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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32화 (32/93)

32화. 단둘이서 만나요

2017.10.19.

너무 잘 잤다!

나루는 벌떡 일어나 시간을 확인했다.

열람실에 걸린 벽걸이 시계는 오후 11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럴 수가! 도서관에서 3시간이나 자다니!’

불편한 자세로 자서 어깨와 목이 아팠지만 정신은 개운했다.

‘지후랑 같은 도서관에 있어서 이렇게 잘 잔 거겠지.’

나루는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침을 스읍 닦으며, 무심코 지후의 자리가 있는 방향을 돌아봤다.

우연인지 아닌지, 마침 재경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딱 마주쳤다.

재경이 있을 줄은 몰랐다. 당황해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가, 이게 더 이상할 거란 생각에 다시 재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경은 책상을 보고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나루는 한숨을 삼켰다.

재경과 이렇게 어색한 사이가 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옛 시간에서 재경은 그 어떤 얘기도 나눌 수 있을 만큼 친한 친구였다.

차라리 처음부터 친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기분도 느끼지 않을 텐데.

‘커피나 한 잔 마셔야겠다.’

나루는 지갑을 들고 일어났다.

도서관 로비에 있는 자판기 앞 의자에는, 몇몇 학생들이 나와서 쉬고 있었다.

나루가 아는 얼굴은 없었다.

촌스러운 무늬가 그려진 지갑 속에서 동전을 찾다가 문득 지갑 안에 있던 체크카드를 발견했다.

대학 다니는 내내 나루가 갖고 있던 유일한 카드였다.

‘그러고 보니 이때는 신용 카드도 한 장 없었지.’

처음 체크 카드로 계산을 할 때, 성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우쭐했던 기억이 났다.

신용 카드가 많은 게 좋은 것도 아닌데, 그때는 왜 그리도 신용 카드를 가진 사람들이 멋있어 보였는지 모르겠다.

나루는 피식 웃으며 체크 카드를 꺼냈다.

‘옛 시간에서는 여기에 재경이가 낙서를 했었는데.’

나루는 카드의 뒷면 서명란에 사인을 해 두지 않았었다.

―그거 서명해 놔야 돼.

어느 날, 지후가 지적을 했다.

―꼭 해야 하나? 어차피 확인도 안 하는데.

―카드 받을 때 안내 사항에 나와 있잖아. 카드 받자마자 사인하라고. 사인하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려?

―나, 사인 아직 안 만들었단 말이야.

지후와 나루가 대화를 하는 동안, 옆에서 커피를 마시던 재경이 끼어들었다.

―그럼 내가 해 줄게, 네 사인.

나루가 말릴 틈도 없이, 재경은 카드를 가져가서 멋들어지게 사인을 했다.

기대 이상으로 예쁜 사인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 나루는 쭉 그 사인을 사용했다.

‘내 사인, 재경이가 만들어 준 거였구나.’

자주 사용하면서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렇듯 시간의 흐름에 흘러가 버린 기억이 얼마나 많을까.

과거로 돌아와 그런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니 사랑스럽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다.

‘좋은 거야. 누가 이런 경험을 해 보겠어?’

과거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잊었을 기억들. 시간과 함께 떠내려 보냈었을 많은 추억들.

그것들을 이 시간에 다시 한 번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내 가슴에 새길 수 있으니까 좋은 거라고, 나루는 생각했다.

동전을 꺼내 자판기에 넣었다.

‘자판기 커피는 오랜만이네.’

밀크 커피를 누르고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윤영을 생각했다.

윤영은 고기를 먹은 후에는 늘 자판기 커피를 마시곤 했다.

―고기 먹은 후에 이걸 안 마시면, 고기 먹은 기분이 안 든다니까.

외모는 귀엽고 사랑스럽게 생겼으면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크하! 좋다.”라고 외치는 윤영이 좋았다.

아저씨처럼 배를 두드리던 윤영의 모습이 생각나서 키득키득 웃으며 자판기 커피를 꺼냈다. 돌아서다가 도서관으로 들어오는 윤영과 딱 마주쳤다.

“어?”

윤영이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전까지 윤영을 추억하던 나루는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살짝 손을 올렸다.

“안녕?”

“어, 안녕.”

윤영이 어색하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열람실에 자리 있어?”

“아니, 없는 것 같던데.”

“아, 진짜? 엄마가 공부 좀 하라고 하도 잔소리를 해서 나왔는데. 어떡하지?”

윤영이 투덜거렸다.

“그럼 내 자리에서 할래?”

나루가 제안했다.

윤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는 어쩌고?”

“난 어차피 슬슬 집에 갈 참이었어.”

“아, 진짜? 아니, 아닌 것 같은데.”

“정말이야.”

나루가 옅게 미소 지었다.

윤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루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말했다.

“나, 솔직히 너 별로 안 좋아해.”

윤영의 발언에 가슴이 따끔했지만,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알아.”

“알면서 이런 호의를 베풀어?”

“호의가 아니라…….”

“착한 척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해. 그리고 너랑 나는 애초에 성격이 안 맞아. 이렇게 잘해 준다고 해서 우리가 친해지는 일은 없을 거야.”

윤영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나루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윤영을 응시했다.

‘우리가 성격이 안 맞는 걸까? 하지만 너랑 나는 옛 시간에 정말 친했는걸.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아마 좋은 일로 친해진 것 같지는 않은데.’

생각하느라 입을 다문 나루의 모습에, 윤영은 자신이 너무 심하게 말을 했나 싶어서 후회했다.

‘아냐, 후회할 거 없어. 나는 얘가 싫고, 뒷담화를 하느니 차라리 대놓고 말하는 게 나아. 겉으로만 친한 척하는 건 딱 질색이야.’

그때, 나루가 미소를 지었다.

자그마하고 새하얀 얼굴에 옅게 번지는 미소가 어찌나 애달픈지, 윤영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도무지 동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깊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윤영을 똑바로 향해 있었다.

“그래, 네 말 잘 알았어. 하지만 난 정말로 곧 일어날 생각이었어. 내 자리에서 공부해도 돼.”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도서관 자리 잡는 게 쉬운 일도 아니니, 윤영은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그럼…….”

고마워, 라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나루의 뒤쪽에 있는 열람실 문이 열리고, 지후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지후는 집에 가는 길인지, 어깨에 옆으로 메는 가방을 걸치고 있었다.

“지후야.”

반가운 마음에, 윤영은 나루가 앞에 있다는 것도 잊고 조금 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후가 이쪽을 돌아보는 모습이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윤영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콩콩 뛰었다.

‘나, 쟤를 진짜 좋아하는구나.’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심장은 날이 갈수록 지후에게 더 크게 반응했다.

“너, 도서관에 있었던 거야?”

사실은 도서관에 지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윤영이 이 시간에 자리가 없을 줄 알면서도 굳이 도서관에 온 이유는, 우연인 척 지후를 보고 싶어서였다.

“어, 시험 기간이니까.”

지후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일찍 가네?”

“오래 앉아 있다고 공부가 더 잘되는 것도 아니니까. 내 자리 비었다. 거기서 해.”

윤영은 지후의 제안에 기분이 좋아졌다.

‘내 생각을 해 주는 걸까?’

하지만 지후가 짐을 챙겨 나온 것을 발견한 시점부터, 윤영은 공부할 생각이 싹 사라진 터였다.

“아냐, 나 졸려서 그냥 집에 갈 생각이었어. 너도 집에 가는 거지?”

“그렇긴 한데.”

“같이 가자, 그럼.”

“아, 집에 가게?”

나루의 목소리에, 윤영은 그제야 자신이 나루와 대화 중이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나루를 잊고 지후에게 살랑거렸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나, 방금 엄청 티가 났겠지?’

예기치 못한 지후의 등장에 윤영의 목소리도, 행동도 달라졌다. 나루와 대화할 때와는 미묘하게 다른 목소리였다.

같은 여자끼리는 남자 앞에서만 바뀌는 여우같은 행동을 잘 간파한다.

나루에게 남자들이랑만 어울리지 말라는 말까지 했는데, 지금 자신이 그런 모습을 보였다.

창피하다.

“응, 가려고. 음, 너도…… 너도 집에 갈 거라고 했지? 같이 돌아갈래?”

나루와 함께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물었다.

나루는 뭘 생각하는지 모를 맑은 눈동자로 윤영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애잔한 미소였다.

“아니, 난 좀 더 공부해야겠어. 조심히들 가.”

나루는 열람실 문을 꽉 잡은 채로, 도서관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윤영과 지후가 나란히 나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윤영은 들뜬 듯이 지후 쪽으로 고개를 바짝 들고 무어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욱신―

윤영이 나루와 대화를 하다 말고 지후를 발견해 환하게 웃을 때부터, 명치 부근이 계속 아팠다.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명치의 통증도 강해졌다.

‘많이 좋아하는구나. 내가 앞에 있는 걸 잊을 만큼.’

나루의 질투 유발을 위해 보라는 듯이 한 행동이 아니었다.

윤영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붉혔다.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자각도 못 했다는 의미다.

‘어쩌지?’

윤영이 지후를 사랑한다.

내 소중했던 친구가 내 사랑하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 이걸 어쩌지?’

혼란스러웠다.

‘내 탓인가? 내가 지후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해서, 윤영이가 지후를 사랑하게 된 건가? 아니면 옛 시간에서도 지후를 사랑했는데, 나 때문에 마음을 감춘 거였나?’

답을 알 수 없었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생각에 잠겨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열람실 문을 열려고 하는 것도 몰랐다.

휙 당겨지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훅 딸려 갔다.

풀썩―

상대의 품에 안기다시피 하는 순간, 지후의 향기가 났다.

나루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재경이 놀란 눈으로 나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미안.”

나루는 황급히 몸을 바로 했다.

“미안해, 재경아.”

“뭘 그렇게까지 미안해해.”

재경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 재경의 미소가 감개무량했다.

“문이 안 열려서 갇힌 줄 알고 깜짝 놀랐네.”

재경이 말했다.

“아, 미안해. 잠깐 딴생각을 좀 하다가. 그럼 난 들어가 볼게.”

재경을 지나쳐 들어가려는데 재경이 앞을 막아섰다.

나루가 왜 그러냐는 듯 재경을 올려다봤다.

재경은 가지런한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나루를 보고 있었다.

재경의 선명하고 깨끗한 갈색 눈동자 안에 걱정이 담겼다.

“너, 입술에 피난다.”

“어?”

나루가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려는데, 재경이 나루의 손목을 잡았다.

“그렇게 닦지 마. 잠깐만 있어 봐.”

재경이 백팩을 서둘러 앞으로 옮기더니, 안에서 티슈를 꺼냈다.

티슈를 통째로 줄 줄 알았는데, 재경은 한 장을 뽑아서 나루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닦아 냈다.

재경의 손길은 잘 깨지는 유리잔을 다루듯 섬세했다.

“다 됐다.”

재경이 허리를 폈다.

그의 머리카락이 나루의 코끝을 스쳐 올라가며, 또다시 지후의 샴푸 향기를 흘려보냈다.

후각이 이렇게나 그리움을 자아내는 감각인 줄은 몰랐다.

‘미안해, 재경아. 네가 내게 잘해 줘도 나는 지후만 생각해.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어.’

미안함에 재경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무슨 일 있어?”

재경이 티슈를 주먹으로 구기며 물었다.

“아니, 왜?”

“표정이 어두워서. 입술에서 피도 나고.”

“입술은 그냥 건조해서 갈라진 것 같은데.”

나루의 변명에 재경이 피식 웃었다. 쓴웃음이었다.

“입술에 잇자국 나 있어, 너.”

“아…….”

이번에는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재경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나루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옛 시간에서 소중한 친구였던 재경도, 가끔 나루의 머리를 이런 식으로 쓰다듬곤 했다.

―하지 마. 머리 망가져.

―안 망가져도 안 예뻐.

―너한테 예쁘게 보일 생각 없네요. 난 지후 눈에만 예쁘게 보이면 되거든.

―과연 그 민지후는 널 예쁘게 봐줄까?

―안 예쁘다고 생각하려나? 역시?

―아하하하하. 역시는 무슨 역시야? 너, 예뻐.

재경이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비슷한 대화를 나눴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게 쾌활하게 웃을 때에도, 너는 나를 좋아하고 있었니? 아니면 나에 대한 감정을 다 정리한 후였니?

“안 좋은 일 있으면 상담 정도는 해 줄 수 있어. 과 수석이라도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게 있는 법이잖아.”

재경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응, 고마워.”

“그래. 그럼 난 가 볼게.”

“응, 조심해서 가.”

“공부 열심히 해, 과 수석.”

재경이 도서관을 나가는 걸 확인한 후에야, 나루는 열람실로 들어왔다.

입술이 아릿했다.

* * *

교정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지후와 함께 걸어가는 내내, 윤영은 무슨 말을 해야 지후가 즐거워할지,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을 완전히 들키지 않을지 고민했다.

먼저 말이라도 걸어 주면 좋으련만, 굳게 닫힌 지후의 입술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후야, 너 시험 언제 끝나?”

간신히 질문 하나를 쥐어짜 냈다.

“다음 주 목요일.”

“아, 정말? 나도 그날 끝나는데. 그날 뭐해?”

“본가에 가.”

“부모님 댁에?”

“응.”

만나자고 할까 봐 원천 봉쇄를 하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윤영은 기분이 가라앉았다.

윤영이 질문을 하면 지후는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윤영에 대한 질문은 돌아오지 않았고, 대화를 이어갈 만한 대답을 해 주지도 않았다.

지후는 온몸으로 ‘너랑 대화할 생각 없다.’는 오라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들떴던 만큼 비참했다.

‘지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그런 생각은 길지 않았다.

지후는 잘났다.

훤칠한 키도, 넓은 어깨도, 조각 같은 얼굴과 묵직한 성격도. 무엇 하나 빼놓을 것 없이 잘났다.

그래서 그가 하는 아주 작은 행동에도 가슴이 뛰었다.

“재경이도 같이 가는 거야? 같은 동네였다고 했지?”

“아마도.”

“음, 그럼 언제 다시 학교로 와?”

“글쎄. 주말에는 오겠지.”

“토요일? 일요일?”

“그건 왜?”

지후가 윤영을 돌아봤다.

“아니, 그게…….”

윤영은 말을 멈추고 침을 꼴깍 삼켰다.

어쩌지. 어떡하지.

데이트 신청을 하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하지만 여자가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하는 건 자존심이 상한다.

지후가 데이트 신청을 해 오도록 유도하고 싶은데, 그 무슨 수를 써도 지후가 먼저 만나자고 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 너랑.”

마음을 굳힌 윤영은 지후와 똑바로 눈을 맞추고, 도발적으로 말했다.

“영화 보고 싶어, 둘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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