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초연은 도대체 신후의 생각을 짐작할 수 없었다.
둘의 결혼식은 아주 가까운 사람들만 불러 소규모로 진행하기로 이미 이야기가 끝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초연은 결혼식에 부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친척도 없었고, 대학 때 친구들과도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그나마 청도 마을 분들이 당연히 와 주신다고 했지만 다 해봐야 스무 명도 안 됐다.
신후의 사정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론 〈MJ 인터내셔널〉만 보면 올 사람들이 차고 넘쳤다.
민씨 집안의 오랜만의 혼사였고, 차기 회장의 혼사에 부르면야 한국 정·재계 인사 반은 올 터였다.
하지만 초연을 배려한 신후가 가족 예식으로 결정했다. 성식 역시 흔쾌히 동의했다.
해서 양쪽 오십여 명 정도가 참석하기로 한 결혼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결혼식 손님들을 위한 대접 준비는 끝난 지 오래였다.
성식이 자신이 기분 좋아 한턱 쏘는 것이라며, 예단 삼아 명품 옷과 이부자리 세트를 이미 각 하객 집에 보냈다.
하객들이 오고 갈 때 먹을 도시락과 간식까지 이미 최고급 호텔 도시락으로 맞춘 상태였다.
예식 후에 챙겨갈 답례품도 고급 전통주에 이바지 못지않은 한과 세트 등 양손 가득 들기 힘들 정도로 마련했다.
그런데 떡 이백 세트라니. 그걸 다 어쩌려고.
초연이 그러지 말라고 눈빛을 보냈지만, 신후는 그녀의 눈빛을 못 본 척 방앗간 여사장에게 말했다.
“내일 점심때까지 이백 세트 가능합니까?”
“얼마짜리로 맞춰드릴까예?”
“귀한 시간 내서 와주시는 손님들께 드릴 거니 금액은 상관하지 말고 최고급으로 해주십시오.”
“그라믄 이건 우짭니꺼? 이거이 이만 원짜리 세트인데 답례품으로는 아주 최고급이라 안 합니꺼.”
미용실 사장은 은근슬쩍 답례품보다는 선물세트에 가까운 떡 사진을 들이밀었다.
남자 옷차림이나 여자를 대하는 태도를 봐서는 돈을 아끼는 손님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걸로 하죠.”
신후가 카드를 내밀었고, 방앗간 여사장이 마지못해 결제했다.
사백만 원어치를 팔았다는 즐거움보다는 초연이 사백만 원을 거리낌 없이 긁을 수 있는 남자에게 시집간다는 사실에 속이 시끄러웠다.
그럼 뭐하나. 기껏해야 조폭이지.
“그라믄 내일 어데로 배달해드리면 됩니꺼?”
이게 웬 횡재냐는 듯, 자신의 몫도 챙겨달라며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미용실 여사장의 팔꿈치 질을 못 본 척하고 계산을 마쳤다.
“궁전 예식장으로 배달해주시면 됩니다.”
“궁전 예식장…… 이예?”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어 방앗간 여사장은 눈만 깜박였다.
하지만 곧 자신이 조폭이라고 짐작한 신후가 실은 〈MJ 인터내셔널〉의 손주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의 초연이 〈MJ 인터내셔널〉 회장의 예쁨 받는 손주 며느리였다는 사실에 방앗간 여사장의 얼굴이 이루 설명할 수 없이 일그러졌다.
***
집으로 가는 차 안, 초연은 운전하는 신후의 옆모습을 보며 피식거렸다.
“왜 웃어?”
“〈MJ 인터내셔널〉 차기 회장으로 뉴스에 오르락내리락하시는 분이 이렇게 유치한 사람이라는 거 직원들이 알면 어쩌나 싶어서요.”
일부러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놀리겠다는 심산이었다.
“당신도 공범이야.”
“내가 왜 공범이에요? 난 모르고 따라간 건데.”
초연이 발끈했다.
어느덧 차가 예전 집 앞에 도착했다.
운전석에서 내린 신후가 돌아와 그녀 쪽 문을 열고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부부는 운명 공동체니까 내 손에서 벗어날 생각하지 마. 기억 잃어도 당신 결국 찾아내는 거 알지?”
협박 같지만 실은 달콤한 고백이었다.
기억을 잃어도 또다시 당신에게 반해 당신을 찾겠노라는.
초연이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며 조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일일이 안 나서도 돼요. 나도 이제 다 잊은 일인걸요.”
유치하다고 흉을 봤지만 실은 신후의 마음을 초연은 알았다.
그녀를 조금이라도 속상하게 한 모든 사람들에게 신후는 나름의 방법으로 복수 중이었다.
자신이 다치고 욕을 먹더라도. 신후는 기꺼이 그녀를 지켜냈다.
“너는 잊어. 나는 안 잊을게. 네 가슴에 매듭 생기게 한 인간들 있다면 다 처리하고, 그 매듭 다 풀 거야.”
단단한 표정의 그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든든했다.
“풀렸어요.”
“풀렸어?”
‘응.’ 초연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어린 시절부터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찬바람이 불었다.
솔이를 낳고 이만큼 키워오면서도 늘 무언가 줄줄 새는 것 같이 허전했다.
이번 생은 이렇게 살아야 하나보다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신후를 만나고 그와 성식이 그 모든 구멍을 메꿔주었다.
구멍을 채우고, 잘 여물라고 다독여줘서 티끌 자국조차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한 번 만져볼까?”
열린 차 문과 자신의 커다란 몸 사이에 초연을 가둬둔 신후가 한 발 다가오며 손을 뻗었다.
집에서 시도 때도 없이 만져대더니 여기서도?
“꺅! 뭐 하는 짓이에요.”
“풀렸다며. 진짜 매듭이 풀렸는지 안 풀렸는지 확인해야지.”
신후의 손이 가슴께로 향했지만, 초연이 한발 빨랐다.
놀란 척 몸을 굽히다가 팔을 들어 올린 그의 옆구리 사이로 쏙 빠져나갔다.
그가 초연을 공격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만큼, 초연 역시 그를 피하는 기술을 연마했다.
두 사람의 술래잡기가 시골길 한가운데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초연과 신후는 그 시절 그때로 돌아갔다.
“장난치지 말고 앞 보고 가. 너 그러다가 넘어져.”
“그러다가 또 덮치려고요?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뒷걸음질 치며 어서 오라고 손짓하자, 신후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다가 대문으로 들어선 순간, 초연은 놀라 그대로 멈춰섰다.
“와, 그때 그대로예요.”
대문도, 집도, 지붕도. 신후가 손질했던 7년 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대로 있을 수 없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7년이면 아무리 관리한 집이라도 다시 페인트가 벗겨지고, 지붕은 태풍에 날아가 몇 장 없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모습은.
그동안 그녀 몰래 집 안을 수리하는 인부들과 몇 번이고 연락을 주고받더니.
신후가 이 집을 예전 모습으로 돌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들어가 볼래?”
신후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판이나 커튼은 새것이었지만 할머니가 쓰시던 미싱, 장롱, 대부분 가구는 그대로였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순간. 갑자기 감정이 북받쳤다. 눈물도 핑 돌았다.
“미안. 다 살리고 싶었는데 천으로 된 것들은 너무 삭아서 살릴 수가 없더군. 최대한 비슷한 원단으로 골랐는데. 속상하지?”
그녀가 우는 까닭을 오해한 신후가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다 신후 씨가 고른 거예요? 예전 거랑 똑같아요.”
“너한테는 6년 전 일이지만 나한테는 어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이니까.”
초연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 모든 시간을 기억하고 있던 자신도 힘들었지만, 그 시간을 모두 잊고 있었던 신후 역시 힘들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기억을 빨리 찾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쵸?”
그랬다면 자신과 신후가 이만큼 돌아오지도 않았을 테고, 신후가 지은에게 휘둘리지도 않았을 텐데.
“기억을 찾든 못 찾든 결국 널 찾았으니 됐어, 난.”
신후가 가만히 그녀를 당겨 안았다.
초연 역시 그의 허리에 팔을 둘러 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보며 약속했다.
같이 못 했던 시간이 아쉬운 만큼, 앞으로 남은 시간 서로 사랑하며 보내자고.
“그래도 내가 기억을 찾아 다행이다 싶은 건.”
신후가 재킷 안쪽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단순한 디자인의 반지였다.
내일 식장에서 낄 예정인 결혼반지는 아니었다.
“그때 서울 올라갈 때 내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떠올랐기 때문이야.”
신후가 얼떨떨해 있는 그녀의 손에 반지를 끼웠다.
이미 결혼반지를 맞추느라 서로의 사이즈를 알고 있는 덕에 반지는 그녀의 손에 딱 맞았다.
“너를 혼자 두지 않는 건데. 반지라도 하나 사서 끼워주고 올걸, 그런 거.”
초연은 자신의 손가락에서 휘황찬란한 빛을 뽐내는 반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차피 결혼반지 있는데 이 비싼 걸 또 샀어요?”
“비싼 거 아냐.”
그저 저를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해준 말이겠거니, 초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아끼지 않는 신후였다.
어디 가서 기죽으면 안 된다고 명품 옷이며 가방을 매일같이 배달시키는 신후였다.
옷이 너무 비싸다며, 자신은 갈 곳이 없으니 이런 비싼 것들은 필요치 않는다고 하면 다음 날 꼭 그 옷을 입을 자리를 만드는 남자였다.
그녀의 주차장에는 아직 개시도 안 한 고급 외제 차가 있었다.
지난번 차 사고 이후 튼튼한 차를 타야 한다고 신후가 부지런히 움직인 결과였다.
그리고는 곧 혼자 운전하는 건 안 된다며 운전사를 붙여주기까지 했다.
그러니 비싼 반지를 사놓고도 저런 말을 하는 거겠지. 믿지 않았다.
“그때 서울 올라가는 길에 너에게 어떤 반지를 사줄까, 상상했어. 당시에 내 통장에 육백쯤 있었는데 아이도 낳아야 하니 다 쓸 엄두는 안 났지.”
그의 말에 따라 초연 역시 그때의 초연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한 백 정도 예산에서 너에게 줄 반지를 상상했어. 반지라고는 골라본 적 없으니 그저 어디선가 본 이미지로.”
그 시절 신후는 자신의 이름조차 밝히지 않았기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을 쓰는 일밖에 없었다.
한여름 에어컨도 없는, 이제 막 짓고 있는 건물 안에서 일하는 건 약과였다.
어떨 때는 뙤약볕에 어깨가 다 타서 허물이 벗겨질 때까지 고생했다.
생활비를 떼어주고, 그렇게 힘들게 모은 돈이 육백만 원이었으리라.
신후는 그 돈으로 우리의 미래를 꿈꿨다.
저도 모르게 초연의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아마 그때 서울 올라가지 않았다면 난 너에게 이런 반지를 사줬을 거야. 그리고 이렇게 물었겠지.”
자신의 손에 끼워진 반지는 그때의 신후가, 그 시절의 초연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사랑해, 초연아. 나와 결혼해줘. 너와 우리의 아이에게 최선을 다할게.”
그리고 이 고백 역시 6년 전 듣지 못했던 그 날의 프러포즈.
두 뺨 위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초연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요, 신후 씨.”
주남이든 찬영 오빠든 결국에는 당신일 수밖에 없는 당신을.
< 깊숙한 각인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