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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28화 (28/93)

28화. 내 어디가 좋아?

2017.10.05.

민지후를 마음껏 사랑해도 된다.

그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삶이 변했다.

매순간 느껴지던 가슴의 통증이 사라졌다.

숨을 쉴 때마다 찾아오던 고통이 없어졌다.

비록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그를 사랑해도 된다는 사실은 마음가짐을 변화시켰다.

이 시간이 더는 고독하지 않았다.

곧 중간고사라서 다들 시험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새벽부터 일어나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공부를 하다가 수업을 들어오는 학생들도 있고, 이제야 시험 범위를 체크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대학에 들어와 처음으로 경험하게 될 시험이었다.

고등학교 때와는 다를 것 같아서 다들 긴장한 상태였지만, 나루만은 초연했다.

대학 때 배운 내용은 전부 나루의 머릿속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엔 나도 진짜 열심히 공부했었는데.’

중간고사 기간은 늘 벚꽃이 피는 기간과 겹쳤다.

날이 좋은 봄, 교정에 흐드러진 벚꽃.

하지만 다들 시험공부를 하느라 벚꽃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옛 시간에서는 나루도 마찬가지였다. 곳곳에 핀 벚꽃을 올려다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도서관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꽃, 예쁘네.

하지만 지후는 달랐다.

나루와 함께 도서관으로 걸어가면서도 고개를 들어 벚꽃을 구경했다.

무심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꽃이나 나무를 좋아하는 그의 모습을 ‘숲속의 곰 아저씨’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꽃 볼 틈이 어디 있어? 너, 시험공부는 다한 거야?

―아직. 하지만 지금이 지나면 꽃구경 못 할 것 같은데.

―그런 거야 졸업하고 나서 하면 되지.

―지금 보는 꽃과 졸업하고 나서 보는 꽃은 다를걸. 자, 고개를 들어라, 연나루.

지후는 고집스럽게 말하며 나루의 양 볼을 잡아 하늘을 보게 만들었다.

새파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듯한 분홍빛 꽃잎이, 시야를 아찔하게 채웠던 기억이 났다.

그때에 나루의 양 볼을 감쌌던 그의 따뜻한 손바닥이 기억났다.

지금 이 순간, 그가 그때처럼 내 볼을 만져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 서서 혼자 뭐하냐? 영화 찍냐?”

뒤에서 명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루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꽃구경.”

나루는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명진이 고개를 들어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확인했다.

“아아, 벚꽃이 폈네.”

“응, 이 시기에는 벚꽃이 피지.”

“꽃 폈다는 것도 몰랐다, 야.”

“응, 나도 그랬어. 옛 시간에서는.”

나루와 명진은 나란히 걸었다.

“이 시기에는 시험공부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지. 시험 끝나면 벚꽃놀이 가야지, 하고 결심을 하는데, 웃기게도 우리 학교는 시험이 끝나면 꼭 봄비가 와. 봄비는 벚꽃을 다 떨어뜨리고, 우리는 바닥에 깔린 벚꽃을 볼 수밖에 없었어.”

바닥에 깔린 분홍빛 융단 같은 벚꽃을 보며 아쉬워했던 기억이 났다.

내년 봄에는 미리 공부를 해 두고 벚꽃 구경해야지, 하면서도 그 결심을 지키지 못했다.

“지금은 봐도 되겠네. 넌 공부 안 해도 되니까.”

“응. 그래서 보고 있었지.”

나루의 입가에 우아한 미소가 떠올랐다.

명진은 잠시 숨을 멈추고 미소 짓는 나루를 응시했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을 명진에게 알린 후, 나루는 명진의 앞에서 더 이상 어린애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32살의 연나루는 정말 매력적이었을 거야.’

라고, 명진은 생각했다.

“너는 도서관?”

나루가 물었다.

“아, 그러려고 했는데. 도서관에 자리 다 찼더라. 그냥 집에 가서 공부하려고.”

“의외네.”

“뭐가?”

“넌 공부 안 할 줄 알았는데.”

“공부 안 하면 이 대학을 어떻게 들어왔겠냐? 이래 봬도 꽤 성실한 편이야.”

“그래서 한 달이나 땡땡이를 쳤니?”

“말했잖아. 해외에서 문제가 생겨서 못 돌아왔었다고. 나도 얼마나 초조했는데. 그런데 너, 어디 가는 거야?”

“한강. 벚꽃 구경하러.”

“팔자가 늘어졌네.”

“응, 난 과 수석이었고, 늘 장학금만 받았고, 졸업 후에도 관련 직종에서 일을 했으니까.”

“그래, 참 좋으시겠다.”

“같이 갈래?”

“난 너랑 다르게 과 수석도 아니고, 장학금도 못 받았을 것 같고, 졸업은 해 본 적도 없어서.”

나루가 웃었다.

명진은 청량하게 울리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이런 식으로 웃는 애였구나.’

늘 죽상을 하고 있던 나루였는데, 지난 번 가평에서 ‘민지후를 사랑해도 돼.’라는 말을 들은 후에 변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이렇게 분위기가 변하다니.

사랑을 해 본 적 없는 명진이기에, 사랑으로 웃고 우는 나루가 신기했다.

“내가 시험에 뭐 나올지 대충 알려 줄게. 전부는 알려 주기 힘들지만.”

“정말? 시험 내용이 다 기억나?”

“전부는 아니지만 대략적으로는 기억나지.”

“너, 진짜 머리 좋구나.”

“응, 그러니까 KOB 수석 연구원으로 있었지.”

명진이 걸음을 멈췄다.

“너, KOB였어?”

“응, 말 안 했던가?”

“어, 연구소라고만 했지. 와, 대단하네.”

KOB 미래 생명 연구소는 여러 나라들과 공동으로 운영하는 연구소로, 세계 각지에 그 지점이 있었다.

입사하기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기로 유명했다.

“응, 나는 대단하지.”

“본인 입으로 대단하다고 하는 건 좀 재수 없다, 야.”

“응, 나는 재수 없기도 해.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가자, 가. 시험 문제 알려 준다는데 안 갈 이유가 없지.”

나루와 명진은 함께 선유도 공원행 버스를 탔다.

흔들리는 버스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던 명진이 중얼거렸다.

“아, 오토바이로 가면 금방인데.”

나루가 도끼눈을 하고 명진을 노려봤다.

“오토바이라니. 너, 설마 아직도 그거 타?”

“아냐, 아냐. 지금은 안 타. 팔려고 내놨어.”

“정말?”

“그래, 정말.”

나루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타지 마, 절대로. 남의 오토바이도 타지 마. 오토바이 근처에도 가지 마.”

“알겠어요, 엄마. 잔소리 좀 그만해요.”

나루는 콧등을 찡그리고 명진의 볼을 꼬집었다.

“까불지 말고.”

“생긴 건 십 대인데 행동은 엄마 같단 말이야.”

“내가 너보다 오래 살다가 오긴 했지만 엄마 나이만큼 오래 살진 않았거든?”

“옛날에 애늙은이 같다는 말은 안 들어봤냐?”

“아주 상큼하다는 말만 자주 들어봤어.”

“거짓말하네.”

“예리하네.”

명진과 이런 대화를 주고받을 만큼, 나루는 마음이 편해졌다.

이윽고 선유도 공원 근처의 정류장에 내렸다.

긴 다리를 건너가 선유도 공원에 들어섰다.

벚꽃놀이 철이라 그런지 선유도 공원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주홍빛으로 저물어 가는 해와 선선한 봄바람이 그리움을 자아냈다.

“졸업을 한 후에 여기에 자주 왔어. 특히 이 무렵에.”

나루가 말했다.

“항상 많이 바빴거든. 그래도 벚꽃 철이 되면 지후 손에 이끌려서 여기에 왔어. 그리고 저기.”

벤치를 가리키던 나루가 말을 멈췄다.

명진은 무슨 일인가 싶어 나루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응시했다.

그곳에 지후가 있었다.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은 배경에 불과했다.

벤치에 구부정하게 앉아 있는 지후만이 또렷하게 나루와 명진의 눈에 각인되었다.

“지후가 왜…… 저기에……?”

나루가 중얼거렸다.

“지후가 저기에 있으면 안 돼?”

“아니, 안 되는 건 아닌데…….”

나루가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데이트를 했어. 나도, 지후도 졸업한 후에. 그때 지후가 그랬거든. 처음 와 본다고.”

“그래?”

“응. 그런데 왜 지금 저기에 있는 거지?”

“…….”

“나한테 거짓말한 건가?”

“글쎄. 가서 물어보지 그래?”

“그건 안 돼.”

나루가 휙 돌아섰다.

“나, 아직 지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명진이 어이없단 표정으로 나루를 내려다봤다.

“왜 몰라? 네 남자친구였잖아.”

“그랬지. 그랬기는 한데…… 지후가 먼저 나한테 고백을 한 거였고. 걔가 왜 나를 좋아하게 됐는지도 안 물어봤었고. 괜히 내가 행동 잘못해서, 지후가 날 더 싫어하게 되면 어떻게 해.”

나루가 빠른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명진이 붙잡을 틈도 없었다.

명진은 황급히 나루의 뒤를 따라갔다.

‘더 싫어하게 되다니. 민지후는 이미 나루한테 푹 빠진 것 같은데.’

명진은 그 일을 말해도 될지, 안 될지 망설였다.

현재의 모든 행동이 미래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나루와 명진이 서둘러 선유도 공원을 빠져나가고 있을 때, 지후는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 *

당산역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저렴한 가격이라서 중고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카페였다.

나루는 눈꽃빙수를 시켰다.

빙수가 나오자마자 와구와구 먹는 나루를, 명진은 가만히 지켜봤다.

“아, 너도 먹을래?”

빙수가 바닥을 드러냈을 때에야 나루가 명진의 존재를 깨달은 듯 물었다.

“국물밖에 안 남았네.”

“원래 이게 제일 맛있어.”

“됐다, 너나 먹어.”

나루는 더 이상 권하지 않고, 그릇을 들어 녹은 빙수를 후루룩 마셨다.

“너, 원래 그런 캐릭터였냐?”

“그런 캐릭터라니?”

“고상할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런 모습도 있고, 저런 모습도 있고 그런 거지, 뭐. 사람이 어떻게 한 모습으로만 살아가? 너도 양아치인 것 같은데 의외로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잖아.”

“그건 그러네.”

그래도 그릇을 두 손으로 들고 빙수 녹은 물을 후루룩 마시는 나루는 신기하다고, 명진은 생각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흩어져 사라질 것처럼 불안하고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었는데.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나루는 쾌활하고 평범한 여고생 같았다.

“어떻게 해야 지후가 날 사랑할까?”

“그건 나도 모르지. 내가 남자의 사랑을 얻으려고 애써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명진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넌 두뇌 회전이 빠르잖아.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 같은 거, 아는 거 없어?”

“너야말로 지후한테 그런 것도 안 물어본 거야?”

“응.”

나루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보통 물어보지 않아? 내 어디가 좋아, 이런 거.”

“아, 그건 물어봤었지.”

“뭐래?”

“멍청해서 좋대.”

“……그래. 그럴 수 있겠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니. 나는 수석으로 졸업했어. 최고의 연구소에 다니고 있었고. 그래서 농담이라고 생각했다고.”

“공부하는 머리랑 다른 머리가 있어. 넌 공부 머리는 뛰어날지 몰라도, 다른 쪽 머리는 멍청해.”

“너무 단호하게 말하는 거 아냐?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내가 멍청한 것 같잖아.”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거든? 지금 이 눈빛에 장난기가 조금이라도 섞였냐?”

명진이 자신의 갸름한 눈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루가 입술을 비쭉거렸다.

“난 안 멍청하다고.”

끝까지 고집스럽게 중얼거리는 나루의 모습에 명진이 피식 웃었다.

나루는 가끔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저 안에 들어 있는 영혼은 나보다 12살이나 더 많을 텐데.’

“설령 지후가 정말로 나를 멍청해서 좋아했다고 해도, 지후 앞에서 계속 멍청하게 굴 수는 없잖아. 나는 멍청한 게 뭔지 몰라.”

나루가 말했다.

“평범하게 행동하면 될 것 같은데. 옛 시간에서 네가 굳이 어떤 행동을 해서 지후가 널 좋아하게 된 건 아니잖아. 자연스러운 너의 모습을 보고 반한 거 아니겠어?”

“자연스러움.”

나루는 머리를 거머쥐었다.

“난 20살의 자연스러움이 어떤 건지 기억도 안 나. 지금 내가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정말로 애늙은이처럼 보일걸.”

“글쎄.”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 보이는 외모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나루는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을 입으로 하기에는 민망해서, 명진은 미지근하게 대답했다.

‘게다가 지후는 이미 너한테 푹 빠졌다고.’

동아리방에서 봤던 광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절절하고 애틋한 지후의 눈빛은 ‘사랑’이 아닌 다른 단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32살의 나는 정말 완벽주의자야. 꼼꼼하고 세심하거든. 20살 때도 비슷하긴 했지만 32살 때만큼은 아니었을 거야.”

나루가 느닷없이 본인 자랑을 시작했다.

무슨 소리를 하려나 싶어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나루가 눈썹 끝을 내리고 물었다.

“남자들은 너무 완벽한 여자를 싫어하지 않아?”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명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왜? 왜 웃는데?”

“아니, 아니. 그건 네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부분인 것 같아서.”

“걱정 좀 하게 내버려 둘래?”

“아냐, 진짜 무의미한 걱정이야. 괜한 에너지 소비하지 말고, 좀 더 있을 법한 일을 걱정하도록 해.”

“있을 법한 일이 뭔데?”

“지후가 너를 사랑하더라도 그 마음을 감추는 경우.”

“그럴 만한 일이…… 아.”

나루는 재경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 성재경. 재경이가 널 좋아한다는 걸, 과 애들이 다 알 정도야. 민지후가 널 사랑하더라도, 과연 그 마음을 표현할까?”

* * *

결국 답을 얻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명진은,

“네가 알아서 해. 그 부분은 못 도와줘.”

라고 말했다.

옳은 말씀이다.

내 사랑이니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다만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 기뻐서 떠들어 댔을 뿐이었다.

씻고 나와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았다.

명진에게 시험에 나올 부분을 알려 주기로 했다. 그 부분을 체크해 둘 생각이었다.

‘습관은 무섭구나.’

할 일이 있으면 뒤로 미루지 않는다.

나루는 늘 그렇게 살아왔다.

해야 할 일을 끝내고 편하게 다른 일을 하는 게 편했다.

두꺼운 전공 서적을 펼치고 기억을 더듬어 시험에 나올 부분을 체크했다.

오래전 밤을 지새우며 시험공부를 할 때가 떠올랐다.

‘힘들지만 즐거웠어.’

그 당시에는 힘들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돌이켜 보면 분명 그 안에 즐거움도 존재했다.

‘내일부터는 나도 도서관에 가서 공부나 좀 해 볼까? 꼭 공부를 하는 건 아니더라도, 다시 한 번 그 분위기나 느껴 보게.’

한 과목을 다 체크하고 나서 기지개를 켜며 시간을 확인했다.

밤 10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산책이나 좀 하고 올까?’

늦은 밤의 산책은 이제 취미가 되었다.

뺨을 스치는 공기를 느끼며 천천히 걷다 보면, 헝클어진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신발을 신고 나와 계단을 타닥, 타닥 뛰어 내려갔다.

1층에 도착한 나루는 걸음을 멈췄다.

빌라 입구로 지후가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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