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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15화 (15/93)

15화. 시간에 묻힌 이름

2017.08.21.

―너 아니었으면 지후나 재경이 같은 애들이랑은 절대 친구로 지내지 않았을 거야.

옛 시간에서 윤영이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윤영은 넷이 모일 때마다 그런 말을 했다.

―잘생긴 애들은 딱 질색이었거든.

고등학교 1학년 때 사귀었던 잘생긴 전 남친이 그렇게 인물값을 하고 다녔단다.

그때 크게 데인 후, ‘앞으로 내 인생에 잘생긴 남자는 없어!’라는 각오를 다졌다고 들었었다.

실제로 지난 시간에서 윤영은, 1학기 내내 재경, 지후와는 단 한 번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 시간에서는 저토록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걸까?

두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말을 잘 듣는다고? 대체 무슨 말을 했는데? 학교에 좀 나오라고 했나? 그럼 지후가 오늘 학교에 온 게 윤영이 때문인 거야?’

예기치 못한 상황에 가슴이 술렁거렸다.

만약 상대가 옛 시간의 윤영이었다면 이런 술렁임은 없었을 것이다. 윤영은 자매와도 같은 사이였으니까.

그러나 이 시간의 윤영은 아직 나루와 대화 한 번 해 본 적 없는 ‘귀여운 여자’였다.

그런 윤영이 지후와 대화를 하고 있다.

‘아니야, 이런 식으로 생각할 게 아니야.’

마음을 고쳐먹어야만 했다.

이 시간의 민지후를 사랑해서는 안 되고, 그의 사랑을 받아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지후에게 연인이 생기는 쪽이 좋았다. 아직 그를 사랑하는 이 심장은 갈기갈기 찢기겠지만, 그래도 그를 향한 마음을 조금씩 접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간의 지후는 다른 사랑을 해야 돼. 그렇다면 차라리 상대가 윤영이인 게 좋아. 윤영이는 정말 좋은 애니까. 내 소중한 친구니까.’

이 시간의 윤영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나루의 소중한 사람이었다.

옛 시간에서 친하게 지낸 만큼, 윤영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의리가 있고, 까칠한 면은 있지만 그만큼 지킬 것은 잘 지킨다. 바람은 절대 피우지 않고, 내 사람이다 싶으면 마음을 다 준다. 날카로워 보여도 사실은 섬세하고 여리다.

이 시간의 윤영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후가 윤영을 사랑하게 된다면, 윤영이 지후를 사랑하게 된다면.

‘나는 한동안 밤마다 울겠지만.’

그래도 그는 행복해지리라.

30년 후의 길을, 40년 후의 길을 걸어갈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한다 해도 곧바로 동요를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1교시 강의를 듣는 내내,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다행이다. 선글라스를 쓰고 와서.

안 그랬으면 이 소란스러운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을 테니까.

* * *

대학 강의는 대부분 한 과목이 2시간씩이었다.

중간 쉬는 시간에, 윤영이 일어나 지후에게 다가갔다. 지후는 책상에 엎드려 잘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땡땡이도 안 치네?”

윤영이 지후의 책상 앞에 서서 말했다.

엎드려 있던 지후가 눈만 슬쩍 들어 윤영을 올려다봤다.

“너, 오지랖 넓다는 말 안 듣냐?”

“자주 들어.”

“민폐야.”

딱딱하게 말한 지후가 눈을 감았다.

윤영은 민망했지만 그대로 자리를 떠나기에는 더 민망했다.

근처의 학생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고, 아무 성과도 없이 돌아선다면 왠지 진다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이따 애들이랑 저녁 먹을 건데, 같이 먹자. 닭갈비 먹을 거래.”

“싫어.”

“그러지 좀 말고. 어차피 집에 가도 할 거 없잖아.”

“많아.”

“많긴. 담배나 피우면서 게임이나 하는 거 아냐?”

지후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더니 윤영을 노려봤다.

어제와는 달리 매서운 눈빛에, 윤영은 아차 싶었다. 방금은 너무 많이 갔다.

“아니, 저기…….”

“사람이 싫다고 하면 그렇게 받아들여. 몇 번이나 거절하게 만들지 말고. 귀찮으니까.”

윤영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물론 내가 너무 친한 척을 하기는 했지만, 다들 있는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말할 것은 없지 않은가. 나쁜 걸 권유한 것도 아닌데.

‘하여간 이래서 잘생긴 것들은 얼굴값을 한다니까.’

한 소리 할까 하다가 관뒀다. 어쨌든 지금은 자신이 잘못했으니까.

윤영은 휙 돌아서다가 저 멀리 있는 특이한 복장의 누군가를 발견했다.

비니 모자에 선글라스.

나루였다.

‘연나루?’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눈이 보이지는 않지만, 이쪽을 보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여길 보고 있어.’

왜 보는 걸까?

‘지후 때문에?’

그러고 보니 나루와 지후, 재경이 같은 빌라에서 자취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후, 재경에게 관심이 있는 여자애들은, 모여 있을 때마다 두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간혹 나루의 이름이 거기에 끼어 있었는데, 좋은 평가는 없었다.

타인의 말로 사람을 평가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괜히 두 남자에게 엮여 미움을 받는 나루가 안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저 시선이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윤영이 눈치챘다는 걸 깨달은 걸까?

나루가 고개를 숙였다.

윤영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생각을 바꾸고 나루에게 다가갔다.

“나루야.”

“어?”

나루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너, 오늘 저녁 때 뭐해?”

“저녁 때? 글쎄.”

“과 애들이랑 닭갈비 먹기로 했는데, 너도 올래?”

뒤에서 몇몇 애들이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친한 애들끼리 먹기로 한 건데, 나루를 불러서 불만스러운 듯한 숙덕거림이었다.

“아니, 나는…….”

“남자애들이랑만 어울리지 말고, 우리들이랑도 좀 놀자.”

자신이 듣기에도 가시 돋친 말투가 튀어나왔다.

‘내가 왜 이러지?’

윤영은 당황스러웠다. 이런 식으로 말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저 여자애들이 욕하는 연나루에 대해 알고 싶을 뿐이었는데. 알고 나면 여자애들도 연나루를 욕하지 않을 것 같아서 다들 친하게 지내자고 하고 싶을 뿐이었는데.

순간 나루의 표정이 굳었다.

“윤영아.”

나루가 윤영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윤영은 어째서인지 애잔함을 느꼈다.

부드럽게 부르는 음성이 20살 대학생의 것 같지가 않았다. 어른스럽고 성숙한 여성의 음성 같았다.

“지후 말 못 들었냐?”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재경이 끼어들었다.

“사람이 싫다고 하면 그렇게 받아들여. 몇 번이나 거절하게 만들지 말고.”

“재경아!”

나루가 꾸짖듯 재경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야 알겠다. 왜 나루에 대해 이런 기분이 드는지.

하루에 두 번이나 ‘귀찮게 하지 마.’라는 말을 들은 윤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질투하고 있구나. 연나루를.’

* * *

“귀찮게 해서 미안하게 됐네.”

차갑게 말하고 돌아서는 윤영의 뒷모습을, 나루는 멍하니 응시했다.

‘어떻게 된 거지?’

방금 전 윤영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재경이 끼어든 후에야 기분이 상해서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그 전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남자애들이랑만 어울리지 말고, 우리들이랑도 좀 놀자.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32년을 살지 않았더라도, 정상적인 20살의 나루였더라도 ‘남자들한테만 꼬리 치지 마.’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대체 왜? 내가 질투할 만한 짓을 했나? 지후랑 재경이랑 어울리고 다녀서?’

하지만 윤영은 남자에게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아니면…… 그런 척한 건가?’

나루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사실은 관심이 있지만 쿨한 척하고 싶어서 관심이 없는 척했나? 원래는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지만, 방어 기제가 작동해서 세뇌를 시키듯 싫다고, 싫다고 말을 했던 건가?’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사람은 좋지만 좋아하지 말아야 할 때에,

‘나는 싫어해. 나는 그런 거 제일 싫어.’

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말하면 그것이 사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고 해서 나루가 내린 윤영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옛 시간 속에서, 나루는 윤영을 사랑했다.

그러니까 이 시간의 윤영이 모진 말 한두 번 했다고 해서, 그녀를 미워하게 되진 않는다.

그저 속이 상할 뿐이다.

‘윤영이랑은 어떻게든 친해져야 하는데.’

이 외로운 시간 속에서 언젠가 윤영과 우정을 나눌 수 있게 될 거란 생각으로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초반부터 이래서야, 우정은커녕 미움을 받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루야. 내가 실수한 거 있어?”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재경이 실수를 저지른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나루를 보고 있었다.

“실수?”

“내가 이번에도 너무 오지랖을 부린 건가?”

“아아.”

윤영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느라, 재경이 한 일을 잊고 있었다.

“아냐, 그런 거. 괜찮아.”

여자에 대해 잘 아는 재경도 윤영의 말에 담긴 가시를 눈치챘을 것이다.

나루를 도와주려고 한 일인데, 그런 것까지 책망할 생각은 없었다.

곧 2교시 강의가 시작되었다.

강의 중에도 윤영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었다.

머릿속에는 윤영을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강의가 시작되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달칵―

뒷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루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는 인물을 확인하는 순간, 나루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탄성을 내뱉었다.

“아!”

교수의 목소리만 있었던 조용한 강의실에, 나루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모두가 이쪽을 쳐다봤다. 교수조차도 불쾌함과 의아함이 담긴 눈으로 나루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루는 그런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쿵―!

쿵―!

쿵―!

이 시간으로 돌아와 20살의 지후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만큼이나 심장이 격하게 뛰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크게 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쿵―!

쿵―!

쿵―!

심장의 울림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나루는 두 눈을 부릅뜨고 강의실에 들어온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나루의 반응에 놀란 듯, 강의실 문을 잡은 채 굳어 있었다.

‘왜…….’

나루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레게 머리와 눈썹 스크래치, 사나워 보이는 눈매와 차갑게 다문 입술.

‘왜 잊고 있었을까?’

얼굴을 보자마자 떠올랐다.

윤명진이라는 이름의 주인공.

그 인물이 기억에서 서서히 사라진 이유.

졸업 후 동기 모임을 할 때, 윤명진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이름을 잊게 되었다.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기억했던 그 이름이 시간에 묻혀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 이름을 상기하게 됐다.

윤명진.

그는 대학교 2학년 어느 봄날.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했다.

* * *

‘뭐야, 저 여잔?’

명진은 문고리를 잡은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해외여행을 갔다가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이제야 처음으로 대학교라는 곳엘 오게 되었다.

딱히 기대가 되지도, 설레지도 않았지만, 너무 늦게 첫 강의를 듣게 됐다는 민망함은 조금 있었다.

그래서 조용히 문을 열었는데, 저 특이한 복장의 여자 때문에 다 망쳤다.

비니 모자에 힙합 스타일의 옷이야 그렇다 쳐도, 실내에서 선글라스라니.

‘약간 정신이 이상한가?’

하지만 정신이 이상하면 이 대학에 합격했을 리가 없다.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학이니까.

‘아니면 ADHD 장애가 있나?’

언젠가 들었던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가 됐든 엮기고 싶지 않은 타입이다.

‘왜 저렇게 보는 거야?’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데도 이쪽을 보는 그녀에게서 여러 가지를 읽을 수가 있었다.

경악, 놀람, 두려움, 후회 등등.

그녀의 마른 몸에서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감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은 날이 아니군. 내일 다시 와야겠어.’

어차피 한참 결석했으니, 하루 더 결석한다고 큰일이 생기지는 않는다.

명진은 가만히 문을 닫으려고 했다.

선글라스의 그녀가 우당탕 책상을 밀치고 나와, 닫히려는 문을 도로 열지만 않았더라면 조용히 사라지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명진은 어지간해서는 놀라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사활을 건 듯 따라 나온 선글라스 여자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뒤로 돌아 도망치고 말았다.

복도를 달려가면서도,

‘내가 왜 도망쳐야 돼?’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몸이 선글라스의 여자에게서 도망쳐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다다다다―

선글라스의 여자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섭다.

정말 무섭다.

명진은 살면서 이런 공포를 느낀 적이 없었다.

어릴 때 엄마에게 들었던 ‘내 다리 내놔.’ 귀신조차도 이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정신없이 달리다가 다리가 꼬였다.

잠깐 비틀거린 틈에 따라잡혔다.

덥석―

선글라스 여자의 손이 명진의 손목을 잡았다.

“으악!”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조용한 복도에 명진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명진은 얼굴을 붉혔다.

‘내가 비명을 지르다니! 그것도 여자한테 손목 좀 잡힌 정도로!’

하지만 이 여자는 보통이 아니니까 비명을 지를 만하다고, 명진은 자신을 납득시켰다.

선글라스 여자가 숨을 헐떡거리며 명진을 올려다봤다.

어쩐지 간절해 보이는 모습에 두려움이 가셨다.

그때, 선글라스 아래로 눈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하얗고 보드라워 보이는 살결을 따라, 길고 가느다란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명진은 최면에 걸린 듯 손을 들어 그녀의 선글라스를 벗겨냈다.

약간 부은 듯하지만, 그래도 크고 모양이 예쁜 눈이 선글라스 너머에 감춰져 있었다.

그 눈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을 지니고, 애달프게 빛나고 있었다.

명진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그녀의 눈가에 묻은 눈물을 엄지로 닦아 주었다.

“너, 왜 울어?”

이 여자가 방금 전 자신을 무섭게 만든 여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차림새는 이상하지만, 행동도 기이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무척이나 애틋하고, 또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잊어서.”

여자의 도톰한 입술 사이로,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잊어서 미안해. 미안해, 명진아.”

“뭐? 뭘 잊었는데?”

여자는 억지로 입술을 움직여 미소를 만들어 냈다.

왜일까.

상당히 동안인 얼굴인데도, 그 순간 그녀가 무척이나 성숙한 여성처럼 보였다.

대답 없이 한동안 명진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말했다.

“나는 나루야. 연나루. 우리, 친하게 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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