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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8화 (8/93)

8화. 그대의 향기

2017.07.27.

재경이 슬쩍 나루를 돌아봤다.

“응.”

재경의 눈빛을 못 본 나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사이도 아냐. 알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정말? 둘이 막 비밀 연애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그런 거면 나한테 말해 주기야?”

“비밀 연애는 무슨. 난 연애하면 여기저기 다 알리고 다닐 거니까 걱정 마.”

나루는 그렇게 말하고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나루가 뒷자리에 앉는 걸 확인한 재경이, 선미에게 잡혀 있던 팔을 빼냈다. 선미가 민망한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물었다.

“그래서 이따 어쩔 거야? 저녁 같이 먹을 거지?”

“아니.”

“왜? 같이 먹자. 1학년들 거의 다 오는데.”

“난 패스. 집에 가서 좀 잘래. 숙취가 안 가셔서.”

“뭐야, 치사해. 너무해.”

“응. 난 치사하고 너무하지.”

재경이 적당히 대꾸하며 앞쪽 자리로 걸어갔고, 선미가 그 뒤를 따라가 재경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나루는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손에 턱을 괸 자세로, 그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청춘, 참 좋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 * *

교수가 강의 계획을 설명하는 동안, 나루는 꾸벅꾸벅 졸았다.

이래 봬도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KOB(미래 생명 연구소)의 수석 연구원이었다. 대학교 1학년의 수업이 흥미로울 리가 없었다.

밖은 춥지만 닫힌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따사로워서, 자꾸만 잠이 쏟아졌다.

침대에서는 도통 잠이 들지 않는데, 이런 불편한 자세로 잠이 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얼마나 졸았을까.

누군가 옆에 앉는 기척에 잠에서 깨어났다.

“침.”

옆자리에 앉는 지후가 나루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읍―

나루는 침을 삼키고, 입가에 흐른 침을 손등으로 닦았다.

지후는 느긋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피식 웃더니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주 짧은 미소였지만, 나루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부는 듯한 그의 미소를, 나루는 가슴 깊이 사랑했다.

알고 지낸 기간 12년, 사귄 기간 9년.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단 한 순간도 그의 미소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만 좀 봐.”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을 때에야, 나루는 그를 너무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담스럽다.”

그의 음성에 짜증이 배어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 그를 사랑한 나루는 알 수 있었다.

덜컥―

심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짜증이라니. 그 민지후가?

지후를 알고 지낸 12년, 지후가 짜증을 내는 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런데 되돌아온 지금, 알게 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지후가 내게 짜증을 냈다.

‘대체 왜?’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내 어떤 부분이 지후를 짜증나게 한 거지? 설마…… 내가 계속 쳐다봐서? 하지만 잠깐이잖아. 한 시간 내내 쳐다본 것도 아니고. 아니면…… 눈치챘나? 내 마음을?’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지후는 여자의 마음에 둔감한 편이다.

지후가 나를 짜증나는 여자라고 인식했다.

이건 기뻐해야 할 일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걸까?

욱신― 욱신― 욱신―

숨을 쉬기 힘들 만큼 가슴이 아팠다.

큰일이다.

나루는 고개를 숙였다.

이거 정말 큰일이다.

고작해야 작은 짜증 한 번으로 이런 아픔이 느껴지다니.

이래서야 지후가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대성통곡을 하다못해 한강 다리를 찾아갈지도 모르겠다.

나루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괜찮아. 예상했던 일이잖아. 원했던 일이잖아.’

하지만 그 일을 실제로 경험하는 건, 상상만 할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훨씬 더 무게감이 있고, 훨씬 더 날카롭고, 훨씬 더 차갑고, 훨씬 더 아프다.

“부담스럽게 해서 미안.”

간신히 내뱉은 사과에, 지후가 대답했다.

“그래.”

심장에 칼이 박혔다.

* * *

‘수업 듣기 싫다. 어차피 일주일은 안 나와도 상관없는데, 그냥 집에 갈까?’

다음 강의실로 이동하던 중에, 나루는 고민했다.

저 앞에, 재경과 지후가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둘 다 키가 커서 눈에 띄었다.

‘지후 키가 작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이렇게 걸어갈 때, 그 뒷모습이 똑똑히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

OT를 가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아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걸어가야 했다.

혼자인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오히려 혼자인 게 좋았다. 누군가를 상대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한때는 친했던 내 친구들이 나를 낯설게 여기는 건 참으로 미묘한 기분을 자아냈다.

‘그래, 집에 가자. 일단 이번 주는 누워서 생각이라는 걸 좀 해 보자.’

그렇게 결심할 때, 재경과 눈이 마주쳤다.

뒤를 돌아본 재경이 싱긋 웃었다.

“나루, 거기서 뭐해? 얼른 와.”

그 말과 동시에 복도를 걷던 학생들이 동시에 나루를 돌아봤다.

‘하아. 저 인간은 왜 이리도 눈에 띄는 짓을 좋아할까. 자기가 눈에 띄는 인물이라는 자각이 없나?’

그러고 보면, 재경은 예전에도 그랬다.

왕자 같은 화려한 생김새 때문에 어디를 가도 주목을 받는데, 정작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어쩌면 주목 받는 걸 즐겼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자기가 내뱉은 한마디에 모두가 신경 쓰는 걸 한껏 즐기고 있겠지.

‘아무튼 저건 진짜 못됐어.’

라고 생각하며, 나루는 말했다.

“피곤해. 먼저 가.”

“뭘 피곤해. 바로 옆 건물인데.”

재경이 멈춰서 나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후가 재경에게 뭐라고 말하더니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제야 나루는 걸음을 뗄 수 있었다.

“재경아. 진지하게 말하는데, 나 좀 너무 신경 쓰지 말아 줄래?”

“왜? 부담스러워?”

응, 이라고 하려다가 멈춘 이유는, 불과 한 시간 전에 그런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얼마나 아픈 말인지 알기에, 나루는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꿀꺽 삼켰다.

“그런 건 아니고. 나, 눈에 띄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넌 너무 눈에 띄잖아.”

“아, 잘생겨서?”

그래, 이런 놈이지.

“응, 잘생겨서.”

재경이 해사하게 웃었다.

재경이 이런 미소를 지으면 이길 수가 없다. 아무리 화가 나도 깨끗이 잊게 만들 만큼 매력적이니까.

“기분 좋은데.”

“허구한 날 듣는 말이면서 뭘 새삼스럽게. 아무튼 난 피곤해. 집에 가야겠어.”

“뭐야, 첫 수업부터 째게?”

“어차피 첫 주는 출석 체크 안 하니까.”

“아, 그래?”

재경은 전혀 몰랐나 보다.

그래, 신입생들은 잘 모르지. 수강 신청 변경 기간이라는 게 있다는 걸.

1학년 1학기의 수업 시간표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2학기가 되어서야 수강 신청을 하고 변경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선배들과 친한 학생들이야 미리 알고 있겠지만, 재경은 의외로 선배들과 자주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집에 가서 좀 자야겠어.”

“데려다줄까?”

“수업이나 들으러 가.”

“째도 된다며?”

“성재경.”

나직하게 불렀더니 재경이 씩 웃으며 두 손을 슬쩍 들었다.

“그래, 알겠어. 귀찮게 안 할게.”

“아니, 귀찮다는 게 아니라.”

“응, 알아. 내가 너무 친한 척했다. 가서 쉬어. 혹시 혼자 밥 먹기 싫으면 연락하고.”

재경이 손으로 전화기를 귀에 대는 시늉을 했다.

“알겠어, 연락할게.”

재경까지 밀어내야 할 이유는 없기에, 나루는 가볍게 대답하고는 돌아섰다.

걸어가는 내내 시선이 느껴졌다.

재경이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럴 이유가 없기에 자의식 과잉이라고 생각하고는 돌아보지 않았다.

* * *

“나, 차인 것 같아.”

재경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후는 말없이 노트를 펼쳤다.

“나 차인 것 같다니까?”

“수업 중이다, 성재경.”

“그냥 강의 계획서잖아.”

“난 원래 강의 계획을 꼼꼼히 체크해.”

“그래, 넌 성실한 놈이지. 난 빈둥거리고 질척대는 남자고.”

이대로 놔두면 재경의 자기 비하가 끝없이 이어지리라는 것을 알기에, 지후가 한숨을 쉬며 재경을 돌아봤다.

“무슨 일인데?”

“나루가 집에 간대서 데려다준다고 했더니 싫대.”

“……싫을 수 있지.”

“귀찮아하는 눈치였어.”

“넌 귀찮은 녀석이니까. 우선 그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

“나 농담하는 거 아냐.”

“나도 농담하는 거 아냐.”

친구의 진지하고 신중한 눈동자를 빤히 응시하던 재경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 난 귀찮은 놈이지.”

“응.”

“넌 친구가 괴로워하는데 위로도 안 해 주냐?”

“차인 것처럼 보이진 않으니까. 자연스럽게 하라고 했지, 스토커 흉내를 내라고 하진 않았어. 좀 더 여유를 가져 봐.”

“여유…….”

“같은 대학, 같은 과야. 질릴 정도로 만나게 될 텐데, 뭐가 그렇게 급하냐?”

“그러게. 난 뭐가 이리 급한 걸까?”

나루를 생각하면 여유가 사라졌다.

나루는 예쁘니까 다른 누군가가 채어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겼다.

한시라도 빨리 친해져서, 나라는 인간을 나루에게 각인시키고 싶었다.

“지후야.”

“왜?”

“네가 여자라면, 나한테 반했을 것 같아?”

재경의 한숨 섞인 질문에, 지후는 재경을 빤히 응시하다가 말했다.

“적당히 좀 해.”

* * *

되돌아보면 참으로 바쁜 삶이었다.

‘열심히’라는 형용사만큼 나루를 표현하기 좋은 단어는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후로도 나루는 쉴 새 없이 달렸다.

공부를 하고, 일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사랑을 하고.

혼자서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생각만 하는, 그런 사치스러운 시간을 보내 본 적이 없었다.

과거로 되돌아온 지금.

나루는 처음으로 그러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열심히’ 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수업은 아는 내용이고, 친구들과의 관계는 어떻게든 흘러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열심히 하지 않아도 시험은 잘 볼 수 있을 것이고, 모든 술자리에 참여하지 않아도 내 곁에 있어 줄 사람은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자유로운 시간이 버겁게 느껴질 만큼 많았다.

처음에는 평소처럼 ‘주제’를 가지고 생각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행동해야 할지.

그러나 어느 순간 그조차도 관두고,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흐르고 흐른 생각의 종착지는 언제나 민지후였다.

민지후.

그랬다.

나의 삶은 민지후와 만나며 시작되었고, 그를 잃으며 끝났다.

과거의 모든 기억과 추억이 시작하는 지점은 언제나 ‘민지후’였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와 처음 손을 잡았을 때, 그의 미소를 보았을 때, 그와 입맞춤을 했을 때, 그와 함께 거리를 걸을 때…….

그리고 기억의 마지막 또한 민지후였다.

퍼져 가는 붉은 피, 눌려오는 그의 무게, 그의 마지막 말과 숨결, 그리고 빛을 잃은 눈동자.

그렇다면 나는 지금 내 삶의 시작지에 와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민지후를 나의 시작점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내 삶으로, 내 인생으로, 내 추억과 기억으로 삼지 않기 위해.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 기회를 준 것이 신인지, 악마인지, 그도 아닌 또 다른 존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모든 추억과 기억을 나 혼자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사무쳐서, 그것이 몹시도 고독해서 자꾸만 눈물이 흘렀을 뿐이다.

‘나는 내가 강한 사람인 줄 알았어. 하지만 아니었나 봐. 나는 참 약하고 외로움이 많은 사람이었나 봐. 그걸 모르고 살았던 건 아마도 네 덕분이겠지, 지후야. 네가 있어서 나는 내가 약한 줄도, 외로움이 많은 줄도 모르고 씩씩하게 살았던 거겠지.’

항상 그가 옆에 있었다.

외로움을 느끼지 못할 만큼, 나약함을 알지 못할 만큼, 그는 항상 곁에 있어 주었다.

지쳤을 때엔 손을 잡아주고, 힘들 때엔 어깨를 안아주기에, 몰랐다.

이토록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토록 마음이 물렁한 사람이라는 것을.

문득 고개를 돌리니, 창 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루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다가갔다.

“눈이 오는구나. 그래, 맞아. 신입생 때, 눈이 왔었어. 3월에도 눈이 오는구나, 그런 이야기들을 했던 것 같아.”

때늦은 눈이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내 마음도 하얗게 눈이 덮여,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다. 사랑도, 추억도, 아픔도, 그리움도.

전부 사라져 깨끗하게 빈 도화지처럼 하얗게 변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 시간이 고독하지 않을 텐데. 이토록 사무치지 않을 텐데.

집 안에 틀어박힌 지 벌써 나흘이 지났다. 나흘간 밥도 먹지 않고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어쩌면 배고프고 햇빛을 못 받아서 더 우울한 걸지도 모르겠다.

눈도 오는 김에 좀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회색 더플코트를 입고 밖으로 나왔다.

‘주말이니까 학교에 사람 별로 없겠지.’

가는 길에 있는 빵집에 들러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하나 사 들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교정에는 사람이 아주 없진 않지만 고즈넉했다.

사락사락 내리는 눈을 맞으며 노천극장에 들어섰다. 눈이 오고 추워서 그런지, 노천극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추워서 곱은 손으로 샌드위치 포장지를 벗겼다. 오물오물 먹으며 노천극장의 빈 무대 위를 응시했다.

이제 날씨가 좀 좋아지면, 저 무대 위에서 연습을 하는 동아리들이 생길 것이다.

때로는 응원단, 때로는 댄스 동아리, 때로는 태권도 동아리나 연극 동아리.

공강 시간이면 가끔 지후나 재경, 윤영과 함께 노천극장에 와서 동아리 연습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어깨에 내려앉는 따스한 햇볕과 나른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어제의 일처럼 떠올랐다.

장난을 치는 재경과 귀찮아하는 지후, 조용히 좀 하라고 투덜거리는 윤영의 목소리.

이렇게나 생생한 추억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슬펐다.

‘아, 뭐야. 나 또 울 것 같잖아.’

이 몸 어디에 이토록 많은 눈물이 감춰져 있었던 걸까?

눈가에 고인 눈물을 삼키기 위해 눈을 깜빡이며 코를 훌쩍거리고, 다시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나 진짜 청승맞다. 못 쓰겠네, 정말.’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손등으로 코를 쓱 문질렀을 때.

스윽―

앞으로 내밀어지는 손수건이 하나 있었다.

나루는 눈을 크게 뜨고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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