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82화 (82/84)

〈82〉

미간을 모으며 잔뜩 걱정스럽단 표정도 했다.

하지만 기대감에 반짝이는 눈빛은 어쩔 수 없었다.

장난기 어린 초연의 표정에 신후의 입매도 부드럽게 풀어졌다.

“무슨 소리야. 결혼식 하려고 이렇게 바쁘게 일하는 건데.”

돌아오는 주말은 초연과 신후의 결혼식이었다.

신혼여행까지 근 보름 가까이 회사를 비우니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부인이라는 여자가 자기의 마음도 모르고 이렇게 걱정을 해서야.

신후는 양손으로 초연을 안고 번쩍 일어났다.

“꺅! 뭐 하는 거예요?”

“바쁜 와중에 결혼 예행연습?”

눈썹을 밀어 올리는 그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예행연습 다 했잖아요.”

신랑 신부의 입장을 둘이 하기로 했다.

행여 좌우가 바뀔까.

간주보다 너무 빠르게, 혹은 너무 느리게 걷게 되는 건 아닐까.

인사를 하다가 머리가 닿을까 몇 번이나 솔이를 앞에 두고 연습했다.

근데 무슨 예행연습?

“해도 모자라지.”

신후가 식당을 나와 안방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근데 넓은 거실을 놔두고 왜 안방으로 가는 건데?

“할아버님이랑 솔이 올 때 다 됐어요. 장난 그만하고 그만 내려놔요.”

초연이 으름장을 부리며 버둥거렸다.

밤에야 솔이가 할아버지랑 같이 자는 날이 많았지만, 초저녁에는 이 건물, 저 건물 불쑥불쑥 나타나는 솔이였다.

지난번에도 뜨거운 시간을 갖다가 솔이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기절할 뻔했다.

다행히 현관에서 안방까지 거리가 있고, 옷을 다 안 벗었기에 다행이었지.

하지만 신후는 그녀를 내려놓기는커녕 오히려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팬티를 단번에 벗겨냈다.

“지난번에도 안전했잖아.”

난데없이 엉덩이에 닿은 차가운 공기에 초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난번에도 옷을 다 안 벗으면 된다고, 팬티만 벗기고 일을 치르던 그였다.

“이 사기꾼아 놓으라고!”

당황한 초연이 그의 가슴을 때리며 반항했지만 신후의 호탕한 웃음소리만 집 안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

돌아온 토요일. 신후와 솔이, 그리고 초연은 부산으로 향했다.

결혼식 당일 아침 내려가기엔 먼 거리였다.

미리 내려가서 푹 쉬고 메이크업 준비를 하라는 성식의 배려였다.

덕분에 세 식구는 지난번에 못 한 가족 여행을 즐기는 중이었다.

일부러 호텔로 바로 가지 않고, 부산 해안가 도로를 한 바퀴 돌았다.

“와! 엄마 저게 바다야?”

“그래. 멋있지?”

창문을 열고 바라는 바라보는 솔의 두 눈이 태양 아래 반짝거렸다.

“수평선 처음 봐.”

청도에 살기는 했지만, 초연은 솔이를 데리고 한 번도 바다 구경을 하러 간 적이 없었다.

사는 게 바빠서이기도 했지만, 텔레비전의 바닷가 장면만 봐도 신후가 떠올라 가슴이 저릿하던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은.

보조석에 앉은 초연은 신후를 바라보았다.

그는 룸미러와 사이드미러를 보며 쉴새 없이 주변을 체크하는 중이었다.

지난번 사고 이후, 신후는 운전할 때 더욱 예민해졌다.

주변에 아무 차가 가까이만 와도 얼굴이 굳어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고의 후유증이라 생각한 초연과 성식은 한동안만이라도 운전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신후는 거부했다.

자신이 무섭다고 피하기만 하면 초연과 솔이를 지킬 수 없다는 이유였다.

운전자들은 사고 시 본능적으로 핸들을 왼쪽으로 튼다던데.

신후는 그 사고의 순간에도 자신들을 지켜주기 위해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그가 자신과 솔을 지켜준다는 의미를 초연은 이제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전과는 다른 이유로 다시 가슴이 저릿했다.

초연의 시선을 느낀 신후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람 너무 세? 솔아. 엄마 추워. 창문 닫아.”

“괜찮아요. 괜찮아 솔아. 그 냄새 많이 맡아. 그게 바다 냄새야.”

자신의 추억들을 솔이도 듣고, 보고, 느꼈으면 싶었다.

“바다 냄새 안 싫은가?”

신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당신 바다 냄새 싫어했던 건 기억 상실이랑 섞여서 그런 거 아니에요? 바다 냄새 좋지 않아요? 서울처럼 먼지 가득한 느낌도 아니고. 서울 사람들은 이 냄새 맡으면 놀러 온 기분 든다고 좋아하던데?”

바닷가에 살 때는 몰랐지만 서울에 올라가 있으면 이 냄새가 그리울 때가 있었다.

서울에서 사람들에게 치이다가 방학마다 부산에 내려올 때면, 바다가 눈에 보이기 전부터 이 바다 비린내로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기차 안 사람들이 ‘우리 부산 왔나 봐’, ‘바다 냄새 나네’ 설렘 가득한 목소리로 외쳐댔던 걸 보면 이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뿐만은 아닐 것이다.

“생각해보니까 나 처음부터 바다 냄새 싫어했어.”

“바다 냄새 싫다는 사람이 어떻게 1년이나 바닷가에서 살았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신후는 그녀처럼 여기 태어난 것도 아니고 연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언제든 떠나려면 떠날 수 있었던 사람.

그런데도 바닷가 그녀의 집에서 1년을 살았다.

그래놓고 인제 와서 바닷가가 별로였다고?

신후의 말에 배신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거야 네 향기가 무척 좋았거든. 바다 비린내는 생각도 안날만큼.”

새초롬하던 초연의 얼굴이 금세 복숭아처럼 발그레해졌다.

낯간지러운 말도 서슴없이 하는 신후 때문에 요즘 초연의 가슴은 봄철 꽃망울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톡톡 터지기의 반복이었다.

***

“와…….”

촌스럽던 읍내 예식장의 변화된 모습에 초연은 좀처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넓은 터에 단층 짜리 궁전 예식장은 2층짜리 건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그녀와 신후의 결혼식이 열리는 옥상 정원의 이미지 사진은 본 적 있었지만, 건물 자체를 이렇게 바꿨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예전 그녀의 기억 속에 있었던 허름한 건물이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푸른 빛이 도는 반사 유리로 외장을 리모델링한 세련된 건물이었다.

게다가 옥상은 외곽으로 나무가 빙 둘러 싸여있었고, 그 안에 또 하나의 유리 집이 있었다.

그 부분은 초연 역시 설계도로 본 적 있었다.

그냥 야외 정원은 날씨의 영향을 받을 수 있으니 정원 안에 삼각 지붕 형태의 유리 온실 정원을 또 만든 것이었다.

“안에도 살펴봤는데 시공사에서 사진으로 보여줬던 것보다 잘 빠졌더구나. 아직 꽃이 다 도착한 건 아닌데 그래도 예뻐. 결혼식 당일에는 네가 보았던 그 어떤 결혼식보다 예쁘게 꾸며주마.”

이번 결혼식은 성식의 아이디어였다.

할머니 산소 가까운 곳에서 해야 할머니가 오시기 힘들지 않으시지 않겠냐며 운을 뗐다.

‘그렇게 멀리서 하면 번거로우실 텐데. 그러실 필요 없어요.’

‘됐다. 한 살이라도 어린 사람이 움직여야지. 네가 네 할머니보다 조금 어리지 않느냐. 내가 움직이는 게 낫지.’

농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성식의 본심이기도 했다.

문제는 예식장이 너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는 점이었다.

대충 꾸며서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성식은 아예 예식장을 매입해 환골탈태 수준으로 바꾸었다.

“이곳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어떠냐.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마음에 들어?”

은근히 기대에 찬 눈빛으로 성식이 초연의 반응을 기대했다.

“네, 무척이요.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울먹이며 성식의 손을 잡으려 초연이 한 발 다가설 때였다.

신후가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당겨 제 쪽으로 바짝 붙였다.

“감동할 필요 없어. 안 그래도 이 근처 리조트 사업 준비 중이니까.”

신후가 초연의 귓가에 속삭였다.

금시초문인 소리에 초연이 그와 성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놈아! 그런 얘기는 뭣 하려 해. 하여튼 초연이가 나한테 잘하는 게 그렇게 못마땅한 게냐!”

“아무리 사업가 기본 마인드가 사기꾼이라고 해도 초연이한테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저 옆에 유상리 알지?”

초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거기 리조트 건설 중이야. 이 예식장 리모델링 하면서 아마 리조트랑 연계사업까지 생각하셨을 테지. 아마 내년에 결혼한다고 했으면 거기에서 우리 결혼식 시켜서 홍보용으로 사용하셨을걸.”

“정말이세요?”

초연이 성식을 보고 물었다.

“왜. 서운하냐?”

성식이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서운하긴요. 저도 사업가 부인인데 뭐든 남는 장사가 좋잖아요.”

해맑게 웃는 모습에 성식도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내가 역시 손주 며느리를 잘 뒀구나.”

다만 성식과 초연의 쿵짝에 신후 혼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초연은 작게 웃으며 신후의 팔짱을 끼었다. 그제야 표정을 푼 신후가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초연은 그의 팔짱을 낀 채 천천히 예식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깐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달라지는 서울과는 달리 이곳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섯 살 무렵 다녔던 유치원, 새로 건물 하나가 올라간 듯한 초등학교, 페인트칠을 다시 한 중학교.

친구들과 자주 가던 분식집이 조금씩 몸을 돌릴 때마다 한눈에 들어왔다.

그때의 외로움, 서러웠던 감정들이 다시 떠올랐다.

그때만큼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다. 이게 다 이 가족들 때문이겠지.

“예전에 살던 집. 한 번 가볼래?”

신후의 제안에 초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누군가에게 쫓기듯 떠났던 고향이었다.

그 뒤로 한 번도 고향을 찾아본 적 없었다.

어린 나이라 그녀와 할머니가 살던 집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몰랐고,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도 신경 써본 적도 없었다.

기억을 되찾은 신후가 집에 관해 물었을 때, 그제야 초연도 집의 존재를 떠올렸다.

신후가 알아본바 집은 다행히 그 상태 그대로 방치된 상태였다.

신후는 사람들을 고용해 집을 새로 단장했다.

앞으로 할머니의 제사마다 와야 하는데 별장처럼 지내자는 뜻이었다.

그녀와 할머니의 추억이 가득한 곳이니 초연도 좋다고 했다.

마침 집수리가 모두 끝났다는 연락을 며칠 전에 받았다.

여기까지 와서 집을 안 보고 올라갈 수는 없었다.

“그러면 난 솔이 데리고 호텔 가서 좀 쉬어야겠다.”

성식은 한참 잠에 취한 솔이를 데리고 호텔로 향했고, 둘은 차를 타고 예전 같이 살던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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