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마주치는 시선
2017.07.17.
노기 띤 표정으로 노려보는 나루를 내려다보며, 재경은 싱긋 웃었다.
“왜 그렇게 봐?”
“이런 식으로 데리고 나오는 게 어디 있어?”
“여기 있지.”
“말장난하자는 거 아냐. 첫 수업이잖아. 제대로 듣고 싶었어.”
“그런 거 치고는 책상만 노려보고 있던데.”
“난 원래 사람 얼굴을 똑바로 못 봐.”
“하지만 지금은 잘 보고 있잖아.”
“네가 사람 같지 않으니까!”
“이야. 그건 또 신선한 평가인데.”
“성재경, 넌 진짜…….”
거기까지 말한 나루가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일까.
재경은 나루가 자신을 대할 때에 마치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인 것처럼 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나 싶었지만, 이렇게 눈에 띄는 여자를 만났던 기억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눈에 띄는 여자.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나루는 그런 여자였다.
며칠 전 처음 봤을 때부터 내버려 둘 수 없는 여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중학생처럼 보이는 앳된 얼굴인데, 눈빛은 묘하게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의미 모를 이상한 행동을 하는데도, 이상하게 나보다 누나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재경은 나루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봤다.
희고 작은 얼굴, 둥그스름한 이마와 끝이 살짝 내려간 일자 눈썹, 속쌍꺼풀이 있는 고양이 같은 눈과 끝이 살짝 올라간 오뚝한 코, 그리고 붉은 입술.
‘얼굴이 완전 내 취향이야.’
잘난 얼굴 덕분에 주변에는 늘 여자가 많았다.
그러나 ‘내 취향’이라는 생각이 드는 여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며칠 전 자취방 복도에서 나루의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
‘우와, 내 취향!’
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상한 패션이나 추운 날씨의 슬리퍼, 감고서 말리지 않은 머리나 별난 행동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얼굴이 완전히 내 취향이니까.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게 당연하지. 이런 얼굴을 또 어디서 만나겠어?’
“에이, 어딜 다시 들어가려고 해.”
나루가 휙 돌아서서 강의실로 돌아가려 하기에, 황급히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야, 성재경. 너 원래 이렇게 남의 몸 막 만지니?”
나루가 까칠하게 물었지만, 재경은 그게 싫지 않았다.
경계심 많은 새끼 고양이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아니. 과 수석 한정.”
“그 빌어먹을 과 수석 타령 좀 그만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히 몇 개 틀리는 건데.”
“우와, 역시 능력자는 생각하는 게 다르구먼. 간신히 추가 합격한 열등생은 웁니다.”
“추가 합격은 무슨. 한 번에 붙었으면서.”
또다.
나루는 이번에도 한 번에 붙은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지레짐작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어떻게 알았어?”
“어?”
“내가 한 번에 붙은 거 어떻게 알았어?”
“아, 그야…….”
나루는 아차 싶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진짜로 추가 합격이라면 굳이 그런 말은 안 할 것 같아서.”
그럴듯한 변명이긴 하지만, 어째서인지 믿어지지 않았다.
“아무튼 난 다시 수업 들어갈 거야. 너도 여자한테 치근거리는 건 그만두고 수업 좀 들어.”
“난 여자에게 좀 더 수월하게 치근거리기 위해 대학을 온 거야.”
“그거 참 당당하기도 하네. 네 당찬 포부는 알겠는데, 네 욕심 때문에 나까지 방해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아?”
“물론 네가 내 타입이고 못 견디게 추근거리고 싶은 여자이기는 한데, 지금 데리고 나온 건 정말로 걱정돼서야. 너, 오늘 아침에도 좀 이상했잖아.”
“그건 잠이 덜 깨서.”
“아파 보여, 너.”
재경이 나루의 볼 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걱정돼.”
진심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걱정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이러다가 나루가 산산이 흩어질 것만 같아 불안했다.
‘산산이 흩어져? 이건 또 뭔 표현력이래?’
내가 한 생각에 내가 어이가 없어졌다.
재경은 놀란 표정의 나루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이야. 왜 그러지? 유독 마른편인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불안해 보이지? 픽 쓰러지는 게 아니라…… 뭐랄까. 사라질 것 같아. 그래, 맞아. 그거야. 갑자기 사라질 것 같아, 얘는.’
볼에 닿은 재경의 손은 따뜻했다.
그래서 나루는 그 손을 꽉 잡고, 좀 더 재경의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내 친구. 밤새 통화를 해도 자꾸만 할 말이 생겼던, 나의 가장 친한 친구.
‘말해 버릴까? 모든 걸 다 말해 버릴까?’
전부 털어놓고 의논하고 싶었다.
있잖아, 재경아. 사실 나 미래에서 왔어. 나 32살까지 살다가, 어째서인지 다시 되돌아오게 됐어.
나 있지. 지후와 사랑을 했어. 아주 깊고 짙은 사랑이었어. 그런데 지후가 날 지키려다가 죽었어.
그래서 난 이제부터 지후를 사랑해서는 안 돼. 지후가 날 사랑하게 만들어서는 안 돼.
난 죽음의 비행기거든.
넌 들은 거 없니? 지후가 날 사랑한 이유, 사랑한 시기. 그런 것들에 대해 들은 거 없니?
수많은 말들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은 말들을 꿀꺽 삼켰다.
‘누가 믿겠어, 이런 걸. 미친 여자 취급이나 하겠지.’
당연한 일이다. 나 같아도 절대로 믿지 못하리라. 친해지기 전이라면 더더욱.
“재경아.”
나루는 살짝 뒷걸음질을 쳐서 재경의 손을 떨어뜨렸다.
“난 그냥 새로운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돼서 조금 혼란스러운 거야. 내가 원래 좀 낯가림도 심하고, 겁도 많거든.”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재경을 납득시켜야 했다.
“신경 써 주는 건 정말 고마운데, 너무 이렇게 행동하면 나 좀 부담스러워. 사람들 눈에 띄는 것도 싫고. 만약 도움이 필요하면 말할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리고 딱 봐도 알겠지만, 나 건강 체질이야.”
재경이 이 정도의 거절로 서운해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나루는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재경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래, 그럼. 앞으로 주의할게, 수석.”
이라고 말하며 씩 웃었다.
전이나 지금이나 참으로 근사한 미소였다.
* * *
생명공학과 신입생 환영회는, 학교 근처의 술집을 빌려서 진행되었다.
신입생뿐 아니라 선배들까지 참가하기에, 좁지 않은 가게인데도 꽉 찼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은 나루는 물을 홀짝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신입생의 출석률은 70프로 정도. 선배들은 2학년 선배들이 가장 많았다.
긴장한 신입생들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하긴. 나도 옛날엔 긴장했었지. 선배들이 왠지 엄청 높은 사람들처럼 보여서.’
지금 보면 다들 어린애 같은데, 그때는 선배들이 왜 그리도 어렵고 무서웠는지 모르겠다.
그래 봐야 1년 일찍 태어난, 똑같은 어린애일 뿐인데.
자리를 잡느라 한동안 시끌벅적했다.
나루의 오른쪽은 선미였고, 왼쪽 자리에는 가방이 놓여 있었다.
‘누가 내 옆에 앉았었더라.’
재경과 지후는 맞은편 오른쪽 끝에 앉았다.
‘그래, 원래 쟤들이랑 떨어져서 앉았었어. 이때까지만 해도 계속 붙어 다니진 않았으니까.’
미생물학 실험을 위해 강물을 뜨러 갔던 시기를 기점으로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다들 자리를 잡았을 때에도 나루의 왼쪽은 비어 있었다.
하지만 누가 오기는 오는지,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은 없었다.
2학년 과 대표가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했다. 각자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나루는 몇 번이나 지후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지후를 보는 건 당연하다. 나는 지후를 사랑하니까.
그러나 지후가 이쪽을 볼 이유는 없었다. 지후는 아직 날 사랑하지 않을 때니까.
그런데 왜 자꾸 눈이 마주치는 걸까?
‘원래 이렇게 자주 눈이 마주쳤었나? 생각이 잘 안 나.’
1, 2년 전의 일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10년 전의 일이 생각날 리 만무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기를 열심히 쓸걸. 아, 소용없구나. 일기장을 가지고 온 게 아니니까.’
“아까 재경이랑 뭐했어?”
선미가 나루의 술잔을 채워 주며 물었다.
아직은 목소리에 독기가 묻어 있지 않았다.
아니, 독기가 묻어 있었더라도 선미가 말을 걸어 준 걸 감사하게 여겼을 것이다.
지후를 흘끔흘끔 훔쳐보는 것 말고도 할 일이 생겼으니까.
“아픈 것 같다고 걱정하더라고. 어젯밤에 잠을 설쳐서 몸이 좀 안 좋았거든.”
“진짜 친한가 보다, 너네.”
“친하긴. 같은 건물 사니까 신경 써 주는 것 같던데.”
“으으.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자취한다고 할걸.”
“자취 안 해?”
“응. 난 서울 사니까. 넌 어디서 왔어?”
“나도 서울이긴 한데…….”
“뭐야, 진짜? 서울인데 자취하는 거?”
“응. 우리 집이 원래 좀 독립을 주장하는 집이라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집 떠나기로 약속되어 있었거든.”
“아, 좋겠다. 우리 집은 엄청 엄해서 결혼 전까지는 절대로 안 된대.”
“그게 좋은 거야. 난 이제부터 생활비도 내가 벌어야 돼.”
“그건 좀 그러네. 집에서 지원을 하나도 안 해 줘?”
“응. 진짜로 급하면 해 주시겠지만, 일단은 내가 벌어야 될 거야.”
다행히도 선미와 평범한 대화가 가능했다.
어쩌면 이번 삶에서는 선미와 친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윤영이는 어디에 있지? 분명 신입생 환영회 때 왔었는데.’
나루는 윤영을 찾아 술집 안을 둘러보다가, 다른 테이블 가운데에 앉은 윤영을 발견했다.
‘윤영아.’
곱슬거리는 짧은 커트 머리가 잘 어울리는 윤영은, 선배들 사이에 앉아서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얌전한 척하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조만간 윤영이 성격을 알게 되면 다들 놀랄 거야.’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와 달리, 윤영은 성격도 말투도 괄괄했다.
앞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또 지후와 눈이 마주쳤다.
비스듬히 앉아 술잔을 잡고 있는 지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멋있었다.
넓은 어깨와 단단한 가슴, 굵은 팔과 커다란 손.
지독히도 사랑해서, 하루라도 안 보면 그립고 또 그리웠던 육체가 가까이에 있었다.
그럼에도 만질 수 없고, 안길 수 없다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었다.
만질 수 없다면, 안길 수 없다면, 원하는 만큼 보기라도 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괴로웠다.
눈이 마주치지 않은 척 시선을 돌릴 때였다.
“으아, 너무 늦었다. 벌써 시작한 거?”
왼쪽에서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에서도 튈 것 같은 그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왼쪽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할 수 있었다.
‘하지민 선배! 아, 맞다. 그 선배였지.’
“뭐야, 윤지. 네가 왜 내 옆이야? 내 양쪽 옆은 신입으로 채워 달라니까.”
지민이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누군 네 옆에 앉고 싶었는지 알아? 그래서 네 오른쪽은 신입으로 앉혀 줬잖아.”
윤지가 신경질을 냈다.
“오, 그래? 어디 보자.”
지민이 노골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루는 그쪽을 보지 않았다.
지민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여자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술을 마시면 ‘여자 좋아 에너지’가 폭발을 해서, 옆에 앉은 사람이 후배인지, 친구인지도 모르고 치근거리곤 했다.
‘아, 맞아. 그래서 예전에…….’
나루가 참다못해 지민의 머리에 맥주를 부었었다.
―그때, 멋졌어.
어느 날엔가 지후가 대학 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말을 했었다.
―대단한 여자구나, 싶더라.
‘아, 그래. 어쩌면 이 사건 때문에 나한테 반했을지도 몰라.’
다들 어려워하는 선배의 머리에 맥주를 부어 버린 당찬 여성. 그 모습에 지후가 반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오오, 예쁜데? 이름이 뭐야?”
참자.
“연나루입니다, 선배님.”
“연나루. 아, 수석?”
“네.”
“이야. 능력자네.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자, 일단 마셔.”
지민이 나루의 잔에 소주를 채우고, 나루에게 병을 내밀었다. 자기 잔에도 따르라는 뜻이었다.
나루는 순순히 지민의 잔에 술을 부어 주었다.
“술 잘 마시나?”
“이번이 처음이에요.”
32살 때는 썩 잘 마셨다. 하지만 지금 이 몸으로는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범생이었나 보네. 공부만 했어? 남자 사귄 적은 없고?”
“네, 뭐. 사귈 기회가 없었죠. 여고를 나왔거든요.”
“여고. 크흐. 그래. 여고 좋지.”
뭐가 좋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동의했다.
“네, 여고 좋죠.”
술자리가 점점 무르익어 갔다.
젠체하고 싶어 하는 선배들은 벌게진 얼굴로 대학 생활에 대해 떠들어 댔고, 몇몇 여자 선배들은 재경과 지후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오른쪽에 앉아 있던 선미는 재미없는지 다른 자리로 옮긴 지 오래였다.
나루도 자리를 옮기고 싶었지만, 지민이 자꾸 말을 거는 통에 그럴 수도 없었다.
“연애를 많이 해 봐야 돼. 대학에 다닐 때 최대한 즐겨.”
2학년밖에 안 된 주제에, 인생 다 산 사람처럼 얘기하는구나.
지민아. 넌 모르겠지만, 난 32살이란다.
“남들은 뭐, CC를 하면 안 좋네, 어쩌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연애하고 사랑하다가 헤어진 건데, 그걸 가지고 수군거리는 게 더 나쁜 거 아냐?”
술에 취하면 취할수록 지민의 목소리는 더욱 까랑까랑해졌다.
“야, 하지민. 목소리 좀 낮춰라!”
다른 선배가 핀잔을 줬지만, 지민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오, 잔 안 비웠네? 얼른 마셔. 어디서 감히 선배가 주는 술을 꺾어 마셔? 선배가 따라 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원샷해야지. 응?”
이 인간, 기억보다 더 진상이었구나.
나루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반쯤 남은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자마자 지민이 기다렸다는 듯 술을 따랐다.
“누가 먼저 취하나 내기할까?”
“아뇨, 전 제 주량을 몰라서 제가 불리할 것 같은데요.”
“아이고. 아주 똑 부러지게 말하네.”
라며, 지민이 나루의 볼을 꼬집었다.
그래, 이 시점이었다.
예전에 나루가 옆에 있던 맥주잔을 집어 지민의 머리 위에 부어 버린 것은.
하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기로 했으니까, 나루는 꾹 참았다.
“너, 보면 볼수록 진짜 예쁘다. 피부가 좋은데? 화장한 거 아니지? 생얼 맞지?”
지민이 나루의 볼을 꼬집은 채로 말했다.
“네, 선배. 일단 이 손 좀 치워 주세요.”
“왜? 아파?”
“네, 아파요.”
다행히 지민은 순순히 볼을 놔줬다. 하지만 곧바로 술잔을 집고 나루의 앞으로 내밀었다.
“자, 짠 하자.”
한 잔 더 마시면 취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눈에 띄어서는 안 되니, 나루는 술잔을 집었다.
‘미치겠네. 술에 취해서 실수하면 안 될 텐데.’
라고 생각할 때였다. 나루의 어깨 너머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나루가 쥔 술잔을 빼앗아 간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