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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11화 (11/93)

11화. 그대의 속도

2017.08.07.

# 버릇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콤테쎄 다이아네― #

사실은 장을 보러 온 것이 아니지만, 지후와 함께 있는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의 힘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살 것도 없는데 마트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필요도 없는 물건을 집어 들고, 관심 있는 척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내려놨다.

시간이 지나도 장바구니 안의 물건은 늘어나지 않았다.

이쯤 되면 그만 돌아가자고 할 법도 하건만, 지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려 주었으면 좋겠다. 그만 돌아가자고 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이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지 않도록, 그가 나를 멈춰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말없이 따라다니는 지후가 좋아서, 예전의 그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어서. 그래서 콧등이 시큰거렸다.

‘그만. 그만해야 돼, 연나루. 그만. 이 시간에, 이 느낌에 더 익숙해지면 안 돼.’

마음을 다잡았다.

걸음을 멈추고 휙 돌아보았을 때, 지후는 나루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까맣고 깊은 눈동자에 어떤 생각이 담겨 있는지, 나루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것 하나는 그저, 내가 저 눈동자를 몹시도 사랑한다는 것뿐.

그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도 심장이 덜컥덜컥 흔들릴 정도로, 그를 깊이 사랑한다는 것 하나뿐.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하려는 말을 잊은 채 그의 눈만 하염없이 응시했다.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나루에게, 지후가 물었다.

“왜?”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렸다.

“아니. 그냥. 이제 살 건 다 산 것 같아서. 그만 집에 가자.”

“그래.”

계산대로 향하는 나루의 뒤를, 지후가 따라 걸었다.

돌아보고 싶었다. 그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아주 잠시 보지 않았을 뿐인데도 궁금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계산대로 향할 수 있었던 나날이 그리웠다.

오늘 너무 많이 샀나 봐.

이건 사지 말걸 그랬나?

우리 식비 좀 줄여야 할까?

그런 이야기를 재잘재잘 떠들 수 있었던 시간이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많지 않은 물건을 계산대에 내려놓고, 직원이 물건들을 바코드에 찍는 걸 멍하니 지켜봤다.

“3만 2천 원입니다.”

들려오는 소리에 지갑을 꺼내려는데, 뒤쪽에서 자연스럽게 돈이 내밀어졌다.

나루는 지후를 돌아봤다. 지후가 ‘왜?’라는 표정으로 나루를 보고 있었다.

나루야말로 묻고 싶었다.

왜? 왜 네가 이 돈을 내?

예전의 지후라면 그럴 수 있었다.

그때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서 지후가 돈을 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관계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우리는 그저 대학의 같은 과 학우. 친하지도, 그렇다고 사이가 나쁘지도 않은 그렇고 그런 관계.

그런데 왜 지후가 돈을 내주는 걸까? 지후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

‘원래 이렇게 돈을 헤프게 쓰는 애였나?’

그렇지 않았다.

지후는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선을 긋는 성격이었다.

친하지도 않은 학우의 식료품을 사주는 성격은 절대 아니라고, 나루는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건 뭘까?

“계산 끝났으면 좀 비켜 줄래요?”

계산대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손님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나루는 얼른 계산대를 빠져나왔고, 지후도 그 뒤를 따라 나오며 물건이 담긴 봉지를 집어 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나의’ 물건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고개를 들어 지후와 눈을 맞췄다.

지후의 검은 눈동자를 보았지만, 여전히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걸 왜 네가 사?”

담고 있던 의문을 솔직하게 뱉어 냈다.

지후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가 대답했다.

“내가 고른 거잖아.”

“하지만 내가 먹을 거잖아.”

“네가 별로 원하지 않는 걸 내가 억지로 고르게 했으니까.”

납득이 되는 대답이었다.

“아, 그래.”

“응. 부담스러우면 돈 줘도 되고.”

지후가 손을 내밀었다.

잡고 싶게 만들어지는 커다란 손을 응시하다가, 나루는 피식 웃었다.

“안 줄 거야. 쏘겠다는데 줄 이유가 없지.”

“그럼 그러든가.”

지후는 무심히 대꾸하며 손을 거뒀다.

그 손을 마음껏 잡을 수 없음이 아쉬웠다.

아련한 그리움을 자아내는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아까보다 그리움이 깊어진 이유는, 아마도 그가 옆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손을 잡고 걸었던 거리. 이제는 그의 손을 잡을 수 없는 거리.

그저 손과 손의 만남이 없을 뿐인데, 그로 인한 감정의 거리가 까마득히 멀었다.

침묵이 무겁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지후와는 아무 말 없이 몇 시간을 함께 있어도 편안한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은 몹시도 무겁고 깊었다.

무슨 말이든 꺼내서 침묵을 깨뜨리고 싶은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난 예전에 지후랑 무슨 얘기를 했었지? 사귀기 전, 친구였을 때. 우리는 어떤 대화를 나눴었지? 그때도 참 편안했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불편한 걸까?’

불편한 것이 당연했다.

그를 사랑하는 이 마음을, 내 눈에서 드러나는 이 감정을 감춰야 하니까. 오롯이 나만 알도록 숨겨야만 하니까.

내가 내뱉는 말에 그를 향한 애정이, 그리움이 담길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하나, 하나 말과 행동을 고르느라 이토록 버거운 것이리라.

그렇게 말을 고르느라 걸음이 늦어졌다.

지후가 한 걸음 앞서서 걷게 되었지만, 한 걸음 이상으로 거리가 멀어지지는 않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그의 등을 가만히 응시했다.

‘내 속도에 맞춰 주고 있는 걸까?’

지후는 원래 걸음이 빨랐다.

언제였더라.

아마도 친구가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일 것이다.

나루의 속도에 맞춰 주는 재경과 달리, 지후는 늘 자기 속도를 유지했다.

셋이 걸을 때는 재경이 항상,

“같이 좀 가자. 다리 길이 자랑하냐?”

라고 말해서 괜찮았다.

하지만 지후와 나루, 단둘이 걷게 되는 날에는, 그의 속도를 따라가느라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만 했다.

다리 길이의 차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고집스럽게 지후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애썼다.

‘그래, 그날은 날씨가 더웠어.’

계절이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을 때였다.

옷이 짧아졌고, 기말고사를 준비 중이었다.

재경이 먼저 도서관에 자리를 잡아 두겠다고 먼저 갔고, 나루와 지후는 도서관에서 먹을 햄버거를 사서 도서관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 지후의 속도를 따라잡다가 넘어졌다.

“으악!”

넘어지면서 비명을 질렀고, 앞서가던 지후가 뒤를 돌아봤다.

아주 제대로 넘어진 나루의 모습에, 지후의 눈이 커졌다.

“괜찮아?”

지후가 다가왔다.

“안 괜찮아.”

엎어진 채로 말했다.

“하나도 안 괜찮아.”

괜히 서러웠다.

반바지를 입고 있어서 맨땅에 부딪친 무릎이 시큰시큰 아파왔지만, 그보다는 대자로 뻗은 자신의 모습이 창피했다.

그것도 같은 나이의 남자애 앞에서 넘어졌다는 게, 더 수치스러웠던 것 같다.

지후와의 다리 길이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뒤따르던 건 자신인데, 괜히 지후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전부 민지후 때문이야!’

아직은 어렸던 나루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다리가 길어도 그렇지! 같이 가는 사람을 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가는 게 어디 있어? 재경이도 키가 크지만 내 속도를 맞춰 주잖아, 항상!’

재경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여자 경험이 많기 때문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일어나 봐 봐.”

지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막 눈물이 나려고 했기 때문이다.

“많이 아파? 못 일어나겠어?”

지후가 상냥하게 말할수록 더 눈물이 나려고 했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엎어진 나루를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였다.

몸이 부웅 떠오른 것은.

지후가 나루를 공주님처럼 안아 들었다.

“으악!”

상황을 파악한 나루가 비명을 질렀다. 눈물이 쏙 들어갔다. 괜히 서러웠던 마음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뭐, 뭐, 뭐, 뭐하는 거야?”

“병원 가자.”

“병원이라니! 그냥 넘어진 건데! 괜찮아!”

“안 괜찮다며?”

“아니, 아니. 괜찮아!”

“좀 전엔 안 괜찮다고 했잖아.”

심통 나서 내뱉은 말이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아냐, 정말 괜찮아. 넘어진 걸 가지고 무슨 병원이야?”

“많이 다친 거 아냐?”

지후의 까만 눈동자가 나루의 무릎으로 향했다.

“무릎에서 피 난다.”

“피, 피는 닦으면 되지! 연고 바르면 돼.”

“여자애 무릎에 흉터 생기면 안 되잖아.”

“아니, 아니. 난 흉터 좋아해. 흉터 생기는 거 좋아.”

당혹스러운 마음에 바보 같은 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지후는 웃지 않았다.

나루의 무릎을 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걱정스러움만 가득했다.

그래서.

‘그래서 결국 어떻게 했더라?’

그래, 병원을 갔다.

그에게 안긴 채 학교 옆에 있는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보다는 그에게서 나는 향기가 더 신경 쓰였다.

시원한 스킨 향과 그의 살내음.

그 향기에 아찔했었던 기억이 났다.

‘어쩌면 나는…….’

그때부터 지후를 좋아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안겨 있지 않았으리라. 어떻게든 그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쓸 만한 깜냥은 있었다.

‘아아, 그랬나? 난 그때 이미 지후를 좋아하고 있었던 걸까?’

새삼스럽게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 것보다는 지후가 날 언제 사랑하게 됐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나루는 지후의 등을 응시했다. 지후는 여전히 한 걸음 앞, 그 위치에서 걷고 있었다.

역시 지후는 이쪽의 속도를 신경 쓰고 있다.

―내가 신경을 못 썼어.

병원에서 나오는 길에, 지후는 그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신경 쓸게. 미안해.

지후의 잘못이 아님에도, 지후는 사과를 했다. 그리고 그 이후, 언제나 나루의 속도에 맞춰 걸었다.

‘지후가 내 속도를 맞춰서 걷기 시작한 건, 그 이후였어. 그전에는 항상 성큼성큼 걸어갔었지. 그런데 왜…….’

지금 속도를 맞추고 있는 걸까?

그때와 지금, 무엇이 바뀐 걸까?

‘여자의 걸음 속도가 자기보다 늦다는 걸 알 만한 일이 있었던 걸까? 하긴. 요새 지후는 옛날이랑 많이 다르니까. 학교도 잘 안 나오고…….’

어쩌면 학교에 나오지 않는 동안, 다른 사건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의문이 들었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나 역시 그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고, 과거의 그는 내 기억과 조금 다르다.

이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어도 괜찮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하긴. 1학년 때의 나는 지후를 아주 잘 알지 못했지. 그러니까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을 거야.’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고민을 해 봐야, 나루의 생각대로 지후를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과거로 돌아왔다고 해도, 지후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으니까.

지후는 지후의 삶을 살아갈 것이고, 나루는 그 삶에 끼어드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바로 지금 같은 시간들을 피해야만 했다.

함께 장을 보고, 함께 걸어가는 이런 따스하고 설레는 시간.

‘물론 지후는 설레지 않겠지만.’

입안이 썼다.

‘내가 지금 여기서 철퍼덕 넘어지면, 지후는 어떻게 할까? 전처럼 날 안아서 병원에 데려갈까?’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최소화해야만 한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정해 봐야 가슴만 미어질 뿐이다.

없애야만 하는 추억을 되새겨 봐야 심장만 아플 뿐이다.

‘생각하지 말자. 그리워하지도 말자. 그냥 내 좋은 기억들 중 하나로만 남겨 두자. 이제 나는 넘어졌을 때 벌떡 일어나야 돼. 지후가 날 챙겨 주기 전에, 나 혼자 일어나고 나 혼자 피를 닦아 내야 돼. 설령 다리가 부러지더라도 지후의 품에 안겨서는 안 돼. 그러니까 궁상떨지 마, 연나루. 정신 바짝 차려.’

어느새 자취방이 있는 골목에 접어들었다.

앞서서 걷던 지후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

나루가 지후의 옆으로 가며 물었다.

지후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고, 나루도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재경이었다.

빌라 앞에 재경이 있었다.

재경은 막 들어가려는 길이었는지 한 발을 입구 계단에 올리고 있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나루는 괜히 움찔했다.

재경의 시선이 지후에게서 나루에게로, 그 다음에 지후가 들고 있는 봉지로 향했다.

기분 탓일까?

재경의 표정이 유독 어둡게 굳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재경이 돌연 환하게 웃으며 오른손을 들었다.

“뭐야, 둘이? 장 보고 오는 거?”

아, 역시 기분 탓이었나 보다.

‘하긴. 지후랑 장 보고 오는데 재경이가 기분 나빠할 이유가 없지.’

나루는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마트 앞에서 마주쳤거든.”

“흐응, 그래?”

재경이 다가왔다.

지후는 여전히 멈춰 서 있었다.

“뭐 샀어?”

재경이 봉지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고기. 애호박. 감자. 샐러리 등등.”

나루의 대답에 재경이 웃었다.

“대체 뭘 해 먹으려고?”

“그러게 말이야.”

대답하며 지후를 올려다봤다. 그제야 지후가 입을 열었다.

“스테이크에 샐러드, 애호박볶음.”

“스테이크에 샐러드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애호박볶음은 뭔 조합이래?”

“밑반찬. 냉장고에 넣어 뒀다가 먹으라고.”

“아아. 애호박볶음 차갑게 식혀서 먹으면 맛있지. 밥 비벼먹을 때 넣어도 맛있고.”

재경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들어 지후와 눈을 맞추고 물었다.

“그런데 그거, 네가 해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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