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
“이 계좌가 대포 통장인지 아닌지 한 번 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거참 깐깐하네 싶으면서도 눈앞에 보이는 삼억이 넘는 숫자에 강 씨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여기……. 됐습니까?”
주민등록증과 계좌의 이름이 일치함을 확인한 신후가 단번에 이체 버튼을 눌렀다.
“입금했습니다.”
드르륵. 가슴에 넣어둔 핸드폰에 입금되었다는 알람이 울렸다.
그제야 행여 계획이 틀어질까 조마조마하던 강 씨의 얼굴에 여유가 깃들었다.
이 돈 중 절반은 정 원장에게, 절반은 수수료 명목으로 자신이 먹을 돈이었다.
이억 가까이 되는 돈이라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더 뜯어먹을 거리가 있으면 더 뜯어먹어야 한다는 게 그의 신조였다.
“수혈 후 저분들 쉬다 가실 수 있게 1인실 입원비와 왕복 교통비는 그쪽에서 내셔야 하는데 이건 청구서 나오면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혈액 공급자들에게는 의뢰인에게 받는 돈에 다 병원 입원비, 검사료, 교통비가 포함된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올린 부수입도 짭짤했다.
“오늘은 아이와 약속이 있어서 곤란할 것 같고. 수혈은 여행 다녀와서 진행하겠습니다.”
“네?”
돈은 줘놓고 수혈을 받지 않겠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저희가 오늘 아이랑 선약이 있어서요.”
“유성우 보러 가요!”
초연과 솔이 신후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아…….”
강씨가 난감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지은이 오늘 신후와 솔이에게 꼭 수혈하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어쩌나.
“유성우라면……. 멀리 보러 가시겠군요. 근데 저분들도 멀리서 오신 분들이라 오늘 꼭 수혈을 받으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차피 긴급 수혈을 위해 생활 지원비 일억까지 받으실 분들 아닙니까.”
신후의 말에 강 씨는 할 말을 잃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애초에 정기 수혈 이외에 일억씩 더 받기로 한 게 사고가 생기면 언제든지 수혈할 수 있게 달려와야 하니, 취업의 기회비용으로 1년간 생활비를 지원한 것이었다.
그러니 오늘 수혈을 하지 않고, 월요일에 하겠다고 한들 그로서는 뭐라 할 방도가 없었다.
억지로 마취총이라도 쏘고 수혈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게다가 이렇게 거액을 줬는데 딴 허튼 생각을 할까 싶었다.
“아, 네.”
강 씨는 찝찝한 마음을 숨기고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신후의 혈액 검사 데이터는 병원에 있는 걸 쓰면 된다는 강 씨의 말에 검사는 솔이만 진행했다.
초연이 솔이를 달래러 같이 검사실에 들어간 사이 신후는 강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강 비서는 덴마크에서 그 대신 중요한 계약을 체결하러 간 상태였다.
“계약은?”
- 사인 막 마쳤습니다. 어떻게 인증 사진 한 컷 보내드릴까요?
“수고했어. 다른 사람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하게 들어오고.”
신후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 한국 들어가면 며칠 휴가 가능합니까? 이렇게 열심히 일했는데요.
“일 하나만 더 처리하고 쉬어.”
- 뭡니까?
그때 검사실의 문이 열리고 초연이 혼자 나왔다.
아침부터 캠핑 준비로 가뜩이나 정신이 없었는데 병원일까지.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진이 빠졌다.
축 늘어진 그녀를 보곤 신후는 눈으로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초연도 자연스레 그의 옆에 앉았다.
신후가 초연의 작은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수고했다는 의미였다.
초연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긴장을 했더니 목이 말랐다.
저기 가서 음료수 하나 뽑아오겠다는 입 모양에 신후가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누른 후 자판기에서 음료를 사 왔다.
“내가 계좌번호 하나 알려줄 테니까 이 사람 뒷조사 좀 해봐.”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캔 뚜껑까지 따서 건네주고는 창밖을 보며 통화를 이었다.
그동안 집 안에서 편한 모습만 보다가 일하느라 다시 날카로워진 그를 보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니다. 실은 그가 다정할 때도, 밤마다 뜨겁게 안아줄 때도 모두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느꼈는지 신후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도 모르게 불시에 바라보는 시선에 적응하려면 아직 한참이 필요할 듯싶었다.
“그동안 벌어들인 자금이 얼마나 되는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초연이 물었다.
“신후 씨. 회사 일 바빠요?”
“별로.”
대답하면서도 신후는 핸드폰으로 메일을 보내는 중이었다.
“이렇게 바쁜데 천문대는 괜히 간다고 했나 봐요. 차라리 당신이랑 솔이 수혈받고 일하는 게 나을지도 모를 뻔했어요.”
여전히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에 메일 전송을 끝낸 신후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초연과 시선을 맞췄다.
“저 피. 받으면 안 돼.”
“?”
“당신 불법 브로커가 당신이 병원에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접근했는지. 의심한 적 없어?”
“그거야 우연히 마주…….”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던 초연이 이상함을 느끼고 입을 닫았다.
“아니면. 감히 불법을 저지르는 주제에 〈K 병원〉 시설을 이용하고, 내 데이터까지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초연이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냥 브로커만 끼고 절차는 제대로 진행하는 줄 알았는데 수혈을 받는 모든 절차에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설마…….
“그러면 신후 씨는 이게 전부 다 〈K 병원〉과 관련이 있다는 거예요?”
“90%는. 그래서 지금 조사를 맡긴 중이야.”
‘말도 안 돼.’ 기껏 기대했던 희망하나가 무참히 짓밟혔다.
어깨가 축 늘어지던 초연은 무언가 깨닫고 신후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브로커한테 입금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괜히 저쪽에서 당신 혈액 불법 매매로 신고라도 하면 어쩌려고 입금을 했어요.”
“그러니 입금만 하고 수혈은 안 받은 거야. 수혈받지 않았으니 정상참작이 되겠지.”
신후의 표정도 착잡해졌다. 생명수를 앞에 두고 마시지 못하는 기분이 오죽할까 싶었다.
“그래도 너무 위험해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차라리 경찰에 신고하는 게 낫지 않나. 초연은 생각했다.
하지만 신후의 반응은 단호했다.
“엿을 제대로 먹이려면 명분이 있어야지.”
팔짱을 끼고 말하는 신후는 차분했지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살기가 느껴졌다.
“그냥 브로커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특정 혈액을 사고팔았다는 사실보다 브로커 뒤에 〈K 병원〉이 있었다는 점이 타격이 클 거야. 그리고 그들이 집안 식구인 나에게 헛짓거리를 했다는 걸 알면 사건을 키우기도 딱 좋지.”
이 사실이 기사화가 되면 그가 〈K 병원〉을 망하게 하고, 지은의 모든 재산을 몰수해도 그를 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진작 말해주지 그랬어요. 난 그것도 모르고.”
“당신 표정 연기가 안 되잖아. 브로커가 눈치채고 숨어버리면 끝이었다고.”
신후가 그녀의 머리를 쓸며 말했다. 넌 너무 어려, 라고 놀려대던 예전의 딱 그 표정이었다.
“거짓말 안 한다고 했으면서.”
혼자 이 모든 일을 감당하느라 머리를 썼을 그를 생각하니 미안함과 얄미움으로 초연이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윽, 미안. 근데 초연아.”
장난스레 허리를 굽혀 장단을 맞춰주던 신후가 허리를 펼 땐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한텐 너랑 솔이 지키는 게 최우선이야.”
신후의 눈빛이 간절하게 빛났다.
앞으로도 자신과 솔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또 할 수도 있다는 단호한 고백.
하지만 그 거짓말은 정말 자신을 위한 것이 될 것이기에 초연은 그의 품에 어깨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따뜻하고 단단해서 마음까지 평온해지는 어깨였다.
***
같은 시각 정 원장의 집.
자신의 침실에서 강 씨의 전화를 기다리던 지은에게 전화가 왔다.
- 안녕하세요. 정 여사…….
강 씨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 지은이 득달같이 질문을 퍼부었다.
“어떻게 됐어요. 두 사람 지금 검사받고 있어요? 수혈 시작하면 다시 한번 알려줘요. 아니다. 수혈 끝나면 언제쯤 되죠? 내가 지금 출발해서 끝나는 걸 보고 싶으니까 시간 좀 끌어봐요.”
이럴 줄 알았다면 직접 보러 갈 걸 그랬나. 괜히 전화로만 전해 듣자니 아쉽기 그지없었다.
사실 오늘 섭외한 네 명은 특정 항응고 혈액 보유자가 아니었다.
그냥 신후와 솔이에게 수혈 가능한, 일반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일반인의 피인 줄 모르고 지속적으로 수혈을 받다가 사고라도 당하면.
본인들은 특정 혈액을 보유 받아 피가 응고 작용을 할 줄 기대하다가 과다출혈로 죽을 것이다.
어차피 불법 수혈이니 수혈 기록이 남을 일도 없었다.
지들이 본인 몸 관리를 안 한 것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 사실도 모르고 수혈을 받고 좋아할 면상을 지켜보지 못한 게 안타까웠다.
지금이라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던 중이었다.
- 아니 그게……. 오늘은 검사만 받고, 수혈은 다음에 받겠다고 합니다.
강씨가 전해줄 희소식만을 기다리고 있던 지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뭐라고요? 민신후랑 그 꼬맹이가 오늘 수혈을 안 받는다고요?!”
- 네……. 워낙 그쪽에서 강경하게 말해서…….
“미쳤어요? 등신이에요? 그 돈을 받아 처먹고 일을 그따위밖에 못 해요?”
- …….
수화기 건너편이 고요했다.
아직 물어야 할 게 많은데 건너편에서 전화를 끊어버리면 민씨들의 소식을 들을 방도가 없다.
지은은 분노한 마음을 꾹 누르며 물었다.
“혹시 그쪽에서 뭔가 눈치채거나 그런 눈치는 아니죠?”
- 아닙니다. 오늘 가족 모임 미리 계획 잡아둔 게 있다고 합니다.
“가족 계획이요?”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의 계획을 눈치챈 건은 아니었다.
하긴 입금까지 했는데 눈치챈 건 아니겠지.
안도하던 지은은 뒤이어진 강 씨의 말에 지은의 귀가 쫑긋 섰다.
- 네. 강원도 천문대에 간다고…….
“천문대요?”
지은은 대관령을 넘는 굽이굽이 길을 떠올렸다.
아마 차 사고가 나면 즉사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서는 아무리 빨리 시내로 내려가더라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신후가 수혈을 안 받은 지도 넉 달은 넘었고, 솔이는…….
지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