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예식장을 빠져나온 둘은 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고, 시장에 먼저 들렀다.
오랜만에 왔는데 예전 할머니의 가게 자리가 어떻게 변했는지 한번 보고 싶다는 초연의 부탁 때문이었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의 단층 건물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3층짜리 흰 건물이 번듯하게 자리 잡혀 있었다.
변한 것보다 변하지 않은 것이 더 많은 동네인데 할머니의 가게가 그 변한 것 중에 하나라니 아쉬웠다.
“아쉬워?”
“조금요.”
초연이 가볍게 웃었다.
어차피 모든 것을 예전 그대로 잡아 둘 수는 없다.
지나가는 걸 잘 보내줘야 그 자리에는 또 새로운 것들이 오지 않는가.
“진작 알았으며 가게도 사둘 걸 그랬어.”
“됐어요. 무슨 위인 생가도 아니고. 집 그대로 둔 것도 고마운걸요.”
다시 차를 타고 움직이는데 문득 신후가 갓길에 차를 세웠다.
“배 안 고파?”
점심을 먹은 지도 한참 지났다.
집을 한 바퀴 둘러보고 호텔로 돌아가서 저녁을 먹으려면 두 시간은 넘게 걸릴 터였다.
게다가 신후는 너무 많이 먹으면 운전할 때 졸린다며 점심도 부실하게 먹었다.
“배 많이 고파요? 그러면 집은 다음에 보러 가고 호텔로 돌아가요.”
“그 정도는 아니고 간단하게 주전부리 어때?”
“그래요.”
초연의 대답에 신후가 차에서 내렸다.
초연도 차에서 내려 편의점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간단하게 삼각김밥? 아님 빵?”
〈MJ 인터내셔널〉의 이사에게는 낯설지 몰라도 7년 전 둘에게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호떡을 물고 길거리를 걸고, 집 앞 슈퍼에서 하드 하나씩을 사서 지붕 위에 올라가 노을을 바라보았다.
먹고 돌아서면 배고프다던 신후 때문에 과자며 빵이며 주전부리를 챙기던 건 그녀의 몫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초연은 편의점에서 무슨 빵을 고를까 머릿속으로 궁리했다.
“아니.”
신후가 그녀의 팔을 잡더니 반대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뭐지 싶어 그의 움직임을 따라보던 초연이 놀랐다.
예전에 수금 문제로 대판 싸웠던 방앗간집이었다.
게다가 막판에는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고 잔뜩 비아냥대던 사람이었다.
다시는 얼굴도 보고 싶지 않은데 이게 무슨.
“농담이죠?”
기가 막힌 초연이 눈을 굴리며 내키지 않음을 피력했다.
“매듭이 있으면 풀어야지. 애도 아니고 계속 꽁해 있을 거야?”
***
“행님 그 말 들었능교? 저 짝에 있던 예식장 소문.”
“와. 무신 일 있나?”
미용실 사장의 화두에 방앗간 여사장이 귀를 쫑긋 세웠다.
이제 방앗간이라도 돈 좀 만지던 좋은 시절도 다 지나갔다.
원래도 사람이 없던 시골 동네는 근 몇 년간 더 사람이 빠져나가 한산했다.
그나마 남은 사람들 역시 떡을 직접 뽑아 먹는 비율이 확 줄었다.
해서 얼굴이 익도록 참깨를 덖어 참기름을 뽑아야 했다.
눈이 맵고, 손이 아리도록 고추를 말리고 닦아 고춧가루라도 만들어야 입에 풀칠이라도 했다.
자신의 생활에 재밌는 일이 없으니 주변에 무슨 일이 생겼다, 하면 자연적으로 귀가 열렸다.
“그 애물단지 싹 뜯어고친 게 〈MJ 인터내셔널〉인가 므라지 캅니까.”
“뭐? 〈MJ 인터내셔널〉? 유상리에 리조트 건설하는 회사 아이가?”
“거가 맞습니데이.”
“근데 거가 예식장은 왜 짓는데?”
〈MJ 인터내셔널〉의 리조트 건설은 몇 년 전부터 이 동네의 핫이슈였다.
유상리는 여기서 차로 삼십 분은 더 안으로 들어가 있는 바닷가 마을이었다.
그 동네의 리조트 소식까지 관심을 두는 건 유상리에 리조트가 생기면 오다가다 관광객들이 이 마을에도 들르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
게다가 리조트가 생기면 직원도 필요할 터.
이 동네 꽤 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자식들 역시 직원 채용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운 상황이었다.
한데 그 낡아빠진 예식장까지 건드렸다니.
리조트 개발 훈풍이 여기까지 불어오는 건가.
두 눈이 자연스럽게 휘둥그레졌다.
“우리 남편이 거기 전기 공사 하느라 갔다가 들었는데 그 집 손주가 이번에 결혼한다 카데예. 근데 손주 며느릿감이 이 동네 출신이라 안 캅니꺼! 그 손주 며느리 결혼식해준다꼬 회장이 손수 관리를 했다 하데예.”
방앗간 여사장의 얼굴이 금세 똥 씹은 얼굴이 됐다.
안 그래도 죽어라 돈 퍼부어 공부시킨 딸년은 그렇게 말리는 사위 놈이랑 결혼해 오늘 아침부터 그녀의 속을 긁었다.
시댁에서 네가 해온 게 뭐가 있냐며 구박을 했다며, 사느니 마느니 신세 한탄을 하더니 결국 돈 좀 보내달라는 얘기였다.
속이 시끄러운 상황에 얼굴도 모르는 남의 집 딸 시집에 시댁에서 저리 신경을 써준다니 속이 쓰렸다.
“하이고야. 부잣집이라 돈이 썩어나나삐다. 아이 으떤 미친 갱이가 다 망해가는 예식장 인수해가꼬 돈 처바르나 했더이.”
팍팍. 스테인리스 대야 두 개를 나란히 붙여놓고 고추를 일일이 마른 수건으로 닦아 옆 대야 옮기는 손길이 거칠어졌다.
“돈이 썩어나긴요. 그카 다 손주 며느리 사랑하는 시할아버지 마음 아입니꺼. 난 부럽기만 하데예.”
“근데 손주 며느리가 이 동네 사람이라꼬? 누구지?”
“글쎄예. 누구네 집이 그런 재벌가에 시집간다면 소문이 쫙 돌았을 낀데 말입니더.”
두 사람이 이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5년 전에야 이 마을에 흘러들어온 미용실 주인보다 방앗간집은 이곳에서 30년 넘게 장사를 했으니 그녀의 시야를 벗어난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자식을 〈MJ 인터내셔널〉에 시집 보낼 정도면 벌써 이 동네 소문이 나도 한참은 났을 텐데, 어떤 소리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때였다.
“계십니까?”
초연이 그의 팔을 잡으며 말렸지만, 신후는 오히려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고 팔짱을 낀 채 가게로 들어섰다.
“어서 오이……?”
오랜만의 손님 목소리에 반갑게 일어나던 방앗간 여사장은 손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얼굴이 굳었다.
초연과 그 조폭 새끼 아냐?
“지난번에 부산에서 뵈었는데. 기억하십니까?”
몇 달 전 해운대에서 보았을 때는 긴가민가했다.
6년 전보다 시간도 많이 흘렀고, 차림새도 너무 달라졌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단번에 알아봤다.
해운대에서 봤을 때처럼 커다란 덩치에 고급 양복.
게다가 가게 밖에 세워둔, 이 동네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비싼 세단까지.
그 양아치 놈이 젊은 나이에 이만큼 성공할 게 뭐란 말인가.
조폭이라기엔 단정하고 기품이 느껴졌지만, 여전히 범접하기 힘든 위협적인 분위기.
방앗간집 여사장은 신후를 조폭 두목이라 단정했다.
“아, 네 네.”
여사장은 시선도 마주치지 않은 채 장갑으로 바지에 묻은 애먼 먼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제가 기억을 찾았지 뭡니까.”
“기억을…… 찾아요?”
미용실 여자가 물었다.
“네. 6년 전에 본가에 결혼 소식을 알리러 올라가다가 사고를 당해서요. 그때 힌트를 주신 덕분에 제가 초연이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제야 방앗간 여사장은 신후와 초연이 이곳에 온 이유를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임신시켜놓고 도망친 양아치 새끼는 아니라는 걸 알려주려고 온 것이다.
그 옆에 마지 못해 인사를 하지만 어서 나가고 싶어 하는 초연의 모습을 보니 초연도 조폭 남편을 소개시켜 주긴 부끄러운가보다 싶었다.
제 딸보다 좋은 과외를 받는 것도 아닌데 성적이 좋던 초연이었다.
대학도 서울로 가서 속을 뒤집더니 결국 조폭 마누라라 된 초연의 모습에 방앗간 여사장은 아침나절의 상처가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한껏 입꼬리라도 뒤틀며 비웃고 싶었지만, 차마 후환이 두려워 건성으로 인사를 받았다.
“그랬나? 축하한데이. 근데 여는 우짠 일로 왔나?”
“기억 찾았다꼬 감사 인사 왔나 보네예.”
미용실 사장이 잘됐다는 듯 손뼉을 치며 두 사람에게 의자를 권했다.
“겸사겸사요. 저희가 이번 주말에 제대로 된 식을 올리는데 이쪽에서는 하객분들 돌아가실 때 답례품, 답례 봉투를 준비하는 풍습이 있다는 걸 이 사람이 말을 안 해줘서 지금 알았지 뭡니까.”
신후가 초연을 바라보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방앗간 여사장은 자신의 팔 위에 올려진 초연을 다독이며 웃는 신후의 얼굴에 순간 가슴이 뛰었다.
문득 조폭이라도 저런 남자한테 사랑받고 살면 나쁘지 않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남자랑 결혼한 제 딸도 맨날 죽네 사네 부부싸움을 하기 일쑤였다.
어린 시절 금이야 옥이야 키운 흔적은 다 사라진 채 남의 집 식모처럼 사는 모습에 속이 뒤틀릴 때가 한두 번이 아녔다.
그런데 조폭에게 시집간 초연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옷차림도 고급스러웠고, 무엇보다 얼굴에 사랑받는 여자의 행복함이 느껴졌다.
입맛이 써 아무 말 하지 않는 방앗간 여사장을 대신해 미용실 사장이 대화를 이었다.
“하모 하모. 이 짝에서는 결혼식 손님들한테 답례품, 답례 봉투 드리는 게 맞지예. 새 신부가 돈 아낀다고 말을 안 했는갑네.”
“그래서 떡을 좀 맞추려고 합니다.”
“얼맨키나예?”
“한 이백 세트면 되겠지?”
신후가 그녀를 보곤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