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네 손의 온도
2017.10.16.
“엄마라니. 나는 이렇게 다 큰 아들 둔 적 없다.”
“다 안 컸으면 엄마가 되어주는 것도 가능하다는 건가?”
지후가 끼어들었다.
“넌 말할 자격 없어. 네가 매운 것도 못 먹는 주제에 잘 먹는다고 허세를 부리니까 이런 소리를 듣는 거 아냐.”
“허세라니. 난 원래 매운 걸 잘 먹어.”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너 지금 이거 잘 먹는 게 절대 아니라니까? 잘 먹는다는 건, 저것 봐 봐.”
명진이 나루를 가리켰다.
명진에게 ‘엄마 같다.’는 평가를 내린 나루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듯 매운 족발의 살코기를 집어 입에 넣는 중이었다.
“저렇게 먹어야 잘 먹는 거라고. 얼굴색 하나 안 변했잖아.”
“나도 안 변해.”
“아니, 넌 변했다니까? 네놈이 조금만 못생겼어도 멍게 같다는 말 들었을 거다.”
“호오. 내가 안 못생겼나?”
“그럼 네 눈엔 네가 못생겨 보이냐? 너, 잘생겼잖아.”
“그런가?”
“뭐야, 이거. 큰 그림이었던 거냐? 잘생겼다는 말을 들으려는 큰 그림?”
지후가 후, 하고 웃었다.
바람이 부는 듯, 모래가 이는 듯, 상냥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한 그 웃음에, 명진이 입을 다물었다.
명진의 매서운 눈매가 가늘어지는데, 지후가 말했다.
“너도 얼른 먹어. 떠드느라 배고프겠다.”
“어, 그래. 먹어야지.”
명진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살코기 하나를 집어 입에 넣은 명진이 억, 소리를 내뱉었다.
“이거 뭐야? 왜 이렇게 매워?”
“아, 명진이 너도 매운 거 잘 못 먹어?”
나루가 덤덤히 물었다.
“아니, 이건 매운 걸 잘 먹고 못 먹는 수준이 아니라…… 엄청 맵잖아! 혀가 타들어 가는 것 같다고.”
“아, 그 정도야?”
나루는 어릴 때부터 매운 걸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이 집의 매운 족발이 맵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지후가 그것 보라는 듯이 명진을 돌아봤다.
“봐 봐, 난 매운 걸 잘 먹는 편이라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난 적어도 너처럼 비명을 지르진 않았지.”
“비명이 아니라 감탄사였어.”
“아, 그래? 특이하게도 감탄하네.”
“그래? 그러는 넌 땀 뻘뻘 흘리면서, 참 특이하게도 안 매워한다?”
그새를 못 참고 옥신각신하는 둘의 모습을 보며, 나루는 저 두 사람이 의외로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 *
“이 매운 맛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라는 명진의 평가에,
“아니, 난 감당할 수 있어.”
라고 지후는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명진은 지후의 말을 무시하고 칼국수를 시켰다.
칼국수가 나오자 지후는 더 이상 족발을 먹지 않았다.
“너, 안 맵다며? 왜 이거 먹어?”
명진이 면박을 줬고.
“난 원래 칼국수를 좋아해.”
지후는 곧바로 대답했다.
지후와 명진은 식사 시간 내내 실랑이를 했고, 나루는 두 남자 사이에서 자신이 불청객인 것 같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돈을 걷어서 계산을 하고 가게 밖으로 나왔을 때, 명진이 말했다.
“아, 나 잠깐 갈 데가 있어. 니들 먼저 들어가라.”
나루가 지후와 단둘이 있을 시간을 주기 위해 자리를 비켜 주려는 것 같았다.
대답도 듣지 않고 돌아서는 명진의 손목을, 지후가 덥석 붙잡았다.
명진이 지후에게 잡힌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다가 지후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뭐야, 설레게.”
“어디 가?”
“갈 데가 있다니까.”
“그러니까 어디?”
“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너랑 나랑 연인 아니거든? 왜 내 일거수일투족을 알려고 해?”
명진이 집착하는 남자와 사귀는 중인 여자 같은 말을 했다.
“어디 가는지는 알려 줘도 되잖아.”
“미안하지만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거라면, 정중하게 거절하지. 난 남자한테 관심이 없거든.”
명진의 말에 지후가 손을 떼어 냈다.
명진이 손목을 문질렀다.
“거참, 힘 겁나게 세네. 울지 마라, 민지후. 이따 도서관으로 갈 테니까.”
그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나루는 꼼짝도 않고 서서 지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의 지후는 뭔가 이상하다.
아니, 어제도. 그제도.
‘이 시간으로 돌아온 후부터 계속.’
그를 사랑하기에 미처 몰랐던 부분들을 발견해 간다고 하기에는, 그 격차가 너무 컸다.
물론 지후에게 엉뚱한 면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명진과 친해지지 말라고 강요를 하거나, 못 먹는 걸 잘 먹는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간다는 사람 붙잡고 못 가게 하거나.
그런 면은 역시 이상하다.
‘뭔가…… 잡힐 듯 말 듯 한데.’
기이한 안개 속에 한 가지 진실이 웅크리고 있었다.
안개가 걷히면 그 진실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은 안개를 걷어낼 만한 바람이 불지 않았다.
나루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후를 올려다봤다.
나루의 시선을 느낀 듯 지후가 말했다.
“도서관, 갈 거지?”
“응.”
“그래, 가자.”
“응.”
지후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나루는 그를 따라 걸으며 바로 옆에 있는 그의 커다란 손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손이 바로 옆에 있었다.
차라리 멀리 있으면 이토록 간절하지도 않을 텐데.
잡고 싶다. 이 손.
“너, 손이 참 크다.”
나루는 지후의 손을 잡는 대신 말했다.
“그런가?”
지후가 손을 들어 올렸다.
“응, 이것 봐 봐.”
나루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펼쳐서 겹쳤다.
이렇게나마 그의 손과 접촉하고 싶다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의 손바닥은 늘 그랬듯 따뜻했다.
“내 두 배잖아.”
나루가 덧붙이며 지후를 올려다봤다.
얼른 손을 피할 줄 알았던 지후는 가만히 겹쳐진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게.”
대답을 하면서도 손을 내릴 기색이 없었다.
괜히 나루가 민망해져서 먼저 손을 내렸다.
“그만 갈까?”
나루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지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루와 속도를 맞춰 나란히 걸었다.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재경은 지켜보고 있었다.
재경은 지영, 선미와 저녁을 먹었다.
곧장 도서관으로 가려고 했지만, 선미와 지영은 재경과 함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커피숍에서 잠 좀 깨고 들어가자고 해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나오는 길이었다.
커피숍에서 나오자마자 나루와 지후를 발견했다.
뒷모습이었지만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가장 소중한 친구와 그런 친구를 질투하게 만들 만큼 사랑하는 여자.
두 사람은 거리에 멈춰 서서 손과 손을 겹치고 있었다.
차마 아는 체를 할 수 없을 만큼 긴밀한 무언가가, 둘 사이에 있었다.
지후와 나루는 다시 걷기 시작했고, 그제야 둘을 발견한 지영이 말했다.
“어, 저거 지후랑 나루 아냐?”
“그러네, 분위기 좋아 보인다.”
“그러고 보니, 나 예전에 쟤네 둘이 노천극장에 앉아 있는 거 봤었어.”
“어? 진짜? 나도 저번에 저 두 사람이 같이 걸어가는 거 봤었는데. 둘이 꼭 사귀는 것 같더라.”
선미와 지영의 대화가 재경의 가슴에 콕콕 박혔다.
재경은 꾸욱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런가?’
입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지후, 너도 마찬가지였던 건가?’
재경이 나루에게 반했던 그날, 지후 역시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늘거리는 까만 머리카락과 맑은 눈동자에 반한 것이, 재경 혼자만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그저 재경이 먼저 그녀에 대한 감정을 지후에게 말했기에, 지후는 가슴에 품은 감정을 감추기로 한 것이다.
‘사실은 몇 번이나 느꼈지.’
나루를 향한 지후의 감정을, 아주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은 언제나 있었다.
다만 무시했을 뿐이다.
나루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내 마음에 들어온 첫 여인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아마 지후도 그런 재경의 심정을 알고 있었으리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나루를 향해 재경의 등을 밀어준 것이리라.
창피하다.
‘만약 지후가 먼저 나한테 말했더라면.’
재경은 가정을 해 봤다.
나루에게 반했던 그날, 지후가 먼저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나도 지후처럼 마음을 감추고, 잘해 보라며 등을 떠밀어 줬을까?
이 가슴이 미어져도, 웃는 낯으로 상담을 해 줬을까?
‘아니, 그렇지 않을 거야. 난 비열하고 이기적인 놈이니까.’
재경은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을, 굳은 표정으로 지켜봤다.
* * *
지후와 나루는 함께 교문을 들어가 도서관을 향해 걸었다.
해가 저문 늦은 저녁, 가로등이 교정 곳곳을 밝히고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해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길을 따라 쭉 뻗어 나간 연분홍 빛 무리가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예쁘다.”
나루가 저도 모르게 흘린 말에, 지후는 ‘뭐가?’라고 되묻지 않았다.
“그러게.”
“우리 학교에 이렇게 벚나무가 많은 줄은 몰랐어. 시험 끝나고 나서도 벚꽃들이 남아 있을까?”
“글쎄. 남아 있지 않을까?”
“봄비 내리면 다 질 텐데.”
“남아 있는 곳이 있겠지. 시험 끝나자마자 꼭 봄비가 내리라는 법도 없고.”
“그야 그렇지만.”
‘우리 대학은 이상하게, 늘 시험만 끝나면 비가 내린단 말이야.’
그런 말은 물론 할 수 없었다.
“벚꽃은 참 예쁜 것 같아. 필 때도, 질 때도. 바람 불 때 꽃잎이 날리는 모습이, 꼭 분홍빛 눈이 내리는 것 같아 보여.”
나루는 지후와 함께 벚꽃 아래를 걸을 기회가 올 줄은 몰랐기에, 조금 들떴다.
말이 많아진 나루를, 지후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벚꽃을 보느라 고개를 들고 있던 나루가, 지후의 시선을 느끼고 지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후의 새까만 눈동자가 이쪽을 똑바로 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너, 얼굴에 뭐 묻었다.”
지후가 말했다.
“얼굴에?”
나루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아니, 거기 말고 좀 더 위에. 눈 가까이.”
지후가 검지로 눈 근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루는 다시 그 부분을 손등으로 쓱 닦아 냈다.
“됐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나루를 보며, 지후가 후, 하고 웃었다.
“안 됐어.”
“뭐야? 아무것도 안 묻은 거 아냐?”
“내가 왜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겠냐?”
“속아서 얼굴 닦는 모습이 바보 같아 보일 테니까.”
지후가 또 후, 하고 웃었다.
“본인이 바보 같아 보인다는 건 자각하는 모양이군.”
“뭐야, 속인 거 맞구먼.”
“속인 거 아냐. 얼굴에 떡 붙어 있는데 못 찾는 게 바보 같다는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지후는 나루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나루의 자그마한 얼굴에 가까워졌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서는 눈을 질끈 감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루는 눈을 크게 뜨고, 유독 가까이에 있는 지후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루의 얼굴(정확하게 말하자면 얼굴에 붙은 무언가)을 신중하게 응시하는 그의 눈이 좋았다.
갸름한 눈매 안에 갇힌 검은 눈동자도, 긴 속눈썹도, 하나 빼놓을 곳 없이 좋았다.
12년간, 거의 매일 봐 왔던 얼굴인데도 질리지 않는 게 신기했다.
봐도, 봐도 새롭고 사랑스럽다.
이윽고 그의 손가락이 나루의 눈가에 살짝 닿았다.
아주 짧고 작은 접촉이었지만, 그 부위에서 번진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그 뜨거움에 색깔이 있다면 짙은 분홍일 것이다.
애정과 그리움과 갈망과 설렘을 몽땅 담은 짙은 분홍색.
“이것 봐.”
지후가 검지에 붙은 것을 나루의 눈앞에 내밀었다.
검지 끝에는 거의 흰색에 가까운 벚꽃 잎 한 장이 묻어 있었다.
“아아. 꽃잎이었네.”
“그래.”
불어온 바람에, 꽃잎이 나풀나풀 실려 날아갔다.
나루와 지후는 꽃잎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었다.
대단한 스킨십을 한 것도 아닌데, 옛 시간에서는 이보다 훨씬 농밀한 스킨십도 자주 했는데. 이 시간으로 돌아오고 나서 이 마음도 어릴 때로 돌아간 것인지, 자그마한 접촉에 가슴이 설렜다.
“지후야.”
어쩌면 지금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너를 사랑한다고. 네게 반했다고 네가 참 좋다고.
지금 말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나 있잖아.”
꽃잎이 사라진 곳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천천히 돌려 그에게 고정시켰다.
지후는 여전히 저 멀리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사라진 꽃잎이 보이는 걸까?
궁금하게 생각하며 나루가 입을 열려는데, 지후가 말했다.
“나 시험 끝나면 본가에 간다.”
“어?”
“본가에 간다고. 너도 집에 좀 가고 그래. 입학하고 나서 한 번도 안 갔지?”
“아.”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짙은 분홍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니, 나 혼자만의 분홍빛이었지. 지후는 아니었을 거고.’
입안에 씁쓰레한 맛이 감돌았다.
‘어쩌면 내가 고백하려는 걸 눈치채고 말을 돌린 걸지도 몰라.’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나도 재경이가 나한테 고백하려고 했을 때, 그 분위기를 눈치챘으니까.’
어쩌면 고백을 결심한 사람의 주위로는 특유의 공기가 흐르는지도 모른다.
나루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응, 그래야겠어. 시험 끝나면 곧장 집에 가 봐야지.”
* * *
지후는 열람실에 앉아 책을 펼쳤다.
밥을 먹으러 먼저 나갔던 재경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연락을 한 번 해 둘까 하다가 관두고, 전공 서적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검지 끝에 닿았던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녀의 볼에 손을 댔던 순간보다, 시간이 지난 지금 그 감촉이 더욱 뚜렷했다.
한참 그렇게 손가락을 응시하다가, 나루의 자리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루는 엎드려서 잠을 자는 듯했다.
옹송그리고 엎드려 있는 나루를 보며, 지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지후는 한동안 나루를 지켜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꿈이라도 꾼 건지, 나루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모습에 지후는 소리를 죽여 키득거리다가, 자신의 행동을 깨달았다.
입가에 묻어 있던 미소가 언제 있었냐는 듯 깨끗이 지워졌다.
“하아.”
지후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책상에 엎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