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망했다
2017.07.10.
망했다.
나루는 싱글싱글 웃는 재경을 노려봤다.
‘이건 다 성재경 때문이야! 도대체가 이놈은 무슨 생각인 거야? 왜 추리닝에 슬리퍼를 찍찍 끌고 지각한 여자한테 치근거리는 거야? 누가 성재경 아니랄까 봐.’
“배 많이 고픈 것 같던데 그걸로 되겠어?”
재경이 나루의 식판을 보며 물었다.
“돼.”
“부족하면 말해. 지후가 자기 것 좀 덜어 줄 거야.”
“남이 먹던 건 더러워서 싫어.”
“그럼 미리 줄까?”
라고, 지후가 물었다.
아차 싶었다.
그래, 지후는 이런 인간이지.
무슨 말을 해도 화내지 않는다. 무뚝뚝해 보이지만 사실은 남을 배려한다.
정말이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다.
‘아니, 전혀. 내가 콩깍지가 씌었던 거야. 잘 찾아보면 사랑하기 싫은 구석이 어마어마하게 많을 거야.’
앞으로 지후의 단점만 찾자고 결심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됐어. 난 이거면 돼.”
나루는 숟가락으로 밥을 푹푹 퍼서 쩝쩝거리며 먹고, 손가락으로 깍두기를 집어서 입에 밀어 넣고, 손가락에 묻은 고춧가루를 쪽쪽 빨아먹었다.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보면, 정이 뚝 떨어지겠지.
그렇게 실컷 먹은 후 고개를 들어, 멍하니 이쪽을 보는 두 남자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입에 음식물을 가득 담은 채로.
‘자, 어때? 자리를 피하고 싶지? 어서 일어나. 일어나서 가 버리라고!’
하지만 두 남자는 나루의 소망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지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재경은.
“우와, 너 진짜 맛있게 먹는다.”
라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했다.
“뭐?”
“그걸로 안 되겠는데? 내 거 아직 손 안 댔으니까 더 먹어라, 야.”
재경이 자기 몫의 밥을 퍼서 나루의 식판에 옮겨 주었다. 묵묵히 지켜보던 지후도 자기 반찬을 나루에게 적선해 주었다.
망했다.
나루는 울고 싶었다.
‘이놈들은 대체 어디까지 마음이 넓은 거야?’
한숨을 푹 내쉬며, 처음처럼 가득 찬 식판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재경아. 지후야.”
같은 과의 여학생 두 명이 다가왔다.
얘네 이름이 뭐였더라.
아, 선미랑 지영이었지.
“지금 아침 먹는 거야?”
선미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물었다.
“응, 너넨?”
“난 원래 아침 안 먹어서. 지나가다가 너 보여서 잠깐 들어왔어. 그런데…… 누구야?”
지영이 눈으로 나루를 슬쩍 가리키며 물었다.
“아, 너넨 모르겠구나. 나루야, 연나루. 수석 입학.”
“아아, 얘가.”
선미와 지영이 동시에 나루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들의 입술에 번진 비웃음을 나루는 눈치챘다.
‘이래 봬도 32살까지 살다 왔다고. 20살 어린애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쯤은 다 알지.’
선미와 지영이 이쪽을 어떻게 보든 아무 상관없었다.
“다음 수업 들어갈 거지? 같이 가자.”
선미가 재경을 돌아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동행이 있어서.”
재경이 가볍게 거절했다.
“다 같이 가면 되지. 밥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릴게.”
“아니. 밥 안 먹는 사람이 옆에서 지켜보는 건 불편해서.”
늘 싱글싱글 웃는 재경은 의외의 부분에서 냉정했다.
“난 좋아해.”
라고 말한 건, 나루였다.
모두가 나루를 돌아봤고, 나루는 숟가락을 손에 쥔 채로 말했다.
“난 누가 나 밥 먹는 거 지켜보는 거 좋아해. 앉아서 지켜봐 줘.”
“…….”
모두의 얼굴에 떠오른 황당함에, 나루는 희열마저 느꼈다.
그래, 봤지? 나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라고! 조롱하면서 피하란 말이야.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지.”
재경이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두 손을 깍지 끼고, 그 위에 턱을 얹었다.
본격적으로 구경하는 자세를 취한 재경이 나루를 보며 싱긋 웃었다.
“자, 열심히 지켜볼게. 먹어.”
“……저기, 성재경.”
“응? 이렇게 봐 주는 거 좋아한다면서? 우리 과 수석이 좋아한다면, 내 끼니 정도는 포기하고 지켜봐 줘야지. 야, 지후. 뭐해? 과 수석이 지켜봐 달라잖아.”
“아아.”
지후도 숟가락을 내려놨다.
그러더니 팔꿈치를 식탁에 대고 손바닥에 턱을 괴었다.
저 자세를, 나루는 기억하고 있었다.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실 때, 지후는 저런 자세로, 귀여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 나루를 지켜보곤 했었다.
그의 얼굴을 살짝 덮는, 그의 길고 큰 손을 나루는 참으로 사랑했었다.
꿀꺽―
눈물을 삼키며 숟가락을 내려놨다.
아아, 버겁다.
더는 안 되겠어. 오늘은 여기까지만.
나루는 벌떡 일어났다.
“나한테서 신경 좀 꺼!”
버럭 외치고 휙 돌아서서 도망치듯 학생 식당을 빠져나왔다.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지켜봐 달라더니, 신경 끄라고 화를 냈으니까.
상종하기 싫은 인간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나루는 두 사람이 이 삶에 계속 얽힐 것만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덥석―
바로 지금처럼.
돌아보지 않고도 손목을 잡은 인물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 손의 크기를, 체온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신경 끄랬지?”
“집에 갈 거야?”
지후의 음성은 낮고 듣기 좋았다.
“신경 끄랬지?”
“데려다줄게. 너, 아파 보인다.”
“신경 끄랬지?”
“걸어갈까, 업어줄까?”
참지 못하고 휙 돌아섰다.
지후가 무표정하게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루는 알고 있었다. 저 무표정 안에 담긴 걱정이라는 감정을.
남들은 똑같다고 생각하는 무표정 속에서 수많은 감정을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사랑했으니까. 함께 했으니까.
“왜 자꾸 이러는 거야? 신경 끄랬잖아. 신경 끄라는 말 몰라?”
울음을 참고 신경질적으로 외치는 말에, 지후가 후우,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아픈 사람한테선 신경 못 꺼. 오지랖이 넓거든. 네가 멀쩡해지면 신경 끌게.”
망했다.
* * *
원룸 빌라를 향해 나란히 걸었다.
예전이라고 해야 하나, 시간을 돌리기 전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 예전이라고 하자.
예전에는 항상 함께 걷던 거리였다.
그 거리를 또다시 이렇게 걷게 될 줄은 몰랐다.
“난 아픈 게 아냐.”
지후는 한 번 돌봐 주기로 마음을 먹으면 무슨 짓을 해도 돌봐 주는 성격이었다. 그를 설득해야만 했다.
“난 원래 이런 성격이야. 이상한 애라고 불렸었어.”
“응.”
“신경질적이고, 밥 먹을 때도 게걸스럽고, 잘 씻지도 않고, 옷도 늘 추리닝에 삼선 슬리퍼야. 느닷없이 화내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항상 지각하고. 그래서 다들 날 싫어했어. 왕따라고들 하지.”
“응.”
“뭐, 익숙해. 아니, 오히려 혼자인 게 편해. 대학에서도 친구를 만들 생각 별로 없고, 이 더러운 성질머리를 고칠 생각도 없어. 그러니까 나한테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너도 같이 왕따 당할걸.”
“그럼 당하지, 뭐.”
지후가 가볍게 말했다.
“뭐? 야, 나 아픈 게 아니라니까?”
“왕따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야…….”
“네가 왕따를 당하지 않게 되면, 그때 신경 끌게.”
나루는 걸음을 멈췄다.
지후도 멈춰서 나루를 돌아봤다.
고개를 들어 한참 위에 있는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나루는 생각했다.
‘이 인간은 진짜 어떻게 되먹은 인간이야?’
마음이 한없이 넓은 인간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방법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이렇게까지 오지랖이 넓고, 마음이 하해와 같이 넓을 줄은 몰랐다.
‘심해. 이 정도였었나?’
결국 지후는 문 앞까지 나루를 데려다주었다.
“들어갈래.”
“응.”
“너한테 들어오라는 말은 안 할 거야.”
“알아.”
“얼른 가.”
“들어가는 거 보고.”
“너 진짜 오지랖이 장난 아니구나. 귀찮은 성격이라는 말 안 들어?”
“응, 별로.”
나루는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들어갈 거야. 가, 이제.”
“아픈 거면 병원에 가 봐.”
“안 아프다니까.”
“그럼…….”
지후가 나루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루는 습관적으로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러면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잡아 주어야 하는데, 그 손이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뒤늦게 이런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얼른 손을 떼어 냈다가 탁 마주 내리치며 말했다.
“파이팅!”
“…….”
지후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파이팅하고. 휴대폰 줘 봐.”
“내 휴대폰은 왜?”
“번호 알려 줄게.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
“뭐야, 너. 이런 식으로 여자 번호 따? 너, 나한테 관심 있니?”
도끼병에 걸린 여자는 최악이다. 그러니까 나루는 차라리 도끼병에 걸린 척하기로 했다.
“그래, 그런 거였구나? 역시 나한테 푹 빠진 거였어. 나, 좋아하니? 뭐, 내가 좀 괜찮긴 하지. 나랑 잘해 보고 싶어서 잘해 준 거였어?”
아직은 좋아하기 전이니까, 후줄근 추리닝에 삼선 슬리퍼의 여자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 게 즐겁지는 않으리라.
“응. 그런 거야. 그러니까 폰 줘 봐.”
하지만 이번에도 지후는 예상을 벗어난 행동을 했다.
얘, 진짜 안 되겠네. 이 인간을 진짜로 모르겠어.
나루는 한숨을 푹 쉬며 휴대폰을 꺼냈다.
지후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자기 번호를 저장하더니 나루에게 돌려줬다.
“아프면 연락해.”
“아프면 119에 전화하지 너한테 전화하겠어?”
“그래도 되고. 들어가.”
지후의 시선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
‘지후가 저런 성격이었나?’
아니었다고 확신한다.
지후는 여자에게 추근거리거나 필요 이상으로 친절한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차가워서 대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이런 식으로 여자를 집에 데려다주고 번호를 따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뭐가 지후를 저렇게 만든 거지? 역시…… 내가 너무 위험스러워 보였나?’
그렇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위태로운 여자.
지후는 버림받고 상처 받은 짐승을 모르는 척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래. 쟤 눈에는 내가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으로 보였을 거야. 밥을 그런 식으로 먹어 댔으니까.’
이 계획은 망했다.
동물에게 친절한 지후의 성격을 염두에 두지 못했다.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
* * *
휴대폰 메모장을 켜려다가 스마트폰이 아닌 폴더폰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도로 내려놓았다.
노트와 볼펜을 챙겨 침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강의를 받아쓰려고 산 것이 분명한 새 노트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시간을 되돌렸지만 벌어지는 일은 비슷해. 이사 온 다음 날 재경이랑 지후를 마주쳤어. 원래대로라면 입학식 때 가족끼리 식사를 하게 되지만, 그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 그런데도 결국 오늘 아침을 같이 먹게 됐어.’
예전에도 그랬다.
첫 수업을 들은 후, 함께 학생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던 기억이 났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식사를 한 후에 같이 수업을 들으러 갔었다.
‘내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큰 틀은 바뀌지 않는 건가? 결국 난 지후랑 재경이를 내 삶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야?’
솔직히 당장 느껴지는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사실은 그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없는 삶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32살, 그 일이 벌어지기까지 12년이라는 시간.
민지후와 성재경은 나루의 가족이자 삶이었다.
“아아. 진짜 어쩌지?”
의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친구들이었던 지후와 재경, 윤영이 가까이에 있지만, 지금은 그런 관계가 아니다.
불현듯 혼자 남겨진 듯한 고독감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그래, 난 혼자구나. 기분 진짜 이상하다.”
나루는 벌러덩 드러누웠다.
“진짜 앞으로 어째야 하지? 윤영이랑은 친해져도 될 것 같긴 한데…… 걔랑 언제 어떻게 친해졌더라?”
10년 전의 일이다.
친구와 언제 어떻게 친해졌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게다가 나루는 무심한 성격이었기에, 사소한 사건을 전부 기억하지는 못했다.
‘그래, 그런 걸 기억하는 건 지후였어.’
남들은 나루가 여자니까 꼼꼼하고 섬세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섬세한 쪽은 지후였다.
둘만의 추억, 기념일, 나루가 흘러가듯 내뱉은 말들까지도, 지후는 늘 기억하고 챙겨 주었다.
기억 못 해서 미안해, 라고 말하면 지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곤 했다.
―내가 기억하면 되지.
나루의 사소한 일상까지도 전부 기억해 주었던 지후는, 이제 없다.
이제부터는 내가 하나하나 떠올리고 기억해 내야만 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모든 과정에 계획을 세우고 움직여야 한다.
‘어렵다, 진짜. 차라리 시험을 보는 게 낫겠어.’
나루는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윤영이랑 친해진 건 분명 1학년 2학기 때부터야. 잘은 기억 안 나지만 영어 회화 수업 듣다가 같은 조라서 친해졌던 것 같아. 그런 거라면…… 미리 친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아무리 노력해도 큰 틀에 맞춰서 2학기는 되어야 친해지려나?’
친구가 필요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 고독감에 짓눌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후에게 기대게 될지도 모른다.
‘일단 계획을 변경해야 돼. 큰 틀이 그대로 진행된다고 한다면, 내가 미친 애인 척하는 건 의미가 없어. 오히려 돌발 상황이 생기게 될지도 몰라. 오늘처럼.’
원래대로라면 나루는 지후보다 재경과 먼저 번호를 교환하고 친해졌어야 했다.
지후는 무뚝뚝하고 낯가림이 심해서, 초반에는 나루와 대화도 잘 하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게 나을지도 몰라. 예전이랑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그에 맞게 대응할 수 있으니까.’
그러다가 중요한 순간들. 내가 그에게 사랑을 느끼고, 그가 나에게 사랑을 느끼는 그 순간들에 대비를 하고, 빠져나가면 된다.
그가 날 사랑할 기회를 원천 봉쇄해 버리면 그만이다.
“좋아! 일단 옛날처럼 평범한 대학 생활을 즐기는 쪽으로 가자. 그러고 나서 내가 너무 매력적이라 지후가 반하겠구나, 싶은 시점에 슬쩍 물러서면 되는 거야.”
그러나 나루는 답을 찾아낸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중대한 오류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나…… 지후가 언제 나한테 반했는지 들은 적이 없는데.’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