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덮쳐버린다.
2017.09.11.
그 마음이 변했으면 좋겠다고, 나루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말을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재경은 알고 있을 테니까.
“네가 해야만 하는 그 일이 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혼자서 하기 너무 외로우면 말해 줘. 그게 무슨 일이든, 내가 함께해 줄게.”
재경이 덧붙인 말에 가슴이 벅찼다.
울컥,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나루는 고개를 숙였다.
‘아, 이런.’
눈물을 참는 데 실패했다.
툭― 투둑―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계단으로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눈물방울이 계단을 적셨다.
“고마워, 재경아.”
이 가슴에 품은 것들을 말할 날이 오지는 않겠지만, 그런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아아, 내 친구 성재경은 아직 곁에 있구나.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고독한 게 아니구나.
재경이 망설이다가 나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루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전해지는 온기가, 나루는 좋았다.
혼자서 해내야 하는 고독한 싸움 속에서, 자그마한 빛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앞으로 날 피하거나 어색하게 대하지 않을 거지?”
재경이 물었다.
“응. 그러지 않을게.”
“영화, 보러 가 줄 거야?”
나루가 작게 웃었다.
“응, 그래. 영화, 보러 가자.”
* * *
계단에서 들려오는 작은 대화 소리를 듣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인물이 있었다.
지후였다.
지후는 그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이고, 복도를 걸어가 자신의 집 앞에 섰다.
문손잡이를 한동안 내려다보던 지후는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한 번도 집 밖으로 나온 적 없다는 듯이.
* * *
재경이 집에 들어왔을 때, 지후는 거실에 대(大)자로 팔을 벌리고 누워 있었다.
재경은 지후의 옆에 앉았다.
“나, 나루한테 고백했어.”
“아아, 그래. 잘했다.”
“정말? 정말로 잘했다고 생각하냐?”
“응, 정말로 잘했다고 생각해.”
“성급했던 거 아닐까? 나루가 부담스럽지는 않았을까?”
“성급했을 수도 있고, 나루가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지. 하지만 잘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로?”
“응, 정말로.”
지후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네가 행복한 게 좋으니까.”
지후가 덧붙인 말에 재경이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왜 그렇게 달콤하게 말을 해? 반할 뻔했잖아.”
“반하지 마라. 남자 취향 아니니까.”
“아니, 방금 좀 반했어. 너에게라면 안길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싫어.”
재경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몸을 피하려는 지후보다 빠르게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지후가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재경은 그 단단하고 굵은 팔을 베고 누워 지후를 끌어안았다.
“이러지 마. 남자는 싫다.”
“난 좋아. 정말 좋아.”
재경이 지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지후는 ‘정말 좋아.’라는 말 뒤에, ‘나루가.’라는 이름이 생략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뿌리치는 것을 관두고 재경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정말 좋아서, 아주 많이 좋아서.”
재경은 지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웅얼웅얼 말했다.
“가슴이 아프다, 정말.”
* * *
꿈을 꾸었다.
커다란 손을 잡고 해변을 걷는 꿈이었다.
새파란 바다와 넓은 백사장을, 나루는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 지후와 함께 갔던 바다였다.
나누었던 대화 또한 기억하기에, 나루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뜨거운 햇살에 얼굴이 탈까 걱정되었지만,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계속 걸었던 기억이 났다.
걷다가 저도 모르게 흥얼거렸는데, 고개를 돌려 보니 지후가 나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애정이 담뿍 담겨 있어서, 가슴이 설레었다.
슬픈 꿈이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루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눈물을 흘린 걸까.
베갯잇이 흠뻑 젖어 있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스윽 닦고 일어났다.
이제는 이런 일에 하나하나 오열할 만큼 마음이 무르지 않다.
‘아, 학교 가기 싫다.’
이런 생각을 다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늘 ‘회사 가기 싫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데.
습관적으로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고 학교로 향했다.
강의실이 있는 건물로 걸어가다가 학생회관 앞에 멈췄다.
‘1교시는 땡땡이칠까? 어차피 이 교수님은 2교시에 출석 부르는데.’
시간을 다시 걷게 되니, 알고 있는 사실들이 많아서 좋았다.
나루는 학생회관으로 들어가 동아리방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1교시라 그런지 동아리방 앞에는 학생들이 아무도 없었다.
조용한 복도를 걸어가 봉사 동아리방의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동아리방에 사람이 있었다.
유독 다리가 길고, 유독 어깨가 넓은 남자가 동아리방에 누워 한 팔을 이마 위에 올리고 있었다.
팔에 얼굴이 가려져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누군지 나루는 단번에 알았다.
‘지후가 왜 여기 있지?’
지후였다.
문 열리는 소리에 지후가 팔을 내렸다.
나루를 발견한 지후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땡땡이냐?”
“어? 아, 응. 땡땡이.”
“팔자가 늘어졌군.”
“너야말로.”
나루는 안으로 들어가 동아리방의 문을 닫았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왜 수업 안 들어가?”
신발을 벗고 들어가 지후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그러는 넌?”
지후는 다시 팔을 들어 올려 눈가를 가렸다.
“나는 그냥.”
수업 내용을 다 알고 있으니까.
대학에 다닐 때에 전부 A+를 받았으니까.
잘 아는 내용을 또 한 번 듣는 건 지루하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없기에 말끝을 흐렸다.
지후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재경이는?”
“궁금하면 네가 문자를 보내보든가.”
“그냥 좀 알려 주면 안 되니?”
“…….”
“너랑 재경이는 표본 채집하러 어디로 가기로 했어? 나랑 명진이는 북한산 계곡에 가기로 했는데.”
“안 보이냐? 난 잘 거다.”
그의 목소리를 조금 더 듣고 싶었다.
이 정도는 욕심을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질문을 했지만, 지후는 귀찮다는 분위기를 팍팍 드러냈다.
한 달 전이었다면 지후의 이런 태도가 칼날이 되어 심장에 박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찔리고 긁혀 해진 심장은, 이제 이런 일로 반응하지 않는다.
다행이다.
“밤에 잘 못 잔 거야?”
“조용히 좀 해.”
지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치사하긴.”
나루는 입술을 비쭉거리며 벽에 등을 기댔다.
지후가 한 팔로 눈가를 가리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마음껏 그를 지켜볼 수 있으니까.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들키지 않을 수 있으니까.
아무런 대화 없이 그가 자는 모습을 지켜볼 뿐인데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이만큼이나 그를 사랑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 1분, 1초가 아쉽게 느껴질 만큼. 흘러가는 시간을 붙들고 싶어질 만큼.
한때는 마음껏 잡을 수 있었던 그의 손을, 마음껏 만질 수 있었던 그의 팔을, 마음껏 안길 수 있었던 그의 품을, 마음껏 기댈 수 있었던 그의 어깨를.
나루는 꼼꼼히 눈으로 훑었다.
모두 내 것이었다. 옛 시간에서는.
내 모든 것이 그의 것이었던 것처럼, 그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었다. 옛 시간에서는.
그의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키스를 하고 싶었다.
그의 부드럽고 따스한 입술 위에 내 입술을 포개고 싶었다.
‘안 돼, 연나루. 안 돼.’
자꾸만 뻗어 나가는 손의 방향을 틀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그의 검은 머리카락 위에서, 나루의 손이 멈췄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의 머리카락 한 올 살며시 건드리는 정도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잠깐 만지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나루의 손가락이 지후의 머리카락을 스치는 순간.
덥석―!
지후가 나루의 손목을 거세게 낚아챘다.
“꺅!”
생각지 못한 일에 나루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의 눈동자가 나루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그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아, 아니. 나는…….”
“잔다고 했잖아, 내가.”
“아, 미안해. 깰 줄 몰랐어.”
“깨지 않으면 마음대로 건드려도 된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지후가 나루의 손목을 잡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꽉 잡힌 손목이 아팠지만, 그래도 그가 놔주지 않기를 바랐다. 그 접촉이, 사실은 좋았다.
“아니면 너.”
지후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차갑게 빛났다.
“나랑 하고 싶냐?”
“어?”
“나랑 하고 싶어서.”
지후가 그대로 나루의 어깨를 밀어 눕혔다.
지후는 나루를 덮치는 듯한 자세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계속 자극하는 거냐고.”
“하고 싶냐니.”
뒤늦게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심장이 철렁했다.
‘얘가 왜 이러지?’
지후의 이런 면은 기억 속에 없다.
지후는 결코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지후는 온화한 봄 햇살 같은 남자였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벌컥 화를 내거나 짜증내는 일이 없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쉿.” 한마디에 모든 것을 담아내는.
그런 남자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저 머리카락 좀 건드렸다고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거지?
“밀폐된 공간에 남자랑 여자랑 단둘이, 할 만한 일이 뭐가 있겠어?”
지후가 차갑게 말하며 상체를 굽혔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콧등에 지후의 숨결이 닿았다.
“하고 싶냐, 나랑?”
나루는 당황스러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지후 본인보다 지후를 더 잘 안다고 생각했다.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보아온 지후의 모습 중에, 이러한 모습은 없었다.
감정적이고 거칠고, 그리고.
‘하고 싶냐니.’
양아치 같은 언행.
이건 정말이지 지후답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모습이 있었던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가족들조차도 내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니까.
지후에게도 나루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습이 감춰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갭이 너무 크다.
그럼에도.
‘이런 순간까지도 얘가 박력 터진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나는 진짜 못 쓰겠네.’
지후의 새로운 모습이 멋있게만 보였다.
콩깍지도 이런 콩깍지가 없다.
“응.”
이윽고 정신을 차린 나루가 대답했다.
“응, 하고 싶어.”
이번에는 지후가 당황할 차례였다.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는지, 차갑게 굳어 있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랑 하고 싶어. 그럼 이제 해 줄 거야?”
“너…… 내가 뭘 하고 싶다고 한 줄이나 알아?”
“응, 알아. 밀폐된 공간에서 남녀가 단둘이 할 만한 일이 뭐가 있겠어?”
지후가 했던 말을 똑같이 되돌려 주었다.
당황하는 그의 모습을 보자, 나루는 여유를 되찾았다.
지후가 왜 이렇게 그답지 않은 행동을 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재경이 때문이겠지.’
지후는 재경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재경은 나루를 향한 마음을 지후에게 터놓았을 것이다. 어쩌면 어제의 고백에 대해서도 알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이 올곧은 남자는, 이 우직한 남자는 나루와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리라.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됐는데. 여자를 밀어내는 방법이 이런 것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20살의 지후가 귀여웠다.
내가 사랑했던 남자는,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는 남자는 참으로 귀엽다.
‘결국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당황할 거면서.’
지후가 이렇게 나온다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재경이 나루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지후는 나루가 어떤 행동을 하든 나루를 사랑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으리라.
지끈―
가슴이 아팠다.
‘아파도 괜찮아. 그러기 위한 시간이잖아, 이건. 사랑을 받았던 기억을 내가 전부 가지고 있으니까, 괜찮아.’
나루는 고통을 갈무리해 안으로 꾹꾹 밀어 넣고 입을 열었다.
“왜 말이 없어? 너랑 하고 싶다니까? 안 할 거야?”
나루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지후의 볼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지후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볼에 닿은 나루의 손을 잡아 옆으로 내렸다.
“너, 내가 우습냐?”
“우스워 하는 것처럼 보이니?”
“너…….”
“아, 조금 우스울 수도 있겠다. 하지도 못할 거면서 강한 척은.”
“…….”
“친구끼리 머리카락 좀 만진 거 가지고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거 아냐? 만지는 거 싫어한다고, 좋게 말해도 알아들어. 이런 연기까지 할 필요 없어.”
“아, 그래?”
지후가 나루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아쉬웠다.
아프지만 그래도 좀 더 잡혀 있고 싶었는데.
‘나는 참 미련한 여자구나.’
쓴웃음을 삼키는 나루에게, 지후가 말했다.
“좋게 말해도 알아듣는다니, 좋게 말해 주지. 너, 여기저기 끼 부리고 다니지 마. 이 남자, 저 남자한테 잘해 주고 이 남자, 저 남자 몸에 멋대로 손을 대는, 그런 짓 그만둬. 여자애들이 너에 대해서 뭐라고 떠들어 대는지 알아?”
“알아, 그 정도쯤.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은 아닌데.”
“잘못이 없더라도 남자들하고만 어울리면 친구 사귀기 힘들어. 여자들이랑도 좀 어울리고, 친구 좀 만들어.”
역시 이 남자는.
“나, 걱정해 주는 거니?”
사랑스럽다.
“시끄러. 난 잘 거니까 건드리지 마.”
지후가 다시 누워서 팔을 이마 위에 올렸다.
“건드리지 않고 떠드는 건 괜찮아?”
“시끄럽다고 했다.”
“동방이 너 혼자 쓰는 곳도 아니잖아.”
“내가 먼저 왔어.”
“뭐야, 그 초딩 같은 발언은? 동방에 침 발라놓은 것도 아니고.”
“시끄러.”
“그러고 보니, 넌 언제 봉사 동아리 가입한 거야? 재경이도 봉사 동아리야?”
“재경이한테 물어보든가.”
“비싼 척은. 네가 대답해 주면 큰일 나? 막 하늘이 무너지고 그래?”
“너야말로 입 좀 다물면 하늘이 무너지고 그러냐?”
“응.”
“그렇다면 나도 응.”
“애 같긴.”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나루는 눈을 감았다.
그의 옆에 누워 있는 이 순간이 좋았다.
비록 그의 마음이 나를 향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아주 가끔 그와 단둘이 공유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그래, 이거면 돼.’
이조차 언젠가는 할 수 없게 되겠지만.
‘지금은 이거면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