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81화 (81/84)

〈81〉

지은이 구속 수사를 받은 지도 한 달이 지났다.

평생 살아본 적 없는 구치소 생활을 지은은 견디기 힘들어했다.

가석방을 신청하려고 했지만 이미 해외 도주 우려가 있었다는 사실이 전 국민에게 알려진 바, 그녀가 가석방을 받을 확률은 없다고 국선 변호사는 선을 그었다.

물론 보석금을 내줄 사람도 없었다.

이미 정 원장 역시 특정 응고 혈액 불법 거래로 구치소에 수감된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정 원장이 구치소에 들어가고, 지은을 팔아넘기면서까지 구하려고 했던 건 정 상무였다.

하지만 곧 정 상무 역시 회사 자금 횡령과 기밀 유출 등으로 〈MJ 인터내셔널〉에게 고발되었다.

정 원장은 아들만은 살려주겠다더니 거짓말을 한 게 아니냐고 변호사를 통해 따졌다.

하지만 정 상무에게 내려진 고발은 민씨 일가가 아닌, 〈MJ 인터내셔널〉 차원에서 지낸 된 것이기에 다르다는 말에 더는 할 말을 잃었다.

구치소에 수감된 정 상무는 겁에 질려 그동안 지은이 시켰던 회사 기밀 유출과 〈K 병원〉 비리를 아는 족족 털어놓았다.

그렇게 공항 진상녀로 시작된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K 병원〉 혈액 비리, 〈MJ 인터내셔널〉 민씨 일가 살해 사건으로 커갔다.

수많은 사건에 재판은 장기 재판이 됐다.

물론 지은의 편은 없었다.

신후의 블랙박스 차량 영상과 강 씨와 주고받았던 음성 녹취록까지 증거자료로 채택되면서 사람들은 지은의 악랄한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게 됐다.

신후에게 25년간 피를 주고, 키워줬다는 그녀의 호소는 정상참작 요소로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가 행패를 부렸던 레스토랑과 피부 샵, 그동안 명품관에서 당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인증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전 국민이 경악했고, 지은을 손가락질했다.

결국, 지은은 한 달간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

저녁 무렵 퇴근하던 신후는 높은 담벼락을 올려다보았다.

항상 감옥같이 느껴지던 돌덩이에서 이제는 온기가 느껴졌다.

어서 저 안으로 들어가 이 옹벽에도 온기를 불어넣은 초연을 보고 싶은 마음에 신후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오빠! 아니 신후 씨!”

그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앞치마를 입은 초연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환하게 웃음을 띤 채였다.

그가 기억을 찾은 후 둘은 예전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6년이나 지난 이야기였지만 신후에게는 어제처럼 생생한 기억이었고, 초연 역시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해서 종종 너무 반갑거나 당황할 때면 오빠라는 호칭이나 찬영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처음 저녁 식사 자리 처음 만났던 초연이 얼마나 쌀쌀맞았는지 이야기하던 순간 초연은 저도 모르게 그를 찬영이라고 부르며 입을 막았다.

덕분에 분위기는 금세 얼어붙었다.

하지만 곧이어 찬영이라는 얽힌 이야기를 듣고 나서 성식은 오히려 신후의 등짝을 때리며 초연의 편을 들었다.

그리고는 어린 시절부터 신후가 어디 가서 욕을 먹을 만하면 꼭 가명을 쓰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가 없었던 시간 속의 서로 이야기를 공유하며 한층 가까워졌다.

“그냥 예전처럼 편하게 불러.”

“솔이도 있는데 호칭 똑바로 해야죠.”

초연의 예의 바름이 신후는 가끔 아쉬웠다.

지금의 초연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자신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지지 않던 초연의 모습이 그리울 때가 있었다.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 없게 저를 똑바로 보던 그 도전적인 눈빛.

한 번은 예전처럼 편하게 말하고 짜증도 내보라고 했다가 변태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남의 속도 모르기는.

신후는 겉옷을 벗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솔이도 안보이고 주방에서 음식 냄새가 났다.

“왜. 오늘은 위에 올라가서 저녁 안 먹어?”

“할아버님이 솔이 데리고 골프 모임에 가셨어요. 늦으실 것 같다길래 저녁은 제가 챙긴다고 했어요. 괜찮죠?”

“나야 더 좋지.”

식탁에는 1인분만 준비되어 있었다.

“당신은?”

“오랜만에 음식 해서 간 보느라 집어먹었더니 생각 없어요.”

급하게 차리느라 몇 개 되지도 않는 반찬이었는데도 몇 달 음식을 하지 않다 보니 금세 낯설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신후는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밥을 한꺼번에 떠서 입 안 가득 채우고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요. 밥 먹을 시간도 없었어요? 좀 쉬면서 일하라니까.”

사고 후 신후는 단 3일간만 입원했다.

병원에서는 그래도 일주일은 입원하고, 정밀 검사도 하자고 했지만 신후는 단칼에 거절했다.

집에서 알아서 잘 쉬겠다며 거짓말도 태연하게 했다.

그래놓고는 다음 날부터 미친 듯이 일을 했다.

지은의 만행이 터지면서 국민의 관심이 〈MJ 인터내셔널〉로 옮겨왔다.

전국 거점 병원에 자신과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위해 치료비를 무상으로 평생 지원하기로 한 그의 결정에 온 국민이 박수를 보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신후가 유럽 기반의 제약 회사로부터 혈우병 D형 예방제의 특허를 구입했다는 소식도 알려졌다.

그동안 찬영이 유럽에 출장을 가 있던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기술은 개발했으나 임상 시험 비용과 적은 환자 수로 생산 단가가 맞지 않아 폐기하려던 예방제의 특허권이었다.

향후 10년 안에 임상 시험을 마치고 누구라도 돈 걱정 없이 혈우병 D형 예방제를 맞을 수 있게 하겠다는 그의 계획에 국민의 호감도는 극대가 됐다.

신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하반기 매출은 10월도 되지 않아 초과 달성했다.

실로 〈MJ 인터내셔널〉의 주가는 연일 상승가를 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구치소에 들러서 그 여자 만나고 왔어.”

회사 일로 바빠 끼니도 건너뛰었겠거니, 생각하던 초연은 신후의 대답에 놀랐다.

“아……. 반성은 좀 해요?”

“반성할 여자 같으면 그런 짓 안 저질렀겠지. 보자마자 패악을 부리더군.”

“그래서 설마 어떻게 하고 온 건 아니죠?”

눈을 뜬 신후는 당장 가서 그 여자를 죽여버릴 거라고 난동을 부렸다.

당신 크게 사고가 났었다고, 그 여자를 마주했다가 더 큰일이 날 수 있다며 신후를 말리고, 경찰에 신고한 건 초연이었다.

신후는 아직도 그때 공항으로 직접 지은을 잡으러 가서 반쯤 죽이지 못한 걸 이를 갈았다.

그랬다면 지금 〈MJ 인터내셔널〉에 대한 사람들의 호감도는 떨어졌을 거라고 달래보았지만 그의 분노를 쉽게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했지.”

“?”

“당신 말대로 지후 얘기 꺼냈더니 잠잠해지더군.”

눈을 뜨자마자 신후는 지후의 유전자 검사를 의뢰했다.

역시나 결과는 혈연관계가 없다고 나왔다.

성식은 말문이 막혔고, 신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성식은 당장 지후를 불러내 이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길길이 뛰었다.

하지만 초연이 그를 막았다.

일단 대학을 졸업하고 자리를 잡을 때까지 놔두자는 것이 그녀의 의견이었다.

반쯤은 아무리 미워도 지은이 여태껏 신후에게 피를 주었던 사람이라는 것과 자신도 엄마이기에 지은과 지후의 관계를 굳이 자신들이 깨고 싶지 않다는 것.

나머지 반은 지은이 순순히 죄를 인정하게 할 미끼로 삼기 위함이었다.

조사를 받고, 법정에 출두할 때마다 패악을 부리는 지은의 모습은 온 국민 앞에 고스란히 중계됐다.

이게 반복될수록 신후에게도 좋을 게 없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잘했어요.”

“당신이 봐주라고 해서 봐주긴 했는지 잘한 짓인지는 모르겠어.”

“잘했어요. 친정에서도 버림받고, 재산도 잃고, 아마 지금 지후까지 잘못되면 그 여자 제정신으로 살기 힘들 거예요.”

초연이 그를 위로하기 위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신후가 팔을 뻗어 옆 의자에 앉으려는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가로로 앉혔다.

“왜. 나와서 해코지라도 할까 봐 무서워? 나온다고 한들 당신, 솔이 손끝 하나 못 건드려 그 여잔. 게다가 그 여자 지은 죄만 해도 벌써 무기 징역감이고.”

그녀와 솔이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그였지만 이럴 때면 자신이 당한 만큼 꼭 돌려주고야 마는 독한 성격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동안 법정에서도 얼마나 성질을 부렸는지 법원 측에도 단단히 밉보인 모양이더군, 어차피 살아생전 나오기도 쉽지 않은데 굳이 뭐가 무섭다고 봐줘.”

초연은 신후의 마음에 진정으로 평화가 찾아들길 바랐다.

누군가를 미칠 듯이 미워하다 보면 그 마음속에도 독이 자란다.

그를 미워했던 지난 세월 동안 초연의 마음은 문드러졌다.

비록 사랑은 아니지만 어쨌든 부정적인 감정을 담고 있는 것만으로 신후에게 좋을 일이 없다.

살다 보면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날 미워하는 사람도 있고, 내가 한 것에 비해 많은 것을 베풀어 주는 사람도 있다.

그녀에겐 이범규 염색장이 그랬다.

차마 지은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 수는 없더라도, 그녀를 더 극한으로 몰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나쁜 인연은 이쯤에서 흘러가도록 하고 싶었다.

“잘됐네요. 어차피 벌은 법이 알아서 줄 테니 우리는 좋은 이야기만 해요. 근데 당신 이렇게 바빠서 결혼식 치르겠어요?”

초연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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