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잘 꾸미는 여자
2017.08.17.
‘내 말을 들었을까?’
아니, 들어도 상관없다.
오히려 들어 버린 쪽이 더 낫다. 그러면 이쪽에 정이 뚝 떨어질 테니까. 이 시간은 그러기 위한 시간이니까.
지후는 신발을 벗고 들어와 재경의 옆에 앉았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생각을 읽어내기가 힘들었다.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가끔 같이 밥 먹을 거면, 수저 좀 더 사놓는 게 좋겠다.”
지후가 말했다.
‘아, 못 들었나?’
만약 들었더라면 이렇게 곧바로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하지는 못할 것이다.
관심이 있든 없든, 누군가에게서 ‘싫다’는 말을 듣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니니까.
묘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나루는 이런 순간에도 그에게 미움을 받지 않을 수 있음에 안심하는 자신이 싫었다.
* * *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시간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설거지까지 끝낸 두 남자가 돌아간 후, 나루는 혼자 남겨졌다.
아까는 가득 찼던 공간이 텅 빈 것만 같은 느낌. 가슴에 공허한 바람이 불었다.
나루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지후가 만들어 준 밑반찬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옛 시간 나루의 냉장고처럼.
그리움이 사무쳐, 냉장고 문을 붙든 채 주저앉았다.
불현듯 만나게 되는 옛 시간의 모습들은, 감정을 자제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아프다.
‘너무 아파.’
정말로 아프다.
나루는 울었다.
아무도 없으니까,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이 없으니까, 마음 놓고 울었다.
흐느낌이 절규처럼 변하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루는 냉장고 문을 붙든 채 주저앉아, 그렇게 한참 동안 엉엉 울었다.
* * *
지후는 복도를 걷다가 울음소리를 들었다.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처절한 울음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곧 아무 상관없다는 듯 다시 걸어갔다.
재경에게 나루가 운다는 걸 알려 줘야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관뒀다.
지후가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충분히 끼어드는 모양새가 되어, 재경의 질투를 한 몸에 받고 있으니까.
빌라 밖으로 나가 담배를 꺼냈다.
지난번 이 근처에서 피우다가 나루와 마주친 적이 있기에, 담뱃갑을 손에 들고 좀 더 걸어갔다.
빌라가 보이지 않는 골목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쭈그리고 앉아 불을 붙였다.
“하아.”
뱉어져 나오는 것이 연기인지, 한숨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모금 빨았을 때,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지후는, 상대를 확인하고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아는 얼굴이네.”
상대가 경쾌한 목소리로 말하며 다가왔다.
“근데 보기 힘든 얼굴이네. 민지후 맞지?”
상대가 골목 맞은편에 쭈그리고 앉아 물었다. 좁은 골목이라서 맞은편 끝에 앉아 있음에도 가까웠다.
“응. 너는?”
“김윤영. 적어도 같은 과 친구 이름 정도는 기억해 주는 게 어때?”
“흐응.”
지후는 콧방귀를 뀌고는 반쯤 피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윤영이 담배를 낚아챘다.
“난 담배 연기 싫어해.”
“내놔.”
지후가 윤영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말했잖아. 난 담배 연기 싫어한다고. 내 앞에선 피우지 마.”
“연기가 싫으면 네 갈 길 가. 여긴 내가 먼저 왔으니까.”
“여기가 우리 집이거든.”
윤영이 뒤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여기서 담배 피우면 내 방으로 연기가 들어온단 말이야.”
“그럼 내놔. 내가 딴 데로 갈 테니.”
“에이, 그러지 말고 얘기나 하자. 나, 심심해.”
“네 친구들이랑 놀든가.”
“별로 없어, 친구.”
“많아 보이던데.”
“아, 뭐야. 나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거야?”
윤영이 해사하게 웃었다.
윤영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얌전한 인상이지만, 성격은 생긴 것처럼 차분하지 않았다.
“강의실에서 몇 번 봤지. 이름까지는 몰랐지만.”
지후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래? 그럼 이제 강의실에서 보면 아는 척 좀 하자. 내 이름도 알게 됐으니까.”
“봐서.”
“너, 요새 학교 안 나오는 것 같더라. 출석 안 좋으면 학고 받을걸. 학교 좀 나와.”
“봐서.”
“뭘 그렇게 자꾸 본대. 시력 좋은 거 자랑하니?”
“…….”
“그런데 너, 키가 몇이야? 엄청 커 보이는데.”
“87.”
“우와. 나랑 30센티나 차이 나네. 난 57이거든.”
지후는 안 물어봤어, 라고 말해 줄까 하다가 관뒀다.
“아무튼 학교 좀 나와. 우리 과에는 왜 이렇게 결석하는 애들이 많은 거야?”
윤영이 담배를 바닥에 비벼서 끄더니, 꽁초를 지후에게 건넸다. 지후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꽁초는 받아 들었다.
윤영이 웃었다.
“담배 좀 줄이고, 내일 봐. 내일은 인사하자, 우리.”
지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윤영은 일어나서 손을 흔들었다.
윤영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더니, 지후는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아. 이놈의 오지랖.’
골목에 앉아 있는 거대한 인물이 지후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아는 척을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담배 연기를 내뿜는 그의 옆모습이 무척이나 고독해 보여서, 잿빛 연기에 감싸여 흩어질 것만 같아서.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지후에 대한 첫인상은 ‘무섭다.’였다.
얼굴은 잘생겼지만 무표정해서, 무섭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방금 전 얘기를 해 보니, 생각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말을 걸면 대답은 해 주고, 담배를 빼앗았는데도 화를 내지 않았다.
‘화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성격 때문에 친구들이 화낸 적이 많았다.
친하지도 않은 여자애가 피우고 있던 담배를 빼앗으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
그런데도 지후는 화내지 않았고, 꽁초를 돌려줬을 때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건 귀여웠어.’
키가 30센티는 더 큰 남자를 귀엽다고 생각하는 건 우습겠지만, 귀여웠다.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손을 내미는 모습이, 반항적이지만 말을 잘 듣는 커다란 강아지 같았다.
윤영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창문을 닫았다.
‘내일, 지후가 학교에 왔으면 좋겠다.’
* * *
“으아!”
나루는 화장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낮은 비명을 질렀다.
“이걸 어쩐담?”
눈이 팅팅 부어 있었다.
어제 다음 날을 생각하지 못하고 펑펑 우는 바람에 생긴 참사였다.
벌겋게 부은 눈꺼풀이 눈의 반을 덮어서 괴물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이래서야 누가 봐도 ‘나 큰일이 생겼소!’라는 걸 알 수 있겠다.
‘엄마 보고 싶어서 울었다는 변명은 안 통할 것 같은데. 알러지 증상이라고 할까? 어제 뭘 먹었더라. 소고기, 라고 하면 앞으로 소고기를 못 먹을 테니 안 되고. 샐러리 알러지라고 할까? 하지만…….’
알러지 반응이라고 하면 어제 장을 보고 요리를 한 지후가 죄책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이걸 어쩌나.’
나루는 양치를 하며 거울 속의 괴물을 응시했다.
우선 씻고 나와서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눈꺼풀 위에 얹고, 장롱을 뒤졌다.
* * *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부터 학교엘 다 가신대? 대학 생활 아주 잘 즐기시는 줄 알았더니.”
빌라 앞에 서서, 재경이 물었다.
요 며칠 제대로 출석을 하지 않았던 지후가, 오늘은 일찍부터 준비를 하고 나왔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가 싶었다.
“학생이라면 응당 출석을 해야 하는 법이지.”
지후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응당 출석을 해야 하는 걸 아는 놈이, 그동안 그렇게 땡땡이를 쳤냐?”
“이런저런 생각을 좀 하느라.”
“무슨 생각?”
“그냥 좀.”
“야, 너 요새 나한테 숨기는 거 많은 것 같다? 예전엔 다 말해 주더니.”
“예전에 다 말해 줬다고 생각하는 게 의외인데? 왜 내가 다 말해 줬을 거라고 생각하지?”
“뭐야, 우린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였던 거 아냐?”
“아냐.”
“냉정하네. 아주 냉혹해.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전과하려거나, 그런 건 아니지?”
“뭐, 그 부분도 좀 생각하고 있고.”
“절대 안 돼.”
재경이 지후의 손목을 잡았다.
“넌 절대 날 버려선 안 돼.”
“내가 전과를 하는 게, 왜 널 버리는 게 되는지 모르겠네.”
“버리는 거지. 날 두고 다른 과로 갈 생각하지 마.”
“질척거리지 좀 마라, 성재경.”
“그럼 네가 날 질척거리지 않게 해 주든가.”
“이보다 더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나한테 관심을 좀…….”
권태기의 연인 같은 대화를 나누던 재경이, 빌라에서 나오는 인물을 보고는 말을 멈췄다.
재경이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좁히고 있던 지후도, 멍하니 빌라 입구를 응시했다.
때는 3월. 아직은 추운 초봄의 오전.
빌라에서 나오는 인물은 알이 까만 선글라스에 비니 모자를 쓰고, 통 넓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마치 촬영을 가는 아이돌 힙합 그룹의 멤버처럼.
물론 남의 옷차림에 지적을 할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그렇게 입고 나온 인물이 함께 수업을 들으러 갈 연나루라는 데에 있었다.
나루는 두 남자를 보고 놀란 듯 흠칫했지만, 곧 환하게 웃으며 한 손을 들었다.
“여어! 좋은 아침!”
“……정말 좋은 거 맞아?”
재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좋아. 오늘 내 기분은 정말 굿이야, 굿.”
나루가 좀 이상하다.
재경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루의 얼굴을 살폈다. 나루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너무 그렇게 뚫어져라 보지 마. 쑥스럽잖아.”
“쑥스러움이라는 게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군.”
지후가 중얼거렸다.
“아하하하. 그런데 왜 다들 여기에 있는 거야? 벌써 학교 갔을 줄 알았는데.”
“같이 가려고 기다렸지. 그런데 오늘, 너.”
재경은 뭐라고 해야 할지 적당한 말을 찾느라 잠시 말을 멈췄다.
“너무 꾸민 거 아니냐?”
고맙게도 지후가 적당한 표현을 찾아서 질문을 이었다.
나루가 웃었다.
“내가 원래 좀 꾸미는 편이거든.”
“아아, 그래? 그럼 좀…….”
지후가 ‘잘 좀 꾸미지.’라는 뒷말을 삼켰다.
“내가 힙합을 좋아해. 오늘따라 힙합 본능이 튀어나와서 참을 수가 없었어. 자, 얼른 학교에 가자.”
묘하게 들뜬 말투로, 나루가 말했다.
‘힙합, 진짜 좋아하나 보네.’
재경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나루는 힙합을 좋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흔한 헤드폰이나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느닷없이 힙합이라니.
‘진짜 특이하다니까.’
나루는 도도하게 생겼는데, 의외로 특이한 행동을 자주 했다.
외모와 행동 사이의 갭이, 오히려 그녀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나루는 역시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드는 여자다.
지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서 돌아봤더니, 지후는 미묘한 표정으로 나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기한 동물을 보는 듯한 눈빛이라서 안심했다.
“너 정말 그러고 학교에 갈 생각이냐?”
지후가 물었다.
“응, 왜? 이상해?”
“응.”
지후는 솔직했다.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어. 난 힙합에 대한 내 신념을 버릴 생각 없어.”
“힙합에 신념까지 있었냐?”
“응. 난 늘 그런 각오로 취미를 즐기거든. 아무튼 계속 이러고 있을 거라면 난 먼저 갈게. 이따 봐.”
나루가 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나루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두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나루의 뒤를 따라왔다.
저벅저벅.
비슷하게 울리는 두 개의 발자국 소리에, 나루는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따라오지 마!
창피해 죽겠다.
부은 눈을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찾아서 쓰고, 이상해 보이는 것 같아서 딱 하나 있는 통 넓은 바지를 꺼내 입었다.
그걸로도 모자라는 기분이 들어 비니까지 꺼내 썼지만, 도저히 밖에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힙합퍼야, 힙합퍼.’
그렇게 자신을 세뇌시켜 각오를 단단히 먹고 나왔는데, 이렇게 빨리 재경과 지후를 마주칠 줄은 몰랐다.
선글라스 때문에 늦장을 부려서, 두 사람은 이미 학교에 갔을 줄 알았는데.
‘아, 지후는 왜 그동안 학교에 안 가더니, 오늘따라 학교를 가는 거야? 창피해 죽겠네, 진짜.’
옛 시간에서는 볼 꼴, 못 볼 꼴 다 보인 사이라지만, 그래도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역시 창피하다. 정신이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 뭐. 내가 이 시간으로 와서 이상한 모습을 보인 게 한두 번이야? 괜찮아. 내려놓자. 잘 보여서 뭐해? 어차피.’
멀어져야만 하는 사이인데.
그 생각을 하기도 전에, 심장은 미리 알아채고 고통을 뿜어냈다.
나루는 뒤에서 따라오는 두 남자에게 들키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멀어져야만 하는 사이인데. 사랑해서는 안 되는 관계인데.’
* * *
연예인들은 매일 이런 기분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걸까?
강의실에 갈 때까지, 나루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쏟아졌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이, 나루는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연예인은 절대 못 하겠다. 물론 시켜주지도 않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강의실에 들어갔다.
역시나 학우들이 경이롭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실내로 들어왔는데, 그걸 좀 벗는 게 어때?”
재경이 부드럽게 제안했다.
“아니, 난 벗을 생각 없어. 형광등 조명이 너무 눈부시거든.”
“박쥐냐?”
“그럴지도 몰라.”
바보 같은 대화를 하며 맨 뒷자리에 앉았다. 재경도 나루의 옆에 앉았지만, 지후는 맨 앞의 빈자리로 향했다.
당연한 듯 멀어지는 지후의 뒷모습을, 나루는 가만히 응시했다.
선글라스를 써서 좋은 점 하나.
지후의 모습을 마음껏 지켜볼 수 있다는 것.
선글라스를 써서 나쁜 점 하나.
지후의 모습을 자꾸만 훔쳐보게 된다는 것.
나루는 간신히 그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를 이 눈동자 안에 담는 건 최소한으로 줄여야만 했다.
보면 욕심이 나고, 욕심이 나면 견딜 수 없게 된다.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부풀어 펑 터지기 전에, 습관처럼 그를 찾아 헤매는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고정시켜야만 했다.
그때였다.
“지후야, 좋은 아침!”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던 나루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강의실 앞자리, 왼쪽 끝에 윤영이 앉아 있었다.
책상 3개를 사이에 둔 자리에 앉은 지후가 윤영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아아, 좋은 아침.”
지후가 대답했다.
“말 잘 듣네. 오늘은 학교에도 오고.”
“네 말 때문에 온 거 아냐.”
“뭐가 됐든, 학교에서 봐서 반가워.”
친근해 보이는 둘의 모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두 사람,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