귀는 것도 아니고.”
지후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관둬라. 나랑 재경이 사이에 끼어들어서 이간질시키지 마.”
“너를 좋아해.”
“…….”
“나는 재경이가 아니라 네가 좋아.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좋았어. 너랑 데이트하고 싶어.”
“떼쓰지 마.”
“이게 떼쓰는 걸로 보이니?”
“그래. 나는 너 싫어.”
아, 이건 좀 아프다.
나루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재경이 문제가 아니더라도, 난 너한테 관심 없어. 이런 식으로 데이트하자고 밀어붙이는 거, 불편하다. 그리고.”
지후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입술 그만 깨물어. 피나겠다.”
울컥 화가 났다.
“싫다면서 걱정은 왜 해 줘? 피가 나든 말든 신경 꺼!”
“아, 그래? 그럼 신경 끄지.”
지후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야, 민지후!”
“왜?”
지후는 짜증스럽게 대답하면서도 뒤를 돌아봤다.
아, 이 남자는 이런 순간에도 사랑스럽다.
짜증이 나면 그냥 가 버릴 것이지, 왜 대답은 하고 야단이람.
“너, 이상형이 뭐야?”
나루의 질문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지후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냐고.”
“그건 또 왜?”
“그런 여자가 되게.”
순간, 지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착각일 것이다.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여자 앞에서, 지후가 웃을 리 없으니까.
“떼쓰지 않고, 잠자면서 침 흘리지 않고, 아랫입술 깨물지 않는 여자.”
“난 잠자면서 침 안 흘리거든!”
“글쎄. 네 얘기를 한 건 아닌데.”
나루는 아랫입술을 깨물려다가 그만뒀다.
“떼쓰지 않고, 잠자면서 침 안 흘리고, 아랫입술 안 깨무는 여자가 될 거야. 그때가 되면 나한테 반하도록 해.”
“명령이냐?”
“부탁이야.”
“명령조인데?”
“부탁조라고.”
지후가 돌아섰다.
“너한테 반할 일 없어. 재경이 좋은 녀석이야. 네가 그런 여자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재경이는 너만 사랑해 줄 거야.”
“나는 지금 너랑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우리 사이에 재경이를 끼워 넣지 마.”
“우리는 없어. 나한테 있는 건 재경이뿐이야.”
“아, 그러셔? 그럼 계속 그렇게 재경이로 방패를 삼아 봐. 내가 그 방패, 뚫어 줄 테니까.”
“그러시든가.”
나루가 휙 돌아서서 탁탁탁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쾅―!
비상구 문이 닫히는 소리도 들린 후에야, 지후는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아까부터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지후는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중얼거렸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 * *
집에 들어온 나루는 침대에 엎드렸다.
“으아아아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난 바보야.”
그런 식으로 밀어붙이면 없던 정도 떨어질 것이다.
‘아, 그러려던 게 아닌데.’
나루는 결심을 하면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
그게 이런 순간에 드러날 줄은 몰랐다.
‘싫다는데 억지로 고백하는 것만큼 정 떨어지는 일도 없는데. 지후는 날 더 싫어하게 됐겠지.’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10분 전으로 돌리고 싶었다.
그러면 우아하고 어른스럽게, 32살의 사랑 방법을 보여 줬을 텐데.
‘아니, 우아하고 어른스럽지 않았을 거야.’
사랑에 빠진 사람은 다 똑같다.
나루와 지후는 32살에도 10대처럼 유치하고 즐겁게 사랑을 했다.
알콩달콩 나누는 바보 같은 장난으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었다.
‘게다가 난 짝사랑을 해 본 적도 없다고.’
지후가 첫 남자 친구는 아니었다.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몇 번인가 남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었다.
전부 고백을 받아서 사귀었지, 나루가 먼저 좋아한 적은 없었다.
어떤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 고백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다가가서 마음을 얻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걸 전문으로 가르쳐 주는 학교가 있으면 좋을 텐데.’
나루는 옆에 놓여 있던 토끼 인형을 집어 들었다.
“그래도 민지후. 넌 나한테 푹 빠지게 될 거야.”
옛 시간, 지후가 보여 줬던 사랑에 확신을 가지기로 했다.
―나, 원래 다른 대학도 붙어서 우리 대학이랑 놔두고 되게 고민했었거든. 만약 다른 대학 들어갔었으면 너랑 지금 이러고 있지도 못했겠지.
지후의 품에 안겨, 그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지후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나는 사람의 인연이 있다고 믿어. 대학에서 못 만났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분명히 만났을 거야. 그리고 사랑에 빠졌겠지.
그런 사랑이었다.
나를 위해 망설이지 않고 목숨까지 던진, 그런 사랑.
그러니까 믿어야 한다. 그와 나의 인연을.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분홍빛 반짝이는 끈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 * *
오랜만에 본가에 왔다.
기억보다 훨씬 젊은 부모님의 모습에, 괜스레 눈물이 나왔다.
울면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 코를 훌쩍거리며 눈물을 삼켰다.
“엄마, 아빠. 보고 싶었어요.”
“뭐니, 징그럽게.”
엄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시크했다.
“나도 우리 딸 보고 싶었지.”
아빠는 늘 그렇듯 다정했다.
“아, 용돈을 주는 건 이번 달까지다. 얼른 알바 구해.”
물론 돈에 있어서는 아주 냉정했다.
“안 그래도 과외 구하려는 중이었어.”
젊어진 부모님을 봤다는 감동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
가족은 옛 시간에서든, 이 시간에서든 똑같은 감정을 자아낸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 있으니, 이제야 오롯이 내 시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시간으로 돌아오게 된 후, 가장 편안했다.
어색할까 봐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미루는?”
엄마를 도와 저녁을 차리며 물었다.
“학원 갔지, 뭐. 공부도 안 하면서 학원에는 뭐 그리 돈을 쏟아붓는지. 쯧.”
엄마가 혀를 찼다.
학원을 다니는 연미루라니.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
“월요일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여긴 지옥이야!”
라는 말을 하던 옛 시간의 미루가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그래, 내 동생도 고교생이었을 때가 있었지. 그때는 아저씨 같았는데.’
“그런데 네가 웬일이니? 밥 차리는 걸 다 돕고.”
엄마가 놀랍다는 듯 물었다.
“그냥, 엄마 힘들 것 같아서.”
“전에는 안 힘들 것 같았고?”
“에이, 또 뭘 그렇게 까칠하게 반응하신담. 그냥 철없던 딸이 대학 들어가니 철 좀 들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해 줘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무서워. 하던 대로 해.”
“이제 쭉 이렇게 할 거야.”
가족들에게 다정한 딸은 아니었다.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잘하지도 않았다.
옛 시간에서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과 함께 여행 한 번 가본 적이 없었다.
30살이 넘어갈 무렵, 생각했었다.
이 연구만 끝내면, 지후랑 결혼하기 전에 엄마 아빠 모시고 해외여행 다녀와야지.
31살이 되었을 때, 엄마는 관절이 안 좋아져 수술을 했다. 장기간 여행을 다니기 힘들어진 것이다.
사람은 늘 후회를 한다.
가장 많이 하는 후회가 ‘살아 계실 때 잘할걸.’이라는, 부모님에 대한 후회다.
부모님이 내게 해 주는 것들은 당연하지만, 내가 부모님에게 해 드리는 것은 시간이 나야 하고, 돈이 있어야 하고, 피곤하지 않아야 하고.
그렇게 이유를 붙여, 미루고 미루다가 후회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간으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나루도 같은 후회를 했을 것이다.
부모님 모시고 여행 한 번 가본 적 없는데,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일찍 모시고 어디 좀 다녀올걸.
그런 후회들이 가슴을 새까맣게 물들였으리라.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은 진리였다.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만 한다는 것을,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나의 가족들도, 연인도, 친구들도,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몰랐다.
“어, 누나? 어쩐 일이야, 집엘 다 오고?”
학원에서 돌아온 미루가 나루를 보고 놀란 듯 물었다.
옛 시간에서와 달리 한참 어려진 미루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뭐야? 왜 그렇게 웃어, 징그럽게.”
미루가 질색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냥 오랜만에 보니까 좋아서.”
“좋으면 집에 좀 자주 오든가. 자취 시작했다고 집에 너무 무심한 거 아냐?”
“그러게. 이제 좀 자주 와야겠어. 너는 공부 잘되고?”
“그냥 그렇지. 난 누나처럼 머리가 좋지 않아서.”
“그래도 넌 성공할 거야.”
옛 시간에서 미루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수능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닌데 마침 정원 미달이었던 수도권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 성적도 관리를 못 했는데, 면접을 잘 본 건지 대기업에 입사했다.
―난 운을 타고 났어.
그게 미루의 입버릇이었다.
물론 매일 회사 가기 싫다고 징징거리기는 했지만.
“누나가 어쩐 일이래? 식사 준비를 다 돕고.”
미루가 수저를 놓으며 신기해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집안일을 안 했었나?”
“엄청 안 했지.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했잖아. 철딱서니 없어가지고. 이제 대학 들어가서 철 좀 들었나?”
3살 어린 미루는 틈만 나면 오빠 행세를 하려고 했다.
“누나한테 까분다, 아주. 엄마, 얘 말하는 것 좀 봐.”
엄마한테 일렀더니.
“맞는 말 했네, 뭐.”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루는 입술을 비쭉거리며 식사 준비를 끝내고 아빠를 불렀다.
네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건, 옛 시간에서도, 이 시간에서도 오랜만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설거지까지 도운 후, 방으로 들어왔다.
기억 속에 있는 방의 배치를 둘러보니 그리움이 사무쳤다.
유치원을 다닐 무렵부터 이 방에서 생활했다.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엄마 몰래 가지고 온 화장품으로 화장도 해 보고.
앞으로 5년 후, 미루까지 대학에 보낸 부모님은 이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그때는 오랫동안 살아온 집이 다른 사람에게 팔린다는 데에 대한 감흥이 없었다.
그저 ‘그 집, 오래되긴 했지.’라는 생각만 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시간을 돌아온 지금, 이 집과 이별하게 되는 것이 아쉽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나. 들어간다.”
미루는 늘 그랬듯 대답도 듣지 않고 안으로 들어왔다.
“노크를 했으면 대답 좀 듣고 들어와.”
“가족끼리 뭘 그렇게까지 따져. 노크했으면 된 거지. 까탈스럽긴.”
미루가 투덜거리며 침대 끝에 걸쳐 앉았다.
“왜? 공부하는 데 무슨 고민 있어?”
“아, 그놈의 공부 타령 좀 그만하시고.”
“그럼 고등학생이랑 공부 말고 무슨 얘기를 할까?”
“누가 범생이 아니랄까 봐. 누나, 학교에서 인기 없지? 따돌림 당하고 그러지 않아?”
“알다시피 나는 인기가 많네요.”
거짓말을 했다.
물론 옛 시간에서 나루는 인기가 많았다.
중, 고등학교 친구들은 물론, 대학 친구들 사이에서도 늘 예쁨을 받았다.
“이런 성격에 인기 많은 거 보면 신기하다니까. 밖에서는 엄청 가식 떠는 거 아냐?”
“원래 인간은 어느 정도 가식을 부릴 줄 알아야 돼. 그게 사회생활이란다, 동생아.”
“됐고. 누나,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응? 갑자기 왜?”
“그냥 좀.”
미루가 나루를 빤히 응시했다.
나루와 닮은 고양이 같은 눈이 진지했다.
“평소랑 다른 것 같아서.”
“달라? 내가? 왜? 집안일 한 것 때문에?”
“아니, 그것도 놀랄 노자이기는 한데. 그런 게 아니라 분위기가 좀 그러네.”
역시 가족은 날카롭구나.
단 몇 시간 같이 있었을 뿐인데 간파 당했다.
동생도 이렇다면 부모님도 나루의 변화를 눈치챘을 가능성이 높았다.
“엄마도 좀 걱정하는 눈치던데.”
아니나 다를까. 미루가 덧붙였다.
“그래?”
“응. 대학 들어가서 벌써 실연당하고 그런 건 아니지?”
“야, 그런 거 아니거든.”
‘내 동생, 진짜 날카롭구나.’
실연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상황이다.
나루는 생각지도 못한 동생의 날카로움에 당황했다.
“뭐, 별일 아니면 됐어. 집에 좀 자주 오고.”
“그래.”
미루가 일어났다.
“미루야.”
방문을 여는 미루를 불렀다.
미루가 돌아봤다.
“고마워, 걱정해 줘서.”
나루의 말에 미루가 오만상을 찌푸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야, 징그럽게.”
저 성격은 옛 시간에서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 * *
시험이 끝난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본가에서 보내다가 토요일 저녁에 자취방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금요일에는 중학교, 고등학교 때 친구들을 만났다.
옛 시간에서는 시간이 흐르며 관계가 소원해진 친구들도 섞여 있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친구들을 만나서 밥을 먹고 떠들다 보니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TV를 조금 보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하루 종일 추억 여행을 한 기분이었다.
좋은 시간을 보냈는데 울적했다.
‘지후 목소리 듣고 싶다.’
어제도 봤는데, 대화도 나눴는데, 며칠이나 못 본 것처럼 그가 그리웠다.
나의 추억 여행을 그도 함께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미련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전화, 해 볼까?’
나루는 휴대폰을 꺼내 지후의 번호를 불러왔다.
지후에게 ‘난 널 좋아해. 너도 날 좋아하도록 만들 거야.’라고 선포를 해 뒀으니, 전화를 한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지금보다 더 기분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어쩌지?’
옛 시간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1번 버튼을 꾹 누르면, 그에게 통화가 연결되었다.
지금 전화해도 괜찮을지, 아닐지 걱정하지 않고 전화했던 그 나날이 꿈인 듯 희미했다.
나루는 휴대폰 액정에 뜬 지후의 번호를 한참 노려보다가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