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엄마 같아
2017.10.12.
[도서관에 자리 맡아놨어. 얼른 와.]
지영의 문자를 받고 도서관으로 향하던 나루는, 나란히 걸어오는 재경과 선미, 지영을 발견했다.
재경을 가운데 두고 선미와 지영이 양쪽 옆에서 걷고 있었다.
“아, 나루야. 빨리 왔네.”
지영이 손을 흔들었다.
“응, 동방에 있었거든.”
나루는 재경과 어색하게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우리 저녁 먹으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갈래?”
지영이 나루에게 물었다.
선미의 표정이 굳었다.
“아, 나는 저녁 먹었어.”
나루는 거짓말을 했다.
지영도 진짜로 나루와 저녁을 먹고 싶은 건 아니었기에, 더는 권하지 않았다.
세 사람을 지나쳐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재경이 선미와 지영의 사이에 끼어 있는 모습은 어색했다. 옛 시간에서는 저런 광경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지금은 옛 시간이랑은 조금 다르니까.’
저녁을 먹을 시간이라 그런지 도서관에서 나오는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아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눈인사를 하거나 잠깐 멈춰서 대화를 하다 보니, 열람실에 들어가는 시간이 늦어졌다.
지영이 알려 준 자리로 향하다가 구석에 엎드려 있는 지후를 발견했다.
나루와 세 자리 떨어진 곳이었다.
‘지후는 저녁 먹었나?’
나루는 책상에 가방을 내려놨다.
지후에게 말을 걸고 싶은데 망설이게 되는 이유는, 어젯밤 지후의 행동 때문이었다.
명진과 어울리지 말라고 강요하던 지후는 낯설었다.
기계적으로 전공 서적을 꺼내 책상 위에 늘어놓고 있는데, 누군가 나루의 어깨를 꾹 눌렀다.
“나루, 얼굴 보기 힘들어, 아주.”
2학년 선배인 지민이었다.
원래 까랑까랑한 목소리라서 작게 낸다고 냈는데도 지민이 하는 말이 도서관에 울렸다.
근처에 앉아 있던 몇 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지민을 쏘아봤지만, 지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공부하러 왔어?”
“아, 네.”
“족보 좀 받은 거 있고?”
“아뇨, 없어요.”
그런 거 필요 없지. 시험에 뭐가 나올지 다 알고 있는데.
“내가 줄까, 족보?”
“아니요, 괜찮아요.”
“왜? 족보 있으면 공부하기 편하잖아. 오빠가 잘 정리해 둔 게 있거든. 다른 애들도 나한테 받아갔어.”
“조용히 좀 하세요.”
근처에 있던 학생 한 명이 지민에게 쏘아붙였다.
지민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나루의 팔을 잡았다.
“나가서 얘기하자. 오빠가 커피 사 줄게.”
도서관 안에서 더 소란을 부리면 주목을 받을 것 같아서, 나루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지민에게 이끌려 열람실을 나가자마자 손을 뿌리쳤다.
“지민 선배. 저, 이렇게 몸에 손대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나루의 단호한 말에 지민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난 그냥 친하게 지내자고 그러는 건데 뭘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해? 그냥 손목 좀 잡은 거 가지고.”
“선배. 저는…….”
“오빠라고 불러.”
나루의 말을 끊으며 지민이 말했다.
나루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놈이 이렇게까지 진상이었나?’
지민과 친하게 지내질 않아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늘 주정을 부렸던 것만 기억났다.
이런 놈들은 적당히 받아주면 계속 이렇게 들러붙는다.
나루는 허리를 똑바로 펴고 지민과 똑바로 눈을 맞췄다.
“선배, 전 선배랑…….”
“나루.”
왜 이렇게 말을 끊는 사람이 많은 걸까.
굵은 팔이 나루의 목을 감싸듯이 끌어안았다.
“여기서 뭐해?”
명진이었다.
지민은 눈을 부릅뜨고 명진을 올려다봤다.
1학년의 위험한 후배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한 달이나 출석도 안 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고, 레게 스타일 헤어에 피어싱을 잔뜩 하고, 팔에는 문신이 있다던가.
우리 학교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겠다고, 동기들이 숙덕거리는 소리를 들었었다.
멀리서 본 적은 몇 번 있지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가까이에서 본 명진은 들은 것보다 훨씬 눈빛이 사나워 보였다.
쉬워 보이는 후배였다면, ‘어디 선배 말하는 데 끼어들어?’라고 면박을 줬겠지만, 명진에게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지민은 눈만 끔뻑거렸다.
“지민 선배랑 얘기 좀 하고 있었어. 아, 2학년 선배야.”
나루가 지민을 소개시켰다.
명진의 눈동자가 지민에게로 향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보는 명진에게, 지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흐응, 안녕하세요.”
“어, 그래. 안녕.”
지민이 어색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우리 나루한테 뭔가 할 이야기라도?”
“아니, 아니. 할 얘기는 뭐.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반가워서…… 어, 그럼 얘기들 나눠.”
지민이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그제야 명진의 팔에서 힘이 빠졌고, 나루는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뭐 하는 거야?”
“널 도와주는 거잖아.”
“내가 할 수 있었거든.”
“너 말이야. 과거로 돌아왔다고 해서 모두랑 척을 지고 살 필요는 없잖아.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게 좋아. 사람은 언제 어디서 도움이 필요하게 될지 모르니까.”
여상히 말하는 명진을, 나루는 빤히 응시했다.
“왜 그렇게 봐?”
“너야말로 그 속에 아저씨의 영혼이 들어 있는 거 아냐?”
“왜? 의외로 속이 깊어서? 새삼 괜찮은 녀석이란 생각이 드냐?”
“처음부터 괜찮은 녀석이라는 생각은 했어.”
명진이 피식 웃었다.
“너, 말 좀 조심하는 게 좋겠다.”
“내가 무슨 말실수했니?”
“나는 네가 나를 12살 어린 동생으로 본다는 걸 아니까, 괜찮은 녀석이라고 말해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어. 하지만 다른 남자애들은 안 그럴걸.”
“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20살이면 아직 어리잖아. 예쁘게 생긴 여자애가 괜찮네, 어쩌네 하면 설레서 잠도 못 잘걸.”
“너야말로 말 좀 조심해. 아무한테나 그렇게 예쁘다고 말하면 그 말 들은 여자애야말로 설레서 잠 못 잘 테니까.”
“오, 방금 좀 설렜어?”
“그럴 리가.”
명진의 조언은 고마웠다.
어쩌면 어린 동생을 대하는 듯한 나루의 행동이, 남자애들을 설레게 만들고 여자애들을 질투하게 만드는지도 몰랐다.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해야지.
“그나저나 너 저녁은 먹었니?”
“아직. 너는?”
“나도. 먹으러 가자.”
“족발. 족발이…….”
거기까지 말한 명진이 입을 다물었다.
열람실에서 나오던 지후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지후의 눈빛이 무시무시하게 변하는 것을, 명진은 똑똑히 목격했다.
‘어이쿠, 무서워라.’
명진은 나루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족발 먹고 싶어?”
지후가 나왔다는 걸 모르는 나루가 명진에게 물었다.
“어, 족발이 먹고 싶긴 한데.”
“나도 족발 좋아해.”
나루의 뒤에 선 지후가 말했다.
나루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는 모습이, 명진은 재미있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재미있구나.’
나루는 명진의 앞에서는 누나처럼 굴고, 다른 학생들 앞에서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행동했다.
하지만 지후의 앞에서는 수줍음 많은 소녀처럼 변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사랑, 그거 참 재미있다.
‘아, 물론 남의 사랑일 때만. 내 사랑은 싫지, 이런 지독한 건.’
사랑하는 남자가 죽었다.
그 남자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이 나루를 과거로 되돌려 보냈다.
그녀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를 위해, 고독한 길을 걸어온 나루가 안쓰럽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했다.
멋지지만, 처절하다.
나루처럼 처절한 사랑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 너도 같이 먹으러 가든가.”
명진이 지후에게 말했다.
그제야 나루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뒤를 돌아봤다.
“안녕, 지후야?”
오른손을 살짝 올리고 인사하는 나루의 모습은.
‘어색하다, 어색해. 그건 아냐, 연나루.’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안녕.”
명진은 초등학교 때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교과서에서였지.’
철수야, 안녕. 영희야, 안녕.
나루와 지후의 모습이 딱 그렇게 보였다.
“어쩔 거야? 밥 먹으러 갈 거야, 말 거야.”
안 되겠다 싶어, 명진이 다시 끼어들었다.
“갈 거야.”
나루가 먼저 대답했고.
“나도.”
지후도 대답했다.
그래서 나루와 지후, 명진은 함께 족발을 먹으러 나갔다.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멤버라고, 명진은 생각했다.
명진은 지후가 나루를 사랑한다는 것도, 나루가 지후를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각자 다른 이유가 있어서 자신들의 마음을 감추고 있다는 것 또한 알았다.
‘진실을 안다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니!’
만화에서 진실을 알게 된 주인공들이 괴로워하는 게 이해됐다.
물론 그 주인공들이 알게 된 진실은 좀 더 무겁고 범세계적인 진실이지만.
‘나는 이것도 힘들다고!’
음식점 안에 들어가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서먹한 분위기 속에서, 명진은 열심히 메뉴판을 노려봤다.
메뉴 고르는 척이라도 하며, 이 분위기를 이겨낼 생각이었다.
“메뉴가 한 백 개쯤 되냐?”
지후의 지적에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메뉴판을 지후에게 내밀었다.
“그럼 네가 고르시지? 아주 멋들어진 선택을 기대할 테니까.”
명진의 도전적인 어투에 지후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족발 먹는다며?”
“족발이 한 종류냐?”
“그래 봐야…….”
메뉴판을 펼친 지후가 그 안에 적힌 여러 종류의 족발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명진이 거보라는 듯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 한 번 최고의 선택을 해 보셔.”
지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골라. 난 화장실 좀.”
지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진이 메뉴판을 가져오려고 손을 뻗는데, 나루가 그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지후는 매운 걸 못 먹어.”
“그럼 그냥 기본 족발 시켜.”
“그런데 난 매운 족발을 좋아해.”
“어쩌라고.”
“생각해 봐. 지금 만약 기본 족발을 시켰는데, 지후가 나중에 내가 매운 걸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면 수상하게 생각할 거 아냐. 그렇다고 지금 매운 족발을 시키면, 지후가 날 이기적인 여자라고 생각해서 정떨어질지도 몰라.”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냐? 그냥 먹고 싶은 거 먹어. 쟤가 매운 거 싫어한다는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아, 그건 그러네.”
“게다가 그런 걸로 정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놈이라면, 너무 별로인 거 아냐?”
“그렇긴 하지만, 지후는 이미 날 싫어한단 말이야.”
“그럴 리가.”
명진은 직원을 불러 매운 족발과 계란찜을 시켰다.
주문을 하는 동안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던 나루가, 직원이 떠나자마자 말했다.
“어쩌지? 난 아직 지후를 앞에 두고 밥 먹을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어.”
“가지가지 한다. 야, 너 쟤랑 12년 알았다며?”
“그래도…… 지후는 아니잖아. 난 지금 짝사랑 중인 거야.”
“짝사랑이고 뭐고, 사람 앞에 두고 밥 먹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실수라도 하면 어떻게 해.”
“그럼 바로잡으면 되지.”
“지후가 날 못 쓸 여자라고 생각하면?”
“쓸모 있는 여자로 보이도록 노력하면 되는 거고.”
“그게 가능할까?”
“죽음을 바꾸려고 과거로 돌아왔는데, 사람 생각 좀 바꾸는 게 대수야?”
명진이 툭 내뱉은 말이 위로가 되었다.
나루는 크게 심호흡했다.
“나는 지후를 정말 많이 좋아해.”
명진이 웃었다.
“그래, 알아.”
화장실에서 나와 자리로 돌아가던 지후는, 마주 보고 웃는 나루와 명진의 모습에 걸음을 멈췄다.
친근해 보이는 둘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다시 걸어가 명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시원하게 싸고 왔냐?”
명진이 스스럼없이 물었다.
“어. 뭐 시켰어?”
“매운 족발.”
“아, 그래.”
“매운 거, 잘 먹어?”
나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잘 먹어.”
지후가 곧바로 대답했다.
나루와 명진이 눈을 맞췄다.
‘못 먹는다며?’
‘아냐, 진짜로 못 먹는단 말이야.’
‘자기 남자 친구 취향도 제대로 모르냐, 넌? 지후에 대해 아는 게 뭐야?’
‘알아. 진짜로 못 먹는다니까!’
나루와 명진은 눈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후는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내, 나루와 명진의 앞에 놓고 있었다.
‘매운 거 못 먹었었는데, 분명.’
나루는 얼떨떨했다.
그저 말로만 못 먹는 정도가 아니었다.
지후는 고춧가루 냄새만 맡아도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매운 것을 먹지 못했다. 매운 거 알레르기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뭐지? 매운 걸 잘 먹는다고? 원래는 잘 먹었다가 나랑 사귀면서 못 먹게 된 건가?’
아니, 그럴 리 없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닭갈비를 먹는 내내 얼굴이 빨개진 지후의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봤던 기억이 났다.
―괜찮아, 지후야?
보다 못해 티슈를 내밀며 말하는 나루에게, 지후는 겸연쩍은 듯 웃어 보였다.
―응, 고마워.
그 미소가 지후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왜 매운 걸 잘 먹는 거야? 내가 과거로 돌아와서 변한 게, 주위의 인간관계뿐만이 아닌 건가? 지후의 체질 같은 것도 변한 거야?’
혼란은 매운 족발이 나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가라앉았다.
매운 족발을 먹는 지후는, 나루가 기억하는 딱 그 모습이었다.
얼굴은 빨개지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누가 봐도 매운 것을 잘 먹는 모습이 아니었다.
황당한 건 명진도 마찬가지였는지, 고개를 돌려 지후의 상태를 지켜보다가 말했다.
“너, 매운 거 잘 먹는 거 맞냐?”
“어.”
지후가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힘들어 보이는데.”
나루가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아니. 맛있게 먹는 중이야.”
지후가 고집을 부렸다.
“맛있게 먹는 거랑 매운 걸 잘 먹는 거랑은 다르지. 너, 지금 되게 힘들어 보여.”
“안 힘들어.”
“살짝 눈물이 맺힌 것 같은데.”
명진의 말에 지후가 손등으로 눈가를 슥 닦았다.
‘어쩌면 쟤는 눈물 닦는 모습도 저렇게 멋질까?’
나루는 황홀한 기분으로 지후를 지켜보다가, 냅킨을 뽑아 지후에게 내밀었다.
“땀 좀 닦아.”
“됐어.”
역시 옛 시간과는 달랐다.
지후는 겸연쩍은 듯 웃지도, 고맙다고 말하며 티슈를 받아 들지도 않았다.
지후 대신 명진이 나루가 내민 티슈를 받아 들어 지후의 이마에 묻은 땀을 쿡쿡 눌러 닦아 냈다.
“하지 마.”
지후가 성가신 듯 말했지만 명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뭘 하지 마. 땀 뻘뻘 흘린다고. 홍수가 나겠다고. 그러니까 좀 닦으라고. 왜 고집부리냐고.”
잔소리를 하며 지후의 땀을 닦는 명진을, 나루는 부러운 듯 지켜보다가 말했다.
“명진아, 너 꼭 엄마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