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추억이 하나하나
2017.09.21.
이렇게 몰아붙인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루는 알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것을 이렇게 쉬운 방법으로 물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난처한 표정으로 나루의 시선을 받던 명진이 말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오토바이 타는 건 내 취미야. 앞으로 더 조심해서 탈게. 그걸로 합의 보자.”
여기서 더 말해 봐야 명진은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 알겠어. 정말로 조심해서 타야 돼. 차들 추월하지 말고.”
“그래, 그래.”
건성으로 대꾸하는 명진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평행 고속버스는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차창으로 넘어가는 길이 눈에 익었다.
‘옛날에 가평에 참 자주 갔었는데.’
MT도 가평으로, 친구들과 1박 여행도 가평으로, 그리고 지후와 사귄 후에도 종종 가평으로 여행을 갔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대학 때로 돌아온 것 같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갔었던 펜션을 빌려 하루를 보내며, 그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눴다.
그의 팔을 베고 이야기했던 시간이,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맞춤을 했던 시간이 그리웠다.
계속 그런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나루는 눈을 감았다.
‘잠이나 자자. 지후가 근처에 있으니까 잘 수 있겠지.’
생각대로, 나루는 곧바로 잠이 들었다.
흔들흔들, 버스의 흔들림에 따라 움직이는 나루를, 명진은 흘끗 돌아봤다.
둥그스름한 이마 아래로 그림처럼 이어지는 콧날, 긴 속눈썹과 붉은 입술이 무척이나 예뻤다.
‘얘는 입만 다물고 있으면 진짜 예쁜데.’
동그란 눈 안에서 빛나던 검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오토바이를 타지 말라고?’
오토바이 위험해,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종종 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단호하게 오토바이를 타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명진의 성격을 아는 명진의 가족들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진짜 엄마 같네.’
나루의 걱정을 받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다만.
‘좀 이상해.’
과하다.
주위에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나루의 행동은 과했다.
‘나랑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데.’
명진을 응시하는 나루의 눈동자에는 짙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저 아는 사람을 향한 우려의 마음 정도가 아니었다.
‘진짜 특이하다니까, 얘는.’
뭐가 특이하냐고 물으면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루 같은 여자는 처음이었다.
‘아니, 여자뿐 아니라 남자들까지 포함해서도. 이런 애는 진짜 처음 보네. 세상은 넓고 기이한 사람은 많구나.’
* * *
버스에서 내려 찌뿌드드한 몸을 풀고 있는데,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이 가벼워졌다.
돌아보니 재경이 나루의 가방 손잡이를 들고 있었다.
“내가 들어줄게.”
“아냐, 다들 짐도 많은데.”
“들어줄게.”
더 거절하면 재경이 민망할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니, 선미가 나루를 노려보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순진들 하구나.’
환하게 웃으며 선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선미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펜션에서 차를 끌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봉고차를 타고 큰길을 가다가 좁고 울퉁불퉁한 길로 들어섰다.
‘눈에 익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차창 밖의 풍경을 구경할 때만 해도 깨닫지 못했다.
곧 도착할 펜션이, 옛 시간에서 지후와 함께 종종 놀러가곤 했던 펜션이라는 것을.
차에서 내려 펜션 앞에 섰을 때에야, 나루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파란 지붕에 하얀 벽면, 넓은 마당과 구석에 있는 낡은 개집, 그 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백구.
기억 속의 광경 그대로였다.
나루는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서 펜션을 응시했다.
“재경아, 펜션 진짜 좋다. 예약하느라 고생했어.”
선미가 재경에게 건네는 애교스러운 목소리도, 나루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루는 그저 멍하니, 추억 어린 그 정경을 눈에 담았다.
―여기 욕조 있을까? 욕조 있는 곳이 좋은데.
―있을걸.
―밤에 물 받아놓고 반신욕 해야지. 아, 목욕 소금 챙겨올걸.
―여자들은 여행갈 때마다 뭘 그렇게 많이 챙기는 거야? 우리 누나도 엄청 챙기던데. 남들이 보면 이민 가는 줄 알겠다.
―여자들은 준비할 것도, 챙길 것도 많답니다.
바로 이곳, 이 자리에 지후와 나란히 서서 그런 대화를 나눴었다.
낯선 사람의 모습에 백구는 짖어댔다. 바로 지금처럼.
왈왈왈―!
개 짖는 소리에, 나루의 생각은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로 돌아왔다.
명진이 놀란 눈으로 나루를 보고 있었다.
“왜?”
“너, 왜 울어?”
“어?”
“왜 갑자기 울고 그래?”
그제야 눈물을 흘렸다는 걸 자각했다.
나루는 손등으로 볼을 쓱 닦아 냈다.
언제부터 눈물을 흘린 걸까? 혹시 지후가 이 모습을 봤을까?
표정을 갈무리하고 지후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지후는 윤영과 마주 보고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봐도 이제는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그저 내가 우는 모습을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 생각?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냐?”
“그냥 좀. 괜찮아.”
나루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명진을 향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경과 선미가 펜션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지후와 윤영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지만, 나루와 명진은 그대로 펜션 앞에 남아 있었다.
“들어가 봐.”
나루는 혼자서 감정을 갈무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우는 애를 어떻게 두고 들어가?”
“아하하하. 나, 애 아니거든.”
“뭐가 됐든.”
나루는 왈왈 짖고 있는 백구 앞으로 향했다.
사람이 가까이 오자 백구가 짖는 걸 관두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나루는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백구의 배를 쓰다듬었다.
“옛날에 여기에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왔었어.”
“흐응.”
명진이 나루의 옆에 앉았다.
“이제는 같이 올 수가 없게 돼서 눈물이 났나 봐.”
“헤어진 거야?”
“헤어졌다고 해야 할까?”
헤어진 거라면 차라리 나았다.
적어도 그의 기억 속에 나와의 추억은 남아 있을 테니까.
사랑하는 이가 나와의 추억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이별보다 슬픈 일이었다.
“아무튼 대단한 일 때문에 운 건 아냐. 괜찮아, 나는.”
나루는 자신을 위로하듯 말했다.
명진이 나루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소리 내서 절규하는 것보다 소리 없는 눈물이 더 슬픈 법이야. 괜찮을 리가 없잖아. 우는 걸 자각하지도 못하고 울게 되는 상황이.”
“너는 의외로 섬세하구나.”
“왜? 머리를 이러고 다니니까 한없이 가벼워 보이냐?”
명진이 자신의 레게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응. 그래 보여, 솔직히.”
“너무 솔직하게 대답하니까 화가 나지도 않네.”
“고마워, 명진아.”
“뭐가?”
“옆에 있어 줘서.”
“…….”
“네가 그냥 들어가 버렸으면 조금 더 울었을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지금은 진짜로 괜찮아.”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추억들이 하나, 하나 쌓이고 있었다.
옛 시간에 집착하기에 이 시간이 고독한 것이다.
옛 시간을 지우고 이 시간에 집중하면, 내 곁에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바로 지금처럼.
진심으로 걱정을 해 주는 친구가 생겼다.
옛 시간에서는 없었던 친구였다.
나루는 일어나며 말했다.
“우리도 들어가자. 배고파.”
* * *
펜션 안으로 들어갔더니, 짐 정리가 다 끝났고 지후는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루가 주방에 서서 요리를 하는 그의 뒷모습을 눈부시다는 듯 지켜보다가 들어가려는데, 윤영이 말했다.
“이야, 민지후. 요리도 할 줄 알아? 멋지다.”
“우리 지후, 멋지지. 지후는 최고의 신붓감이야.”
재경이 우쭐해하며 말했다.
“그래, 최고의 신붓감이지.”
지후가 적당히 대꾸했다.
“그럼 나한테 시집 와. 내가 잘해 줄게. 몸만 와.”
윤영의 말에 지후가 피식 웃었다.
“나 먹여 살리기 힘들 텐데.”
“걱정 마. 너 하나 먹여 살릴 능력은 될 테니까.”
“그럼 고려해 보지.”
“뭐야, 두 사람. 이러다가 진짜로 결혼하는 거 아냐?”
선미의 말에 윤영이 아하하 웃었다.
“그럴 리가. 장난이지, 장난.”
나루는 그저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평소보다 한 톤 높은 윤영의 목소리에, 농담인 척 넘기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속으로는 상당히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괜찮아. 괜찮아.’
윤영은 좋은 친구였다.
‘지후의 상대가 윤영이라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 윤영이는 의리도 있고, 착하고, 남을 잘 배려하니까. 아예 모르는 여자보다는 윤영이가 지후 옆에 있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라.’
그러나 술렁이는 가슴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나루가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선미가 말했다.
“나루야, 여자 방 그쪽 아냐. 저쪽이야.”
“아, 응. 고마워.”
선미가 가리킨 방으로 들어가니, 재경이 가져다 놓은 나루의 가방이 있었다.
나루는 하릴없이 가방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다가 끌어안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괜찮아. 이 상황을 즐기자.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고 재미있게 놀다가 돌아가자. 괜찮아.’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그래서 나루는 가방을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차마 밖에 나가서 내 사랑하는 남자가 내 소중한 친구와 알콩달콩 대화를 하는 모습을 지켜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달칵―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루, 자?”
재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루는 고개를 들었다.
“아, 깜빡 잠이 들었어.”
“어제 잘 못 잔 거야?”
“응. 여행할 생각에 들떴나 봐. 밥 다 된 거야?”
“응, 점심 먹고 나가기로 했어.”
거실에는 커다란 상이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지후가 만든 라면과 볶음밥이 놓여 있었다.
“엄청 많네. 이걸 다 어떻게 먹어?”
“나루, 너는 꼭 그렇게 지적질을 해야 하니? 지후가 열심히 만든 건데.”
나루가 자리에 앉으며 말하자, 선미가 톡 쏘아붙였다.
“특별히 지적을 한 건 아닌데.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지후야.”
“괜찮아.”
지후가 대답했다.
“괜찮긴. 여행 오면 꼭 이런 애들 있더라. 아무것도 안 하다가 지적하는 애들.”
선미가 입을 비쭉거리며 말했다.
나루는 선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물었다.
“선미야, 너. 나랑 싸우고 싶니?”
“뭐?”
“나랑 싸우고 싶어서 시비 거는 거야?”
“아니, 시비라니. 시비가 아니라 네 말투에 대해서 얘기를 해 주는 거지. 지후가 지금까지 여기서 음식 만들었는데, 넌 방에서 쉬다가 나오자마자 하는 말이 그거잖아. 양 많다고.”
“그냥 추임새처럼 내뱉은 말이었고, 지후한테 사과도 했잖아. 지후는 괜찮다고 했고. 그런데도 네가 계속 나한테 그렇게 대하는 건, 나랑 싸우고 싶다는 거 아냐?”
“넌 자기 잘못을 인정 안 하는구나?”
“그래 보여? 그럼 지금 이 시점에서 내 잘못이 뭔데?”
“또 말해 줘야 돼?”
“양 많다는 말에 대해서는 지후한테 사과했잖아.”
“사과했다고 끝이 아니지.”
“그럼? 일어나서 지후 앞에서 석고대죄라도 할까?”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해?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지후한테 사과한 거야. 그런데도 네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넌…….”
“먹자.”
선미의 말을 끊으며, 재경이 말했다.
“라면 불겠다. 얼른 먹자.”
나루에게 공격 받았다는 생각에 재경이 있다는 걸 깜빡한 선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재경은 그릇에 라면을 덜어 선미의 앞에 놔주었다.
“선미야, 많이 먹어.”
“어, 응. 그럴게. 고마워.”
“볶음밥도 덜어 줄까?”
“응, 덜어 줘.”
“그래.”
재경이 빈 그릇에 볶음밥을 덜었다.
선미는 황홀한 듯 재경의 손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루와 싸운 걸 새까맣게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너도 퍼주랴?”
명진의 질문에 나루는 피식 웃었다.
“됐네요.”
입맛이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 먹지 않으면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질 것 같았다.
나루는 라면을 덜어와 억지로 입에 넣었다.
아무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 다 먹고 어디 갈까?”
윤영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화제를 전환했다.
“근처에 강 있잖아. 거기서 물놀이하는 건 어때?”
선미는 이제 기분이 완전히 풀린 것 같았다.
“펜션 아저씨가 그러는데, 여기서 차 타고 조금 올라가면 용추계곡이라는 데가 있다더라. 물 깨끗하고 근처에 폭포도 있대. 거기 가볼래? 아저씨가 태워다 주신대.”
재경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기까지는 비슷하네.’
분위기가 다르기는 하지만, 옛 시간에서도 용추계곡에 갔었다.
사람 좋은 펜션 주인은 귀찮은 기색 없이 일행을 용추계곡으로 데려다주었다.
펜션 주인은 펜션으로 돌아오기 10분 전에 연락을 하면 태우러 와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4월의 계곡은 사람이 없고 조금 추웠다.
하지만 경치가 좋고 물이 깨끗했다.
“으아, 물 엄청 차가워.”
계곡에 발을 담근 윤영이 말했다.
나루는 물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물에 가까이 가지 않을 거야.’
여기서 놀다가 넘어졌고, 젖었고, 지후가 일으켜 세워 줬었다.
“물고기도 있는데? 저것 봐 봐.”
“송사리인가?”
“그런데 물 진짜 맑다. 여름에 오면 더 좋을 것 같아.”
“우리 여름에 또 올까?”
춥다고 하면서도 찰방찰방 물놀이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싫지 않았다.
물에 들어가지 않을 줄 알았던 지후도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물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나루와 명진뿐이었다.
명진이 나루의 옆에 앉아서 물었다.
“왜 안 들어가?”
“추워. 물놀이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하고. 넌?”
“이 머리 젖으면 수습 불가야.”
명진이 자기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대체 어떻게 감는 거래?”
“일주일에 한두 번 미용실에 가서 감아.”
“손 많이 가네. 너, 돈 많나 보다?”
“어. 돈 많은 남자 좋아하냐?”
“좋아한다고 하면? 사귀어 주게?”
장난스럽게 내뱉은 대답에 명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도 좋고.”
“아하하. 난 살짝 정신이 이상한 여자인데도 괜찮은 거야?”
“응, 예쁘잖아. 여자는 예쁘면 장땡이야.”
“이런 외모지상주의.”
그런 대화를 나눌 때였다.
“아! 지후야!”
윤영의 비명이 들려온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