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이 마음은 변치 않아.
2017.09.07.
재경과 지후는 노천극장의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둘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4월 초 한낮의 공기는 봄볕에 녹아 따스했다.
하지만 재경의 가슴에는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루는 그 새까만 눈동자로 재경을 똑바로 응시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난 명진이를 선택할래.
약간의 망설임도 없는 어조였다.
“나는 차였어.”
“I was a car.”
지후의 대꾸에 재경이 오만상을 찌푸리고 지후를 돌아봤다.
“그게 뭐야?”
“너는 차였다며? 그걸 영어로 표현한 거야.”
“아아, 나는 차였다고?”
“그래.”
“너, 이상한 개그를 한다?”
“그런가?”
지후의 무심한 얼굴만 봐서는 그의 생각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전부터 생각하는 거지만, 이 무뚝뚝한 친구는 의외로 엉뚱한 면이 있다.
“아무튼 농담 아냐. 난 차였어.”
“그런가?”
“하아. 뭐가 문제인 거지? 나, 그렇게 별로냐?”
“글쎄. 널 그런 눈으로 본 적이 없어서.”
“당연히 그래야지! 날 그런 눈으로 보면 큰일 나는 거 아냐?”
“그런데 왜 그걸 나한테 물어?”
“아, 진짜. 난 지금 위로가 필요하다고, 민지후.”
재경은 고개를 숙였다.
지후가 재경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차인 거 아냐. 아까 그건 실험을 위한 짝짓기였을 뿐이잖아. 진짜 짝짓기는 아니었지.”
“짝짓기가 문제가 아냐.”
“그럼 뭐가 문젠데?”
“나루는, 아마도. 내 마음을 눈치챘겠지?”
“글쎄. 내가 연나루가 아니라서 그것까진 모르겠는데.”
“눈치챘을 거야. 그렇게 티를 냈으니까. 그런데도 윤명진을 선택했다는 건, 내 마음을 거절한다는 거지. 나랑 둘이 있기 부담스러우니까 윤명진을 선택한 거잖아.”
“어쩌면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어? 아, 그거?”
“그거라니?”
“나루가 윤명진한테 관심이 있다거나, 그런 거.”
“흐음. 글쎄.”
“뭔가 아는 게 있는 거야, 너?”
재경이 다시 고개를 들고 지후의 팔을 붙잡았다.
“아는 거라면, 글쎄. 윤명진 헤어스타일이 끝내준다는 거?”
“야, 넌 진짜……! 하, 됐다. 너한테 뭘 바라겠냐, 내가.”
재경은 지후의 팔을 놔주고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지끈, 지끈 아팠다.
나루를 사랑하게 된 이후로, 늘 이런 통증이 가슴에 자리 잡고 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아프고 초조한 일인 줄은 몰랐다.
좀 더 분홍빛이고 달콤하고 반짝반짝 빛날 줄 알았는데.
‘아니, 사랑은 그럴 거야. 이건 짝사랑이라서 그래.’
사랑과 짝사랑은 비슷한 이름이지만 완전히 다르다.
사랑은 분홍빛이겠지만 짝사랑은 잿빛이다.
사랑은 달콤하겠지만 짝사랑은 쓰다.
씁쓸한 통증이 가득한 잿빛 거리를, 혼자서 걸어가는 기분이다.
그 잿빛 거리에 안개가 가득해, 어떻게 해야 뚫고 나갈 수 있을지 조금도 모르겠다.
“아프다, 지후야.”
쓴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재경을, 지후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 * *
“공강 시간에 할 게 없네.”
점심을 먹고도 한 시간이 남았다.
좋지 않은 분위기에서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고, 나루는 명진과 학생 식당에 남아 있었다.
“동아리나 들까?”
명진이 중얼거렸다.
“동아리, 뭐 들게?”
“넌 아직 안 들었냐?”
“응. 아직.”
동아리에 가입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옛 시간에서는 지후, 재경과 함께 봉사 동아리를 들었었다.
맛집을 자주 간다는 홍보에 낚여서였고, 실제로도 맛있는 가게들을 여기저기 찾아다녔다.
“할 만한 동아리가 있으려나?”
“같은 동아리 들자, 우리.”
나루의 말에, 명진이 손바닥에 턱을 괴고 나루를 빤히 응시했다.
“그렇게 나랑 같이 다니는 게 좋냐?”
“응.”
“난 남을 편하게 해 주는 성격이 아닌데. 너, 나 좋아하냐?”
“응. 아, 이건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연나루.”
“어?”
“솔직하게 말해 봐.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말했잖아. 너한테 호기심이 생겼고, 헤어스타일도 멋지고…….”
“그런 이유가 아니잖아.”
“왜 그런 이유가 아닐 거라고 생각해? 너 자신에게 자신감을 좀 가지라니까.”
“자신감의 문제가 아냐, 이건. 사랑에 빠진 여자는 너처럼 행동하지 않아. 김윤영이랑 김선미를 봐. 걔들은 민지후랑 성재경에게 관심이 있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을 때, 대부분은 그렇게 행동해. 그런데 넌 아냐.”
나루는 당황했다.
명진은 의외로 통찰력이 있었다.
윤영과 선미가 지후와 재경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이렇게 빨리 간파하다니. 그리고 그걸 미루어, 나루의 마음까지도 짐작하다니.
‘쉬운 상대가 아니네.’
나루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넌 나한테 뭔가 원하는 게 있어서 나랑 가까워지려고 하는 게 분명해. 그런데 대체 뭘 원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하하하. 원, 농담도.”
“그 웃음, 진짜 어색한 거 알아? 넌 연기력이 부족해.”
“실례야, 그 말. 난 탤런트가 꿈이었다고.”
“정말?”
“아니, 거짓말.”
명진이 피식 웃었다.
“너랑 같이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드는 줄 알아?”
“무슨 생각이 드는데?”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누나가 내 또래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여.”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얘, 진짜 눈치 빠르네.’
“말하는 것도 그렇고, 상당히 무리하고 있는 느낌이야. 그럴 리는 없겠지만, 네 몸 안에 한 40대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니까.”
“야, 40대는 너무했다.”
명진의 통찰력도 통찰력이지만, 40대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난 32살이라고!’
“아무튼 연나루. 솔직하게 말해 봐.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명진이 웃음기를 거두고 물었다.
갸름한 눈매 안에 담긴 눈동자가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네가 살아가는 거.
‘21살 이후의 삶을, 네가 누리는 거.’
그걸 바란다.
하지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꿀꺽 삼켰다.
“나중에.”
언젠가는.
“말해 줄게.”
말할 날이 올까.
내가 시간을 건너왔노라고.
그리하여 너와 내 사랑하는 남자를 살리려고 발버둥을 쳤노라고.
고독과 싸우며, 외로움을 견디며, 그렇게 힘껏 걸어왔노라고.
말할 날이 올까.
언젠가는.
* * *
공강 시간에는 명진과 함께 봉사 동아리에 가서 가입 신청을 하고, 강의를 다 들은 후 저녁까지 함께 먹었다.
나중에 말해 준다는 말을 믿은 건지 어쩐 건지, 명진은 더 이상 나루의 속셈에 대해 묻지 않았다.
나루는 명진과 큰길에서 헤어졌다.
빌라가 있는 골목길을 걸어가다가 우뚝 멈췄다.
빌라 앞에 익숙한 인영이 서 있었다.
재경이었다.
‘날 기다린 걸까?’
그럴 거란 생각이 들었다.
돌아서고 싶었다.
재경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만 같았다.
설령 그 말을 꺼내지 않더라도, 나를 사랑하는 내 소중한 친구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는 것은 불편하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서면 재경은 나루가 피한다는 것을 눈치챌 것이고, 가슴 아파할 것이다.
재경은 소중한 친구였다. 이 시간의 재경이 어떻게 생각하든, 옛 시간의 재경은 나루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재경이 아파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루는 다시 걸었다.
빌라 벽에 기대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재경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흰 피부와 흐트러진 연갈색 고수머리, 오뚝한 코와 새빨간 입술.
순정 만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 주인공 같은 외모였다.
기척을 느꼈는지 재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연갈색 눈동자가 나루를 향했고, 그의 그림 같은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두근―
애틋한 미소에 심장이 반응했다.
재경은 옛 시간에서 지후가 나루를 볼 때마다 지어 주었던, 그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두근거림은 지후를 향한 두근거림일까, 재경을 향한 두근거림일까.
지후를 향한 것이리라고, 나루는 생각했다.
그래야만 했다.
‘아니, 그러지 말아야 하나?’
혼란을 느끼고 있는데 재경이 나루에게 다가왔다.
“늦었네.”
“아아, 응. 저녁을 먹고 오느라.”
“누구랑?”
“명진이랑.”
“아, 그래.”
재경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곧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명진이랑 물 뜨러 어디로 갈지 정했어?”
“응, 우린 북한산 계곡에 가기로 했어. 상류, 하류에서 채집하려고. 너넨?”
“우린 그냥 한강이나 갈까 하는데, 우선 윤영이네 얘기 들어봐야 할 것 같아.”
“응, 그래.”
나루가 빌라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데, 재경이 나루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루가 돌아보자, 재경이 자신의 행동에 놀란 듯 손에서 힘을 뺐다.
하지만 완전히 놔주지는 않아서, 나루의 가느다란 손목은 여전히 그의 손 안에 들어 있었다.
긴장을 해서일까. 아니면 오랫동안 밖에 나와 있어서일까.
재경의 손은 차가웠다.
“왜?”
“아, 미안. 얘기 좀 하고 싶어서.”
“얘기.”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차라리 서둘러 그의 마음을 듣고 정리하도록 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거절의 말은 생각해 두었다.
“그래, 얘기. 하자. 어디서?”
“어디서든. 우리 집도 괜찮고, 너희 집도 괜찮고, 아니면 커피숍이나.”
“계단에서 얘기하자.”
나루가 계단을 가리키며 말하자,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루는 재경이 상처받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을 빼내고,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비상계단은 어두웠지만 사람이 들어가면 불이 켜졌다.
2층 즈음에 멈춰, 나루는 재경을 돌아봤다.
한 계단 아래에 서 있는 재경과 나루는 눈높이가 비슷했다.
약간은 어둑한 불빛이 재경의 긴 속눈썹 위에 내리 앉았다.
“할 얘기가 뭐야?”
“아, 그게.”
재경은 곤란한 듯 고개를 숙였다.
나루는 재촉하지 않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재경이 다시 고개를 들고 나루와 눈을 맞췄다.
“내일 저녁에 영화 보자.”
“나, 내일 수업 끝나고 명진이랑 북한산에 가기로 했어.”
“아, 그게 내일이야?”
“응.”
“그럼 모레는?”
“모레는 동아리 모임 있고.”
“동아리, 들었어?”
“응, 명진이랑 같이 봉사 동아리.”
일부러 명진의 이름을 더 꺼냈다.
나루가 의도한 대로 재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연갈색, 예쁜 보석 같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는 게 가슴 아팠다.
“명진이를, 좋아해?”
“응, 좋아해.”
상관없겠지, 이 정도는.
명진에게 폐가 되지 않겠지.
“얼마나 봤다고.”
“얼마나 봤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 그래. 그렇지.”
“할 얘기는 영화 얘기였어?”
“아니. 사실 다른 얘기였어.”
“응, 얘기해.”
흔들리던 눈동자가 다시 나루에게 고정되었다.
그때, 센서 등이 꺼졌다. 한동안 움직임이 없었던 탓이었다.
어둠 속에서, 재경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좋아.”
나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불이 꺼져서 다행이었다.
재경의 표정을 볼 수 없어서 다행이었다.
“네가 좋아, 나루야.”
재경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얼굴을 볼 수 없음에도 절절한 음성에 가슴이 아렸다.
“응, 그래. 나도 널 좋아해. 하지만.”
생각해 둔 말을 꺼내려고 했는데.
“처음이야.”
재경이 말을 끊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처음이야. 사랑해서 가슴이 아프고, 사랑해서 초조하고, 사랑해서 자신감이 사라져. 너한테 멋지게 보이고 싶은데, 그러지 않은 것 같아서 불안하고 무섭고. 그래서 바보처럼 굴게 돼.”
좋아하는 여자에게 밝히기 어려운 진심을, 재경은 천천히 말하고 있었다.
떨리는 말끝에서, 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아, 이 애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나를 좋아하는구나.
내가 지후를 사랑하듯, 이 애도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그저 호감이 아니었구나.
내 소중한 친구가, 이렇게나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내 마음을 밀어붙여서 너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런데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돼. 나는 이 모든 게 처음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도 널 좋아해. 하지만 그런 감정은 아니야. 너랑은 좋은 친구로 남고 싶어.’
준비해 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재경이 이렇게 진심을 보이는데, 상투적인 대사로 대응할 수는 없었다.
“재경아.”
나루는 천천히 손을 올렸다.
나루의 움직임을 포착한 센서 등이 켜졌다.
재경은 고개를 들어 나루를 보고 있었다.
예쁜 눈썹 아래에 자리 잡은 커다란 눈이 간절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맑은 눈동자를 보자 마음이 약해졌지만, 나루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재경의 뺨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고마워, 그렇게 말해 줘서. 사랑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나루야, 난.”
나루는 검지로 재경의 입술을 살며시 눌러 말을 멈추게 했다.
“재경아. 나는 지금 마음에 여유가 없어.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을 받을 여유가 없어.”
재경의 눈썹 끝이 내려갔다.
“나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나는 그걸 위해 살아가고 있어. 그 일이 끝날 때까지, 나는 누구도 내 마음에 받아들일 수가 없어.”
재경이 나루의 손목을 잡아 옆으로 내렸다.
“기다릴게, 그럼. 네 마음에 여유가 생길 때까지.”
“아니. 기다리지 마, 재경아. 이건 아주 길고 긴 시간이 걸릴 일이거든.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
“나루야.”
“너의 고백을 회피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이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되는 대로 던지는 말이 아니야. 나는 정말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한 마디, 한 마디 힘겹게 뱉어 내는 나루를, 재경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재경도 알 수 있었다.
나루의 작은 얼굴에 떠오른 고통과 고독은 꾸며 낸 것이 아니었다.
연기를 아주 잘하는 배우라도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이런 표정은 짓지 못할 것이다.
“무슨 일인데 그래?”
재경은 나루가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묻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야?”
“응.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일이야.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하지만 언젠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는 너에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래? 그럼 기다릴게.”
“재경아. 그런 뜻이 아니라.”
“너는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여자야. 내 가슴에 처음으로 들어온 여자야. 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놓아 버릴 생각 없어, 나는.”
“재경아.”
“10년이 흐르고, 20년이 흘러 봐. 이 마음이 변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