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저 멀리서 구급차와 경찰차가 오는 줄도 초연은 몰랐다.
“괜찮으십니까.”
경찰의 말에 가디건으로 신후를 지혈하는 데 온 정신을 쏟고 있던 초연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이 사람 좀 빨리 병원으로…….”
신후의 상태를 확인한 응급 요원들이 신후를 들것에 실어 구급차에 태웠다.
경찰들은 사고 난 차와 주변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그녀의 연락처만 받아적더니 보내줬다.
초연도 솔이를 안고 구급차에 올랐다.
“엄마 손…….”
초연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피로 자신의 손과 옷이 엉망이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마에서 시작된 피는 그의 얼굴과 셔츠 전체를 흠뻑 적셨다.
차에 올라 새로운 거즈로 바꿨지만 이미 그 거즈 역시 붉게 물든 지 오래였다.
일반 환자였다면 지혈되었을지도 모를 시간이었지만 혈우병 환자에게 지혈이란 건 없다.
특정 응고 혈액을 수혈받은 지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신후의 피는 멈출지 모르고 뚝뚝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아, 이거 너무 출혈이 심한데…….”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리는 바람에 운전자만 직빵으로 다쳤나 봅니다.”
걱정스레 신후를 보던 응급 요원 중 나이 든 사람이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수고하십니다. 지금 천문대 올라가는 길에서 교통사고가 나서요. 삼십 대 남자 한 명 병원 후송 중입니다.”
- 아……. 오늘 10중 추돌 사고로 병원에 피가 바닥인데. 그분 혈액형이 뭡니까?
스피커 폰이라 내용이 다 들렸다.
“보호자 분 환자분 혈액형…….”
멍하니 정신이 나가 있는 초연을 대신해서 대답한 건 솔이었다.
“흐흑……. 아저씨……. 우리 아빠 혈우병 D형이에요.…….”
울면서 제 아빠의 병을 말하는 솔이의 말에 응급 요원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
응급 요원이 안타까운 탄식을 쏟아냈다.
그리고는 운전석 쪽을 향해 더 빨리 가달라고 재촉했다.
“혹시 연락드릴 다른 분은 없습니까.”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표정이었다.
퍼뜩 무언가 떠오른 초연이 성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 저 초연이에요.”
- 그래. 천문대에는 잘 도착했누? 아니다. 천문대 가기 전에 야영장 가서 텐트 치기로 했다면서? 어떠냐. 신후 그놈 쓸만해?
다정한 성식의 목소리에 눈물이 왈칵 났다.
아까 집을 떠나기 전 성식과 인사를 했던 일이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일분일초가 귀했다.
“그, 그게 아니라 신후 씨가……. 신후 씨가.”
- 왜? 신후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어?
“교통사고가 나서…… 할아버지 여기 강릉 종합병원으로 치료제 좀 보내주세요.”
- 알았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바로 헬기로 보내줄게.
전화를 끊고 초연은 신후의 손을 잡았다.
항상 뜨거울 정도로 따듯하던 손이 차갑고 뻣뻣했다.
자신을 보며 다정하게 웃어주던 얼굴이 피와 붓기로 엉망이었다.
덩달아 초연의 가슴도 갈가리 찢기는 기분이었다.
“신후 씨 정신 차려봐요. 할아버지가 치료제 보내주신다고 했으니까 병원 도착할 때까지만 버텨봐요.”
행여 열심히 만져주면 피가 돌지 않을까. 초연은 그의 손을 문지르며 사정했다.
다 됐다. 다 잘 될 것이다.
지난번에도 솔이의 치료제를 헬기로 공수받아 해결했다.
성식이 신후를 살려줄 것이다.
초연은 수백 번 속으로 되뇌며 정신을 다잡았다.
그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그때 성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할아버지 치료제 보냈어요?”
- 이 일을 어쩌냐, 초연아.
안절부절못하는 성식의 목소리에 초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 어떤 미친놈이 헬기장에 들어와서 헬기 엔진을 망가뜨렸다는구나. 것도 하필……. 하여튼 지금 급하게 차 섭외해서 네가 말한 병원으로 치료제는 보냈어. 일단 일반 혈액 수혈하면서 버텨봐. 버틸 수 있지?
덜컥. 신후의 손을 잡고 있던 초연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엄마…….”
불안함을 감지한 솔이도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며 울었다.
응급 요원들도 두 사람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설마 신후가 이렇게 허망하게 죽게 될 줄.
“아, 아니야…….”
부정하는 초연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저도 모르게 뜨거운 무언가가 뺨을 타고 흘렀다.
신후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은데. 자꾸만 시야가 흐려져 제대로 그의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나……. 괜찮아.’
거짓말. 당신 몸은 뭐 철로 만들어진 줄 알아요? 왜 핸들을 그쪽으로 꺾어!
“흐흑……. 거짓말 안 한다고 했으면서…….”
‘미안. 근데 초연아. 나한텐 너랑 솔이 지키는 게 최우선이야.’
지킬 거면 살아서 지키란 말이야!
차마 솔이가 들을까 터질 것 같은 마음을 표현도 못 한 채 솔이를 껴안은 초연의 몸이 하염없이 떨렸다.
***
병원에 도착하자 이미 준비하고 있던 응급팀이 그들을 맞이했다.
“무슨 사고입니까.”
“아까 전화로 설명해 드린 추돌 사고입니다. 삼십이 세 남자 환자로 사고 시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는 바람에 혼자 충격을 그대로 흡수했습니다. 현재 두부 출혈이 있고 의식불명 상태입니다. 다행히 다른 곳 외상은 및 골절은 없어 보입니다.”
불빛이 나오는 펜으로 동공 검사를 하던 의사가 젊은 의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 바로 바이털 체크하고, CT 찍어. 상처에 비해 출혈이 많네. 혈액 검사하고 혈액도 준비하고.”
초연의 시선이 신후의 머리를 누르는 거즈에 향했다.
벌써 응급 요원이 간 거즈 뭉텅이만 다섯 개.
사람 몸속에 피가 5ℓ고 30%가 빠지면 사망이라는데 지금까지 그가 흘린 피가 얼마나 될까.
사고가 난 지 한참 지났음에도 여전히 맑게 흐르는 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네. 알겠습니다.”
급하게 베드를 움직이는 의사를 보며 응급 요원이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근데 이 환자분 혈우병 D형이랍니다.”
아마 노력해도 살리긴 힘들 거라는 표정.
잠시 멍한 의사의 표정에 초연은 확인 사살을 당한 듯 가슴이 찢겨 나갔다.
정신을 차린 나이든 의사가 젊은 의사에게 지시했다.
“야. 빨리 가서 그 치료제 가져와.”
“네. 알겠습니다.”
젊은 의사가 베드도 내팽개친 채 어디론 가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혈우병 D형 환자를 포기하지 않고 줄 만한 치료제가 있다는 소리일까? 두려움과 기대 가득한 초연을 보며 나이든 의사가 말했다.
“혹시, 〈MJ 인터내셔널〉 민신후 이사님입니까?”
“그걸 어떻게……?”
혹시 지난번 지은이 터트렸던 신후의 병에 관련된 기사를 본 것인가 싶었다. 초연이 의아한 눈으로 의사를 보았다.
“얼마 전에 〈MJ 인터내셔널〉에서 전국 종합병원급에 혈우병 D형을 위한 치료제를 상시 갖추고, 이에 대한 비용은 전액 〈MJ 인터내셔널〉에서 지원한다는 협력 약정 체결했습니다.”
“네?”
지방에서는 환자도 몇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희소병이었다.
게다가 치료제는 몇억이나 하는 데 비해 보존 기간이 짧아 서울 몇몇 병원을 제외하고 치료제가 지방 병원에 비치되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다.
근데 상시 구비라니.
놀란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너무 놀라 입만 뻥긋거리던 초연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러면. 그러면 지금 치료제가 병원에 있나요? 신후 씨 지금 그 주사를 맞을 수 있나요?”
“네. 다행히요.”
방긋 웃는 의사의 표정에 초연의 다리에 주르륵 힘이 빠졌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워낙 희귀한 병인데 〈MJ 인터내셔널〉에서 콕 집어 지원해주신다기에 알아보다가 민신후 이사님 사진을 본 적이 있어서 혹시나 했습니다. 민 이사님께서 그 첫 번째 수혜자가 되었다니 신기하네요.”
초연은 말없이 신후를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
‘너랑 솔이는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당신이 말했던 방법이 이건가요.
“흑흑.”
안도감에 초연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
대문에 들어서기 전 신후는 담장 높은 집을 올려다보았다.
남들은 그의 집을 보고 땅값 비싼 동네에서도 가장 좋은 곳에 터라고 부러워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저 감옥과 다를 바 없었다.
차라리 군대에 있던 기간이 좋았지.
제대한 지 한나절도 안되었지만, 신후는 다시 군대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그나마 그가 다시 대문으로 들어서는 이유는, 이제 곧 복학하고 졸업을 하면 이 집에서 독립할 수 있다는 것.
대학 입학과 동시에 독립을 외치던 그에게 성식은 그래도 대학은 졸업하고 분가하라고 명을 내렸다.
말은 혈기왕성한 나이에 선후배와 몰려다니다가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실상은 그동안 그와 도재가 화해하길 바라는 것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아직 회사에서 제 세력도 형성하지 못한 상황에 제멋대로 행동해서 제게 좋을 것도 없었다.
신후는 착실히 성식의 말을 따랐다.
집에 들어서자 고용인들이 그를 보고 놀랐다.
“어머, 큰 도련님. 제대 다음 주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어머니 제사도 있고 해서 포상 휴가 남은 거 써서 조기 전역했습니다.”
“연락 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럼 큰 도련님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어쩌죠.”
안타까워하는 개성댁을 보며 신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됐어요. 안 그래도 제사 준비 때문에 바쁘실 텐데 신경 쓰지 마세요. 전 그냥 한숨 잘 테니 깨우지 마시고요.”
신후는 자신의 방이 있는 2층으로 향했다.
도재가 재혼을 한 후, 신후는 아래채에서 본채로 옮겨왔다.
지은에게 집안 가풍을 가르치겠다는 성식의 뜻이었다.
해서 지은과 도재는 1층, 성식의 방과 끝에서 끝으로 떨어져 있는 부부 안방을 썼고, 신후는 지후와 2층을 썼다.
지후의 존재가 거슬리긴 했지만 신후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인지 그나마 집에서는 최대한 그의 눈에 안 띄게 조용했다.
그런데.
그가 있을 때는 늘 조용하던 2층이 오늘은 시끄러웠다.
뭐지?
계단을 올라간 신후가 발견한 건 통화 중인 지은의 뒷모습이었다.
그가 있을 때는 그의 개인 공간을 지켜주겠다며 2층에는 얼씬도 하지 않던 여자였다. 근데 지금은 마치 제집 안방처럼 소파에 기대어 통화 중이었다.
그것도 파일로 손톱까지 다듬으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줄기 사이로 공기 중에 부유하는 하얀 먼지들이 유난히 거슬렸다.
“어휴, 뭘 죽은 본처 제삿날까지 챙기는지. 오늘 딱 손톱 손질하러 갔어야 했는데.”
신후는 조용히 팔짱을 끼고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