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 그래도 네가 그 집에 시집갔으면 최선을 다해야지. 괜히 미운털 박히면 네 몫, 지후 몫만 줄어드는 거야.
테이블 위에 놔두었던 핸드폰의 스피커를 통해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 원장이었다.
제 앞에서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더니 딸자식과 이런 저급한 대화를 나눌 줄이야.
그래도 서운하거나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원래 눈에 욕심이 드글드글한 인간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애지중지하는 딸이 열 살도 넘게 차이 나는 남자의 후처 자리로 들어갔는데 그를 볼 때마다 무슨 꿀단지 보듯 볼 건 뭐란 말인가.
“아빠는. 내가 이 집 장손 목숨줄을 잡고 있는데 누가 날 하대해요? 그럼 그때처럼 미국 간다고 한번 지랄하면 되지.”
- 하긴 민 사장이 사람이 좀 좋긴 하지. 너 유학 간다는 소리에 한달음에 호텔로 달려간 거 보면.
“그날 나한테 코 꿰인 거죠 호호호.”
예상치 못한 부친과 지은의 연애사에 신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딴 이야기를 들어서 얻는 게 뭐라고. 속만 시끄러울 뿐이었다.
뒤를 돌아 내려가려던 신후의 발걸음을 잡은 건 모친에 관한 대목이었다.
- 민 사장이 잘해주긴 하냐? 예전에는 지 마누라 죽고 한동안 우울해했잖냐.
“착해 빠져서는 아직도 이맘때 되면 잠도 못 자고, 우울해해요.”
- 그래도 그만큼 책임감이 강하니 널 받아줬던 거지.
“됐어요. 그때 그 여자 살려둘 걸 그랬나 봐. 그 사람 죽상 된 얼굴 볼 때마다 짜증 나.”
차라리 옆에 두고 놀려 먹는 재미라도 있을 텐데.
이미 죽은 전처의 자리를 자신이 넘볼 수 없다는 생각에 열등감은 더 폭발할 지경이었다.
항상 멍하니 자신을 보는 도재의 시선도, 오갈 때마다 보이는 유령의 집 같은 아래채도.
그녀에게는 전 부인의 망령같이 느껴졌다.
차라리 살아있다면 어떻게든 싸워 이길 텐데. 죽은 귀신과 싸우자니 싸울 방도가 없다.
- 그래도 그때 네가 잘 처리했으니 부인 자리라도 차지한 거지 평생 첩으로 살려고 그래?
“하긴. 그 여자 살려뒀으면 〈MJ 인터내셔널〉 사모님 소리는 영영 바이였겠죠?”
그나마 그거 하나 마음에 드네.
앞으로 우리 지후가 언제쯤 돼야 내 수모를 복수해줄까.
지은이 정 원장과의 통화를 마치고 일어설 때였다. 아래층으로 몸을 돌리던 지은이 신후를 발견했다.
“신, 신후야!”
지은에게 다가서는 신후의 표정이 당장이라도 그녀를 찢어 죽일 듯 험악했다.
180cm가 훌쩍 넘는 키에 군 생활로 단련된 몸. 죽일듯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신후의 모습이 꼭 저승사자 같았다.
지은이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섰지만 신후가 빨랐다.
마치 갈고리 같은 손으로 그녀의 목을 콱 조였다.
“처리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상시 같으면 머리를 굴려 거짓말을 만들어낼 그녀였다. 하지만 신후의 표정과 목조름에 지은은 머리를 굴릴 틈도 없었다.
“지, 자…… 잘못 했어. 한 번 만. 한 번만 용서해줘. 모두 지나간 일이잖아. 제발.”
“씨발. 사람을 죽여놓고 그런 말이 잘……!”
신후가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신후의 손을 목에서 떼며 지은이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녀가 감당할 힘이 아니었다.
지금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를 덮쳤다.
지은은 덜덜 떨면서도 제 살 방법을 찾았다. 일단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면 살 방법이 생기겠지.
“내가 일부러 그러는 거 아냐. 아빠가. 네 아빠가 부탁했어.”
“그럴 리 없어.”
부정하면서도 신후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목을 쥔 손아귀의 힘도 약해졌다. 신후 역시 도재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본처가 죽고, 술기운에 자신과 잠자리를 가진 줄 안 도재는 늘 아들 보기를 괴로워했다.
그런데도 그녀를 밀어내지 못한 건 지후의 존재와 신후에게 줄 자신의 피.
누구보다 가정을 지키려는 그였지만, 결국 이렇게 신후와 어긋났다.
그리고 그 틈은 그녀가 살 수 있는 동아줄이었다.
“내가 지후 임신하고 너무 힘들어하니까 네 아빠가 그러라고 했어. 어차피 죽을 사람이었잖아. 그냥 응급 상황에 벨만 안 울리게 한 거야. 어차피 나 아니었어도 오늘내일했을 거야.”
지은의 교묘한 도재 탓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신후가 집을 뛰쳐나왔다.
설마 아버지가 지은과 결혼하기 위해 그런 짓을 저질렀을 줄은 미처 몰랐다.
지은을 부인으로 받아들인 건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 인간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를 죽인 사람이라니.
어디로 가야 하지?
아버지를 떠올려보았지만 가서 따진들 무엇이 달라질까.
한때는 그가 존경해 마지않던 아버지의 추악한 변명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갈가리 찢겼다.
그러면 할아버지?
이 사실을 알면 아마 뒤로 넘어지실지도 모른다.
게다가 자신 역시 버러지처럼 지은의 피를 받아 목숨을 유지하는 처지 아닌가.
자신의 몸이 한없이 더럽게 느껴졌다.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씨발.”
욕설과 동시에 분노에 가득 찬 자신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쳐갔다.
‘감히, 씨발. 그 여자가 솔이 목줄을 쥐고 당신을 흔들었어. 그렇지?’
‘신후 씨 아버님도 절 반대하신다고…….’
‘아마 그 여자가 또 거짓말을 지어낸 듯하네. 게다가 아버진 내가 하는 일에 반대하는 분도 아니었고.’
또 거짓말? 정지은이라는 여자가 거짓말을 잘하는 인간인가.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자신이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느낌.
『당신이 죽은 지 벌써 3년인데 아직도 난 당신 이름을 부를 때면 떨리고 마음이 아프다오.
혹시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내가 미워서 꿈에도 안 나타나는 거요?
미안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은데 당신은 내 사과를 받아주지 않을 모양인가 보구려.』
이상했다.
정말 아버지가 어머니가 죽는 걸 계획했다면, 죽인 걸 사과를 해야지 왜 지은과 결혼한 것만 사과하지?
내가 무언가를 잘못 안 건가?
‘근데 이 사람은 가족 아닌데 왜 가족사진에 있어요?’
맞다.
우리 집안 남자들은 모두 닮았는데 민지후, 왜 너는 우리 집 식구와 안 닮았지?
‘아버님. 잘못했어요. 다 집안을 위해 그런 거예요. 도재 씨도 죽기 전에 그 앨 반대했다고요. 전 그냥 도재 씨의 유지를 받들어…….’
거짓말이다.
어머니까지 죽인 지은이 집안을 위해 초연을 반대했다는 소리는 다 개소리일 뿐이었다.
‘근데 당신 아버님과 싸우고 가출한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이건 명백한 거짓말!
난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어!
신후가 벌떡 눈을 떴다.
***
어젯밤 강 씨로부터 사고 후처리가 깔끔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지은은 밤새 잠을 설쳤다.
평상시보다 천문대에 유성우를 보러 가는 사람들이 많아 완벽한 처리는 하지 못했다는 핑계였다.
미친 새끼. 그 돈을 받아 처먹고 일을 그따위밖에 못 해?
피가 거꾸로 솟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도 혈우병 환자니 운 좋게 과다출혈로 죽기라도 한다면.
차라리 즉사보다 나을 수 있다.
곱게 손질한 손톱이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지은은 초조하게 방을 왔다 갔다 하며 뉴스를 기다렸다.
드디어 기다리던 아침 첫 뉴스.
【지난밤 저녁 7시경 강릉 천문대 부근에서 승용차 한 대가 가드레일과 나무를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지은은 침대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앞으로는 착실히 살겠습니다. 제발 이번 소원만…….
맞잡은 손에 땀이 찼다.
【당시 차 안에는 〈MJ 인터내셔널〉의 민신후 이사와 부인, 그리고 자녀 한 명이 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현재 민신후 이사만 크게 다치고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합니다.】
아악!
지은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질긴 놈. 죽어라 죽어라 해도 안 죽네. 도대체 왜 안 죽는 거야?”
하늘도 무심하지. 지은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연이은 뉴스에 지은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아시다시피 민신후 이사는 혈우병 D형 환자로, 이 병은 출혈 시 즉시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과다출혈로 큰 위험에 빠질 수 있으나, 때마침 〈MJ 인터내셔널〉에서 지난달 전국 지역 거점 종합병원들과 치료제 무상 지원 및 협력 약정을 체결한바, 지난주부터 각 병원에 치료제가 제공되어 무사히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대체 언제 그런 걸 다 준비한 거지?”
전국 병원에 치료제 지원이라니. 들어본 적 없는 프로젝트였다.
게다가 지난달 협약을 체결하고 이제야 발표하는 걸로 봐서는 그동안 의도적으로 엠바고를 걸었던 게 틀림없다.
혹시 자신의 계획을 알고 그런 걸까?
어젯밤 강 씨에게 검사까지 받고 수혈은 받지 않았다.
게다가 강 씨의 통장이 대포 통장은 아닌지 확인까지 했다고 했다.
아무래도 교묘히 피해갔다는 인상을 지을 수 없다.
설마…….
【현재 민신후 이사는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 측에서는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하지만 검사 결과 다른 곳의 부상은 없는바, 곧 의식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번 사건 관련, 경찰 조사 결과 덤프트럭 두 대가 일부러 민 이사의 차에 부딪히며 사고를 일으킨 모습이 포착되어 이를 교통사고로 위장한 살인 사건으로 판단, 현재 대대적 조사에 착수하였다고 합니다.】
지은은 정신을 차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아직 신후가 정신을 못 차렸기에 망정이지 정신을 차리면 당장 자신을 잡으러 올 것 같았다.
한국을 떠나야 한다!
한국을 떠나면 지가 나를 어떻게 잡으려고.
지은은 얼른 캐리어를 열고 자신의 옷과 귀중품을 되는대로 주워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