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무슨 사이야?
2017.07.24.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은 ‘우리’가 되고 말았다.
지후는 말이 없었다. 늘 그랬다. 이야기를 하는 쪽은 나루였다.
나루가 말을 하면 지후는 옅은 미소를 띠고 이야기를 들었다.
“지루하지 않아?”
라고 물으면, 그는.
“네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이는 게 귀여워.”
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텐데.
‘아니, 하면 안 되지. 절대 안 되지.’
우리는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이다. 그 끝에 죽음이 존재하니까. 나는 죽음의 비행기니까.
그럼에도 자꾸만 욕심이 생기는 건, 아직은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정리할 시간이 부족했으니까.
좀 더 시간이 흐르면, 더 많은 세월이 지나가면 이 마음도 단단해질 것이다.
그를 보아도, 그의 음성을 들어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곧아질 것이다.
너는 좋겠다, 지후야. 아직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함께 있는 이 순간, 심장이 에는 아픔을 느끼지 않아서.
나는, 지후야.
너와 함께 걷는 지금, 날카로운 칼이 심장을 잘게 저미는 것 같아. 그만큼 아파.
그리고 무서워.
내가 견디지 못하고 네게 내 사랑을 드러낼까 봐. 나도 모르는 새에 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까 봐.
“재경이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자고 있어?”
“응.”
“둘은 원래 친구 사이였던 거야?”
알고 있지만 물었다.
“응.”
“언제부터?”
“초등학교 때부터.”
“우와, 되게 오래된 사이구나.”
“응. 좋은 녀석이야.”
“응, 좋은 녀석인 것 같더라. 너도 그렇고.”
“글쎄. 난 별로 좋은 녀석이 아니야.”
“하지만 오지랖이 넓잖아.”
“그런가?”
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다시 대화가 끊겼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지후가 날 사랑하지 않을 만한 발언을 할 수 있을까?
혹시라도 그의 가슴을 설레게 할까 봐, 말을 고르고 고르느라 평범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번화한 거리까지 나오게 되었다.
몇 년 후에 사라질 가게들이 즐비한 그 거리를, 나루는 신기한 기분으로 돌아봤다.
고작 12년 전으로 돌아왔을 뿐인데, 무척이나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와 함께 이 거리를 걸었던 나날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저기에 있는 저 가게는 저렴하고 맛있어서 자주 갔었고, 저기에 있는 저 카페는 케이크가 무료로 제공되었다.
지후는 단 걸 싫어했기 때문에, 그와 함께 저 카페에 가면 지후 몫의 케이크는 늘 나루가 골랐다.
케이크 두 개를 단숨에 먹어 치우는 나루를, 지후는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곤 했었다.
그와 함께한, 그러나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추억이 이 거리에 묻어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추억이 물보라처럼 밀려와 나루를 적셨다.
참으로 사랑스럽고 풋풋한 추억의 향기를, 나 혼자만 알고 있다는 것이 슬펐다.
만약 지금 평범한 상황이었더라면, 그의 손을 잡고 걸어가며 말했을 것이다.
지후야, 저 가게 기억나? 우리 같이 가서 매운 거 시켰다가 죽을 뻔했잖아.
저 가게는 기억나? 저기서 네가 인형을 뽑아 줬잖아.
저기는, 저기는, 저기는.
나루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여기는.
대학교 정문 건너편에 있는 교회로 들어가는 골목. 그 조용하고 고즈넉한 골목에서, 우리는 첫 키스를 했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이것이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러운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심장은 거세게 뛰었고, 머리는 어질어질했었다.
입술을 지그시 눌러오던 그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과 어깨를 꽉 잡은 그의 손을 기억한다.
그리고 키스를 하는 내내 숨을 쉬지 못했던 내 모습 또한 기억한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내 첫사랑, 내 첫 키스의 상대가 바로 옆에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내색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다.
조금만 손을 움직이면 닿을 거리에, 그의 커다란 손이 있는데 잡을 수가 없었다.
팔짱을 끼고 싶은데, 안기고 싶은데, 그래서는 안 됐다.
차라리 멀리 떨어져 있으면 좋을 텐데. 아주 안 보이는 곳에 있으면 이런 미련 따위, 조금씩 조금씩 시간과 함께 흩어질 텐데.
‘아, 싫다. 나 언제부터 이렇게 우울했니? 정신 차려. 두 번째 기회를 얻었잖아. 지후를 살릴 기회가 생긴 거잖아. 이건 아주 기쁘고 행복한 일이야. 누가 이런 일을 경험하겠어.’
나루는 마음을 갈무리하고 돌아섰다.
“그만 돌아갈래.”
“그래.”
자취방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걷는 내내, 그는 반걸음 뒤에서 걸었다. 다행이었다. 만약 바로 옆에서 걸었더라면, 그 손을 잡고 싶어졌을 것이다.
너무나도 사랑하는 그의 커다란 손.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라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손을 꽉 잡았을지도 모른다.
조용하고 어두운 계단을 올라와 나루의 집 앞에서 멈췄다. 열쇠로 문을 여는 나루에게, 그가 물었다.
“이제 잘 수 있겠어?”
열쇠를 열던 손이 멈췄다.
나루는 긴장한 눈으로 지후를 돌아봤다.
“응?”
“잠 안 와서 산책했던 거 아냐?”
“아아, 맞아.”
깜짝 놀랐다.
그가 나의 불면증에 대해 알고 있는 줄 알고.
“이제 잘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잘 자라.”
“너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자마자 문고리를 잡은 채로 주저앉았다.
아아.
울고 싶다.
* * *
“어떡하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씻고 나갈 준비를 한 재경이, 거울을 노려보며 물었다.
“뭘?”
방금 전 일어난 지후가 양치질을 하며 물었다.
“오늘 내 모습이 멋지지 않아.”
“…….”
“어떡하지? 다시 씻을까?”
“적당히 해라.”
“하지만! 멋있어 보이고 싶어.”
“흐음.”
지후가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계속 양치질을 했다. 그 옆에서 거울을 보며 머리를 스타일링 하던 재경이 또다시 물었다.
“지후야. 어떻게 할까?”
“뭘? 너 못생긴 걸?”
“아니, 아니. 난 못생기지 않았어.”
“방금 전에 못생겼다며.”
“아니, 그저 멋지지 않다고 했을 뿐이야. 못생기진 않았지.”
“그래, 그래.”
“어떡할까, 지후야.”
“못생기지 않았으면 됐지.”
“아니, 그거 말고. 오늘, 그러니까 지금.”
재경이 거울을 통해 지후를 응시했다.
재경의 두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나루한테 같이 수업 들으러 가자고 해도 될까?”
지후의 표정이 어이없다는 듯 변했다.
오랜 친구의 이 반응을, 재경은 이해할 수 있었다. 재경 역시 자신의 이런 모습이 이해되지 않고 바보처럼 느껴지니까.
“그래, 별일 아니지. 옆집 사는 같은 과 친구한테 같이 수업 들으러 가자고 하는 거, 정말 자연스러운 일이야. 나도 알아. 아는데. 이거 정말 자연스러운 거 맞냐, 지후야? 나다운 거야? 으아.”
재경이 세면대를 두 손으로 붙잡은 채 주저앉았다.
“어쩌지, 지후야. 나 진짜로 사랑에 빠졌나 봐.”
“그래. 그렇게 보인다.”
“머릿속이 헝클어진 기분이야. 뭘 하는 게 자연스러운지도 모르겠어. 어제까지 나루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던 게 이상해.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어.”
자각을 하지 못했던 어제까지는 편하게 대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녀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지금, 나루만 생각하면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내가 하는 행동이 도무지 나의 행동인 것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낯선 누군가가 내 몸뚱이를 멋대로 이리저리 흔들어 대는 기분이었다.
“원래 이런 거냐? 응? 지후야. 원래 이렇게 갑작스럽게 사랑에 빠지는 거야?”
재경이 쭈그리고 앉은 채로 지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글쎄다.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래, 넌 무심하고 냉정한 녀석이지.”
“글쎄. 그건 오히려 너 아닌가.”
“난 다정하잖아.”
“다정한 척하는 거지. 누구보다도 냉정하잖아. 웃으면서 칼을 꽂을 수 있는 녀석이야, 넌.”
“이래서 오랜 친구는 옆에 두는 게 아닌가 봐. 날 너무 잘 알아.”
“너도 슬슬 나에게서 독립할 때가 됐지.”
“그건 싫어.”
재경이 지후의 긴 다리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갑작스럽게 당겨지는 힘에 지후는 비틀거렸지만, 간신히 버티고 서서 재경의 머리를 꾹 눌렀다.
“위험하잖아, 인마.”
“너랑 떨어지는 건 싫어, 지후. 네가 없으면 안 돼.”
“난 네 엄마 아니다.”
“우리 엄마랑 떨어져 살 땐, 네가 내 엄마야.”
“그거 참 슬프군. 이 나이에 동갑의 아들이 생기다니.”
재경은 지후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무척이나 좋았다.
남들이 볼 때는 냉정하고 무심할 것 같은 이 거대한 친구는, 사실 누구보다도 상냥한 사람이었다.
물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 한해서.
지후의 ‘좋아하는 사람’의 범주에 자신이 끼어 있다는 것을, 재경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지후 또한 재경의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넌 오늘도 멋져, 성재경.”
지후가 재경의 머리를 꾹 누른 채로 말했다.
“그리고 아침에 같이 학교에 가자고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얼른 준비하고 나가서 같이 가자고 해.”
“넌?”
“나도 눈치라는 게 있어.”
“싫어. 너도 함께 가. 아니면 싫어.”
재경이 지후의 다리에 얼굴을 비비며 외쳤다.
말 안 듣는 5살 아이처럼 떼를 쓰는 재경의 모습에, 지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노래 모르냐.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아……!”
“나한테 뺏기는 수가 있어, 성재경.”
재경이 고개를 들어 강아지 같은 눈으로 지후를 올려다봤다.
“뺏을 거야?”
지후가 씩 웃었다.
“그럴 리가.”
“그럼 같이 가. 여자 때문에 친구를 버리긴 싫어.”
“됐어. 그런 생각 안 해. 그리고 알잖아. 나, 혼자 다니는 거 좋아하는 거.”
“그야 그렇지만.”
“나에 대한 너의 집착을 연나루가 조금이라도 가져가 줘서 감사하는 중이다. 그러니까 제발 좀 일어나서.”
지후가 허리를 굽히더니, 재경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단숨에 일으켜 세웠다.
“옷 갈아입고 나가.”
“네, 엄마.”
* * *
나루가 문을 열었을 때, 복도에는 재경이 서 있었다.
문을 두드리려던 자세 그대로 멈춘 재경의 모습에, 나루는 눈을 크게 떴다.
“재경아?”
“아아, 나루야. 안녕?”
재경이 올리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응. 안녕해. 너도 안녕하지?”
“응, 그렇지. 하하하.”
재경이 어색하게 웃었다.
얘가 왜 이러지?
“어, 그러니까. 어차피 같은 수업이잖아. 같이 가자.”
“응, 그래.”
꺾어 신고 있던 운동화를 똑바로 신으며 집 밖으로 나왔다. 열쇠로 문을 잠그는 동안, 재경은 뒤에 말없이 서 있었다.
재경과 함께 걸어 나가며, 나루의 눈동자는 자연스럽게 지후를 찾아 헤맸다.
매일 같이 등교를 할 텐데, 지후가 보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혹시 어젯밤에 너무 추워서 감기라도 걸린 걸까?
“지후는?”
별일 아니라는 척 물었다.
“먼저 갔어.”
“둘이 같은 방 쓰는 거 아냐?”
“응, 같은 방 쓰지.”
“그런데 왜 같이 안 가고?”
“그러게. 지후가 좀 급한 일이 있었나? 왜? 지후 보고 싶어?”
“응? 아니, 내가 걔를 왜 보고 싶어 해? 하하하.”
어색하게 웃는 나루를, 재경이 빤히 응시했다.
어째서인지 그 시선을 견디기가 힘들어서, 나루는 재경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으아, 춥다. 언제쯤 따뜻해질까?”
“그러게.”
재경도 나루에게서 시선을 떼고 정면을 응시했다.
“보통 3월 말은 돼야 따뜻해지지 않나?”
“얼른 따뜻해지면 좋겠다. 우리 대학에 벚나무 많던데. 꽃 피면 엄청 예쁠 거야.”
“우와, 연나루. 나무만 보고도 무슨 나무인지 알아맞힐 수 있어?”
“전부는 아니지만, 벚나무는 알아보지. 봄에 자주 보러 가잖아.”
“나는 매번 봐도 모르겠더라. 다 똑같은 나무로 보여.”
“소나무 정도는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역시 재경과 함께 걷는 시간은 편하다.
10분 거리의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교정으로 들어가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나무들 아래를 걸어, 강의실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강의실이 가까워질수록 아는 얼굴들이 하나둘 눈에 띄었다.
어제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재경과 나루를 보고는 서로 소곤소곤 귓속말을 나누었다.
아마도 저 둘이 무슨 사이인지 짐작하는 것이리라.
이런 소문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명하면 해명할수록 더 무성해진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구태여 나설 필요가 없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들 진실을 알게 될 테니까.
먼저 갔다던 지후는 강의실 안에도 보이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그를 찾아 더듬는 시선을 깨닫고, 나루는 쓴웃음을 지었다.
“재경아.”
선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선미가 자연스럽게 재경의 팔짱을 끼었다.
“어제 너무 일찍 갔더라. 다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아아. 속이 안 좋아서. 술을 너무 마셨나 봐.”
“뭐야, 너 술 잘 마시잖아. OT 때는 엄청 마셨으면서.”
“그때보다는 늙었으니까.”
“뭐래. 아쉽다. 이따 저녁 때 같이 저녁 먹자. 동기들끼리 모이기로 했어.”
그 말에 재경이 나루를 돌아봤다.
“나루, 같이 갈래?”
그제야 나루의 존재를 알았다는 듯 선미가 나루를 향해 싱긋 웃었다.
“나루, 거기 있었어? 몰랐어.”
몰랐긴. 아주 잘 알았으면서.
재경의 팔짱을 보란 듯이 끼고 우쭐해하는 선미의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어리진 않았다.
그리고 그걸 구태여 지적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응, 여기 있었어. 재경이랑 요 앞에서 마주쳤거든.”
“아, 그래? 같이 온 줄 알았는데. 같은 건물 산다며?”
“같은 건물 산다고 매번 시간 맞춰 올 수는 없으니까.”
라고 대답한 건, 재경이었다.
“아, 그래? 어제 그 일 때문에 둘 사이에 뭔가 있는 줄 알았는데. 너네 나가고 나서 난리였어. 지민 오빠는 저 새끼 잡아 죽일 거라고 날뛰지, 지후는 그거 말리느라 애쓰지, 여자들은 재경이랑 나루랑 뭔 사이냐고 수군거리지.”
선미는 마치 자신은 그 여자들에 끼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수습은 역시 지후가 했구나. 고생했겠다.’
셋이 놀다가 문제가 생기면, 수습을 하는 건 언제나 지후였다. 시간을 되돌아와도 마찬가지라는 게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너네, 정말 아무 사이도 아냐?”
선미가 확인 사살을 하듯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