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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12화 (12/93)

12화. 듣고 싶지 않은 말

2017.08.10.

재경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침묵 속에서 재경과 지후가 눈빛을 주고받은 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루는 그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나루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 두 남자의 눈치를 보는데, 지후가 재경에게 봉지를 내밀었다.

“그럼 네가 해 줘.”

“어?”

재경의 얼굴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사라졌다. 재경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봉지를 내려다봤다.

지후가 다시 말했다.

“네가 해 주라고. 애호박볶음.”

“야, 그걸 내가 어떻게 해? 나 요리 못하는 거 알잖아.”

재경이 칭얼거리듯 말했다.

지후가 미간을 좁혔다.

“내가 해 주는 게 싫은 거 아냐?”

“아니, 싫다기보다는, 그냥…….”

“나도 귀찮아.”

라고, 지후는 말했다.

그 말에 나루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귀찮아.’라고 말하는 지후는 알지 못한다.

물론 지후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시간의 민지후가 내게 관심 보이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지후가 나를 성가셔하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지후가 나를 귀찮아하는 것을 인정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후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그 한마디가, 날카로운 얼음 칼날이 되어 나루의 심장에 깊숙이 박혔다.

이렇게나 아플 줄은 몰랐다.

격통에 호흡을 하기가 어려웠다.

숨을 헐떡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울면 안 돼.’

이제 막 알게 된 사이인 지후가 나루를 귀찮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후는 원래 자기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상대하는 걸 성가셔 했었다.

그러니까 이건 당연한 흐름. 당연한 반응.

‘당연한 건데도 참 아프구나. 정말 아파, 지후야.’

있는 힘껏 표정을 갈무리하고 얼굴을 번쩍 들었을 때, 재경은 지후에게 한 소리하고 있었다.

“야, 귀찮다니. 그래도 같은 과 친구한테 너무하잖아, 그 말은.”

“그런가?”

지후는 어깨를 으쓱했다.

장을 봐 온 봉지를 여전히 재경의 앞에 내민 채였다.

재경이 봉지를 받아 들려고 할 때, 나루가 그것을 낚아챘다.

“필요 없어.”

나루가 차갑게 말했다.

“애호박볶음이든 샐러드든 뭐든, 다 필요 없어. 해 달라고 한 적도 없고. 그러니까 됐어. 내가 알아서 해 먹을게.”

“나루야.”

재경이 불렀지만 나루는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후가 중얼거렸다.

“저거, 내가 산 건데.”

* * *

쾅―!

나루는 보는 사람도 없지만 거칠게 문을 닫았다.

들고 있던 봉지를 집어던지려다가 관두고 식탁 위에 살며시 내려놨다.

봉지 안에 담긴 것들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그 옆에 앉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나, 진짜 뭘 하고 있는 거지?”

한 번 걸었던 시간을 다시 걷게 되었다.

그렇다면 모든 상황에 좀 더 의연하게, 담담하게 대처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을 하려고 해도 마음은 멋대로 움직여, 자제하기 힘든 감정을 자아냈다.

―나도 귀찮아.

지후가 내뱉은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도 귀찮아.

―내가 해 주고 싶어.

방금 전의 말과 예전의 말이 뒤섞였다.

방금 전의 성가시다는 표정과 예전의 다정한 표정이 범벅되어, 가슴이 술렁거렸다.

차라리 기억이 나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의 다정한 눈빛과 상냥한 음성, 따스한 손길을 기억하지 못하면 좋으련만.

그런 것들을 모르면 지금의 냉정함이 이토록 아프고 시리지 않을 텐데.

‘하지만.’

나루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잊고 싶지 않아.’

잊고 싶지만 잊고 싶지 않다는 모순된 감정이 있었다.

그와의 추억은 살아가는 힘이었다. 아프지만, 때때로 사무치지만, 그래도 나루에게는 소중한 기억이었다.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 모든 일들을, 나만큼은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지후와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되더라도, 그의 손을 다른 여자가 잡게 되더라도.

이 기억들은 나루에게 살아갈 의미로 남아 있을 것이다.

똑똑―

노크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네.”

“나루야. 나, 재경이.”

“아아. 잠깐만.”

지금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지만, 힘겹게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재경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까 기분이 상했던 것 같아서.”

“너 때문에 기분이 상한 거 아냐.”

“혹시 지후가 귀찮다고 말해서라면…….”

“지후 때문도 아냐.”

“어, 그럼?”

“그냥, 갑자기.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

“정말?”

재경이 미심쩍다는 듯 나루를 응시했다.

“응, 정말로.”

나루는 재경과 눈을 맞추고 말했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서 그랬어. 오히려 그런 식으로 들어와 버려서 내가 미안하지. 지후, 기분 안 상했든?”

다행이라고, 나루는 생각했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어서 안심이다.

앞으로 이런 상황들이 종종 벌어지겠지만, 아마 오늘보다 더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뜯기는 듯한 가슴의 통증도 무시할 수 있게 되겠지. 익숙해지겠지.

“응. 지후야, 뭐. 그런 일로 기분 상하는 애는 아냐.”

“그래, 다행이네.”

나루가 돌아섰다.

재경은 여전히 문 앞에 서 있었다. 나루는 흘끗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거기서 뭐해? 안 들어와?”

“어? 들어가도 돼?”

재경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쟤가 저렇게 어리숙한 애였나?’

나루가 아는 성재경은 누구보다도 여자에게 능숙한 남자였다. 예전에, 나루가 자취하는 방에 가장 먼저 거침없이 들어온 남자이기도 했다.

그런 재경이 차마 발을 딛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을 보니,

‘내가 성재경을 잘못 알고 있었나?’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 기억이 잘못됐나? 아냐, 옛날엔 분명.’

샤워를 하고 나와서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리포트를 쓸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꽤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의아한 기분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여어.”

재경이 한 손을 들며 웃었다.

얼굴이 발간 걸 보니 술에 취한 것 같았다.

“뭐해?”

“리포트 쓰려고. 오늘 과 모임 갔었어?”

“어, 잠깐 들렀지.”

“잠깐 들른 것 같지가 않은데? 엄청 취해 보이네.”

“안 취했어, 안 취했어. 야, 너네 집에서 좋은 냄새 난다. 네 냄새인가?”

“징그러운 소리 좀 하지 마.”

아마도 친구가 되고 두 달쯤 지났을 때였을 것이다.

재경과는 급속도로 친해져서, 거의 남매나 다름없이 지내고 있었다.

서로에게 무슨 말을 해도 상처받지 않는 사이. 그런 사이였다.

“좀 비켜 봐, 들어가게.”

재경은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야, 너네 집 놔두고 왜 우리 집엘 들어와?”

혼자 있는 집에 남자가 밀고 들어온다는 자각은 없었다.

재경은 ‘친구’였으니까.

“지후는 리포트 쓰고 있을 테니까. 성실한 녀석이거든.”

“내 말 안 들었어? 나도 리포트 쓰려고 하고 있었다니까?”

“쓰고 있는 중은 아니었잖아. 게다가 넌 과 수석이고.”

“대체 이 상황이랑 과 수석이 뭔 관계인지 모르겠네.”

결국 재경은 신발까지 벗고 집 안에 들어와, 식탁에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한참 집 안을 둘러본 재경은 나루에게 솔직한 감상을 들려주었다.

“너, 집 좀 정리하고 살아라.”

“신경 끄셔. 손님이 올 줄 알았나?”

“아하하하. 손님.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날 손님으로 봐주는 걸?”

재미있지도 않은 말에, 재경은 웃음을 터뜨렸다. 술에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재경은 손에 턱을 괴고 나루를 빤히 응시했다.

재경의 얼굴에는 무어라 규정짓기 힘든 미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는데, 그것도 아마 술에 취해서 나오는 표정일 것이라고, 나루는 생각했었다.

한참 그렇게 나루를 응시하던 재경이 갑자기 식탁에 엎드렸다.

“졸려.”

“야, 너네 집에 가서 자.”

“안 돼. 집엔 지후가 있고, 난 지금…… 지후를…….”

‘볼 자신이 없어.’

라는 뒷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래, 볼 자신이 없다고 했었어. 잘 안 들려서 잊고 있었었는데, 분명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아.’

나루는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재경을 지켜봤다.

‘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지후랑 무슨 문제가 있었나?’

이제 와서는 알 도리가 없다.

지금의 시간은 그때와 다른 시간이니까. 그 일은 아마도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재경은 식탁에 엎드린 채로 잠이 들었다.

나루는 난처해져서 재경을 지켜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재경과 지후의 집 앞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연 지후는 피곤해 보였다.

“자고 있었어?”

“아니, 리포트. 넌 다 썼어?”

“아직. 이제 막 쓰려고 했는데, 재경이가 방해를 했어.”

“아아. 술자리 불려 나갔었어?”

“아니, 우리 집에 쳐들어왔어. 네가 리포트 쓰는 걸 방해하기 싫다고!”

나루의 말에 지후는 눈을 크게 떴다가, 후, 하고 웃었다.

“미안하게 됐네. 리포트 좀 도와줄까?”

“응, 도와줘! 너 때문에 방해받은 거니까!”

“알겠어, 그럼. 잠깐만.”

지후가 리포트 노트를 들고 나왔다.

‘그래서 지후도 우리 집에 오게 됐지. 지후 덕분에 리포트를 쉽게 썼고, 점수도 잘 받았었어. 그리고…… 중간에 재경이가 깨어나서 우리 리포트 쓰는 걸 방해했었어.’

그날 이후로 셋은 서로의 집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게 되었다.

그리운 기억이 떠오르는 바람에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걸 본 재경이 물었다.

“왜?”

“응?”

“왜 그렇게 웃어?”

“응? 내가 왜?”

재경이 성큼 다가와 나루의 앞에 섰다.

재경에게서는 오래전 지후에게서 맡을 수 있었던 향기가 났다. 그립고 사랑스러운 향기.

“울 것 같아, 너.”

재경의 손이 나루의 볼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무슨 일 있어?”

걱정스러운 음성에 왈칵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안 돼, 안 돼. 울면 안 돼.’

황급히 감정을 정리하고 웃었다.

“일은 무슨. 리포트 쓸 걸 생각하니까 걱정이 돼서.”

“리포트? 우리 지금 리포트 쓸 게 있나?”

아차 싶었다.

예전 기억에 빠져 지금 다른 시간을 걷는 중이라는 걸 깜빡했다.

“아니, 아니. 그냥 좀…… 아르바이트 삼아서 하는 일이 있거든.”

“아르바이트? 벌써 알바를 구했어?”

“어, 응. 그런 게 좀 있어.”

이 시간을 다시 걷게 된 후 거짓말만 늘어가는 것 같다.

“아무튼 앉아. 커피, 아니, 커피 안 마시지? 코코아 타 줄게.”

재경은 식탁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코코아를 찾는 나루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커피 안 마신다는 걸?’

보통은 마신다고들 생각한다.

그런데 나루는 아주 당연하게도 재경이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치 옛날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내가 말한 적이 있나?’

아니. 없었다.

같이 커피숍을 간 적이 없으니, 커피에 대한 취향을 말할 기회도 없었다.

‘술김에 말했나?’

사실 자신이 커피와 코코아 중 어느 쪽을 좋아하는지 나루가 알고 있는 게,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마음에 걸렸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추가 합격이라는 말을 농담으로 했을 때도 그렇고. 혹시 원래 나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건가?’

한 번 시작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때, 나루가 까치발을 들고 찬장에서 머그컵을 꺼내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재경은 일어나 그녀의 뒤로 다가가 팔을 쭉 뻗었다.

나루가 휙 돌아서는 바람에, 그녀가 거의 품에 들어오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재경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나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경을 올려다봤다.

“왜 그렇게 놀라? 네가 너무 놀라니까 내가 놀란 걸 말할 수가 없잖아.”

“아, 아니. 그냥.”

재경이 얼굴을 붉혔다.

나루는 그런 재경을 빤히 응시했다.

‘얘가 왜 이러지?’

재경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등에 갑자기 뭔가 닿는 바람에 놀라서 돌아봤는데, 도리어 재경이 더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아니, 자기가 와서 서 놓고 왜 놀라는 거야? 내가 덮치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은 빨개져서는. 성재경답지 않게.’

이 모습은 정말이지 성재경답지 않다.

재경이 이렇게 수줍음이 많은 남자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재경이에 대해 한참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재경을 처음 만났을 때는 사람을 잘 파악하지 못할 만큼 어렸으니까.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자연스러워진 재경을 보며, 그것이 ‘성재경답다’고, 제멋대로 정의를 내렸는지도 모르겠다.

성재경이라는 사람은, 어쩌면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수줍음이 많고 순진한 남자였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너도 참 이상한 애야. 여자관계 엄청 복잡할 것처럼 생겨서는 의외로 순진하다니까.”

나루가 웃음기 묻은 목소리로 말하며 다시 돌아섰다. 찬장을 향해 손을 쭉 뻗는데, 재경이 그 손목을 잡았다.

이번에는 놀라지 않고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재경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숨을 헉 삼켰다.

재경의 눈동자가 그동안과는 다른 빛을 띠고 나루를 향해 있었다.

연갈색 눈동자는 무척이나 깊고 맑아서, 거기에 비친 나루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재경의 이런 눈빛은 처음이라, 나루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뭘까, 이 눈빛은?

뭐지, 이 눈빛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실제로 20살의 연나루라면 몰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루는 겉모습만 20살일 뿐, 사실은 32살의 성숙한 여인이었다.

깊은 사랑도, 아픈 이별도 해 본, 성인이었다.

그래서 알았다.

20살의 재경이 짓는 눈빛의 의미를. 그 안에 가득 담긴 감정의 이름을.

그러면 지금까지의 재경답지 않은 재경의 행동이 전부 설명되었다.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친구였으니까. 가장 소중하고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

여차할 때에 사심 없이 기댈 수 있는, 몇 안 되는 우정 중 하나였으니까.

다시 걷게 된 이 시간 속에서 아직 우리의 우정이 깊어지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다시 그러한 우정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렇기에 짐작하면서도 애써 무시해 왔을 뿐이었다.

그때.

재경의 입술이 벌어졌다.

“나루야, 나는.”

그 뒤에 이어질 말을, 나루는 듣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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