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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10화 (10/93)

10화. 사랑을 하면 바보가 된다

2017.08.03.

사랑을 하면 바보가 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사랑에 빠지고 보니 알겠다.

정말로 바보가 된다.

온 생각이 그녀에게 집중되어,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여유가 사라지고, 시야가 좁아진다.

내 행동이 자연스러운지, 그렇지 않은지도 모르는 채, 그녀의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기만 한다.

자부심을 가졌던 잘생긴 외모 따위는, 그녀의 앞에선 그리 대단히 느껴지지도 않았다.

좀 더 나은 무언가, 좀 더 대단한 무언가가 있어야만 한다는 초조함에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쉽게 보낼 수 있는 문자조차도, 그녀에게 보낼 때는 열 번 망설인 끝에 결국은 포기하고 만다. 행여나 그녀가 귀찮아할까 봐서.

강의 시간이 다가오자 학생들이 들어와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나루는 교수님과 거의 동시에 들어와서, 재경보다 두 자리 앞에 앉았다.

오늘부터는 본격적인 수업이지만,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시선이 자꾸만 나루에게로 향했다.

얼굴이 보이는 자리도 아닌데,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달칵―

작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교수가 잠시 말을 멈췄고.

“죄송합니다.”

지후의 음성이 들려왔다.

순간, 나루의 어깨가 움찔 떨리는 듯 보인 것은 눈의 착각일까?

지후가 재경의 옆에 앉았다.

“너, 요새 왜 이렇게 자꾸 늦어?”

그러고 보면 대학 생활을 제대로 즐기는 건, 나루와 윤명진뿐만이 아니었다.

내 오랜 친구이자 룸메이트 또한 대학 생활을 아주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그냥.”

지후는 무심히 대꾸하며 책을 꺼냈다.

어째서일까.

오랜 시간 형제처럼 지낸 지후가 최근에는 조금 멀게 느껴졌다.

수업에 늦고, 때로는 아예 결석을 하기도 하는 민지후를, 재경은 몰랐다.

재경이 아는 민지후는 미련스러울 정도로 성실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일은 무슨. 수업 중이다.”

지후가 수업을 들으라는 듯 턱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늦은 주제에 성실한 척은.”

재경은 투덜거리며 펜을 들었다.

이제 나루를 보는 건 그만하고 수업에 집중해야겠다. 이번 학기 과 수석을 목표로.

결심한 바가 있어서 생명공학과에 입학했기에, 좋은 성적을 유지해야 했다.

재경은 겉보기엔 한량 같은 느낌이라 다들 성실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노력파였다.

수업을 열심히 듣고 예습 복습을 철저하게.

당연하지만 실행하기 어려운 그 방법을, 재경은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실행하고 있었다.

수업에 집중을 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교수가 화이트보드를 지우고 있을 때 잠깐 고개를 돌린 재경은, 생각지도 못한 지후의 모습에 숨을 삼켰다.

지후는 손에 턱을 괴고 나른하게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눈빛은 온화하고 다정했고, 입가에는 즐거운 듯 옅은 미소가 묻어 나왔다.

오랫동안 지후를 알아온 재경으로서도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남자까지도 반할 만큼 달콤한 표정.

‘어디를…….’

칠판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 건 확실했다.

지후의 시선은 그보다 더 왼쪽으로 향해 있었다.

‘보는 거지?’

지후의 시선을 따라간 그곳에는, 나루가 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설마.

지후가 나루를.

설마.

내 친구가 내 사랑하는 여자를.

숨이 턱 막혀 왔다.

‘아니, 아닐 거야. 이미 내가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잖아. 지후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잖아. 지후는, 친구가 사랑하는 여자를 사랑하는 녀석이 아니야.’

정말 그럴까?

최근의 지후는, 재경이 아는 지후 같지가 않았다.

신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재경은 주먹을 꽉 쥐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후가 보는 것이 정말로 연나루인지 확인해야 했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지후와 눈이 마주쳤다.

지후가 의아한 듯 물었다.

“표정이 왜 그러냐?”

나루를 그런 눈으로 본 적이 전혀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아니, 그냥…….”

“저기 좀 봐 봐.”

지후가 턱짓을 했다.

나루가 있는 곳이었다.

“나루가 왜?”

“나루? 걔가 어디 있는데?”

지후가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저기 있잖아.”

“아, 회색 옷? 저게 연나루였냐?”

“나루, 보고 있던 거 아냐?”

“내가 걔를 왜 봐? 저기 창밖에 봐 봐.”

그제야 재경은 나루가 창문 근처에 앉아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창밖엔 왜?”

“까치 있어. 두 마리.”

“…….”

“귀엽다.”

지후가 황홀하다는 듯 중얼거린 말에,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지후가 생긴 것과는 다르게 동물을 몹시 사랑한다는 걸 깜빡했다.

“저 둘은 연인인가?”

“넌 내 짝사랑보다 저 까치의 연애 사정이 더 궁금하냐?”

역시 사랑을 하면 바보가 된다.

친구의 시선 처리 하나에, 이렇게까지 긴장하고 놀라고 당황하다니.

창피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투덜거리는 재경에게, 지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넌 귀엽지 않지만, 까치는 귀여우니까.”

* * *

“끝나고 2학년 선배들이 밥 사 준대.”

라는 말에, 나루는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선배들과 마주치는 자리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마음가짐을 바꿔서인지, 요 며칠간은 평화로웠다.

다만 지후가 걱정되었다.

얘는 왜 출석을 제대로 안 하는 걸까?

기억하기로, 예전에 지후는 성실했었다. 아플 때에도, 전날 술을 마시고 밤을 샜을 때에도, 출석만큼은 성실하게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학교에서 지후를 보기가 힘들다.

결석을 하거나 지각을 하거나 2시간 강의 중 1시간만 듣고 사라지곤 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니면 무언가 이변이 벌어진 걸까?

‘아니, 내가 걱정할 일이 아냐. 오히려 잘됐어. 안 보이니까 오히려 마음이 차분하잖아.’

사실은 거짓말이다.

그립다.

지후를 보고 싶었다.

그의 깊은 눈동자와 웃을 때면 끝이 내려가는 눈썹이 그리웠다.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 미소를 짓던 순간이 그립고, 고개를 돌렸을 때에 그의 옆모습이 보였던 순간이 그리웠다.

그립고 그리워서, 올 리 없는 그의 전화를 기다리며, 하루에도 몇 번이나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질없이. 하염없이.

돌아가는 길에는 마트에 들러 장을 볼 예정이었다.

마트가 어디였더라.

기억을 더듬어 큰길을 따라 걷다가 눈에 익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이 골목 안쪽에 할인마트가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골목 여기저기 놓여 있는 상자와 쓰레기 때문에 조금은 지저분한 거리를 걸었다.

걷다가 우뚝 걸음을 멈춘 이유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 때문이었다.

아, 어째서 저 남자는 이렇게 느닷없이 내 눈앞에 나타나 심장을 후려치는 걸까?

마트 맞은편에 지후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온 후인지, 옆에는 커다란 비닐 봉투가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한 손에는 담배를,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강아지를 쓰다듬는 모습에서, 나루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림 같은 광경이었다.

아주 잘 그려진, 그래서 보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도, 그립게도 하는 그림.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지후는 천천히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빨아들이고 훅 뱉어 냈다. 잿빛 연기가 지후를 에둘러 감쌌다가 흩어졌다.

먼저 나루를 발견한 건 강아지였다.

떠돌이 개인 듯 꼬질꼬질한 강아지가 나루를 돌아봤고, 동시에 지후도 고개를 돌렸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지후의 눈이 커졌고, 담배 끼운 손을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둘은 한참 그렇게 서로를 응시했다. 시간도, 공간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적어도 나루에게는.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골목의 자잘한 소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영원 같은 시간 속에 그와 단둘이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루는,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해도 좋으니, 그저 하염없이 그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저 하염없이 그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렇게 시간이 멈춰, 그가 죽는 순간이 오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러면 참으로 좋을 텐데.

“장 보러 왔냐?”

지후가 일어나며 물었다.

“어, 응. 넌?”

“난 보고 돌아가는 길.”

“아아. 강아지, 좋아하나 봐.”

“응, 뭐. 좋아해.”

순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좋아해.’라는 말이, 날 향한 말인 것 같아 심장이 내려앉았다.

항상 그랬다.

예전에, 그토록 오래 사귀고 늘 듣는 말인데도. 그가 좋아해, 사랑해, 말해 줄 때마다 심장이 뛰었다.

그런 사이였다.

우리는.

이제는 우리라고 부를 수 없는 예전의 우리는, 사랑해, 좋아해, 그 말을 수시로 하면서도 설레는, 그런 사랑스럽고도 달콤한 커플이었다.

“수업은 안 나오고 장 본 거야?”

“아아.”

“수업 좀 나와. 너 그러다가 학고 받겠다.”

“그럼 한 학기 더 다니면 되는 거고.”

“재경이가 그러는데, 그거 대학 생활 제대로 즐기는 거라더라. 출석 제대로 안 하는 거.”

“그럼 안심이네. 뭐 하나는 제대로 하고 있으니.”

지후가 마트 봉지를 집어 들었다.

돌아가려는 모양이라는 생각에 아쉬움을 느끼는 것도 잠시.

“가자.”

그가 턱으로 마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 어딜?”

“장 보러 왔다며?”

“같이 가 주게?”

“응.”

“왜?”

“그거야.”

지후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주 잠깐, 그의 얼굴에 난처하다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집에 혼자 돌아가기 심심하니까.”

“아…….”

외로움 많이 타는구나?

됐으니까 먼저 가. 난 혼자 장 보는 거 좋아해.

생필품도 사야 하고. 남자랑 같이 장 보는 거 불편해.

그런 말을 해야만 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입은 멋대로 움직였다.

“응, 그래. 그럼.”

사랑하기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기에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좋은 기회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은 밀어내지 못했다.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지후와 나란히 마트로 들어가는 내내 되뇌었다.

‘아, 진짜 안 되는데.’

지후가 입구에 있는 녹색 장바구니를 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

우리의 관계에서, 장바구니를 드는 건 언제나 지후였다.

지후가 장바구니를 들고, 나는 그 장바구니의 끝을 살짝 잡고 걷곤 했다.

팔짱을 낄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나도 장바구니를 드는 걸 한몫 거들었어.’라는 느낌이 드는 게 좋아서 장바구니에 손을 얹곤 했다.

그렇게 걸어가며 필요한 것을 하나, 하나 골라 넣었던 때가 떠올랐다.

너무도 당연하고, 그 당연한 것이 아프지 않았던 나날.

평화롭고도 사랑스러운 한때의 기억이 물밀듯 밀려와 심장을 움켜쥐었다.

요 며칠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예전과 같은 지후의 모습을 보는 순간, 간신히 붙잡아 세운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나루는 주먹을 꽉 쥐고 신음을 삼켰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지후의 옆을 따라 걸으며, 몇 번이나 장바구니로 향하는 손을 멈추게 하느라 고생했다.

“뭐 살 거야?”

문득 지후의 음성이 들려와 화들짝 놀랐다.

“어? 어어? 어? 뭐라고?”

당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그 모습에 지후가 눈을 크게 떴다가 “후.”하며 웃었다.

지후의 얼굴 전면에 옅게 퍼지는 미소가 어찌나 황홀한지, 나루는 저도 모르게 말할 뻔했다.

지후야. 사랑해.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꿀꺽 삼켰다.

“왜 그렇게 놀라? 남들이 보면 내가 너한테 욕이라도 한 줄 알겠다.”

“아하하하. 그러게. 하하하.”

“뭐 살 거냐고.”

“아, 그게…… 어, 그러니까…….”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지후와 함께 있다는 것에 이렇게까지 긴장을 하다니.

이런 건 예전에 지후와 첫 키스를 했을 때와 첫 경험을 하기 직전 이후로는 처음이다.

“먹을 거.”

“먹을 거라.”

지후가 야채 코너 앞에 멈춰서 마침 보이는 애호박을 가리켰다.

“이런 거?”

얘가 이렇게 엉뚱한 애였나?

“아니, 좀 더 제대로 된 먹을 거.”

“애호박이 어때서?”

“난 고기를 좋아해.”

“넌 좀 골고루 먹을 필요가 있어.”

“내 식성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안 봐도 빤하지.”

라고 말하며, 지후는 장바구니에 애호박을 담았다.

“야, 나 이거 안 먹는다니까. 어떻게 먹는지도 모르고.”

나루가 다시 꺼내자, 지후가 다시 애호박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호박전이라도 부쳐 먹어. 어려운 거 아니니까.”

“싫어. 번거로워. 요리하는 거 안 좋아해.”

“내가 해 줄게.”

“어?”

“내가 해 줄 테니까 먹으라고.”

숨이 턱 막혔다.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하는데,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느닷없는 그의 다정함에 가슴이 미어졌다.

“왜 그렇게 봐?”

지후가 감자와 샐러리를 장바구니에 집어넣으며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감자랑 샐러리는 왜 넣는 건데? 대체 무슨 음식을 만들려는 거야?”

“뭐든 만들 수 있겠지.”

“요리 잘해?”

잘한다는 걸 알고 있다.

“글쎄. 해 보면 알겠지.”

“난 고기가 좋아.”

“적당히 좀 해.”

라고 말하면서도, 지후는 정육 코너를 향해 걸어갔다.

―적당히 좀 해.

나루가 떼를 쓰면, 지후는 무뚝뚝하게 말하곤 했다.

적당히 좀 해.

그러면서도 나루가 원하는 것을, 싫은 기색 없이 들어주었다.

그것이 참으로 좋아서, 그 목소리가 참으로 사랑스러워서, 나루는 가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칭얼거리곤 했다.

지후는 나루가 기댈 수 있고, 칭얼거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소고기.”

“돈 많네. 등심, 안심.”

“애호박이랑 감자랑 샐러리랑 어울리는 고기로.”

나루의 대답에 지후가 피식 웃었다.

“등심으로 하자.”

“응.”

“또 살 거 있어?”

“치약이랑 과자.”

“과자로 이를 썩히고 치약으로 회복하겠다는 건가? 미묘한 조합이군.”

“아니, 그렇게까지 깊은 의미는 없거든.”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며 장을 보는 동안, 잠시 예전의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을 느꼈다.

물론 그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가슴의 통증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이 시간이 소중하고 행복해서, 나루는 도저히 지후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를 사랑하지 말고, 그 또한 나를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생각을 배신하고 멋대로 육체를 움직였다.

이성의 힘이 이토록 약하다는 것을, 나루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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