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그대 내 품에
2017.08.28.
커튼을 내리고 불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 나루는 혼자 앉아 있었다.
딩동―
초인종이 울린 건 오후 12시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재경이었다.
“가방.”
재경이 나루의 가방을 들어 보였다.
“응, 고마워.”
나루가 가방을 받아 들었다.
“수업, 안 들을 거야?”
“응, 오늘은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넌 생각할 것도 참 많구나. 과 수석이라 그런가?”
“아하하하. 그놈의 과 수석.”
나루가 웃는 모습에 재경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 애틋한 미소를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역시 얘는 날 좋아하는구나.’
재경의 마음이 절절히 전해졌다.
나루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안 돼, 재경아. 안 돼. 넌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가장 친한 친구야. 그러니까 안 돼.’
차라리 재경이 고백이라도 해 오면 좋겠다.
그러면 매몰차게 밀어낼 수 있을 텐데.
“그럼 나, 그만 들어가 볼게.”
“응, 그래.”
재경은 아쉬운 듯했지만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나루는 문을 닫고, 잠시 현관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재경이 걸어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문 앞에 서서 이쪽을 응시하고 있으리라.
이윽고 재경이 복도를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고, 그제야 나루도 편히 숨을 쉴 수 있었다.
나루는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문득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차라리 재경과 사귀어 버릴까?
재경은 상냥한 남자였다. 가볍게 행동하지만 사실은 속이 깊고, 정도 많았다. 여자를 배려할 줄도 알았다.
사귄다면 잘해 줄 것이다.
어쩌면 지후에게로 흐르는 이 마음이 방향을 틀어, 재경에게로 향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지후를 사랑하지 않게 될 것이고, 지후 역시 나를 사랑할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지후는 살아가리라.
12년 후에도.
어쩌면 이 방법이 모두에게 해피엔딩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루는 눈을 감았다.
‘과연 가능할까?’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친구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오롯이 재경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
언젠가 재경을 사랑하게 되더라도, 이 가슴 한 구석에는 언제나 지후가 존재할 것이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지만, 사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며, 재경의 곁에 있을 수는 없었다. 내 소중한 친구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편한 쪽으로 도망치려고 하면 안 돼, 연나루.’
재경은 좋은 사람이었다.
재경만을 아주 많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날 자격이 있었다.
“아, 진짜 모르겠다.”
나루는 두 팔을 벌리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지저분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 정말 모르겠어. 누가 정답을 좀 알려 줬으면 좋겠어.”
* * *
‘우선 명진이를 살려야 돼.’
3월 중순이 지났지만 아직도 공기는 차가웠다. 밤에는 더했다.
두꺼운 점퍼를 걸치고 나왔는데도 찬바람이 옷 사이로 파고들어 왔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걸었다.
번화가로 접어들자 삼삼오오 모여서 노는 학생들이 보였다. 학년 초에는 늘 이렇다.
시험 기간인 4월이 되기 전까지, 이 거리는 늘 술을 마시는 학생들로 붐빈다.
인파에 들어서면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생겨났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다는 고독감. 그래도 사람들 속에 함께 있다는 안도감.
즐거운 듯 보이는 사람들 사이를, 나루는 천천히 걸어가며 생각을 정리했다.
‘명진이를 살리는 거야. 명진이가 10년 후에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거야. 그러면 지후를 살리는 게 가능하다는 것도 증명되는 거야. 명진이가 오토바이를 타지 못하게 하고, 사고가 있던 날 붙어 있어야겠어. 만약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명진이가 죽는다면.’
운명은 바꿀 수 없다.
죽음의 비행기는 결코 방향을 틀지 않는다.
그것이 증명된다.
‘만약 그렇다면…… 그냥 사랑해야지. 어차피 바꿀 수 없는 운명. 지후가 죽기 전까지, 다시 한 번 마음껏 사랑해야지.’
어쩌면 그러기 위한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후를 살리기 위한 기회가 아니라, 지후에게 못 해 줬던 것들을 해 줄 수 있는 기회.
그걸 위해 또 한 번 이 시간을 걷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만약 그렇다면 지후에게 많은 것을 해 줄 것이다.
해 주지 못해 후회했던 것들, 이유 없는 짜증으로 그를 속상하게 만들어 후회했던 순간들.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고쳐 가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 나루를 쫓는 시선이 하나 있었다.
윤영이었다.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고 3차를 가기 위해 이동 중이던 윤영은, 저 멀리서 혼자 걷고 있는 나루를 발견했다.
반쯤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긴 그 모습이, 어째서인지 고독해 보였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떠올랐다.
멀리서 보는데도, 나루는 사람들에게 조금도 섞이지 못하는 듯 보였다.
왜일까?
왜 저 애는 저런 분위기를 풍기는 걸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루는 주위에 사람이 많을 타입이었다.
예쁘장한 얼굴과 괜찮은 몸매, 세련된 차림.(물론 오늘의 차림은 해괴했지만.) 거기에 과 수석이라는 점까지 더하면, OT를 참가하지 못했다고 해서 여태 친구를 사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나마 같이 다니는 지후, 재경과 함께 있어도, 나루는 겉도는 느낌이었다.
일부러 꾸며낸 것 같지는 않았다.
‘말을 걸어볼까?’
나루에게 질투가 나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신경이 쓰였다.
‘술 한잔하면 내 기분도 좀 달라지지 않을까?’
윤영은 남자 때문에 이유 없이 사람을 싫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여자들은 딱 질색인데, 자신이 그런 여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 잠깐만.”
그래서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루를 향해 가려다가, 한 걸음 떼기도 전에 멈췄다.
나루의 뒤를 따라 걷는 인물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쟤가 왜?’
지후가 점퍼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느릿하게 걷고 있었다.
나루와 지후 사이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꼭 지후가 나루를 따라가는 중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윤영은 확신할 수 있었다. 지후가 나루의 뒤를 따라 걷고 있다는 걸.
지후의 시선은 오롯이 나루만을 향해 있었다.
나루가 시선을 바닥에 고정시킨 것처럼, 지후의 시선도 나루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 공간에 연나루 한 사람만 존재한다는 듯.
신촌 밤거리에는 많은 사람들과 많은 가게들, 많은 물건들이 있었다.
그러나 윤영의 눈에는 나루와 지후, 단둘만이 보였다.
나루와 지후는 두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세계를 걸어가는 것 같았다.
어느 누구도 결코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세계. 둘만의 공간. 둘만의 시간.
그래서 질투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윽고 정신을 차렸을 때, 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 *
걷다가 사격장을 발견한 나루는, 걸음을 멈췄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그리운 추억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있어 봐.
자신만만하던 지후의 음성이 귓가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2학기 중간고사의 끝이 하루 남은 날이었다.
“아아, 재경이는 좋겠다. 시험 다 끝나서.”
대학 시험은 수강하는 과목에 따라 끝나는 날짜가 달라진다.
나루, 지후와 몇 개 다른 과목을 수강하는 재경은, 어제 시험을 다 끝내고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다. 3박 4일 일정이라고 했다.
나루와 지후는 시험이 하루 더 남았기에, 여전히 학교에 남아 있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숨 좀 돌릴 겸 밖으로 나왔다.
시험이 거의 끝나가는 한낮의 신촌 거리는 한산했다.
“나도 재경이가 듣는 대로 들을 걸 그랬나 봐. 법과 사회가 이렇게 늦게까지 시험을 볼 줄은 몰랐어.”
“그러게.”
“그러게는 무슨 그러게야. 너 때문에 법사 들은 거잖아.”
나루가 입술을 비쭉거렸다.
“그래, 그거 참 미안하게 됐다.”
2학기에 들을 교양 과목을 고민하고 있을 때, 지후가 ‘법과 사회’를 듣자고 강력하게 주장했었다.
인간이라면 응당 법을 지켜야 하고, 법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그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있다면서.
‘법과 사회’와 ‘문학과 예술’ 과목 중에 고민하던 나루는 지후의 주장에 홀린 듯 ‘법과 사회’를 선택했고, 재경은 ‘문학과 예술’을 선택했다.
그런데 법과 사회의 시험이 이렇게 늦게 끝날 줄이야.
“보상해, 보상!”
나루의 말에 지후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어떻게 보상할까?”
괜히 심술을 부린 건데, 진지하게 보상 방법을 물어오니 당황했다. 그래서 거리를 둘러보는데, 마침 사격장이 눈에 띄었다.
나루가 손가락으로 사격장을 가리켰다.
“인형. 인형 뽑아 줘. 잔뜩.”
“아직 애구만.”
“그래, 난 애다. 애야. 그러니까 뽑아 줘, 잔뜩!”
“알겠어.”
둘은 사격장으로 걸어갔다.
돈을 지불하고 사격용 총을 받아 들고, 지후는 말했다.
“있어 봐.”
자신감이 묻어 나오는 여유로운 음성이었다. 사격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전문가의 향기가 느껴지는 말투에 나루는 기대했다.
적어도 한 개 정도는 맞출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하나도 못 뽑을 줄은 몰랐어.’
당황하던 지후의 표정이 떠올랐다.
총알은 지후가 마음먹은 대로 나가지 않았고, 지후는 무척 동요한 듯 보였다.
10발에 2천 원이었던가, 3천 원이었던가.
10발을 다 쏠 때까지 인형의 털 한 올도 맞추지 못한 지후가 안쓰러웠다.
―아냐, 지후야. 내가 무리한 부탁을 했어. 인형 안 뽑아 줘도 돼.
―아니, 있어 봐.
지후는 또 그렇게 말했고, 또 돈을 지불했고, 또 못 맞췄다.
―진짜로 인형은 괜찮다니까. 나, 그냥 법과 사회 시험 잘 볼 수 있어. 최선을 다해서 볼게. 난 공부를 좋아하거든. 과 수석이잖아.
―그냥 있어 봐.
나루는 또 있어 보았지만, 결국 같은 결과만 보게 되었다.
저 돈이면 차라리 인형 하나를 사고 말겠다, 라고 생각할 때쯤. 얼굴까지 빨개져서 다섯 번째로 도전하는 지후가 안쓰러웠는지 주인이 자그마한 인형 하나를 서비스로 안겨 줬다.
‘진짜 바보 같아 보였는데.’
모든 일에 여유롭고 완벽한 줄 알았던 지후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지후가 귀엽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 그래서 머리를 쓰다듬어 줬었지.’
―지후야, 고개 좀 숙여봐 봐.
그냥은 손이 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더니, 지후는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처음으로 만져 본 그의 머릿결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자꾸자꾸 쓰다듬고 싶어질 만큼.
반쯤은 장난으로 한 짓이라서 지후가 뿌리치거나 얼른 고개를 들 줄 알았다.
그런데 지후는 가만히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인의 손길에 나른해하는 강아지처럼.
‘그때 지후는 날 좋아하고 있었을까? 좋아했으니까 머리를 만지는데도 그렇게 가만히 있었던 거겠지?’
그리움이 사무쳤다.
‘토끼 인형이었지, 그거. 그 당시 유행하던, 엽기 토끼였나? 대학 졸업할 때까지 갖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로 갔을까?’
버린 기억은 없다.
어쩌면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면서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소중히 보관할걸.’
그러다가 깨달았다.
소중히 보관했더라도, 지금 이 순간 갖고 있지는 못했을 거라는 걸.
사격장 안에는 여러 가지 인형과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그때 서비스로 받았던 것과 같은 인형도 있었다.
‘그럼 내가 쏴서 받으면 되지.’
나루는 사격장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없어서 지루한지 하품을 하는 주인에게 돈을 내고, 총을 집어 들었다.
커다란 인형도, 더 예쁜 인형도 있었지만, 나루는 자그마한 그 인형을 겨냥했다.
방아쇠를 당겼다.
탕―!
빗나갔다.
‘우와, 이거 되게 어렵구나.’
나루는 다시 한쪽 눈을 감고 인형을 겨냥했다.
탕―!
두 번째도 빗나갔다.
심기일전하여 다시 겨냥할 때, 누군가 총신에 손을 얹었다.
나루는 가늠자에서 눈을 떼고, 손의 주인공을 올려다봤다.
지후였다.
언제 온 걸까?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묻고 싶은 말이 많은데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올려다보는 나루를, 지후는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왜……?”
많은 질문 중 무엇 하나 묻지 못하고, 간신히 한 단어만 뱉어 냈다.
그러자 지후는 총을 가져가며 말했다.
“있어 봐.”
지끈―
옛 시간과 같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에 뻐근한 통증이 찾아왔다.
처절한 그리움에 눈물이 날 것 같아, 반항도 하지 못하고 자리를 내어 줬다.
자세를 잡은 지후가 인형을 겨냥하는 모습을, 나루는 숨도 쉬지 못하고 지켜봤다.
이리저리로 총구의 방향을 움직이던 지후가 방아쇠를 당겼다.
탕―!
빗나갔다.
순간 저릿저릿한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웃음이 나왔다.
옛 시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동일 인물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지후가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탕―!
또 빗나갔다.
‘얘는 정말.’
나루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후가 가늠자에서 눈을 떼고 나루를 흘깃 쳐다봤다. 그러더니 말했다.
“있어 봐.”
“뭘 자꾸 있으래? 이거 내가 돈 낸 거거든?”
아까보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투덜거렸다.
“있어 봐.”
그렇게 말한 지후가 다시 가늠자에 눈을 대고 방향을 맞췄다. 그리고.
탕―!
인형이 뒤로 넘어갔다.
“우와!”
나루는 저도 모르게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우와! 우와! 맞췄다!”
옛 시간에서는 맞추지 못했기에, 그 감동이 더 컸다.
“우와, 대단하다! 대박! 멋지다, 민지후!”
그래서 이 시간이 옛 시간과 다르다는 것을 잊고, 구부정한 자세로 총을 들고 있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말았다.
그의 샴푸 향기를 맡은 후에야,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깨달았다.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랑을 받아서는 안 되는 남자를 끌어안고 말았다!
그의 얼굴이 나루의 가슴에 폭 파묻혀 있었다.
나루는 그의 목을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굳었다.
그때 지후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와 나루의 허리 위에 살며시 놓였다.
시간이 아주 길게 늘어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