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믿어줄까?
2017.09.14.
동아리방 문을 열려던 명진은, 문에 붙은 작은 창문 안으로 보이는 모습에 손을 멈췄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동아리방에 두 사람이 있었다.
나루와 지후였다.
나루는 바닥에 똑바로 누워서 자고 있고, 지후는 벽에 기대어 앉아 그런 나루를 지켜보고 있었다.
눈을 뗄 수 없다는 듯 나루를 응시하는 지후의 모습에, 숨이 턱 막혀 왔다.
‘뭐야, 저건?’
무례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앞에 두고 ‘같은 조 하기 싫어.’라고 말하는, 생각이 짧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나루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보는 사람조차도 당혹스러울 정도로 묵직한 애정이, 지후의 눈동자에 담겨 있었다.
지후의 손이 나루를 향해 뻗어 가다가, 그녀의 머리칼에 닿기 전에 멈췄다.
머뭇거리던 지후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대지 않았지만 마치 쓰다듬듯 손을 움직였다.
‘뭐 하는 거야, 저게?’
한동안 그렇게 쓰다듬는 척을 하던 지후가 다시 손을 거뒀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지후가 작은 창문 너머에 있는 명진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명진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 지후의 눈동자에 사로잡혀 가만히 서 있었다.
이윽고 지후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지후는 검지를 입술에 댔고, 명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안심한 듯 지후는 옅은 미소를 짓고, 그 눈동자를 나루에게 고정시켰다. 아주 잠깐 눈을 뗀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이.
명진은 문손잡이를 놔두고 돌아섰다.
‘저 녀석, 나루를 좋아하는 건가? 그럼 어제 그 행동은…….’
―나도 나루랑!
재경의 행동이 떠올랐다.
‘아, 그런 건가?’
지후와 재경은 친구였다.
‘성재경이 나루를 좋아해서 마음을 감추고 있나 보네. 정작 나루는 성재경한테 관심이 없어 보이던데.’
관심은커녕, 나루는 연애나 우정 따위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나루는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어째서인지 나루가 먼저 친근하게 다가오는데도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뭐, 나랑은 상관없지. 연나루도 죄 많은 여자로구먼.’
* * *
나루는 눈을 떴다.
‘여기…… 어디지?’
때가 얼룩진,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후에야 동아리방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아, 동방이구나.’
동아리방 구석에는 명진이 벽에 기대어 앉아 만화를 보고 있었다.
‘난 얼마나 잔 거지? 그나저나 언제 잠든 거야?’
지후와 대화를 하다가 눈을 감았던 기억은 있는데, 잠이 든 기억이 없었다.
‘요새 잘 못 잤었는데.’
이불도, 베개도 없는 동아리방에서 피곤이 싹 가실 정도로 잘 잤다.
그 이유를, 나루는 알고 있었다.
지후 덕분이었다.
지후는 늘 나루의 수면제였다.
신경이 예민하고 생각이 많아 잘 자지 못하는 나루이지만, 옆에 지후가 있을 때는 달랐다.
지후와 함께 누우면 눈을 감는 순간 잠이 들곤 했다.
그가 옆에서 부스럭거려도, 기침을 해도 깨지 않았다.
간혹 그가 있어도 잠이 오지 않을 만큼 생각이 많은 날도 있기는 했다.
그럴 때면 지후는 나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유행하는 아이돌의 노래일 때도 있고, 자장가일 때도 있었다.
그의 나직한 흥얼거림을 듣다 보면, 헝클어진 머릿속이 차분해지며 스르륵 잠이 들곤 했다.
“깼냐?”
명진이 만화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응, 깼어.”
“넌 동방에서 참 잘도 잔다. 머리만 대면 잠드는 타입인가?”
“그러게. 넌 언제 온 거야?”
“30분쯤 전에.”
“나, 많이 잤나?”
“나도 모르지. 수업 땡땡이치고, 잘하는 짓이다.”
“너도 치고 있잖아.”
“1교시는 들었어.”
“그 교수님은 2교시에 출석 부르는데.”
“잘 아네.”
“응, 난 그동안 수업을 나왔었으니까.”
나루는 몸을 일으켰다.
“무슨 만화를 그렇게 봐?”
“SF야. 여자들은 별로 안 좋아할걸. 3교시 시작하겠다. 수업 들을 거?”
“응, 들어야지. 이 교수님은 출석에 예민하거든.”
“진짜 잘 아네. 이 학교 한 번 다녀본 것처럼.”
“아하하하. 그럴 리가.”
명진은 역시 예리했다.
‘말조심해야지.’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굳이 감춰야 할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내가 과거로 건너왔다는 걸 알리는 게, 윤명진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지후를 사랑하지 말아야 했다.
내 사랑을 그에게 알려, 그도 나를 사랑하게 되면, 나와 엮이게 되면, 또다시 죽음이 반복될지도 모르니까.
나를 지키다가 죽은 지후가 또다시 나 때문에 죽게 될지도 모르니까.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어도! 네가 우리 지후를 죽인 거야! 네가 내 동생을 죽였다고!
지후의 누나인 지연의 절규가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나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후의 인생에 너무 깊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명진은 지후와 입장이 달랐다.
명진의 죽음의 비행기는 나루가 아니었다.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지.’
지후가 나루 때문에 죽은 것처럼, 명진은 오토바이 때문에 죽었다.
‘내가 이 애의 삶에 끼어든다고 변하는 건 없을 거야. 오히려 가까워져서 오토바이를 멀리 하게 만드는 편이 낫지 않을까. 게다가 명진이는.’
영혼이 바뀐 것 같다거나, 40대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거나 하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런 걸 보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만화책을 가방에 넣는 명진을 보며 말했다.
“사실은 그래. 한 번 다녀본 적이 있어.”
“응? 뭘?”
“이 학교 한 번 다녀본 것 같다면서. 사실은 한 번 다녀본 적이 있어. 예전에.”
명진이 나루를 응시했다.
“예전에 다녀본 적이 있다고? 언제?”
“아주 오래전. 12년 전에.”
명진이 미간을 좁혔다.
“뭔 소리야, 그게?”
“나 사실, 시간을 돌아왔거든.”
“응?”
“32살까지 살았어. 32살에 큰 사건이 벌어졌는데, 정신을 차렸더니 12년 전인 지금으로 돌아와 있는 거야.”
“…….”
“명진아. 난 시간을 돌아서 이곳으로 왔어.”
침묵이 흘렀다.
명진은 인상을 찌푸린 채 나루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믿어줄까? 내 말을?
이윽고 명진의 미간이 부드럽게 풀어지고.
“푸핫!”
명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별 이상한 농담을 다하네. 얼른 강의실이나 가자. 수업 늦겠다.”
동아리방을 나가는 명진의 뒤를 따라 나가며, 나루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래, 믿어줄 리가 없지. 이런 허무맹랑한 일을.’
* * *
방에 누워 있던 윤영은 휴대폰의 문자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내일 오전 9시에 버스 터미널에서 만나자.]
한 시간 전에 지후에게서 온 문자였다.
내일 조원들끼리 가평에 가기로 했다.
그 때문에 보낸 문자이지만, 데이트 신청을 받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 진짜 싫다.’
이런 기분을 또다시 느끼게 되는 것이 싫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사귀었던 남자 친구도, 윤영의 짝사랑으로 시작된 관계였다.
그때는 어렸기에, 마음을 감추는 법을 몰랐다.
좋아하는 것을 티냈고, 먼저 사귀자고 말했고, 그래서 사귀게 되었다.
그놈도 나를 좋아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헌신적으로 잘했다.
그놈이 잘못을 해도 용서해 줬고, 막 대해도 받아들였고, 다른 여자를 만나다가 걸려도 괜찮다며 웃어 주었다.
―내가 뭘 해도 걘 날 못 떠나. 나한테 푹 빠졌잖아.
어느 날, 그놈이 친구들에게 하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 안의 무언가가 뚝 끊겼다.
그래서 이별을 고했는데, 그놈은 잡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산산이 무너진 자존감과 갈기갈기 찢긴 자존심.
두 번 다시는 남자를 만나지 않으리라, 남자를 좋아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특히 잘생겨서 얼굴값 하는 남자는 딱 질색이었다.
‘그런데 난 또 짝사랑을 하고 있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후를 좋아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이후로, 윤영의 시선은 늘 지후에게 고정되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지후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의 검고 깊은 눈동자는 늘 나루를 향해 있었다.
‘아마 그걸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 재경이한테도 말 못 했겠지. 재경이는 지후랑 친한 친구고, 나루 좋아하는 티를 엄청 내니까.’
지후는 친구가 좋아하는 여자를 빼앗고 싶지 않아, 그 마음을 감추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 진짜 짜증난다.’
나루가 싫었다.
‘걔가 뭐가 좋다고.’
두 남자의 마음을, 아니, 이제는 명진까지 더해서 세 남자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나루가 못마땅했다.
‘행동을 좀 똑바로 할 것이지.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행동하니까 다들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나루한테 매달리는 거잖아.’
정말 싫다, 연나루.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지후일까 싶어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우와, 전화 진짜 빨리 받네.]
선미였다.
“응, 휴대폰으로 뭣 좀 하고 있었거든.”
[나 지금 학교 앞 주점인데, 술이나 한잔하자.]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친구들과의 관계가 나빠지는 건 싫었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뒤에서 엄청 욕을 해댈 것이다.
“알겠어, 어딘데?”
* * *
선미와 늘 붙어 다니는 지영이 함께 있을 줄 알았는데, 선미는 혼자서 윤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에 메뉴판만 덩그러니 있는 걸 보니, 선미도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뭐 먹을래? 너 먹고 싶은 걸로 시키려고, 안 시키고 기다리고 있었어.”
선미가 싹싹하게 말했다.
‘얘가 왜 이러지?’
윤영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메뉴판을 들여다봤다.
“간단하게 오뎅탕이랑 소주 먹자. 너도 소주지?”
“응, 소주 좋아.”
점원에게 주문을 하자마자 선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내일 가평 갈 준비 다 했어?”
“아니, 아직.”
“기대된다.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 놀러가는 건 처음이잖아.”
“그래?”
사실은 윤영도 기대가 되었지만 심드렁한 척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지영이는? 같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 지영이. 걔는 오늘 남친 만난다더라고.”
“아아. 꽤 오래 사귀었다고 들었는데.”
“응, 그렇다더라. 그런데…….”
선미가 윤영의 눈치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지영이 걔 좀 웃기지 않아?”
“응? 뭐가?”
“걔, 남친 있는데도 재경이 좋아하잖아.”
“아, 그거.”
지영도 재경을 좋아하는 무리 중 한 명이었다.
남자 친구가 있어서 대놓고 티를 내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들 알고 있었다.
“재경이가 좋으면 남친이랑 정리를 하든가 해야지. 보험처럼 남친은 옆에 놔두고 재경이한테는 추파 던지고. 진짜 좀 그래.”
“으응, 그러게.”
‘그럼 그런 이야기를 지영이한테 해 보든가.’
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지금 지영에 대해 뒷말을 하는 것처럼 윤영에 대한 뒷말도 하게 될 테니까.
아직은 대학 생활에 익숙해지지도 않았고, 견고한 무리를 형성하지도 못했는데, 뒷담화의 소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옳은 말을 하는 건, 어느 정도 나의 위치를 다져둔 후가 좋았다.
선미가 지영에 대한 험담을 하는 동안, 안주와 소주가 나왔다.
윤영은 소주를 따서 선미의 잔에 따라주고, 자신의 잔에도 따랐다.
“자, 우선 짠이나 하자.”
대화의 주제를 바꾸고 싶었다.
소주를 입에 털어 넣자마자 윤영이 말했다.
“이제 곧 중간고사라서 도서관에 사람 많은 것 같더라. 도서관 가 본 적 있어?”
“아직. 다음 주부터는 나도 중간 준비해야지. 아, 그런데 있잖아. 이번에 가평 가면 하루 자고 오잖아.”
“응.”
“나 좀 도와주라.”
“응?”
“나, 이번에 재경이랑 잘해보고 싶거든.”
‘이 말 하려고 부른 거구나.’
이제야 선미가 따로 불러낸 이유를 깨달았다.
“도와달라니. 뭘 어떻게?”
“그걸 나도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재경이가 날 봐줄까? 나 같은 여자애들, 주위에 진짜 많겠지?”
“그렇겠지. 선배들도 재경이 보려고 강의실 근처에 올 정도니까.”
“하아. 게다가 재경이, 나루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응, 그렇더라.”
“나루는 어떤 것 같아? 걔도 재경이한테 마음이 있을까?”
“글쎄.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 재경이가 같이 하자고 했는데도 싫다고 했잖아.”
“아, 맞다. 그랬지. 그런데 재경이는 대체 왜 나루 같은 애를 좋아하는 거지? 나루, 좀 이상하지 않아?”
선미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런가?”
“걔, 되게 4차원인 척하잖아. 저번엔 선글라스 쓰고 강의 들으러 오고. 난 그런 식으로 눈에 띄고 싶어 하는 애는 진짜 싫은데 남자애들은 그렇지도 않은가 봐.”
“뭐, 예쁘게 생기기는 했으니까.”
“예쁜 걸로 따지면 네가 더 예쁘지. 넌 딱 남자들이 좋아할 타입이잖아. 작고 예쁘고. 하아. 나도 너처럼 생겼으면 좋겠다.”
“뭐야, 갑자기. 지금 칭찬 타임이야?”
“아니, 진짜로. 오티 때부터 예쁘다고 생각했었어. 나도 작고 귀엽게 생기고 싶었는데.”
진심이 담긴 선미의 말에, 윤영은 우쭐해졌다.
“아냐, 너도 예뻐. 그리고 난 그냥 키가 작아서 그렇게 보이는 거야. 난 키 큰 사람이 부럽던데.”
윤영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진심처럼 늘어놓았다.
“키 큰 사람이 뭐가 부러워. 조금만 살쪄도 뚱뚱해 보이고, 떡대 있어 보인다는 소리를 듣는데.”
“그래도 선미 너는 늘씬하잖아. 옷발 잘 받고. 그래서 부러운데.”
주고받는 칭찬 속에 우정이 싹텄다.
윤영은 슬슬 대화를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 좋은 상태로 여행을 가고 싶었다.
지후와 단둘이 가는 건 아니지만, 함께 가는 첫 여행이니까.
“아무튼 나루는 윤명진인가? 걔랑 친한 것 같으니까, 아마 걔랑 붙어 다닐 것 같은데. 내가 지후랑 어떻게든 같이 다녀보도록 할게.”
“정말? 도와줄 거야?”
“응, 친구 좋다는 게 뭐야. 힘닿는 데까지 해 볼게.”
기뻐하는 선미를 보며 윤영은 생각했다.
‘이건 내가 지후랑 어떻게 해 보려고 하는 게 아니야. 선미를 도와주기 위해서인 거지.’
하지만 내일 지후와 함께할 시간을 떠올리자 가슴이 설레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내일의 가평행이 기다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