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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19화 (19/93)

19화. 짝짓기는 우아하게

2017.09.04.

명진의 미소에 애정이 담겨 있다는 걸, 재경은 알 수 있었다.

지후는 신경 쓸 거 없다고 했고, 그래서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건만.

나루를 향한 명진의 다정한 시선을 모르는 척하기가 어려웠다.

‘난 왜 B 식권을 샀을까?’

돈가스를 샀더라면 나루에게 나눠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아쉬워하는데, 커다란 돈가스 한 덩어리가 나루의 식판 위에 놓였다.

지후의 돈가스였다.

돈가스는 한 덩어리만 나오는데, 지후가 그 한 덩어리를 전부 나루에게 준 것이다.

“먹어라, 그거. 울지 말고.”

지후가 말했다.

“안 울었거든.”

나루의 말에 지후가 후, 하고 웃었다.

“돈가스 하나 못 먹었다고 우는 여자는 처음 보네.”

“안 울었다고.”

“그래, 그래.”

지후가 달래듯 말했다.

나루는 콧등을 찡그리고 지후를 노려보다가, 우동 그릇을 지후에게 내밀었다.

“그럼 넌 이거 먹어.”

“그래.”

지후는 거절하지 않았다.

“볶음밥도 줄까?”

“됐어. 난 흰쌀밥 좋아해.”

나루와 지후, 둘 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들의 대화에 낄 수가 없었다.

“실험 표본은 어떻게 구할까?”

윤영이 주제를 바꾸지 않았더라면, 계속 묘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할 뻔했다.

“여러 개 구해야 하니까 둘씩 짝지어서 표본 구하러 다니는 거 어때? 각각 2개 이상.”

윤영의 제안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데, 명진이 반박했다.

“굳이 둘씩 짝을 지어야 할 필요 있냐? 그냥 각자 하나 이상 구해 오는 게 낫잖아.”

“아니, 뭐. 혼자 다니면 심심하기도 하고. 겹치는 곳도 있을 것 같고.”

윤영이 변명하듯 말했다.

“흐응. 그래? 그럼 넌 누구랑 짝짓기를 하고 싶은데?”

명진이 윤영의 속셈을 간파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윤영이 얼굴을 붉혔다.

“짝짓기라니. 단어 선택 한 번 우아하다, 너?”

“내가 좀 우아한 집안에서 자라서.”

“그렇게 우아해서 머리를…….”

거기까지 말한 윤영이 입을 다물었다.

명진의 표정이 굳었다.

“내 머리가 왜? 내 헤어스타일 이런 게 너한테 무슨 피해라도 줬냐?”

“자, 자. 분위기가 왜들 이래? 장난치는 건데.”

재경이 적당한 순간에 끼어들었다.

나루는 돈가스를 먹으며 윤영과 명진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지켜봤다.

‘쟤들은 왜 저런대?’

짝을 지어서 가든, 각자 가든, 나루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후와 둘이 엮이는 일만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명진이 말도 맞지만, 어쨌든 다 같이 하는 실험이잖아. 앞으로도 쭉 같이 실험해야 하고. 친분도 다질 겸, 이번에는 둘씩 표본 준비하자.”

재경이 상황을 정리했다.

명진도 자기가 예민했다고 생각했는지,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아, 그리고 우리 주말에 다 같이 모여서 가평에 갈래? 가평에도 강 있으니까.”

선미가 제안했다.

그제야 나루는 포크를 멈췄다.

원래 이 제안은 재경이 했었다.

“다들 놀 생각밖에 없구만.”

명진이 투덜거렸다.

“넌 왜 그렇게 비협조적이야? 우리가 뭐 나쁜 짓 하자는 것도 아닌데.”

윤영의 말에 명진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한테 홀려서 꼬리 칠 기회를 잡으려고 애들 써대는 꼴이…… 읍!”

명진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나루가 손으로 명진의 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이 애가 더 이상 미움 받으면 안 돼!’

라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명진이 신경질적으로 나루의 손을 뿌리쳤다.

“야, 너. 왜 이래?”

“너야말로 왜 이러는데? 미움 받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하? 넌 대체! 아, 됐다. 됐어.”

명진은 파리를 쫓듯 손을 휘휘 저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명진이라고 남의 미움을 받는 게 좋은 건 아니었다.

다만 윤영과 선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 실험 시간 내내 윤영과 선미는 나루에게 시비를 걸 듯 말했고, 실험이 끝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딱 봐도 그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윤영은 지후가, 선미는 재경이 마음에 드는 것이리라.

하지만 지후도, 재경도 나루만 챙겨 주니 그녀에게 질투를 느끼는 것이 분명하다.

이 조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여자들의 마음을 알면서도 나루에게 잘해 줘서, 나루가 여자들의 질투를 받게 만드는 재경과 지후도 싫었다.

그리고.

명진은 다시 돈가스를 먹기 시작한 나루를 흘긋 돌아봤다.

‘얘가 제일 싫어야 하는데, 왜 싫지가 않지?’

처음부터 느닷없는 행동으로 사람을 당혹시킨 연나루.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나루를 향해서는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다시 분위기가 묘해졌고, 이번에는 그 침묵을 깨기 위해 누구도 노력하지 않았다. 다들 묵묵히 밥만 먹었다.

나루는 특히 빠른 속도로 밥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이윽고 식판을 깨끗하게 비운 나루가, 말 많고 탈도 많은 조원들을 둘러봤다.

“둘씩 짝지어서 표본 채집하러 가자. 겹치면 안 되니까 이동 전에 어디로 갈지 말해 주기로 하고. 그리고 이번 주 토요일에는 오전에 모여서 1박으로 가평 다녀오자. 채집도 채집이지만, 바비큐 먹고 싶어.”

“짝은 어떻게 정할까?”

무거운 분위기가 깨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재경이 물었다.

“글쎄.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랑 같이 가는 게 제일 좋겠지. 윤영아, 넌 누구랑 가고 싶어?”

나루가 윤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윤영이 얼굴을 붉히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딱히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있는 건 아냐.”

“정말?”

“그래. 내가 뭐 쟤 말대로 남자한테 꼬리 치고 싶어서 이런 제안을 한 줄 알아?”

“그래? 그럼 나랑 같이 갈래?”

“어? 아, 어. 아니, 그건…….”

윤영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에, 나루는 가슴이 아팠다.

내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한 달간 같이 해외여행을 가도 싸운 적 없는, 편하고 소중한 친구였는데.

아픔을 감추고 선미를 돌아봤다.

“선미, 넌? 같이 가고 싶은 사람 있어?”

“어? 아니, 나도 딱히.”

“그래? 그럼…….”

“왜 남자들한테는 안 물어봐?”

재경이 볼멘소리로 물었다.

나루가 씩 웃었다.

“원래 남자는 여자의 선택을 받는 동물이니까.”

“어? 너, 그거 남녀차별이다.”

“응, 난 남녀차별주의자라서.”

나루가 담백하게 대답했다.

“데덴찌로 정해, 그럼. 다들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없는 것 같으니까.”

명진의 말에 나루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나루를 쳐다봤다.

‘데덴찌라니.’

정말 오랜만에 듣는 단어다.

옛 시간에서도 누군가 데덴찌로 정하자는 제안을 했었다. 그리고.

“그런데 데덴찌가 뭔데?”

선미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어? 데덴찌 뭔지 몰라? 편 나눌 때 하는 거.”

“아, 혹시 엎어라 뒤집어라?”

“엎어라 뒤집어라가 뭐야? 데덴찌지.”

“아냐, 앞쳐라 뒤쳐라야.”

‘그래, 이런 일이 생겼지.’

편 나누기를 할 때 사용하는 말은 지역마다 달랐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한참 이야기를 하고 웃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흘러갔던 그 사건은 지금 현재 나루의 눈앞에서 다시 벌어지고 있었다.

따스한 광경이었다.

“데덴찌로 하자.”

한참 의논을 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그래, 그럼 데덴찌로 정하자.”

“하아. 진이 다 빠진다. 그놈의 데덴찌가 뭐라고.”

대단한 문제도 아닌데 큰 문제로 만들어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는 일이야말로, 이 나이 때에 만난 친구들과 누릴 수 있는 즐거움 아닐까.

나루는 오랜만에 다른 생각 없이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세 팀으로 나눠야 하기에 손바닥을 위, 아래, 그리고 주먹을 쥐는 것. 세 개로 나눠 데덴찌를 하기로 했다.

재경의 구호에 맞춰 “데덴찌!” 손을 내밀었다.

세 팀으로 정확히 나눠지지 않아 몇 번을 더 시도한 후에야 짝이 정해졌다.

나루는 주먹, 그리고.

‘지후가 짝이네.’

지후도 주먹이었다.

재경과 명진이 손바닥을 위로, 윤영과 선미가 손바닥을 아래로 하고 있었다.

윤영과 선미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노골적으로 떠올랐다.

“자, 그럼 이렇게 정해졌으니까…….”

또 말이 나올까 봐 걱정된 재경이 서둘러 상황을 정리하려고 할 때였다.

“난 짝을 바꾸고 싶은데.”

지후가 재경의 말을 끊었다.

자신의 손을 응시하고 있던 나루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후가 나루를 향해 무심한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뭐라고?”

재경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물었다.

“나, 짝을 바꾸고 싶다고.”

지후가 다시 한 번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지끈―

나루는 칼에 찔린 듯 명치가 아팠다.

‘괜찮아. 잘된 거야. 그래, 괜찮아. 나도 난처했잖아.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거, 안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나루는 아픔을 갈무리하기 위해 애썼다.

표정에 상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거참 무례하시네.”

명진이 끼어들었다.

“애도 아니고 짝하기 싫다니. 그럼 나랑 바꿔.”

명진의 말에 지후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고, 재경이 황급히 말했다.

“아니, 내가. 내가 바꿀게.”

“왜 끼어들어? 내가 먼저 말했잖아. 내가 연나루랑 짝하겠다고.”

“나도 나루랑!”

거기까지 말한 재경이 입을 다물었다.

필시 ‘나도 나루랑 짝하고 싶어.’라는 말을 삼킨 것이리라.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재경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두 남자가 나루와 짝을 하는 문제를 두고 싸우는 모습에, 선미와 윤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너도 나루랑 뭐?”

명진이 짓궂게 물었다.

재경의 얼굴이 붉어졌다.

재경은 나루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그런 재경을 나루는 신기한 기분으로 지켜봤다.

‘재경이가 의외로 되게 순수하구나. 옛날엔 몰랐는데.’

32살의 눈으로 보는 친구들은 옛 시간에서와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나루도 어렸기 때문에 볼 수 없었던 면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어서인가 보다.

“나루한테 선택하라고 하지 그래?”

윤영이 뾰족한 어투로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나루에게로 향했다.

나루는 한숨을 삼켰다.

32년의 삶을 살다가 20살로 돌아왔지만, 그래도 주변 사람의 악의와 질투에 기분이 상하는 건 마찬가지다.

윤영의 질투를, 선미의 적대감 가득한 시선을 받아 주는 건 이제 한계다.

‘지후 생각만으로도 벅찬데.’

미워하라면 미워하라지.

나루는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검지를 입가에 살며시 올렸다. 그리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내가 선택할게. 이래서 인기 많은 여자는 피곤하다니까.”

돌변한 나루의 태도에 윤영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동의를 구하듯 선미를 돌아봤다. 선미도 윤영과 마찬가지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루는 그들을 무시하고, 상품을 고르듯 명진과 재경을 찬찬히 돌아봤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난 명진이를 선택할래.”

나루가 말했다.

재경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재경의 다갈색 눈동자에 깊은 상처가 아로새겨지는 것을, 나루는 똑똑히 목격했다.

‘어쩔 수 없어, 재경아. 너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가장 친한 친구인걸. 그리고 나는.’

명진이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애랑 친해져야 돼. 내년 봄, 이 애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 * *

“나루, 걔. 진짜 웃기지 않아?”

동아리방으로 향하며, 선미가 말했다.

선미와 윤영은 같은 댄스 동아리였다.

“그런가?”

사실은 윤영도 ‘진짜 웃긴다.’고 생각했지만, 뒷담화를 하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아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선미는 윤영이 자기와 같은 생각이라고 여긴 듯 계속해서 말했다.

“난 그렇게 남자한테 꼬리 치는 애는 딱 싫어. 그런 애들 있잖아. 4차원인 척하면서 남자애들 관심 끌려고 하는 애들.”

“아아, 있지.”

하지만 윤영의 생각에 나루는 단지 4차원인 척하면서 눈에 띄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나루의 행동이 특이하기는 하지만,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나루에게는 무언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답답했다.

차라리 그 이유를 알면, 이렇게나 나루가 싫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아까 걔 하는 거 봤지? 턱 치켜들고 인기 많은 여자는 피곤하다고 한 거. 인기는 개뿔. 다들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 몰라서 그러나?”

다들 나루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사실 나루를 싫어하는 건 대부분 여학생들이지, 남학생들은 나루를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는 예쁘장하면서도 비밀이 있는 것 같은 나루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우리 과에서 누가 제일 낫냐?”

라는 술자리 질문에,

“연나루가 제일 예쁜 것 같지 않아?”

“맞아, 옷도 잘 입고.”

“되게 어려 보이는데, 이상하게 좀 성숙한 분위기야.”

“섹시해.”

그런 대답이 나올 정도였다.

다만 나루를 둘러싼 남자들이 감히 범접하기 힘든 민지후와 성재경이라서, 다들 나루에게 말도 못 붙일 뿐이었다.

이제는 거기에 윤명진이라는 인물까지 끼어들었다.

‘걔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지?’

윤영은 짜증이 났다.

물론 나루는 예쁘지만, 외모로 따지자면 윤영도 지지 않았다.

어디에 가도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칭찬을 들어왔다.

무리에서 이렇게 들러리로 취급받는 건 처음이었다.

선미와 윤영은 동아리방에 들어갔다.

동아리방에는 지영이 누워서 휴대폰으로 남자 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지영은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동갑 남자 친구가 있는데, 재수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아, 친구들 왔다. 그럼 끊을게, 자기야.”

지영이 전화를 끊자마자 선미가 달려들듯 지영의 옆에 앉아 아까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웬일이야, 웬일이야. 걔, 진짜 웃긴다.”

“그치? 진짜 재수 없어.”

“난 걔 처음 봤을 때부터 별로였어. 재경이랑 딱 붙어 다녔잖아.”

“맞아, 그러니까. 재경이랑 지후랑 같은 빌라 산다는 핑계로 허구한 날 같이 다니고, 집에도 같이 가고.”

“연약한 척하고 그러는 거, 진짜 왕재수야.”

선미와 지영은 쉴 새 없이 나루를 욕했다.

그렇게까지 ‘왕재수’일까 싶었지만, 윤영도 나루에 대한 마음이 좋지는 않았기에 묵묵히 그들의 뒷담화를 듣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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