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깊숙한 각인-80화 (80/84)

〈80〉

공항에 도착한 지은은 지후가 있는 미국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입국심사 줄을 섰다.

신후가 깨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서 빨리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출발해버렸으면 좋겠는데.

긴 수속줄을 보고 있으려니 비행기를 놓치는 건 아닐까, 애가 탔다.

지은은 자신의 앞에 있는 한 무리의 학생들을 보았다.

아프리카로 자원봉사를 떠나는지 커다란 팻말을 들고 같은 조끼를 입고 있는 무리는 얼핏 봐도 열 명이 넘었다.

그나마 제대로 줄 선 건 한 사람. 나머지는 삼삼오오 모여 떠들기 바빴다.

저 사람들만 젖혀도 꽤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겠다 싶었다.

“내가 지금 비행기 탈 시간이 촉박해서 그러니 먼저 좀 갑시다.”

지은이 자신의 앞에 있던 얌전한 얼굴의 남학생을 밀치고 앞에 섰다.

“저희도 줄 선 건데요…….”

착한 인상이라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는데. 학생의 태클에 말에 지은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니. 내 비행기가 이제 곧 출발이라 그런다니까? 먼 나라로 자원봉사까지 가는 학생들이 그것도 양보 못 해요?”

우물쭈물한 표정의 학생 뒤쪽으로 몸을 틀어 둥그런 대형을 만들어 떠들고 있던 여학생이 몸을 돌려 앞으로 나왔다.

“급하면 방송 나오겠죠, 아줌마.”

지후보다도 어려 보이는 애가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게 기가 막혔다.

평상시 같으면 자신에게 눈도 못 마주칠 것들이 지랄이다 싶었다.

“아줌마? 내가 누군지 알고 아줌마래?”

“새치기하면서 당당하신 아줌마요. 제가 뭘 또 알아야 하나요? 야, 경준아. 너 이 아줌마 알아?”

“아니?”

여학생의 뒤에 있던 또 다른 등치가 좋은 남학생이었다.

“그러면 사진 좀 찍어드려야. 전 국민이 누군지 좀 알게.”

“오케이.”

재미난 일이라도 생겼다는 듯 이죽거리던 남학생이 핸드폰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향해 들었다.

만약 이 사진이나 동영상이 온라인에 퍼지면 개망신을 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너희들 미쳤니? 당장 그거 끄지 못해!”

“먼저 아줌마가 자기 누군지 아냐고 물었잖아요. 별로 안 유명하신 것 같아서 유명하게 만들어드린다니까요?”

빈정거리는 여학생의 말에 지은의 눈이 뒤집혔다.

“어린 게 어른 말에 꼬박꼬박 토를 달아!”

“어? 아줌마. 손 안 놔요?”

두 사람이 소란에 금세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둘에게 고정됐다.

몇몇 사람은 핸드폰을 꺼내 촬영하기 시작했다.

“니가 먼저 놔야지. 이거 찍어서 뭐 하게!”

핸드폰을 차지하려고 둘이 아웅다웅하는 사이 핸드폰은 두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갔다.

팍! 핸드폰이 바닥에 산산이 깨져 여기저기 흩어졌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수군거리는 모습에 그제야 지은은 정신이 들었다.

행여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까,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침 방송에서 그녀가 탈 뉴욕행 비행기의 출발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빨리 탑승을 서두르라는 방송이 나왔다.

이런 것들한테 쓸 시간이 없다.

지은은 캐리어를 잡고 다시 앞쪽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어어? 남의 핸드폰 망가뜨리고 어딜 가요? 진짜 미쳤나 봐, 이 아줌마.”

여학생이 그녀의 캐리어를 잡고 버텼다.

“놔! 나 비행기 못 타면 네가 책임질 거야?”

“내 친구 핸드폰은요? 아줌마가 책임져야지 그냥 토끼면 어떡해요?”

“지 잘못인 걸 왜 나한테 지랄이야?”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 핸드폰 책임도 못 져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지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야! 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러니까 그 대단하신 이름이 뭔데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두 사람이 팽팽히 맞섰다.

이미 두 사람 앞에 줄 섰던 사람들은 모두 수속을 밟고 들어간 지 오래였다.

그때였다.

“정지은 씨.”

뒤에서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이 상황에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짜증스럽다.

“누구야?”

날 선 표정으로 돌아서던 지은이 금방 얼어붙었다.

공항 경찰 한 무리가 그녀를 둘러쌌다. 사복 경찰 두 명은 양쪽에서 그녀의 팔을 잡았다.

“당신을 민신후 일가 살해 혐의로 법원이 발부한 영장에 의하여 긴급 체포합니다. 정지은 씨 당신은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변명할 기회가 있습니다.”

미란다 원칙을 읊는 경찰의 모습에 사람들이 더욱 모여들었다.

“또한,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고, 당신이 행한 진술은 법정에서 유죄의 증거로 사용될 수 있으니 묵비권을 행사해도 됩니다.”

찰칵, 찰칵. 자신을 찍는 수십 개의 카메라와 플래시에 지은은 미칠 것 같았다.

“놔, 놔요.”

경찰에게 잡힌 팔을 빼서 얼굴을 가렸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조용히 따라가시는 게 정지은 씨에게도 좋을 텐데요?”

“초연이가 그래요? 내가 사고 냈다고?”

“아니요. 민 이사님이 깨어나셨습니다.”

역시 그 새끼가 깨어났어!

더 빨리 한국을 떴어야 했는데 저 망할 년 때문에 늦었다. 지은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나 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래, 증거. 아직 증거는 못 찾았을 것이다.

“어젯밤 사고를 내가 했다는 증거 있어요?! 당신들 그냥 민 이사 말만 듣고 이러는 거 아냐? 여기가 어떤 나라인데. 대한민국은 법치주의 국가라고?!”

지은은 뻔뻔한 얼굴로 버티며 소리 질렀다. 어이없다는 얼굴로 경찰이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이 강재구 씨에게 살인 교사하는 통화 녹취 내용 확보하였으며, 입금 내역까지 확보했습니다.”

살인 교사라는 소리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경악했다.

하지만 지은의 눈에 이미 주변 모습은 들어오지 않은 지 오래였다.

강 씨 이 비겁한 새끼.

어제 돈을 입금하는 게 아니었다. 지 살자고 녹취까지 하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저 겁만 주려고 그랬다고요! 걔가 먼저 나를 집에서 쫓아냈다고! 25년 넘게 키워준 고마움도 모르고 인제 와서 새엄마를 팽하려는 자식을 그냥 지켜봐야 해요?”

“그러면 25년 전. 민신후 씨의 모친 김미경 씨를 살해한 사실은 어떻게 말씀하실 건가요?”

헉. 지은이 숨을 들이켰다.

그걸 어떻게.

6년 전 사고 후 신후는 7년 전 제대하는 날의 기억을 잃었다.

그녀로서는 천운이나 다름없던 일이었다.

한데 그때의 기억을 되찾았다니.

“그, 그런 적 없어요!”

“그러니까 당신 말이 맞는지, 민신후 씨 말이 맞는지 조사를 해보면 금방 끝나지 않겠습니까?”

7년 전 그녀의 말에 속아 가출하던 어리숙한 신후는 사라졌다.

초연을 협박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뺏고 쫓아낸 신후였다.

제 친모는 자신이 죽였다는 사실을 알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벌써 신후가 분노한 얼굴로 그녀를 찢어 죽을 듯 달려드는 모습이 그려졌다.

아찔한 상상에 지은이 휘청했다.

저도 모르게 벌벌 떨며 악을 썼다.

“그런 적 없다고요! 당신들 그 사람 말만 믿는 거야? 25년 동안 키워준 나를 돈 한 푼 없이 쫓아낸 인간이라고. 당신 경찰 주제에 그 자식한테 돈 받았지?! 대한민국 경찰이 재벌한테 돈 받고 아무 사람이나 체포해도 돼? 내가 가만있을 줄 알아?”

지은은 떨리는 손으로 정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즘 자신에게 잔소리가 늘긴 했지만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그리고 그 병원. 그 병원이 그만큼 큰 게 누구 덕인데. 앞으로도 제 덕을 보려면 자신을 살려줄 수밖에 없겠지.

정 원장 역시 〈MJ 인터내셔널〉 덕에 많은 인맥을 쌓아 아는 변호사, 검사, 국회의원이 많았다.

이 정도는 해결해 줄 수 있겠지.

지은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정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정 원장과의 통화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그 모습을 경찰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켜봤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지금은 연결할 수 없다는 안내음.

“도대체 뭐 하느라 전화를 안 받아.”

아랫입술을 물어뜯으며 다시 전화했다.

“지금 이 상황에 어디 전화 겁니까?”

“가만있어요. 변호사도 부를 수 있고, 묵비권도 행사할 수 있잖아요. 나한테 도움 되는 사람 좀 부르겠다는데. 그것도 안 돼요?”

그래도 사람이 많은 곳이라 좋게 연행하려던 경찰들도 지치긴 마련이었다.

할 수 없이 수갑을 꺼냈다.

“혹시 지금 통화하시려는 정 원장이 정한철 원장입니까?”

경찰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렸다. 묘하게 비웃는 느낌.

“당…… 당신이 그걸 어떻게?”

찰칵. 그녀의 손에 은색 수갑을 채웠다. 차갑고 묵직한 수갑의 존재에 지은이 얼어붙었다.

“당신 부친인 정한철 원장이 이미 25년 전 의료 기록과 약물 기록, CCTV를 제출하며 조사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무겁고 둔탁한 것이 머리를 내리친 것 같은 기분에 지은은 한동안 멍했다.

설마 부친이 자신을 배신할 줄을 몰랐다.

자기 혼자 살겠다고 감히 가족인 나를 쳐?

부친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지은이 절규했다.

“아악!”

그날 인터넷은 공항에서 지은의 난동 동영상으로 뜨겁게 불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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