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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33화 (33/93)

33화. 내 친구가 내 남자를

2017.10.23.

지후의 대답이 돌아오기까지의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윤영은 주먹을 꽉 쥐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지후가 입을 열었다.

“그래, 알겠어.”

“어?”

“알겠다고.”

“뭐, 뭘?”

“영화 보자며? 알겠다고.”

“알겠다는 건…… 나랑 영화를 보겠다는 거야, 아니면 영화 보자는 말을 잘 알겠다는 거야?”

지후가 피식 웃었다.

“주말에 같이 영화 보자고.”

“아…….”

제안을 하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지후가 나루와 재경을 제외한 모든 사람과 벽을 치고 있는 느낌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한 수락에, 윤영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요새 재미있는 영화가 있나?”

다행히 지후가 대화를 주도했다.

“어, 아…… 어, 어떤 장르 좋아하는데?”

긴장해서 대화를 제대로 이어가기가 힘들었다.

남자 앞에서 떨지 않는 여유로운 여자로 보이고 싶은데.

이래서야 좋아하는 마음이 다 들통나겠다.

“뭐든 상관없어. 네가 보고 싶은 걸로 봐.”

“아, 그럼…… 음, 그러니까.”

윤영은 사실 최근에 상영 중인 영화를 체크해 두지 않았다. 딱히 영화를 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 지후와 데이트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렇게 대답을 못하고 답답하게 구는 모습에, 지후가 약속을 취소할까 봐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 난 원래 장르를 가리지는 않는데. 요새는…… 음, 글쎄. 뭘 보지?”

“천천히 생각해 봐. 다음 주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지후가 다정하게 말했다.

“응, 알겠어. 그럼 내가 정해도 되는 거지?”

“응.”

대화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갈림길이었다.

헤어짐이 아쉬웠다.

“나는 이쪽으로 가야 돼.”

윤영은 혹시나 데려다주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곧장 걸음을 옮기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래, 잘 가.”

지후는 단호하다 싶을 정도로 인사를 하고 걸어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지후의 뒷모습이 서운했다.

‘그래도 다음 주에는 단둘이 영화를 볼 수 있어.’

윤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서, 시험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2과목만 더 보면 된다.

‘내일은 오랜만에 집에 가겠구나.’

옛 시간에서도 본가에는 잘 가지 않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2, 3주에 한 번씩은 본가에 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곤 했다.

자식들의 독립적인 삶과 당신들의 자유를 주장하는 부모님은, 딸이 거의 2달 동안 연락이 없는데도 먼저 연락을 해 오지 않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게 엄마의 주장이었다.

옛 시간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가족들을 만나러 가는 거라, 긴장도 되고 설레기도 했다.

12년 젊어진 엄마와 아빠를, 고등학생인 남동생을 볼 수 있다.

강의실에 가방을 놔두고, 나루는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세면대 앞에 윤영과 선미가 있었다.

“안녕.”

“어, 안녕. 공부 많이 했어?”

윤영이 거울을 통해 나루에게 물었다.

“응, 많이 했어.”

사실 단 한 시간도 공부하지 않았지만, 나루는 적당히 대답했다.

“난 하나도 못 했는데, 부럽다. 역시 과 수석은 달라.”

선미가 징징거렸다.

나루는 선미에게 웃어 주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달칵―

문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윤영은 잠깐 망설이다가 선미에게 말했다.

“나, 이번 주 일요일에 지후랑 영화 보기로 했어.”

단조롭지만 나루에게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어, 진짜? 지후랑 단둘이?”

“응. 며칠 전에 지후랑 같이 집에 가는데, 지후가 영화 보자고 하더라.”

“오, 웬열. 지후가 먼저 그랬다고?”

“응. 갑자기 그래서 좀 당황하긴 했는데.”

거기까지 말하고 윤영은 입을 다물었다.

거짓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난 왜 이런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지?’

나루에게 지후와 단둘이 영화 보기로 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거짓말까지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이런 거짓말은 쉽게 들통날 텐데.

“와, 이러다가 사귀는 거 아냐? 지후가 너한테 관심 있나 보다.”

선미는 윤영이 원하는 반응을 보여 줬다.

“에이, 관심은 무슨. 그냥 친구끼리 영화 보자는 거지, 뭐.”

“아니지. 관심도 없는데 단둘이 영화를 보자고 하겠어? 지후 걔는 재경이랑만 붙어 다니잖아. 그런데 너한테 일부러 둘이 영화 보자는 건, 관심 있다는 거지.”

“그런 거 아냐.”

“아니긴. 잘됐다. 이러다가 우리 과 3호 커플 되는 거 아냐?”

과에는 이미 사귀는 중인 커플이 둘이나 있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왜? 넌 지후 마음에 안 들어? 지후, 키도 크고 멋있잖아.”

“아니, 그냥 과 동기니까. 그런 쪽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럼 이제부터 생각해 보면 되겠네. 와, 잘됐다.”

“잘되긴, 무슨.”

윤영은 싫은 척 대꾸하며 귀를 기울였다.

나루가 들어간 화장실 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쪽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승리감이 가슴을 채웠다.

“엄청 잘된 거지. 지후도 무뚝뚝해서 그렇지, 은근히 인기 많잖아. 그런 애가 먼저 영화 보자고 했는데, 말 다했지, 뭐.”

“아냐. 지후가 들으면 부담스러워하겠다. 그러지 마.”

“그러지 말긴. 오히려 지후는 소문내 줬으면 하고 있을지도 몰라.”

목적은 달성했다.

윤영은 자기보다 더 들뜬 것 같은 선미와 함께 화장실에서 나갔다.

화장실이 조용해진 후에야, 나루는 화장실 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안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믿기가 힘들었다.

‘지후가 먼저 영화를 보자고 했다고?’

명치가 욱신욱신 아팠다.

내 친구가 내 남자를 사랑한다.

거기까지는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남자가 내 친구에게 호감을 보인다.

그건 힘들었다.

‘물론 지후가 내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이 이상했다.

옛 시간에서는 나를 사랑하게 되었던 남자가, 내게 먼저 고백을 해 왔던 남자가 지금은 내게 전혀 관심이 없다. 게다가 내 친구에게 호감을 표시하기까지 한다.

이럴 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 * *

“글쎄다. 나라고 알겠냐?”

명진이 말했다.

“기분이 정말 이상해. 지후가 윤영이한테 호감을 보이다니. 물론…… 지후가 지금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 그래도, 그런 거 있잖아. 옛 시간에서도, 어쩌면 지후가 윤영이한테 조금쯤은 관심이 있었던 거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

오늘로 시험은 끝났다.

나루는 시험이 끝나자마자 어딘가로 향하는 명진을 붙들어, 커피숍에 끌고 온 터였다.

“그렇지는 않겠지. 설마 걔가 널 두고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었겠냐?”

“하지만 사람 마음은 자기 자신조차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믿어, 그냥. 지금은 뭐, 너랑 사귀는 것도 아니니까 그럴 수 있지만. 너의 옛 시간에서는 너랑 사귀고 있었잖아. 걔 마음을 의심하면 안 되지.”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그래도…… 이상해, 정말.”

나루는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테이블 위의 아메리카노를 노려봤다. 그렇게 하면 아메리카노가 답이라도 줄 것 같다는 듯이.

‘지후는 나루를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명진은 지후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아리방에서 봤던 지후는 나루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뿐이 아니다.

수업 중에 간혹 지후 쪽을 보면, 지후는 언제나 나루를 보고 있었다.

나루가 지후를 보는 시간보다, 지후가 나루를 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눈을 뗄 수 없다는 듯 나루를 응시하던 지후는,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돌리곤 했다.

저렇게 좋으면 재경이고 뭐고 그냥 고백을 해 버리지, 라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윤영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다니.

“김윤영이 거짓말한 거 아냐?”

“어?”

“걔, 지후한테 관심 있잖아. 그래서 거짓말한 거 아니냐고.”

“하지만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

“네가 화장실에 있고, 널 라이벌로 생각하니까.”

“그렇다고 그런 들통날 거짓말을 한다고?”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 건 진짜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김윤영이 먼저 민지후한테 영화 보러 가자고 했을지도 모르잖아. 어쩌면 단둘이 아니라 여러 명이서 갈 수도 있는 거고.”

“설마.”

“그래, 말하고 보니 진짜 이거 같네. 네가 화장실에 들어오니까 말을 한 것도 수상하잖아. 너 들으라고 한 말이지, 뭐.”

나루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명진을 응시했다.

“왜 그렇게 봐?”

“너, 여자 마음 되게 잘 안다?”

“어, 누나가 3명이거든.”

“3명이나?”

“거기에 여동생도 한 명 있지.”

“우와. 어머님 대단하시다.”

“대단하지. 아무튼 그래서 어쩔 건데?”

나루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 윤영이가 지후를 많이 좋아해. 그럼 난 윤영이를 위해 지후를 포기해야 하는 걸까?”

“야, 야.”

“소중한 친구였어. 고민이 있다고 하면 그게 몇 시가 됐든 달려와 주고, 얘기를 들어주고, 위로해 주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지금은, 아니지. 그래도…… 윤영이랑 지후가 사랑을 하게 되고, 내가 윤영이랑 친해지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두 사람 곁에 있으면서 지후에게 위험이 닥치는 순간을 파악할 수 있잖아. 만약 날 사랑해서 지후가 죽게 되는 거라면, 날 사랑하지 않을 테니 더 잘된 거고.”

“안 그래.”

명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가설이 너무 많으면 산으로 가게 되어 있어. 가설을 좁힐 필요가 있어. 민지후가 연나루를 사랑하면 죽는다, 라는 가설은 버려.”

“하지만.”

“말했잖아. 만약 그게 아닐 경우, 너무 많은 변수가 생기게 돼. 그러니까 버려.”

“알겠어, 버릴게.”

“이제 하나만 생각하자. 네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사실만 보는 거야.”

“사실?”

“민지후는 32살에 연나루를 구하고 죽는다. 이게 유일한 사실이야. 지후가 사랑하는 이를 구하다 죽는다느니, 연나루를 사랑하게 되어서 죽는다느니, 그런 추측들은 할 필요도 없어.”

나루의 비밀을 알게 된 후, 명진은 항상 이 부분을 고민해 왔다.

“나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야. 윤명진은 21살에 사고로 죽는다. 이게 사실인 거야.”

“응.”

“그렇다면 나는 21살, 내가 죽었던 그날에 오토바이를 타고 나갈 거야.”

“뭐?”

“만약 오토바이를 타지 않고 있다가 다른 사고 때문에 죽을 수도 있잖아.”

“하지만 위험해. 오토바이 사고였어. 어느 쪽이 잘못했던 건지도 기억 안 나, 나는. 자세하게 못 들었단 말이야.”

“충분히 주의를 할 거야. 어떤 상황에서든 대처할 수 있도록.”

“그게 네 마음대로 되니?”

“될 거라고 봐. 그렇게 조심을 했는데도 내가 죽으면.”

명진이 말을 멈추고 나루와 눈을 맞췄다.

“그땐 다른 가설을 세워 봐. 뭐, 내가 죽는다고 꼭 민지후도 죽는다는 법은 없겠지만.”

“명진아…….”

“그렇게 보지 마. 아직 벌어진 일도 아니고, 네 덕분에 살 기회를 얻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 * *

명진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며, 나눴던 이야기를 정리했다.

명진은 연구를 완성시켜야 한다고 했다.

―모든 걸 네가 살아온 대로 진행시켜. 변수가 많아지면 그만큼 대처도 힘들어져. 만약 연구를 완성시키지 않더라도, 지후가 널 구하려다가 죽는 상황이 온다고 생각해 봐. 어떤 이유로 널 구하게 될지 추측조차 할 수 없어지잖아.

옳은 말이었다.

모든 것을 원래대로. 변수가 생기지 않도록. 나루가 겪었던 미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했다.

‘그동안 했던 걸 한 번 더 해야 하는 거네. 슬슬 과외도 구해야겠구나.’

옛 시간에서는 과외를 여러 개 했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졸업을 하자마자 전세를 얻었다.

18평짜리 빌라에 지후의 물건이 하나, 둘 채워지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취하는 빌라에 도착해 계단을 올라가는데,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숙이고 계단을 보며 무심히 올라가다가, 내려오던 인물의 신발을 보았다.

구겨 신은 운동화.

지후였다.

나루는 고개를 들었다.

지후와 눈이 마주쳤다.

“이렇게 보니까 엄청 크다, 너.”

안 그래도 눈높이의 차이가 큰데, 계단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지후는 더 컸다.

“그런가?”

지후가 나루를 피해 세 계단 아래로 내려가서 돌아섰다.

“이러면?”

“비슷하네.”

지후가 후, 하고 웃었다. 나루가 물었다.

“시험은 잘 봤어?”

“그럭저럭. 너는?”

“나도 그럭저럭. 본가에는 언제 가?”

“지금.”

“재경이는 같이 안 가?”

“재경이는 시험이 내일 끝난대.”

“아, 그렇구나.”

대화가 끊겼다.

하지만 나루는 이 침묵이 무겁지 않았다.

나루에게 있어서 지후는 말없이 몇 시간을 함께 있어도 좋은 사람이니까.

그저 지금은 대화가 끊기면 헤어져야 하는 사이가 되었기에, 그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이제 그만 가 보겠다고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지후가 입을 열었다.

“너는 본가에 안 가?”

“응, 준비하고 가야지.”

“조심해서 다녀와.”

“응, 너도.”

“그래, 그럼.”

지후가 돌아섰다.

“지후야.”

저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어?”

지후가 고개를 돌려 나루를 응시했다.

손만 뻗으면 그의 얼굴을 만질 수 있는데, 그럴 수 없어서 속상했다.

“주말에 뭐해?”

알고 있으면서도 물었다.

“선약이 있어.”

“누구랑?”

“그걸 말해 줘야 하나?”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나루는 지그시 주먹을 쥐었다.

“말해 줬으면 좋겠어.”

지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왜냐하면.”

나루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이 남자 역시 나를 사랑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12년 후, 그에게 닥칠 죽음에서 그를 구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망설일 이유도, 시간도 없었다.

이 관계가 더 틀어지기 전에 바로잡아야만 한다.

나루는 지후와 똑바로 눈을 맞추고 말했다.

“내가 너랑 데이트를 하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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