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네가 있는 시간으로
2017.09.28.
나루의 눈이 커졌다.
“어?”
“저번에 동방에서 했던 얘기, 기억나지? 네가 그랬잖아. 학교 한 번 더 다니는 중이라고. 그 얘기, 다시 좀 해 보자고.”
“아…… 그건 갑자기 왜?”
“듣고 싶어서.”
“아니, 그 얘기는 그냥 장난삼아서 한 거였잖아. 네가 그 얘기를 마음에 담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마음에 안 담고 있어, 보통은. 그런데 지금은 보통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
“아니, 음. 갑자기 이러니까 당황스럽다.”
나루가 웃었다. 눈치 없는 사람이 보기에도 어색한 웃음이었다.
명진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나루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원래 SF라든가, 초능력이라든가, 영혼이라든가, 그런 거 안 믿어. 그렇다고 해서 그걸 완전히 부정하지 않아. 눈앞에서 벌어지면 믿겠지.”
“…….”
“넌 이상해. 날 처음 봤을 때부터 넌 이상했어. 날 잘 안다는 듯이 굴었고, 대학 생활에 대해 너무 잘 알아. 교수가 출석을 2교시 때만 부른다는 거, 보통 몇 달은 지나봐야 알잖아. 그런데 넌 그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어.”
“…….”
“말투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가끔 이상할 정도로 달라. 가끔은 어른스러운데, 또 가끔은 어린애 같아. 그냥 20살의 어린애가 아니라 완전히 어린애.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이 20대인 척 하고 싶은데, 그 선을 몰라서 더 어리게 행동하는 듯한 느낌이야. 그리고 오늘 아침에 나한테 오토바이 타지 말라고 한 거.”
나루는 마른침을 삼켰다.
“너, 주위에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사람이 있는 거 아니지?”
“있어.”
“아니, 없어. 없을 거야. 설령 있다고 해도, 오늘 아침에 나한테 오토바이 타지 말라고 말하는 모습은 너무 절박했어. 보통은 친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그렇게 절박하게 말하지 않아.”
“내가 오지랖이…….”
“그리고 아까 계곡에서.”
명진이 나루의 변명을 끊었다.
“지후한테 하는 네 행동, 진짜 이상했어.”
“그건 아는 사람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있어서…….”
“아, 그래? 오토바이 사고로도 죽고, 물에 빠져서도 죽고. 네 주위에는 죽는 사람이 참 많기도 하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역시 그런 걸까?
내가 죽음을 몰고 다니는 걸까?
그래서 내 주변의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가는 걸까?
명진이 사정없이 몰아붙인 통에, 나루는 정상적으로 사고할 여유가 없었다.
명진을 똑바로 보고 싶은데, 흔들리는 동공을 바로잡기 힘들었다.
“네가 수상쩍게 구는 이유, 나중에 얘기해 주겠다고 했지. 지금이 바로 그 나중이라고 생각해. 지금 난 네 얘기를 듣고 믿을 준비가 되어 있어. 네가 그 어떤 허무맹랑한 말을 해도 믿을 거야. 왜냐하면.”
명진이 손가락으로 자기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내 머릿속에 허무맹랑한 생각이 가득 차 있거든. 나중에 내가 정신을 차리고 그럴 리 없다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늦어. 그러니까 연나루. 지금 말해. 너, 대체 뭐야?”
* * *
너는 대체 무어냐고 묻는 명진을, 나루는 눈을 크게 뜨고 응시했다.
나는 대체 뭘까.
옛 시간이었다면 단번에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연나루. XX년 6월 5일생. 쌍둥이자리. B형.
하지만 이 시간의 연나루는, 모르겠다.
나는 뭘까. 왜 이 시간을 다시 걷게 된 걸까. 이 시간은, 내가 걸었던 그 시간이 맞기는 한 걸까.
한참 동안 깜빡이지 않은 눈이 시렸다.
나루는 눈을 감았다.
―네 얘기를 듣고 믿을 준비가 되어 있어.
한 단어, 한 단어를 곱씹는 듯한 명진의 음성이 귀를 울렸다.
어쩌면 누군가 이렇게 말해 주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난 널 믿을 거야. 그 어떤 소리를 해도 다 믿을 테니까 말해 봐.
이 고독한 시간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엉엉 울며 모든 것을 털어놓게 될 것이라고, 나루는 막연히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괜찮은 걸까? 이 시간의 사람에게 모든 걸 말해도 괜찮은 걸까?’
오늘 지후가 죽을 뻔했다.
원래는 32살에 죽어야 하는데, 20살인 지금 죽을 뻔했다.
죽음이 그렇게 빠르게 지후를 삼키려 한 것이, 이 시간으로 돌아온 나루의 존재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런 이야기들을 했다가 또다시 죽음을 자극하게 되면, 그때도 과연 오늘처럼 막아낼 수 있을까?
명진은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문 나루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그녀의 옆에 앉아,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이윽고 나루가 다시 눈을 떴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는 결심을 굳힌 듯 단호히 명진을 향했다.
“32살까지 살았어. 명진아. 나는 32살까지 살다가 이 시간으로 돌아왔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나루는 돌아가는 상황을 확신할 수 없었다.
말했을 때에 죽음이 닥쳐올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도움을 받는 편이 나았다.
지금 눈앞의 남자가, 눈치 빠른 한 남자가 ‘전부 믿어 주겠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 시간에서 조력자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나는 평범하게 자라서 이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기업에 입사를 하게 돼. 거기서 연구를 하다가 뭔가를 발견했는데, 그게 상당히 돈이 되는 거였어. 그래서 위험에 처했고, 그런 나를 구하다가…… 지후가 죽었어.”
명진은 말이 없었다.
명진이 이 말들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한 번 시작한 말을 멈출 수 없었다.
“지후의 몸에서 피가 흘렀어. 지후의 몸이 식어갔던 것도 생생해. 정신을 차렸더니, 나는 지후의 장례식장에 있었어. 지후의 가족들이 내게 화를 냈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 지후는 나를 구하다가 죽었으니까. 나 때문에 죽은 거니까.”
이상한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속사정을 이야기하게 되면 울음이 터질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타인의 이야기라도 된다는 듯 단조롭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이 너무 거짓말 같아서, 오히려 담담해지는 것이리라.
“나는 도망치듯이 장례식장을 나와서 집으로 돌아왔어. 울었지. 울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아. 그리고 눈을 떴더니, 여기였어. 이 시간으로 돌아와 있었어. 나의 20살 때로. 지후의 20살 때로. 그리고 네가 있는 시간으로.”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이 시간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했던 다짐은, 명진이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 후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았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무겁고 신중한 침묵 속에서, 나루는 명진이 어떤 결론을 내리든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이자고 결심했다.
명진이 이 거짓말 같은 말들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하지 말자고, 허물어지지 말자고, 마음을 다졌다.
“그럼.”
이윽고 명진이 입을 열었다.
“로또 당첨 번호 기억나는 것 좀 있어?”
“어?”
나루가 눈을 크게 뜨는 모습을 보고, 명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농담이야.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져서.”
“아아.”
“뭐, 기억나는 게 있으면 알려 주면 고맙고.”
“내 말을 믿는 거야?”
“하아.”
명진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머리를 거머쥐었다.
“사실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했었어. 바보 같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생각인데,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멈출 수가 없더라. 그런데 생각만 하는 거랑 그 말을 실제로 듣는 건 좀 다른 것 같아. 믿어.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런데 한편으로는.”
“너무 거짓말 같지.”
“그래, 너무 거짓말 같은 얘기야.”
“이해해. 나도 아직 이 현실이 믿어지지 않으니까. 가끔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싶거든. 아주 긴 꿈. 그러다가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 어쩌면 내가 옛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그것들이 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호접몽이라는 건가?”
“응.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하아.”
명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머리에서 손을 내렸다.
“너랑 지후는 연인이었던 거냐?”
“응.”
“그럼 나는?”
“너는 대학 동기였어.”
사실은 별로 친하지 않았어. 이 시간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너를 잊고 있었어.
그런 말은 당연히 할 수 없었다.
“대학 동기라. 나는 언제 죽었는데?”
명진이 중얼거린 말에, 나루가 눈을 크게 떴다.
“뭘 그렇게 놀라? 나,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거 아냐?”
“……맞아.”
“그래, 그러니까 나한테 오토바이 타지 말라고 그렇게 절박하게 말한 거겠지. 언제 죽었어?”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명진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내년 이맘때.”
“그렇게 빨리?”
“응.”
“그렇군. 그럼 네가 32살 때쯤엔 날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겠네.”
“왜 그렇게 생각해?”
“널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대학 애들이랑 어울릴 일 별로 없었을 거야. 오늘 같은 날, 이 바보 같은 여행에 참가하지도 않았을 거고, MT는 물론 과 모임이나 동아리도 가지 않았을걸. 그게 내 성격이니까.”
“…….”
“부딪치는 일이 없는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 넌 용케 내 죽음을 기억했네.”
“사실은 나도…….”
“아, 됐어. 32살에 날 잊고 있었더라도, 지금은 기억하는 거잖아. 그걸로 됐어.”
“미안.”
“원래 인간은 남의 일에 크게 관심이 없는 법이니까.”
염세적으로 말하는 명진에게 무슨 대답을 해 줘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명진은 생각에 잠겨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생각을 정리하던 명진이 물었다.
“왜 시간을 되돌아왔는지 짐작 가는 건 전혀 없어?”
“없어. 아니, 하나 있나?”
“뭔데?”
“옛 시간에서 잠들기 전에, 딱 한 가지 생각을 했었어. 다시 한 번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로 지후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그래서 지후가 32살 이후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 주겠다고. 정말로 간절히 바랐어.”
“간절히 바란다고 시간을 돌릴 수 있으면, 다들 몇 번쯤은 돌렸을걸.”
“응. 하지만 그것 이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어.”
“그래, 뭐. 지금 이 시점에서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만약 네 기억들이 꿈이 아니라고 가정하고, 진짜 이 시간으로 돌아온 거라면. 넌 뭘 하고 싶은 거야? 지후를 살리려는 거야?”
“그래. 지후를, 그리고 너를.”
“방법은 생각해 봤고?”
“너는 오토바이 때문에 죽었어. 그러니까 오토바이를 타지 못하게 하려고 했어. 그리고 지후는, 나 때문에 죽었으니까 내가 그 애의 인생에서 사라지면 돼. 내가 그 애를 사랑하지 않고, 그 애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되는 거야.”
“너는 이미 지후를 사랑하잖아.”
“응, 하지만 들키지 않으면 되니까.”
“지후는…….”
거기까지 말하고 명진은 입을 다물었다.
며칠 전, 동아리방 창문 너머로 봤던 광경이 떠올랐다.
나루를 향한 지후의 애틋한 시선. 그 간절한 손길.
“지후는 과연 널 사랑하지 않을까?”
그 일에 대해 말하는 대신, 명진은 물었다.
“사랑하지 않을 거야. 실제로 지금 지후는 나를 귀찮아하고 있거든. 게다가 재경이가 날 좋아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날 사랑하는 일은 없을 거야. 지후, 의리파거든.”
“그래 보이기는 한다만, 글쎄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지 않을걸.”
“쉽지 않겠지. 하지만 나는 지후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게 할 거야. 지후는, 32살 이후의 삶을 살아가야 돼.”
“견딜 수 있을까?”
“어차피 지후는 나와의 추억이 전혀 없으니까…….”
“아니, 지후 말고. 너 말이야.”
명진이 나루를 돌아봤다.
“지후는 멋진 녀석이지. 언젠가 여자를 만나게 될 거야. 네가 있던 그 자리를 네가 아닌 다른 여자가 차지하겠지. 너와 나누던 사랑을 다른 여자와 나누게 될 거야. 그 손을 잡는 것도, 그 품에 안기는 것도, 네가 아닌 다른 여자일 거야.”
명진의 말이 나루의 폐부를 찔렀다.
나루는 통증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숨을 멈췄다.
“네가 과연 그걸 견딜 수 있을까?”
“나는.”
나루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 눈물이 떨어지기 직전에, 나루는 꿀꺽 눈물을 삼켰다.
“지후만 살아간다면, 그래도 괜찮아.”
“가슴이 새까맣게 탈 거야.”
“응.”
“매일 울고 싶을걸.”
“응.”
“하루, 하루가 지옥 같을 거야.”
“응. 하지만. 명진아, 나는.”
나루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가 내뱉듯이 말했다.
“나는 지금도 그래.”
* * *
강변에 혼자 남겨진 나루는 흐르는 강물에 시선을 던졌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명진은 그렇게 말했다.
―네 말을 안 믿는 건 아냐. 하지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그것으로 충분했다.
누군가에게 이 마음을 털어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속이 후련했다.
항상 나루를 둘러싸고 있던 고독의 색이 조금은 옅어졌다.
‘대나무 숲에 대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친 기분이야.’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마음이 편해졌다.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지고 강물은 검게 물들었다.
이제 슬슬 들어가야겠다 싶어서 일어났다.
펜션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데, 이쪽으로 걸어오는 커다란 인영이 보였다.
어두워서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지후였다.
그의 걸음걸이, 작은 몸짓 하나까지도 나루는 전부 다 알고 있었다.
나 자신보다 그를 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후 역시 그랬었다. 옛 시간에서는.
나루를 발견한 지후가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걸어와 나루의 앞에 섰다.
“몸은 좀 괜찮아?”
나루가 물었다.
“응, 덕분에.”
“다행이다.”
“너는?”
“나도 괜찮아. 어디 가는 길이야?”
“편의점에. 술 부족할 것 같다고 해서.”
“아, 벌써 술자리가 벌어진 거야?”
“응. 명진이가 너 잠깐 뭐 하고 있다고 그러더라.”
“응, 뭣 좀 하고 있었어.”
나루를 혼자 있게 해 주기 위한 명진의 배려가 고마웠다.
“다했어?”
“응, 다했어.”
사실은 하나도 못 했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세운 계획이 옳은지, 그른지, 짐작도 못 하겠어.
어떻게 해야 널 살릴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지가 않아.
나루는 목에서 맴도는 말을 삼켰다.
“그래, 잘됐네.”
“응.”
이제 그만 들어갈게, 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 말도 나오지 않았다.
미련하게도 이 육체는 여전히 지후를 원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하면 안 되는 것을 아는데도, 육체는 항상 생각을 배반했다.
머뭇거리는 나루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지후가 말했다.
“편의점, 같이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