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검사는 언제 끝나죠?”
- 지금 막 검사 들어갔으니 한 시간 안에 끝나고 갈 예정입니다.
지은은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섭외하고, 대관령으로 가는 그를 따라붙게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믿을만한 사람 한 명 소개해줘요.”
- 믿을 만한 사람이요? 혹시 저희 애들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차 하나만 밀어줘요.”
- 정 여사님. 그런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다니요.
얼토당토않다는 반응이었지만 지은은 그의 반응을 믿지 않았다.
어차피 흥신소나 하던 놈을 아빠가 데려와 써먹던 사람이었다. 똥 먹던 개가 똥을 피하나.
“아무렇지 않게, 라뇨. 돈은 넉넉히 줄게요. 얼마예요? 넉넉히 불러요.”
수화기 너머 정적이 이어졌다.
설마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까. 지은은 초조했다.
- 민 이사 차를 밀면 됩니까.
미끼를 문 강 씨의 대답에 지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말이 잘 통하네요. 그럼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부탁해요. 비용은 내가 일 끝나는 대로 만나서 챙겨줄 테니.”
- 그건 아니죠, 사모님. 이런 일은 선불로 진행하는 거 모르십니까.
“그러니까 그쪽이 먼저 일해줄 사람한테 지불하라고 하는 거잖아요. 당신 돈은 내가 나중에 만나서 준다고.”
- 사모님. 그건 룰이 아닙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 자신과 흥정하려는 강 씨 때문에 지은은 짜증이 났다.
어서 빨리 사람 섭외를 하지 않고 뭐 하는 거람.
하지만 여유로운 강 씨의 태도에 지은은 이번 거래에서 자신이 졌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 기회를 놓친다면 다음번 기회는 언제 올지 모를 일이었다.
“알았어요. 계좌랑 금액 불러요.”
순식간에 톡으로 계좌와 금액이 찍혀 왔고, 지은이 강씨가 말했던 돈을 입금하려다가 두 배의 금액을 입금했다.
- 두 배로 입금하셨는데요?
“한 사람 더 섭외해줘요.”
- 저희 원래 2인 1조로 움직입니다. 실수 없이 깔끔하게 처리하기 위함이죠.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됩…….
“그게 아니라 본사 옥상 가면 헬리콥터 한 대가 있어요. 못 뜨게 좀 망가뜨려 줘요.”
- 헬리콥터요?
“네. 〈MJ 인터내셔널〉 본사 옥상에 있는 헬기요. 보안이 있으니 접근하기 쉽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도 꼭 해줘요. 오늘 밤 절대 뜰 수 없게.”
드디어 민씨 일가를 밀어버리고 〈MJ 인터내셔널〉을 지후와 자신이 갖게 되는구나.
전화를 끊는 지은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
해가 지기 전에 출발했지만, 서울을 벗어남과 동시에 날은 금방 어수룩해졌다. 특히 천문대가 있는 대관령 산은 오르는 길은 나무만 가득해서 청도 뒷산을 떠올리게 했다.
초연은 뒷좌석에서 그새 잠든 솔이의 자세를 좀 더 편하게 바꿔주었다.
“솔이 자?”
신후가 힐끗 룸미러로 눈을 맞췄다.
“네. 언제 천문대 가냐고 보채더니 잠들었네요.”
“길이 험해서 멀미할 텐데 차라리 자는 게 낫지. 당신은. 괜찮아?”
“예전에 우리 살던 집이요. 거기가 부산역에서 한두 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거든요. 서울에서 KTX 타도 세 시간 걸리는데 부산에서 두 시간 걸리는 곳이 있다니 신기하죠? 하여튼 거기가 시외버스도 드문 비포장도로라서 이런 도로쯤은 아무렇지 않아요.”
신후는 쫑알거리는 초연을 바라보았다.
요즘 초연은 그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밝아졌다. 잘 웃고, 말도 많아졌다. 원래 이것이 초연의 모습이었겠지, 싶었다.
기억을 잃은 그를 위해 초연은 예전 일을 이야기할 일이 있으면 더욱 자세하게 설명해주려고 애를 썼다.
지금의 행복이 감사하면서도 아쉬움이 없을 수는 없었다.
기억만 찾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이대로 영영 기억을 못 찾는 건 아닌지.
“결혼식 하기 전에 한 번 가자. 할머님께 인사도 드리고.”
그동안 초연은 신후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특히 할머니에 관한 얘기를 들으면 마음이 너무 죄스러웠다. 그렇게 자신에게 잘해주셨는데 할머님이 가장 아끼셨던 초연에게 상처를 주었다.
이제라도 할머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드리고 싶었다.
이 못난 손주 사위가 돌아왔노라고. 결코, 할머님과 초연이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라고.
앞으로 제가 초연이를 목숨 걸고 돌볼 테니 하늘나라에서 편히 눈 감으시라고.
그의 마음을 느꼈는지 초연도 빙긋이 웃었다. 그러자는 뜻이었다.
“아까 보니까 저쪽에 양 떼 목장 있다는 이정표 있던데 내일 가면서 거기 들러요. 솔이가 좋아할 거예요.”
“그래? 알았어. 혹시 입장 신청해야 하는지 한 번 알아봐.”
“네.”
초연은 핸드폰을 꺼내 양떼 목장을 검색했다.
근데 갑자기 차가 휘청였고, 초연이 차 옆쪽으로 쓰러질 뜻 넘어졌다 일어났다. 원체 운전을 거칠게 하는 신후가 아니었다.
지금도 굽이굽이 휜 길을 올라오는 것도 솔이 모르고 잘 정도로 부드럽게 운전하던 신후였다.
“무슨 일이에요?”
“미안. 갑자기 저 차가 추월을 해서.”
거대한 화물 트럭 한 대가 그들의 앞에서 갈지(之)자로 상행선과 하행선을 넘나드는 중이었다.
“술 마셨나 봐요. 따라가지 말고 천천히 운전해요.”
“걱정하지 마.”
하지만 중앙선을 넘어 추월까지 할 때는 언제고 앞에 선 화물 트럭은 그들을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속도를 줄이고 신후의 앞을 막았다.
차선이 하나밖에 없는 왕복 도로였다.
게다가 구불구불한 길에 안전거리를 지킬 새도 없이 속도를 줄이면 더 줄이는 탓에 운전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치 일부러 장난을 거는 듯한 느낌.
점점 신후의 표정이 굳어졌다.
“신후 씨. 첫째도 안전 운전. 둘째도 안전. 잊지 말아요.”
“알았어.”
신후가 잔뜩 화를 누르며 속도를 줄였다. 그때였다.
빠앙!
뒤에 오던 또 다른 화물 트럭이 경적을 올렸다.
“젠장.”
신후가 차를 오른쪽 낭떠러지 쪽으로 바짝 붙였다. 추월해서 가려면 가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차 역시 신후가 오른쪽으로 붙으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붙으면 왼쪽으로 따라 움직였다.
차 세 대가 나란히 일직선으로 움직이는 꼴이었다.
“제기랄. 그 미친년이 보낸 차 같네.”
설마 오늘 사람까지 붙일 줄은 몰랐다.
그것도 초연과 솔이까지 타고 있는 차에다가.
당장 눈앞에 있으면 찢어버리고 싶은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초연과 솔을 안전하게 이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
“초연아. 안전벨트 다시 꼭 매고 솔이 잘 잡고 있어. 걱정하지 마.”
그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뒤차가 일부터 쿵쿵 붙여왔다.
“아빠…….”
추돌의 충격과 경적에 잠에서 깬 솔이 상황을 금방 파악하고 잔뜩 두려운 얼굴을 했다.
“걱정 마. 솔아. 오늘 유성우 보면 무슨 소원 빌지 눈 감고 생각하고 있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심시키는 신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래 솔아. 아빠 말 듣자. 엄마도 무슨 소원 빌지 생각해야겠네?”
초연도 떨리는 마음을 숨기며 솔이의 눈을 자신의 손으로 가리며 아이를 꼭 껴안았다.
하느님. 제발 저희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순간 트럭이 오른쪽으로 비켜섰다.
이때다! 지금 저 차를 추월해서 따돌릴 타이밍이었다!
신후는 급하게 중앙선을 넘어 액셀을 밟았다.
코너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코너를 돌고 그가 마주친 것은 눈 부실만큼 강한 불빛.
빠앙!!!
신후는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끼익! 타이어가 긁히는 찢어지는 소리. 초연은 솔이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쾅!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온몸이 차 안 여기저기 부딪혔다.
이대로 죽는구나 싶던 것도 잠시 초연은 곧 자신이 무사함을 깨달았다.
재빨리 눈을 뜨고 솔이를 살폈다.
“솔아!”
다행히 솔이는 어디 한 군데 다친 곳 없이 멀쩡했다. 다만 놀랐는지 울음을 터트렸다.
“으앙!”
정신이 아득해지는 신후의 귀에 솔의 울음소리가 박혀 들었다.
다쳐서 우는 소리인 건가.
아니면 적어도 의식이 있다는 거니 다행인 건가.
초연아, 솔아. 괜찮아?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으으. 으으.”
목구멍이 콱 막히고 눈이 자꾸 감겼다.
이마에서 뜨끈한 액체가 눈을 타고 흘렀다.
무거운 액체의 무게에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으으……. 초…… 여…… 어…….”
목을 긁는 짐승 같은 그의 신음에 초연이 그제야 앞 좌석에 있는 그를 살폈다.
아래로 고꾸라진 차는 나무에 부딪혀 운전석 유리가 거의 깨지고 차체까지 으스러진 채였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차 안으로 가득 들어차 신후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신후 씨? 괜찮아요?”
핸들 위에 엎드려있는 그를 흔들었다.
그 움직임에 핸들을 잡고 있던 피 묻은 손이 툭, 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신후 씨!”
초연이 절규했다.
초연을 울게 해서는 안 된다.
신후는 애써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헤드 레스트에 기댄 신후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나……. 괜찮아, 솔이 못 보게……. 솔이 못 보게 눈 좀……. 괜찮아…….”
피에 엉망인 자신을 보고 놀란 솔이 놀라면 어쩌지?
똑똑한 아이라 이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할 텐데. 트라우마라도 가지면 어쩌지?
이대로 죽어버리면 초연이와 솔이는 누가 지켜줄 것인지.
눈을 감으면서도 두 사람의 모습이 그에게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