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2017.10.09.
나루를 발견한 지후가 우뚝 멈춰 섰다.
지후는 나루의 등장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하지만 곧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어디 가?”
“아, 산책을 좀. 넌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산책.”
“음, 그래?”
“응.”
아까 널 선유도 공원에서 봤어.
나루는 그 말을 할까 하다가 관두고 다른 걸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
“응, 간단하게. 넌?”
“나도.”
“그래. 잘했네.”
나루는 고개를 숙였다.
지후와는 12년을 알고 지냈다. 그중 9년은 연인으로 지냈다.
그런데 왜일까.
다시 한 번 그와 사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후를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마치 첫사랑을 하는 여자아이처럼.
“그럼 난 들어가 볼게.”
지후가 말했다.
“아, 저기. 같이 가지 않을래?”
“어디를?”
“산책.”
“아니. 나는 하고 돌아오는 길이라서.”
지후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실제로 거절을 당하니 가슴이 아팠다.
옛 시간의 지후는 항상 나루에게 상냥했었다.
‘그래, 그럼. 그만 들어가 봐. 내일 보자.’
옛 시간의 나루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루는 옛 시간과는 달랐다.
어째서일까.
산 기간이 더 긴데도 더 소심해졌다.
‘하긴. 원래 나이가 들면 겁이 많아지는 법이지. 나만 해도, 원래 무서운 놀이기구 잘 탔었는데 서른 살 넘어가면서는 잘 못 타게 됐잖아.’
아는 게 많아지는 만큼 많은 경우의 수를 따지다 보니, 오히려 겁이 많아진다.
지금의 나루는 인간관계와 사랑에 대해 잘 모르던 20살의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렵고 무서웠다.
문득 구겨 신은 그의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신으면 운동화 빨리 상해.”
“아아.”
지후가 황급히 운동화를 바로 신었다.
가벼운 지적을 받아서 하는 행동치고는 무척 당황해하는 것처럼 보여서 의아했다.
나루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 그렇게 봐?”
지후가 시선을 옆으로 피하며 물었다.
“아니, 그냥. 좀…….”
이상하다.
하지만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지.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데, 그걸 정확하게 집어낼 수가 없었다.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아 뒀네. 들어가 봐.”
나루는 뒤늦게 마음을 정리하고 지후에게 산뜻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래.”
지후는 대답과 달리 움직이지 않았다.
“왜 안 들어가?”
“너 먼저 가.”
“뭐야, 그게? 너 먼저 들어가.”
“아니, 너 먼저 가.”
나루의 입가에 애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먼저 들어가.
―아냐, 우리 집 앞이잖아. 너 먼저 가. 보고 들어갈게.
―아니, 너 들어가는 거 보고 갈래.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지후와 나루는 데이트를 끝내고 늘 이런 실랑이를 했었다.
그렇게 10분, 20분 실랑이를 하다가 생각났다는 듯 다른 주제의 대화를 하고, 또다시 먼저 들어가, 너 먼저 가, 그런 말을 하다가 또 다른 주제로 대화를 하고.
하루 종일 데이트를 했는데도 헤어지고 싶지 않아, 집 앞에서 그렇게 한참 동안 옥신각신하곤 했다.
“그러고 보니, 너 요새 윤명진이랑 잘 어울려 다니는 것 같더라.”
지후가 주제를 바꿨다.
마치 옛 시간 때처럼.
“아, 응. 명진이랑 많이 친해졌지.”
“친해졌어?”
“응.”
“둘이 사귀거나 하는…….”
“아니, 그런 건 아냐!”
그가 오해할까 봐 황급히 반박했다.
지후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붙어 다니던데.”
“그러면 안 돼?”
“응.”
“왜?”
“윤명진은…….”
거기까지 말한 지후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윤명진은 관상이 안 좋아.”
“…….”
“어울려서 좋을 게 없어.”
“농담이지?”
“진담이야.”
지후의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전혀 없었다.
나루는 당혹스러웠다.
지후는 남의 인간관계에 대해 지적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선입견을 가지고 타인을 판단하지도 않았다.
‘내가 잘못 안 걸까? 내가 이 애를 사랑해서, 이 애의 단점을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재경이 때문이야?”
지후가 그답지 않게 행동하는 데 대한 다른 이유가 떠올랐다.
“재경이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여기서 재경이가 왜 나와?”
“재경이가 날 좋아하니까.”
“…….”
“그래서 내가 재경이 아닌 다른 사람이랑 어울리는 게 싫은 거야?”
“그렇다면?”
“월권행위야. 나와 재경이, 그리고 명진이의 문제야. 네가 개입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런가?”
“그래. 들어가 봐.”
나루는 돌아섰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지후가 나루의 손목을 잡아 세웠기 때문이다.
지후는 나루의 가느다란 손목을 세게 잡고, 돌아본 나루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나루는 그의 검은 눈동자 안에 어떤 생각이 담겨 있는지 알고 싶었다.
“뭐야?”
“난 개입을 해야겠어.”
지후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뭐라는 거야? 이 손 좀 놔줄래?”
그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의 잘못된 행동까지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윤명진은 좋지 않아. 걔는 너한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거야.”
지후의 한 마디, 한 마디에 허투루 넘기기 힘든 무게가 실려 있었다.
하지만 나루는 그런 그의 음성과 말투가 그의 재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을 사로잡고 사람을 이끄는 재능.
지후는 그런 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걔가 오토바이를 타고 머리를 그러고 다녀서 그래?”
“그런 문제가 아냐.”
“그럼 뭐가 문제인데?”
나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후를 올려다봤다.
지후는 난처한 듯 살짝 미간을 좁혔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재경이가 널 많이 좋아해.”
“…….”
“걔는 겉으로 그렇게 보여도 사실은 순정파야. 네가 앞에 있으면 어쩔 줄을 몰라 하지.”
“그래서? 재경이를 선택해라?”
“그래.”
“재미있구나, 너.”
나루는 그에게 잡히지 않은 쪽 손을 들어, 지후의 뺨에 살며시 올렸다.
지후는 움찔했지만 그 손을 뿌리치진 않았다.
“지후야. 재경이가 좋은 애라는 건, 나도 알고 있어. 그 애가 생긴 것과 다르게 순정파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고. 하지만 나는 그 애를 좋아하지 않아.”
“나루야.”
“너도 바보가 아니라면 알겠지. 마음이라는 건 나 자신조차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내 마음은 재경이를 향하지 않아. 앞으로도 그럴 거고.”
“세상에 확신할 수 있는 일은…….”
“있어, 가끔은.”
“…….”
“나는 그 애를 사랑하지 않아. 나는 언제나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해.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누구냐고, 지후는 묻지 않았다.
다행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놔줘, 지후야. 난 산책을 할 거야.”
지후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나루는 그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을 빼냈다.
돌아서는 나루를, 지후는 붙잡지 않았다.
하지만 지후는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멀어지는 나루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 * *
지각이다.
간밤에 지후의 돌발 행동에 대해 고민을 하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나루는 서둘러 준비를 하고 집을 나왔다.
계단을 두 개씩 달려 내려가다가 다리가 꼬였다.
‘넘어진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나루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는 팔이 있었다.
“조심 좀 해.”
재경이었다.
“아, 재경아. 고마워.”
“응.”
재경은 나루가 똑바로 섰다는 걸 확인하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같이 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요새 재경이랑 제대로 얘기를 해 본 적이 없네. 강의실에서 마주쳐도 제대로 인사도 못했고.’
나루를 대하는 재경의 태도가 어색해졌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무슨 일이지?’
묻고 싶지만 묻지 않았다.
‘재경이는 날 사랑하고 있어. 굳이 여지를 주는 행동을 하면 안 돼.’
어쩌면 이대로 영원히 멀어질지도 모른다.
눈이 마주쳐도 인사 한 번 안 하는 사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시간을 돌아왔다고 해서, 모든 것이 같으리라는 희망은 버려야 했다.
지후만 해도 나를 사랑하지 않고, 윤영 역시 나를 싫어한다.
옛 시간의 사랑과 우정은, 이 시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새롭게 시작을 해야만 했다.
단 하나만 빼고 모든 미련을 다 버려야만 했다.
‘지후를 살리는 거. 나는 그거 하나만 하면 되는 거야.’
내 사랑하는 친구가 나를 싫어하고 어색해하더라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
학교를 향해 걸어가는 내내, 재경은 뒤에서 걸어오는 나루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허리는 무척이나 가늘었다.
‘밥은 먹고 다니는 건가?’
나루는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마른 것 같았다.
팔 안에 쏙 들어오던 그녀의 체온이 여전히 팔에 묻어 있었다.
재경은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쓰디쓴 웃음이었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한심하게.’
* * *
2교시 강의가 끝나자마자 도서관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빈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 도서관에서 공부 좀 해 보려고 했는데.’
실망스러운 기분으로 나오다가, 서로 팔짱을 끼고 들어오는 선미와 지영을 발견했다.
“안녕.”
나루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둘은 놀란 듯했지만 곧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도서관 자리 없지?”
선미가 물었다.
“응, 없더라. 너넨 자리 맡았어?”
“우린 새벽부터 왔어. 선배들이 자리 맡으려면 새벽 5시에 와서 기다리라고 하더라고. 그때 자리 정리한다고.”
“아, 그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메뚜기 해. 어차피 자리만 맡아두고 안 오는 사람들 많더라.”
메뚜기는 도서관에서 빈자리에 앉아 공부를 하다가, 자리 주인이 오면 다른 빈자리로 옮기는 걸 말했다.
오랜만에 듣는 단어에 빙그레 웃는 나루를, 선미와 지영은 멍하니 쳐다봤다.
“와, 너 웃으니까 이미지가 진짜 다르다.”
지영이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아, 그래?”
“훨씬 낫네. 좀 웃으면서 다녀.”
“맞아, 맞아.”
“응, 고마워. 다들 공부 열심히 해.”
“아, 나루야. 이따가 자리 나면 맡아줄까?”
지영의 제안에 선미가 지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도서관에는 재경과 지후도 있었다.
요 며칠 재경, 지후와 잘 지냈는데 나루가 끼게 되면 두 남자는 나루에게만 관심을 둘 것이다.
하지만 지영은 선미의 속도 모르고 나루에게 말했다.
“폰 번호 알려 주면, 자리 났을 때 연락 줄게.”
“그래 주면 정말 고맙고.”
나루는 지영에게 폰 번호를 알려 줬다.
“자리 안 날 수도 있어.”
선미가 말했다.
“응, 그래도 괜찮아. 내가 늦은 게 잘못이지. 나도 내일은 5시에 나와 볼까 봐. 그럼 다들 힘내.”
나루는 손을 흔들고 도서관을 나갔다.
나루가 멀어지자마자 선미가 지영의 팔을 꽉 잡았다.
“야, 너 왜 나루한테 그런 거야?”
“응? 뭐가?”
“너, 나루 싫어하잖아.”
“아니,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었는데. 그냥 너무 남자애들이랑만 어울리는 것 같아서 좀 그랬던 거지.”
“나루는 지금도 남자애들이랑만 어울리잖아.”
“그런 것 같진 않던데. 쟤, 요새 혼자 다니잖아.”
“그런가?”
그러고 보니, 요새 나루가 재경이나 지후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우리가 애도 아니고, 왕따 시키고 그러는 건 좀 그렇잖아.”
“아니, 내가 뭐 나루 왕따 시키자고 했나?”
선미가 툴툴거렸다.
“나루 왕따 시키게?”
선미의 투덜거림에 대한 대꾸는 뒤에서 들려왔다.
선미가 표정을 굳히고 뒤를 돌아봤다.
재경이 서 있었다.
선미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왕따 같은 거 안 시킬 거라는 얘기하고 있었는데.”
“그래?”
재경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여태껏 나루에게만 보여 주던 미소였다.
“누구 왕따 시키고 그러지 마. 이따 같이 저녁이나 먹자.”
“아, 정말?”
재경이 먼저 저녁을 먹자고 하는 건 처음이기에, 선미와 지영 둘 다 반색하며 달려들었다.
“응, 수업 다 끝나면 닭갈비나 먹자. 공부하려면 속이 든든해야지.”
“오, 닭갈비. 좋아.”
“술도 한 잔 하고?”
“시험 기간인데 술은 자제하자.”
재경은 적당히 대꾸해 주며 열람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루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나루가 따돌림을 당하고 미움 받는 것은 싫었다.
그러니까 있는 힘껏 노력할 것이다.
나루가 여자애들의 미움을 받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여자애들이 나루를 싫어하는 이유 중에는 내 탓도 있으니까.’
* * *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자, 재경은 옆자리를 돌아봤다.
지후는 도서관에 오자마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벌써 2시간째다.
‘이 녀석, 대학 들어온 후로 좀 이상하단 말이야.’
지후는 항상 성실했다.
타고난 머리가 좋은데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험생 때 늘 함께 학원과 독서실을 다녔는데, 엎드려서 자는 모습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요샌 수업도 잘 빼먹고.’
대학 들어와서 해이해져 정신을 놓고 노는 애들이 있다고는 들었다.
하지만 지후는 그런 과가 아니었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정신을 놓고 노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재경은 지후의 어깨를 흔들었다.
지후가 반쯤 고개를 들고 재경을 응시했다.
“저녁 먹으러 갈 거야.”
“아아.”
지후가 일어날 준비를 했다.
“선미랑 지영이랑 같이 먹기로 했어.”
재경이 덧붙인 말에 지후가 움직임을 멈추고 미간을 좁혔다.
“김선미랑 정지영?”
“응.”
“왜?”
“같은 과 애들이랑 저녁 먹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돼?”
“나루는?”
이번에는 재경이 미간을 좁혔다.
“여기서 나루가 왜 나와? 말했잖아. 나루에 대한 마음 접을 거라고.”
“재경아.”
지후가 짐짓 심각하게 재경의 이름을 불렀다.
재경은 왈칵 짜증이 났다.
나루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난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 때문에, 친구가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친구를 질투했다고.
나는 그런 비열한 놈이라서 나루를 사랑하는 것도, 네 옆에 친구라는 이름으로 있는 것도 미안하다고.
목구멍까지 치민 말을 꿀꺽 삼켰다.
“어쩔 거야? 저녁, 같이 먹을 거?”
“난 패스.”
“그래, 챙겨 먹어라.”
지후는 다시 엎드렸고, 재경은 일어나서 지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선미와 지영은 이미 열람실 입구에서 재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뜬 듯한 표정의 두 여자에게 다가가며, 재경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아. 대학 생활, 정말 재미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